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Old Partner, 2008)
삶과 죽음의 관한 담담한 여정


<워낭소리>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것을 재쳐두더라도(하지만 재쳐두기엔 그간 선댄스가 주목한 작품들은
대부분 다 좋긴 했다), 다큐멘터리에 특별한 관심이 있던 내게 개봉 훨씬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작품이었다.
사실 40년을 함께한 소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라는 것은 어쩌면 '인간극장' 정도의 소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영화라는 포맷으로 선보이는 이 작품에 남다른 기대가 있었던 점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왠지 보기도 전에 내용을 다 알것만
같았고, 보기도 전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이 영화는, 의외로 단순히 할아버지와 소와의 애틋한 관계만을 조명한
단순한 작품이 아니었으며, 인간극장처럼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서,
그 과정 속에서 더 깊은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미깊은 다큐멘터리였다.




70이 넘는 평생동안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최노인에게는 무려 30년이나 함께 해온 소 한마리가 있다. 이 소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농사를 함께 지어온 가장 믿음직한 동료이며, 할머니의 계속 되는 구박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함께했던 파트너이기도
하다. 사실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을 전해듣고 예상했던 것은 이렇듯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 속에서,
소가 결국 할아버지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겪게 되는 일들, 그리고 할아버지가 소에게 다정하게
애정을 쏟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소가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물론 관객들까지 슬픔에 젖도록 만드는 구성일
것으로 알았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이렇게 일반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지만 할아버지에게
소는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굴레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항상 말없이 묵묵히 일을 해왔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적이
없으며, 더 나아가 얼핏 봐서는 늙어서 자신 몸 하나 겨누기도 힘겨워 보이는 늙은 소를 할아버지가 고되게 부려먹는 것만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자식처럼 살아왔는데, 그 흔한 '누렁이'같은 이름조차 없다. 그냥 '소' 라고 하거나
화가 날 땐 '소새끼' 일 뿐이다.

소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할머니의 말처럼 주인을 잘 못 만나서 사람으로 치면 벌써 세상을 떠날 나이가
지났음에도 매일 같이 무거운 수레를 끌고 일을 해야 한다. 어찌보면 할머니의 말이 더 설득력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서
그렇지 사람이었으면 벌써 욕을 해도 한 바가지는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사람이었다면 벌써 소에게 맞아 죽었을 것이라며
자신이 소에게 고된 삶을 주었던 것을 인정한다. 이렇듯 겉으로 보기에 소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일반적이지 않다.
하지만 어찌보면 그 둘은 표현방법이 일반적인 경우가 틀릴 뿐이다. 할아버지는 말 한 번 따뜻하게 하는 법이 없지만,
성치 않은 다리를 이끌고 매일 소를 먹일 '꼴'을 배러 가고 그 힘든 농사도 소가 농약먹은 풀을 먹으면 좋지 않다는 것 때문에
농약을 치지 않는 힘든 길을 고수해왔다. 소 역시 말 못하는 동물이긴 하지만(동물은 말을 하지 못할 뿐, 표현은 분명히
할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의 힘듦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힘든 길이면 가지 않겠다고 힘을 써볼 수도 있고, 내키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고 버틸 수도 있지만 소는 항상 할아버지가 하자는 대로 따른다.
이 관계를 주종관계로 보게 되면 마치 소가 내내 희생만 해야 하는 불쌍한 존재로 인식될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이 관계를
그려내는 방식은 이들을 주종관계로 보기 보다는, 동반자 혹은 파트너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워낭소리>의 카메라 구도나 이야기 구성면에서 보았을 때 죽어가는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이 아니라 함께
삶과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동일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다. 마치 두 인물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듯한 구도가
이 영화에는 자주 등장한다. 그 주인공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소다. 서로 겨누기 힘든 다리를 발 맞추어
가며 걷는 장면이나, 담배를 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할아버지의 옆으로 포커스 아웃된 소의 모습을 담는 다던가,
무릎을 끌며 농사일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저 멀리 떨어져서 지긋이 바라보는 소의 시선을 담아낸 것이 그렇다.
할아버지는 소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와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소리내어 '아파, 아파' 하던 것은
말 못하는 소의 심정을 대신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아파올 때마다 아마 소도 얼마나 힘들고
아플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가 예전 같지 않자 할아버지는 수의사를 불러 소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데, 수의사는 길어야 1년 밖에는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후 할아버지는 우시장에 나가 새끼 밴 암소 한마리를 집으로 사오게 된다. 이 암소가 집에 오게 되면서 늙은 소는 그 동안
사용하던 자리도 이 소에게 내어주고, 이 젊은 소에게 힘으로 밀려 먹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이 암소가 송아지를 낳게 되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가 된다. 이 힘있는 암소와 어린 송아지는 할아버지가 처해 있는
상황에 그대로 비유된다. 모든 농사를 직접 손으로 짓고 농약도 전혀 치지 않아 모두 손수 벌레를 잡아주고, 잡초를 일일히
제거해야 하는 방법을 고수해온 할아버지에게 빠르고 간편한 농사 기계와 농약은, 나쁘다기 보다는 가는 길이 틀리다고
해야겠다. 모든 편리함을 마다하고 고집스럽게 가장 힘든 길을 택한 할아버지에게, 아니 그것이 더 힘든 길 인줄도 모른채
그저 묵묵히 열심히만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급속하게 변해가는 세상은 적응하기 힘든 세상이다. 할머니는 이 고집스러운
할아버지에게 제발 좀 편하게 살자고, 소를 팔자고, 농약을 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얘기하지만, 할아버지는 진짜 안들리는지
아니면 안들리는 척 하는 건지 대답이 없다. 어쩌면 대답할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살아가는 것에만 열심이었던
그의 인생에 변화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 세상의 문제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큰 결심을 하고 소를 팔러 우시장에 갔다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가격들을 듣고 다시 소를 끌고 돌아오게
되는 장면은, 할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이 세상과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런 소는 돈주고 데려가라고
해도 안가져 간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할아버지는 큰 상처 아닌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에게 크게 한 소리를
해주고는 집으로 소를 데리고 다시 돌아온다. 나중에 송아지 역시 팔려고 하는데 가격 면에서는 역시 의견이 맞지 않았지만,
결국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가격에 송아지를 팔게 된다. 송아지를 팔아버리게 된 것이 단순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FTA관련 뉴스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늙은 소 역시 헐값에 팔아버렸어야 했다. 하지만 이 늙은 소는
자신과 똑같은 세상과 멀어진 존재였기에 할아버지는 팔아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소와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워낭소리>에는 의외로 제 3자라고도 할 수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그려지고 있다. 어쩌면 할머니는 관찰자적 입장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자신처럼 고생 많이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예기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열 여섯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할아버지에게 시집와서는 지금까지 이렇게도 고집스러운 할아버지와 살아왔지만,
말로는 온갖 불평들을 할아버지에게 쏟아내지만, 그 후회스러운 불평 속에는 할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어린 시절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일찍 일어나 일을 해야만 했던 할아버지가 그 이후에도
습관적으로 매일 같이 일을 해야만 하는 모습이 안쓰러운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할아버지가 좀 더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지만 그 고집을 꺽을 수 없는 것에 안쓰러운 것이다.

편리하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곧이 곧대로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정도를 가는 이의 삶이 간편한 삶에 의해
잠식당하는 것을 바라봐야만 하는 것이 어찌보면 할머니의 입장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항상 할아버지가 하는 일을 묵묵히 돌봐주고 있는 것이다.




<워낭소리>는 소가 죽는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이 죽음 자체를 극 적인 소재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인 셈이데, 실제로 영화는 이 소의 죽음 자체보다는 이별을 준비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매일 같이 아무리 힘들어도 발걸음을 일으키던 소가 어느 날 아무리 애를 써도 일어나지 않자 할아버지는
어느 정도 죽음을 감지하게 된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수의사의 말이 있은 후, 무려 40년 동안이나 코를 두르고 있던
쇠꼬뚜레와 고삐를 풀어주며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그 동안 애 많이 썼단'말을 전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삶과 죽음에는
연연하지 않고 무덤덤할 것만 같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소이지만 이 순간 이들 모두는 매마른 피부 위로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더 이상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슬픔 보다는 감사의 감정이 더 큰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워낭을 손에 쥐고 있는 남겨진 할아버지의 모습을 카메라는 담담히 보여준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보지 않고서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질 않았다. 어느새 삶과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대처하는 노인의 지혜를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배우게 되어버린 것이다.





1. HD로 촬영된 영상과 친절한 자막은 감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 영화를 보고나니 나도 대체될 수 없는 누군가를 잃게 되었을 때 어떻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3. FTA를 반대하며 미친소를 외치던 시위 행렬 앞으로, 할아버지와 소가 지나가던 장면은 정말 묘한 순간이더군요.
   더군다나 소가 한 번 스윽 돌아보는데, 오만가지가 연상되는 장면인듯.

4. 이번 감상기는 평소보다 더 정리가 잘 안되네요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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