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 파운즈 (Seven Pounds, 2008)
살아남은 자의 또 다른 선택


윌 스미스를 떡하니 내세운 포스터가 나름 인상적이었던 영화 <세븐 파운즈>. 언제부턴가 윌 스미스는 그 존재만으로도
어느 정도 영화를 선택하게 하는 배우가 된 듯 하다. 특히 이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배우들이 개인적으로는 애초부터
이런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윌 스미스는 작품이 하나 하나 더 해질 수록 차곡차곡 그 영향력을 더해나간 결과
이제는 감독 이름도 확인하지 않은채 그의 이름만으로도 영화를 선택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세븐 파운즈>였으며, 보는 내내 한 편으론 그의 전작이었던 <행복을 찾아서>와 비교하곤 했었는데,
알고보니 이 작품의 감독이었던 가브리엘 무치노와 윌 스미스 콤비의 또 다른 작품이기도 했다.


(이후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선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는 '하느님은 7일 만에 세상을 만들었고, 나는 7초 만에 모든 것을 잃었다' 라는 주인공 '벤'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러곤 자신이 자살한다고 911에 신고전화를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고는 별다른 설명없이 이 남자의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 간다. 사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게 윌 스미스가 연기한 '벤'의 행동들에 근거를 초반에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시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왜 눈이 안보이는 전화 상담원에게 전화하여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퍼붓는지, 친구로 보이는 남자와는 왜 다투는 것인지, 동생의 전화는 왜 계속 피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개인적으로 봤을 때 이걸 미스테리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해
숨겨온 것이라고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초반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전화 장면이 나왔고, 무언가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더 직접적으로 장기기증을 필요로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것만 봐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첫 장면과의 연계성을
통해 하나 둘 등장하는 이 인물들에게 벤이 장기기증을 하겠구나 하고 예상하게 된다. 만약 감독인 가브리엘 무치노가
벤이라는 인물의 행동의도에 대해 숨기는 것으로 이 영화를 미스테리 하게 풀어나가 나중에 어느 정도 비밀이 밝혀졌을 때
관객들로 하여금 '그랬었었구나...'하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던 것이라면 이는 큰 '오해'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븐 파운즈>는 초반에 이야기의 전개를 다 알려주고 시작하는 셈이 된다(만약 가브리엘 무치노가 위와 같은
이유를 감동 포인트로 잡았다면 이건 좀 문제일 듯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밀 아닌 비밀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좀 더 작은 디테일이나 감정 하나하나에 집중을 하며 영화를 보게 되었다. 쉽게 말해 좀 더 '벤'이 되어보려 한 것이다.
벤이 이렇듯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앗아가며 7명이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기로 한 것은, 영화 중간중간 스쳐가는
회상에서 알 수 있듯이 교통사고로 부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을 죽게한 사고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이 회상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기 전까지는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사고가 나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자체가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정도로, 이 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벤이(더군다나 자신의 과오로 일어난 사고였기에) 스스로의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런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사실 이 영화에 호불호가 갈리는 가장 큰 이유는 <미스트>의 경우가 그랬듯이
주인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죄의식의 해방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7명의 생명을 살리는 행동 자체의 숭고함으로
볼 것인지에서 나뉠 듯 하다). 영화는 이처럼 관객에게 주인공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준 뒤
이 남자의 심정을 공감케 하는데 더 집중을 하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진짜 윌 스미스가 '벤'이라서 국세청 직원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조회하고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특권'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가 펼쳐질 줄 알았다. <다크 나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일종의 '권력'을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에 쓰면 괜찮은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만한 영화가 될 줄 알았었는데, 알다시피 윌 스미스가 '벤'이 아니라 '팀'
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런 논쟁은 필요가 없어진다(참고로 엔딩 크레딧에 윌 스미스의 배역 이름은 '벤'으로 표기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역시 남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남자의
심정에 빠져드는 것이 남는데,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어서인지 이 착하게만 보이는 스토리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첫 장면에 '신(神)'을 등장시켰던 것처럼 이 영화는 굉장히 영적인 부분의 접근이 가능한 영화라 하겠다. 마치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여러 생명을 살리려는 '벤'의 여정은 이를 자연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동기 부분에서 '벤'은 죄책감에 근거했다는 것 때문에 한 편으론 아쉬움도 남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감독과 배우의 전작 <행복을 찾아서>에서처럼 인간적인 인물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기도 했다.

영화 속 '벤'은 집이며 장기며 모두 내주는 것에서 '히어로'나 '신'적인 모습이 비춰지기도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벤'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을 영화는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신이 지켜내려는 7명의 이름을 악을 쓰며 외우는 모습에서,
결정을 내린 뒤에도 끊임없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이 과정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에밀리와의
관계가 가장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데, 결국 사랑에 감정을 느끼게 되 담당 의사를 다시 찾아가 심장을 의식 받을 수 있는
확률을 되묻는 장면은, 확실히 신적이라기 보다는 몹시도 인간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따지고보면 에밀리와의 로맨스는
로맨스라기 보다는 '벤'의 생존본능에 의한 구실로 보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스스로 에밀리와 행복한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혹은 납득시키고 싶어하는 그의 불안하고 인간적인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결말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각자의 평가가 남겠지만, 영화 속 벤처럼 자신에게는 특히나
엄격한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할 만한 전개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가치관을 갖고 있는 인물에 대한 디테일한 드라마로서
나쁘지 않았던 것 같고.

사실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에서 예고 했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눈물이 났다.
보통 이식을 받거나 큰 상처가 있는 경우 숨기려는 것과는 달리, 가슴이 파인 원피스로 오히려 자신의 수술 상처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에밀리의 모습이나, 벤의 안구를 이식받은 에리자(우디 헤럴슨)가 에밀리(로자리오 도슨)를
알아보는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났다.




리뷰의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보는 내내 윌 스미스의 연기와 그 비중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특히 이제는 감정을 움직이는
휴먼 드라마에 있어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한 영향력을 가진 배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믿음직함이 느껴졌으며,
정말 많은 생각을 속으로만 해야하는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연기를 펼쳤다.

로자리오 도슨은 영화 속에서 몸이 아픈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아픈 로자리오 도슨의 모습을 보니 며칠 전 보았던 <체인질링>의
안젤리나 졸리가 자꾸 떠올랐다. 둘다 강한 여성의 대표 캐릭터이기도 했는데, 이렇게 아파서 골골해 하는 모습을 보니
측은함과 동시에 배우 자체에 대해서도 다시 보게 된 것 같다. 우디 헤럴슨은 뭔가 이렇게 착하게만 나오니 조금 적응이
안되긴 했다 ^^;


1. 메가박스 신촌에서 디지털 상영으로 감상하였는데, 정말 화질이 좋더군요! 마치 블루레이를 집에서 보는 듯한 디테일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좋은 화질이었습니다. 화질이 감상에 10%이상 도움이 확실히 된 경우입니다.

2. 삽입곡들도 참 좋았습니다. 특히 닉 드레이크의 곡이 좋았고, 뮤즈의 곡도 좋았구요.

3. 이 영화를 보니 오랜만에 <행복을 찾아서>도 다시 보고 싶어지더군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콜럼비아 픽쳐스에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