만추 (Late Autumn, 2011)
유령과도 같은 하루


이만희 감독의 동명작품을 리메이크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한국인 훈(현빈)과 중국인 애나(탕웨이)가 미국 시애틀에서 만난 하루를 담은 작품이다. 사실 리메이크라고는 하지만 이만희 감독의 원작이 현재는 필름 프린트가 존재하지 않아 본 사람들 보다는 보지 못한 사람들이 더욱 많기 때문에 조금은 자유롭지 않았을까도 싶지만, 영화 감독들 및 영화인들 사이에서 이만희 감독의 원작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김태용 감독에게는 오히려 더 힘든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 역시 원작을 본 적은 없고 단지 이 작품이 갖고 있다던 이미지와 정서만 전해 들은 것이 고작이라, 오히려 오롯이 김태용 감독의 작품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래서였을까. '만추'는 탕웨이와 현빈이라는 배우의 옷을 입은 김태용 감독의 또 다른 하루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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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교도소에서 특별히 하루 외출을 허가받은 애나는 시애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훈을 만나게 된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그리고 그녀가 처한 현실 때문에 애나는 누군가와의 새로운 만남이나 인연을 굳이 만들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히 다시 만난 훈의 적극적인 행동에 아주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훈 역시 자신이 현재 처한 도망자 신세와 직업적인 면에서 접근했던 것과는 달리 점점 애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결국 훈과 애나가 함께 보내게 되는 하루라는 시간 동안의 이야기는 움직일 것 같지 않던 마음의 동요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만추'의 주인공은 탕웨이가 연기한 애나라고 할 수 있을텐데, 대부분의 심리 묘사가 그녀 위주로 진행되며 현빈이 연기한 훈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애나의 하루를 함께하는 외부 작용으로서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결국 애나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남녀의 사랑이 담긴 멜로였음에도), 오히려 후반부 훈의 개인적인 이야기 부분은 조금은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차라리 훈의 이야기를 좀 더 쳐냈더라면 더 인상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너무 친절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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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에게 있어 특별할 수 밖에는 없는 이 하루는, 예상치 않았던 훈의 등장으로 인해 판타지스러운 혹은 유령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서로 자신의 말이 아닌 영어로 대화하는 이 둘의 관계는, 각자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점에서 제 3의 매개체로 이어진 관계라고 볼 수 있겠다. 애나에게 있어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녀의 과거는 중국어가 지배하는 세계고, 훈에게 있어 누님들을 만나 유흥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일들은 한국어가 지배하는 세계다. 애나와 훈은 하루라는 짧은 시간 탓도 있지만 상대의 세계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의 영역에서 서로의 세계는 잊은 채 조우하려고 한다. 그래서 제 3의 언어와 공간이라는 조건은 이들에게 미묘하지만 마음이 움직일 수 있겠다 싶은(특히 애나의 입장에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훈이라면 이미 많은 것이 어긋나기 시작한 삶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미약한 가능성, 혹시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아주 조금의 기대. 이런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영화는 느리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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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감성과 더불어 김태용 감독스러움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은 역시 놀이공원에서 벌어진 판타지 시퀀스다. 이미 전작 '가족의 탄생'을 통해 이런 공중부양 판타지를 보여주었던 김태용 감독은, 이 시퀀스에서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감성을, 즉 두 주인공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감성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이 시퀀스는 단순히 보여지는 것의 판타지가 아니라 그 안에 외국인 두 남녀의 몸짓과 거리 (서로가 다른 속도와 보폭으로 걷기에 쉽게 만나기 어려운)의 묘사 등을 통해 애나와 훈의 이야기를 대변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시퀀스를 역시나 좋아하지만 한편으론 약간 길게 느껴지는 분량을 떠나서, 조금은 감정의 과잉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빗대어 말하고자 하는 연극 시퀀스의 감정이 오히려 주인공들의 감정보다 더 과잉이 되어 있어, 시작은 주인공들의 감성에서 시작했지만 시퀀스가 끝날 때에는 그냥 연극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이 내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대해 아주 천천히 접근했다는 점에서 이 시퀀스는 아주 마음에 드는 부분인 동시에 아쉬운 부분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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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탕웨이라는 배우의 얼굴은 여러가지 표정을 지을 때보다 절제하고 있을 때 훨씬 진면목이 드러나는 얼굴이라고 생각하는데, '만추'에서는 특히 이런 탕웨이 만의 매력이 흠뻑 담겨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다. 특히 화장을 했을 때보다 거의 안했을 때가 훨씬 매력적인 그녀의 얼굴의 오목조목함이 잘 담겨 있고,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안개와 잘 어울려 하나의 그림같은 미장센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빈의 경우 무엇보다 '훈'이라는 캐릭터가 어색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시크릿가든을 보지 않아서 몰입하는데에 아무 걸림돌이 없었다는 것도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유령같은 하루를 담아낸 것에 만족하는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이상의 것을 끌어내려고 했던 시도가 없지 않았지만, 그 역시도 그 정도에서 그쳤기에 전반적으로 인상 깊은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다.


1. 이 작품에 일등공신 중 하나는 누가 뭐래도 현빈이 입고 나온 극중 코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묘한 주머니 위치가 만들어낸 미장센이란! 만약 보통 코트를 입고 나와서 일반적인 모양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훈이었다면, 분명 이 정도로 각인 시키지는 못했을 것 같네요.

2. 참고로 극중 훈과 식당에서 설전을 벌였던 남자배우는 한국인 배우 김준성 씨네요. 반응들을 보니 이 분 밉다는 분들 많던데, 그 만큼 연기를 잘했다는 반증일듯;

3. 시애틀 관광코스에 있던 오리버스(?)는 한 번 타보고 싶더군요 ㅎ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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