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스팀보이>는 아직까지도 아니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아키라 (1988)>를 만든 오토모 가츠히로의 작품으로 많은 팬들에게 큰 기대를 갖게 했던 작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키라>의 임팩트는 20년이 다 되가는 지금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충격적이었으며, 이러한 충격적인 작품을 내 논 뒤에 무려 16년이라는 긴 시간 뒤에 공들여 내놓은 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조금 덜했지만, 일본 내에서는 2004년에 발표한 애니메이션 신작들 가운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등 그야말로 쟁쟁한 작품들을 제치고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키라>급 임팩트를 기대했던 아니메 광팬들은 물론, 일반 관객들에게도 기대했던 것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한 범작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상 <스팀보이>의 주제는 <아키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발명해 낸 새로운 기술과 이를 컨트롤 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급속한 기계 문명 발전에 따른 폐해와 위험에 대해 경고에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 <아키라>였다면, <스팀보이>의 경우는 시대만 19세기의 영국으로 거슬러 갔을 뿐이지, 역시 증기 에너지라는 새롭고 강력한 에너지원의 발명과 사용을 통해 벌어지는 갈등과 위험요소에 대해 그리고 있다. 주제 면에선 큰 차이가 없는 반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배경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이라 불리는 <아키라>의 충격적인 스토리와는 틀리게, <스팀보이>의 구조는 어린 주인공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모험을 다룬, 어쩌면 진부한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 리뷰도 그렇고, <스팀보이>에 관련한 모든 글들이 <아키라>를 언급하고 있듯이, 태생적으로 <아키라>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 사실인 것처럼,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야기 또한 아마도 소년에 모험담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젠 <아키라>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 작품 <스팀보이>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자. 먼저 <스팀보이>는 애니메이터들의 시각에서 봤을 땐, 굉장히 완성도 높은 작품에 속할 듯 하다. 자주 인용되는 홍보 문구처럼 총 컷 수 1,860컷, 총 작화 매수 18만장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1.5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어마어마한 작화 량을 통해 2D와 3D가 함께 사용된 영상이나, 세세한 고증이 필요했을 만큼 세밀한 배경 묘사가 많았던 장면에서도 실사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영상을 만들어냈다. 태엽이 맞아 돌아가는 장면들처럼 그림의 움직임에서 오는 애니메이션의 원초적인 재미가 극대화 되었으며, 3D가 사용된 장면들에서는 <이노센스>의 경우처럼 작품의 배경에 걸 맞는 엄청난 스케일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초반 레이의 집에서 밖으로 카메라가 공간을 넘어 직선으로 빠져나오는 컷은, 흡사 <패닉 룸>에서 명 촬영 감독 ‘다리우스 콘지’가 보여줬던 컷을 연상되게 한다. 또한 종종 등장하는 주인공은 중앙에 머물러 있고 배경이 360도 회전하는 장면 등에서도 기술적인 높은 완성도를 실감하게 한다.
 
한 번 볼 때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장면들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영국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작에 앞서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과 스텝들은 런던의 맨체스터와 요크 등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서 10일간 로케이션 헌팅 작업을 마쳤으며, 여기서 얻은 자료를 통해 영국의 낡은 거리와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의 재질감과 색감, 풍경 등을 더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등 철저한 고증작업을 통해 완성하였다. 일본인으로서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노력은, 작품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멀리 상공위에서 잡는 장면 임에도 디테일에 굉장히 신경 쓴 노력을 엿볼 수 있으며, 거리 상점들에 간판 하나하나와 벽보 등에 글씨체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점은 정말 놀랍다.



‘사회에서 아이들의 꿈은 점점 좁고 작아져만 가고 있습니다. 부모나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미래를 투영해 버립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무모하다고 생각되는 꿈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발명을 통해 미래에의 꿈을 현실화시킨 시대를 배경으로, 공상과 꿈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오토모 가츠히로’.
이 같은 감독의 말처럼, 흔히 기계문명화와 폐해에 대해 일방적으로 경고하는 영화로 그려질 수도 있지만, 감독의 의도는 쉽게 얘기하자면 ‘어떻게 잘 사용 하느냐’에 있다고 하겠다. 각 시대마다 필연적으로 닥쳐올 새로운 문명적 도구, 혹은 에너지에 대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경종을 일깨우는 것이다. 레이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스팀과 오하라 제단 뿐만 아니라 레이를 지켜주는 듯 했던 영국정부와 스티븐슨을 비롯한 세력 또한, 완전한 선역으로 그려지지는 않으면서, 오로지 발명에 대한 순수함만을 갖고 있는 레이만이 올바른 선택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등장하는 에필로그를 통해 이 같이 희망으로 상징되는 레이의 앞날이 순탄하지 만은 않겠지만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 또한 전달하고 있다. (에필로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처럼 스틸 컷과 감동적인 엔딩곡이 함께하는 엔딩 크레딧도 좋았지만,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며 이후의 이야기까지 맛 볼 수 있는 이 같은 엔딩 크레딧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출시된 DVD는 3장으로 출시되었는데 첫 번째 디스크에는 일본어 더빙 버전의 본편이 수록되었고, 두 번째 디스크에는 우리말 더빙에 본편이, 세 번째 디스크에는 부가영상이 수록되었다. 1:85: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의 화질은 최근 출시된 애니메이션 타이틀과 비교해 보았을 때 최상급 화질을 수록하였다고 보기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감상에 지장을 주거나 불편한 정도는 전혀 아니지만, 칼 같은 콘트라스트비를 기대했던 이들에겐 전체적으로 브라운 톤에 색감이 더해진 영상과 높지 않은 해상도, 종종 등장하는 잡티는 조금 아쉬움을 준다. 돌비디지털 5.1채널을 수록한 사운드는 만족스러운 편인데, 공장 내의 소음, 폭발음, 박진감 넘치는 스코어와 각종의 다양한 소리들은, 순간 DTS인가? 했었을 정도로 강력한 우퍼 사운드와 활용도를 선보인다. 특히 후반부에 긴박한 전개 속에서는 젭론스키의 스코어가 더욱 빛을 발한다. 각종 소음과 기계음이 많은 작품답게 채널 분리도의 활용도도 활발했다. 굳이 아쉬운 점을 찾으라면, 워낙 강력한 DTS급의 배경 사운드에 비해
센터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대사 음량이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부가영상으로는 감독과 주요 역할의 성우들의 인터뷰, 메이킹 영상, 예고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와 앨리스>로 국내 팬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스즈키 안이 주인공 레이 스팀 역할을 맡았으며, 전문 성우가 아닌 배우로서 처음 참여한 더빙 작업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전해들을 수 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인터뷰에서는 후속 작이 16년이 걸리게 된 사연, 작품의 배경을 19세기 영국으로 설정하게 된 이유 등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각종 시사회와 무대 인사 장면 등이 담겨있으며, 특보, 영화제 트레일러, TV, CM판 등 다양한 버전의 예고편이 수록되었다. 이 밖에 한국어 더빙 현장 스케치가 담겨있는데, 각각의 주인공을 맡은 국내 성우들의 인터뷰가 담긴 점도
이채롭다. <스팀보이>라는 작품이 굉장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투여된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이노센스>의 경우처럼 좀 더 작품과 기술적인 면에 대한 상세한 메이킹 영상이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이 남는다.
 
전체적으로는 대중들과 매니아 사이에서 모두 크게 임팩트를 주지 못한 작품이 되어버렸지만,
10여년의 제작과정이 그냥 투여 된 작품이 아닌 만큼, 애니메이션 매니아들에게는 그냥 쉽게 지나치기에는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임에도 틀림없다.

2006.04.27
글 / 아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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