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 (The Ides of March, 2011)

최선의 선택이란 무엇인가?



조지 클루니가 출연에 연출까지 맡고, 라이언 고슬링, 폴 지아마티,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마리사 토메이, 에반 레이첼 우드 등 화려한 캐스팅이 눈길을 끄는 영화 '킹메이커 (The Ides of March, 2011)'를 뒤늦게 보았다. 평소 정치에 관심은 물론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치기도 하는 조지 클루니의 작품이라 정치적인 소재를 다뤄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영화는 적극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펼치기 보다는 오히려 이를 소재로 활용하는 영리한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히려 정치에 관심도 생각도 많은 조지 클루니이기에 가능한 여유가 아닐까도 싶은데, 조지 클루니는 민주당내 선거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주인공 스티븐 (라이언 고슬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살면서 여러번 맞닥들이게 되는 '최선의 선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또 한 번 던지고 있다.



ⓒ Cross Creek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스티븐은 민주당내 차기 대선 후보를 뽑는 것이나 다름 없는 선거에서 모리스 (조지 클루니)를 당선시키기 위해 일하는 선거 캠프의 팀장이다. 젊은 나이에 뛰어난 재능으로 정치계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스티븐은, 선거 운동 중 상대 후보 캠프의 모략에 걸려들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믿고 지지하던 모리스의 치명적인 스캔들을 알게 되고 만다.


사실 조지 클루니의 그간 정치적 활동이라던가 '킹메이커'라는 국내 개봉 제목으로 미뤄봤을 때, 예전 비슷한 영화들처럼 선거 캠프의 인물들을 통해 선거와 그 뒷 이야기 그리고 미국내 여러가지 정치적 이야기들을 다룬 영화가 아닐까 했었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킹메이커'의 포커스는 분명 그 곳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현실적 소재들이 모두 등장하고 실제 사례 (클린턴의 스캔들)들을 인용한 부분들도 등장할 만큼 실제 정치판의 뒷이야기가 살아 있지만, 이것들을 통해 미국내 정치판을 비판하거나 다큐멘터리처럼 재조명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 사건에 놓인 주인공 스티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 Cross Creek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영화 속 스티븐의 선택이 그러한 점을 더 돋보이게 하는데, 스티븐은 말그대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정의의 편에 서기 보다는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기는 했지만 씁쓸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론도 물론 중요하지만 스티븐이 자신이 믿고 따르던 모리스의 스캔들을 알게 된 후 벌이는 갈등과 그로 인한 몇 번의 선택들을 통해 영화는 끊임없이 '최선의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킹메이커'의 이러한 질문은 개인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아주 깊게 다가왔는데, 최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과정의 정의는 포기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과정의 정의가 없는 최고의 결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를 또 한 번 생각해보게 했다. 실제로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결과를 위해 과정의 정의는 무시해도 된다가 아니라, 부득이한 경우 결과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며, 과정의 정의 없는 최고의 결과는 무조건 잘못 되었다 가 아니라, 과정의 정의를 위해 최고의 결과를 포기하여 결국 상대의 승리 혹은 최악의 결과를 낳도록 하는 것을 잘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에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는 삶의 여러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쉽지 않은 선택의 기로인데, 그것이 신념과 맞물렸을 때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또 한 번 깊게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였다 (아, 이 영화에서 역시 답은 없다. 이 문제에 공통된 답이란 것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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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짜임새 있는 이야기와는 별개로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영화가 바로 '킹메이커'이다. 최근 보았던 '디센던트'를 통해 더더욱 사랑하게 된 조지 클루니의 경우 정말 못하는게 무엇인지 묻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연출력을 보여주었으며, 등장만으로 무게감을 주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폴 지아마티의 캐스팅은 양 캠프의 무게감을 동등하게 부여하는 가장 쉽고 확실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큰 역할이 아닌 듯 하지만 마리사 토메이가 연기한 타임지 기자 역할도 가볍지 않았고, 에반 레이첼 우드 역시 자신의 순수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소비한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주인공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의 경우, '드라이브' 이후 최고의 주가를 기록하고 있는 남자 배우답게 연기와 이미지가 완전히 결합된 또 한 번의 결과물을 보여주었으며, 점점 동년배의 헐리웃 다른 남자 배우들과는 차별되는 특별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듯 했다. 이런 이유로 곧 개봉예정인 '블루 발렌타인'이 기대되는 바이다 (미셸 윌리엄스까지 출연하니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을 수 밖에는 없다).



ⓒ Cross Creek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1. 예전에 극장 상영버전이 화면비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보고 패스했다가 이번에 IPTV로 보았는데, 대충 비교해보니 이 버전은 잘린 것 같지는 않더군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2. 저는 라이언 고슬링과 동갑입니다 -_-;;;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Cross Creek Pictures 에 있습니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 2007)
외로운 시대, 외로운 가족의 초상


2007년 작이긴 하지만 이번에 국내에는 처음 정식으로 선보이게 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12인의 성난 사람들>, 알 파치노가 열연했던 <뜨거운 오후>, 범죄/미스테리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등을 연출했던 거장 시드니 루멧의 작품이라는 점만으로도 일단 관심을 갖게 되었던 작품이었다. 감독의 이름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의 면면을 보니 이건 더 대단한 것이 아닌가. <카포티>와 <다우트>를 통해 새삼스럽게 연기력을 평가받고 있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만나게 된(적어도 개인적으론) 에단 호크, 그리고 최근 <더 레슬러>를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마리사 토메이와 대배우 알버트 피니까지. 이런 배우들과 시드니 루멧이라는 감독이 만들어낸 작품은 과연 어떨지 영화 팬으로서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부터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아래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는 범죄 현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는 일단 생략한채 살인이 발생하게 되는 범죄 현장을 보여주고는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그런데 이 범죄 현장에 얽힌 이들과 사연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일반적이고 현실적이라 예사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형제인 에디(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와 행크(에단 호크)는 각자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보석상을 털기로 계획을 세운다. 아, 계획은 형인 에디가 한 것이며 행크는 단지 실행할 뿐이다. 그런데 이 보석가게는 다름 아닌 형제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다. 이 계획에 흥미로운 점은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없는 범죄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보석상을 털어서 돈을 챙기고 부모님은 보험을 들어 놓았기 때문에 피해는 커녕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범행 예상시간에는 가게 내에 노인 한 명만 지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별다른 몸싸움이나 인명 피해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훔치려는(얻으려는) 돈이 일확천금이 아니라 단순히 현재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정도라는 것이다.

보통 범죄 영화와 이 영화가 가장 차별되는 점은 바로 이 목적에 있다 하겠는데, 이 계획은 에디와 행크에게는 각자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아무도 피해받지 않고 서로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정도만을 목적으로 한 범행이었으며,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가 된다. 에디의 계획에는 없었던 인물이 행크의 뜻에 따라 합류하게 되었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 2명이나 발생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형제의 어머니가 가게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자 이들 형제는 몹시 당황하게 된다. 평소 우유부단하고 독립성이 부족했던 동생 행크는 이 현실에 어쩔 줄을 몰라하고, 모든 일을 계획대로 이뤄 처리하던 형 에디도 자신이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로 인해 틀어져 버린 이 현실 때문에 공황상태에 빠져버린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점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이 모습, 더 나아가 결국 이들이(이럴 필요도, 그럴만한 목적이나 악의를 애초부터 갖지 않았던 이들이) 얼마나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는 가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영화는 기법 측면에서 사건이 진행되고 나서 그 사이에 각 인물들이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가 일종의 플래쉬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단순히 기법 측면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을 듯 하다. 제목인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전에'에서도 알 수 있듯이, '~ 뭐 하기 전에' 라는 뉘앙스와 계속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그 전으로 돌아가는 구성 방식은,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던 나약한 인간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담겨있으며, 항상 이런 불안 요소를 잠재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외로운 이들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의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바로 이 불안감에 대해 영화는 또 깊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겉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리고 별로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던 일들이 결국 모두 표면 밖으로 터져나오는 걸 보여주면서, 이런 불안감을 항상 잠재하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했다. 범죄 현장에 무엇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목격자는 없었는지 행크에게 닥달하듯 계속 되묻는 에디의 모습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어떤 불안의 잠재요소가 있는지 되묻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불안 요소를 더 증폭시키기 위해 영화 음악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영화의 영화 음악은 마치 사운드 시스템에 오류가 난 것이 아닌가 흠짓 착각했을 정도로 계속 불안하게 음이 끊긴 채로 전달된다. 이렇듯 관객의 심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를 더 극대화 시키려는 영화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통한 인물들의 해석이었는데, 아버지로 부터 이어진 가족의 불안요소와 불화가 결국 어떤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각 인물들의 상황을 겪으면서 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욱 흥미로웠다. 에디와 행크는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본인도 의도 하지 않았던 일들을 더 저지르며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 특히 본래는 아무도 죽이지 않으려던(그래서 총도 장난감 총만 준비하고자 했던) 계획을 세웠던 에디는 사태가 급변하면서 이 사건에 관련된 이들을 거침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 내러티브 측면에서 왜 에디가 필요없는 사람까지 죽여야 했는가라고 묻는 다면, 이 상황에 놓인 에디는 이미 그런 맥락을 다 따져가며 살인을 저지르는 심리 상태가 절대 아니었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 스스로도 공포스러울 정도로 일을 최악으로 몰고 가버리게 되는데, 이건 일종의 불안에 잠식되어버린 연약한 인간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가족으로 다시 돌아와서. 흥미로운 점은 에디나 행크의 모습이 너무도 외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일단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경제적인 문제를 나누고 들어줄 만한 친구나 동료가 이들에게는 없었으며,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았을 때도 고민을 들어줄 존재라고는 결국 자신들 밖에는 없었다. 특히 에디의 경우는 돈을 주고 마약을 거래하는 마약상에게 자신의 이런 고민을 털어놓게 되는데, 마약상은 딱 잘라 관심없음을 표현한다. 정말 자신을 잘 표현하지 않는 에디가 참다참다 못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이런 남과도 같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점은, 가정 내에서 문제를 겪은 이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데 실패했는지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에디와 행크가 끊임 없이 서로에게 전화하는 것은(특히 에디가) 단순히 이 사건에 둘이 공모했다기 보다는 이런 고민을 나눌만한 이가 서로 밖에는 없기 때문인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외로운 시대에 외로운 존재였던 이들이 어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닥쳤을 때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리는지, 이들이 이렇게 까지 되어버린 데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큰 책임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는 텍스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작 감독은 이 영화를 멜로 드라마로 규정하기도 했는데, 그런 측면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더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우트>를 보며 '와, 연기만으로도 이렇게 공포감을 느낄 수 있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곤 참 대단하다고 느꼈었는데,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또 다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이 영화 내에서 거의 감정이 폭발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데, 별로 폭발시키지 않고 내색을 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이렇게 캐릭터에 무게감을 전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전작들을 통해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여러 종류 연기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그의 또 다른 면목을 새삼 느끼게 하는 고수의 연기였다 하겠다.

에단 호크는 자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의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하겠다. 단순히 이미지를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기반으로 영화 속에 잘 녹여낸 경우로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마리사 토메이는 최근 작품들에서 연이어 노출 장면이 많아 한편으론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 독특한 말투는 과연 이 사람이 <더 레슬러>에 나왔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 배우는 아버지 역할을 연기한 알버트 피니였다. 복잡하게 얽혀버린 가족사를 점점 알게 되는 인물을 연기하는 알버트 피니의 모습은 현실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는 다른 측면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을 관객에게 전한다. 표정 하나하나에서 그야말로 '열연'을 느낄 수 있었고, 이 영화가 좀 더 풍부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에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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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진중권 교수님과의 씨네토크 사진들. 클릭하면 좀 더 큰사이즈로 보실 수 있어요)

이 날은 영화가 끝나고 진중권 교수님이 함께하는 씨네토크가 이어졌다. 기존 영화 관계자나 평론가가 참가하는 씨네토크와는 달리 진교수님이 자신의 정리해온 내용을 발표형식으로 진행한 이후 토크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영화 평론가라던가 관계자와 함께하는 방식이 아니다보니 일반적인 씨네토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진행이 되었던 것 같다. 좀 색다른 분위기의 씨네토크여서 흥미롭기도 했고, 영화 내용에 관한 토론보다는 철학적 텍스트에 관한 (아무래도 씨네토크 진행자와 참가자들의 성향에 따라 이런 방식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 같다)  이야기로 이어져 신선하기도 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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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
한계와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찬사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2008년작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라는 배우 때문에 일단 주목하게 된 영화였다. 젊은 시절 그 누구보다 화려한 헐리웃의 섹시가이로 유명세를 떨치던 미키 루크는 마약을 비롯해 각종 안좋은 일들로 영화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었으나 몇해 전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씬시티>를 통해 다시금 메인 스트림에 복귀하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와 캐릭터로 또 다른 미키 루크를 선보이며 영화 팬들 곁을 다시 찾아왔었다.  그 이후 미키 루크의 새로운 행보를 주목하던 중 처음으로 접하게 된 영화가 바로 이 영화 <더 레슬러>였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 가운데 <파이>와 <레퀴엠>만을 보았었는데(<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dvd가 있음에도 아직 보질 못했는데, <더 레슬러>를 계기로 이번에 한번 봐야겠군요), 영화를 볼 때는 전작들과의 접점을 단번에 알아채기 어려웠으나, 리뷰를 쓰려고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이번 작품 <더 레슬러>역시, '레슬링'이라는 소재는 단지 거들 뿐, 현실과 이상의 갈등 속에서 한계에 부딪힌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주인공인 랜디 더 램(미키 루크)은 젊은 시절 프로레슬러로 큰 인기와 전성기를 누렸던 스타였으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보청기를 착용해야만 하고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일해야만 하는 노년에 가까운 남성일 뿐이다. 그런데 랜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점은 바로 그가 아직도 '프로레슬러'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스포츠를 주제로 신파성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성공스토리 영화들과의 분명한 차이점이다. 실버스타 스텔론의 <록키 발보아>같은 경우 (참고로 미키 루크에게 캐스팅 제의가 가기 전에 스텔론에게도 제의가 있었으나 바로 <록키 발보아>때문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전성기를 보냈던 주인공이 세월이 흐른 뒤 다시금 전성기 때처럼 열정을 가지고 한계에 도전한다는 것으로 감동을 그려내고 있지만, <더 레슬러>의 경우는 전성기를 보낸 주인공이 한참 떠나있던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계속 몸을 사용해야 하는 프로레슬러로서 활동을 해왔다는 점이다. 비록 엄청난 주목을 받던 젊은 시절에 비해 지금은 작은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오고 있으며 쉬지 않고 해왔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 랜디가 겪게 되는 갈등과 고통은 무엇일까. 다른 성공스토리가 '그래, 내가 전성기는 아니지만 아직도 할 수 있어!' 라는 식의 도전과 성공으 이야기였다면, <더 레슬러>의 구조는 '아,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의 고민과 고통에서 시작된다. 격한 프로레슬링을 하기 위해 수많은 약물과 편법등을 동원해서 커리어를 이어오던 랜디에게 어느날 심장에 무리를 주는 쇼크로 쓰러지게 되면서, 랜디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다. 그 동안 프로레슬러로서 소홀했던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에게도 좀 더 마음을 열기로 하고, 자주 가던 스트립바의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에게도 오랫동안 숨겨왔던 손님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심장에 이상이 왔다는 걸 알았을 때 좀 더 신파같은 줄거리였다면 단번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레슬링을 했었을테지만, <더 레슬러>의 랜디는 그 동안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위해 큰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주저없이 커리어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레슬링을 떠나서 그가 바로 피부로 겪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이다. 레슬링 비지니스 속에서만 살아온 랜디가 이를 관뒀을 때 겪게 되는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다. 그 동안 돌보지 못했던 하나 뿐인 딸은 자신을 아버지는 커녕 남 대하듯 쫓아내는 한편, 빈 트레일러 집에 덩그러니 누워서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며, 레슬링을 하지 않으면 생계에 직접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앞치마와 위생모를 머리에 쓰고 식품 코너에서 샐러드를 팔기도 해야한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불러온 동네 꼬마와 구형 닌텐도로 게임을 하는 장면에서, 랜디는 자신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레슬링 게임에 신나하는 것에 비해 아이는 최첨단 FPS 게임(콜 오브 듀티 4)을 이야기하는 것은, 랜디가 현실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그 거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랜디가 이 한계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랜디는 자신을 매몰차게 내치는 딸 스테파니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캐시디에게 살짝 고백을 했다가 거절 아닌 거절을 당한 뒤에도 (생각보다는) 약한 불만의 표현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애초부터 하고 싶지 않았을 식품 코너 일도 긍정적이고 즐겁게 하려는 모습이 오히려 안쓰럽기까지 했다. 랜디가 맞닥 들이게 되는 현실의 묘사도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랐다.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뿌리치는 스테파니의 입장은 사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부분이다. 아버지가 필요할 때는 없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병을 얻고 나서야 나타나서 호의를 배푸는 아버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 당연하고, 캐시디 역시 그간 아무리 자주 오가며 정을 쌓았다 하더라도 막상 고백까지 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일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기에 랜디에게 다가오는 현실이 그리 가혹한 것만은(자초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랜디가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은 너무 순응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닥쳐올 현실을 모두 다 세상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랜디의 모습은 애처로운 동시에 너무도 현실적이다. 사실 이런 현실이 닥쳤을 때 고통을 조금 호소하다가 바로 불만과 용기를 동시에 뿜어내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너무도 영화적이었던 것에 반해, 랜디의 모습은 너무 현실적이라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딸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기 위해 노력하다가 자신의 진심을 얘기하며 그 거친 피부 아래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눈물 이상의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장면이기도 했다 (랜디가 현실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유일한 부분은 '랜디'라는 레슬러로서의 이름으로 반드시 불리길 원하는 것이 전부인것 같다).




랜디가 처하는 현실의 극적인 대비 측면을 위해 영화는 프로 레슬링의 세계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흔히 '쇼(Show)'로만 알고 있는 프로 레슬링을 위해 얼마나 많은 '현실'의 사람들이 많은 준비와 노력을 들이는지를 구차할 정도로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보통 같으면 프로 레슬링의 링 뒷면에서는 서로 저렇게 미리 합을 짜고 스토리를 준비하는구나 하고 알 정도였다면 초반 한 두번 연관 장면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쳤을텐데, <더 레슬러>에서는 이 부분은 랜디가 링에 오를 때마다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미리 칼날을 숨겨 이마에 커트를 내고 사용할 무기들에 관해 미리 준비를 하는 기술적인 측면 뿐 아니라, 이렇게 치열한 경기를 치르고 링을 내려와 쇼 뒷면에 현실로 돌아왔을 때 레슬러들의 세계를 가까운 곳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이다. 보통 일반적 영화같았다면 퇴물쯤 되는 랜디를 젊은 레슬러들이 그야말로 퇴물 취급하며 왕따 비슷하게 몰아갔을테지만, 이것은 너무 극적인 요소만을 강조한 전개일뿐, 현실성과 메시지를 중시하는 <더 레슬러>에서 젊은 레슬러들에게 랜디의 존재는 존경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링을 내려온 랜디에게 서로 등을 두드리며 나누는  '굉장했다' '죽여줬다' '영광이다' 등의 말들은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말들인 것이다.

가장 쇼에 가까운 프로레슬러에게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또 하나의 진부한 설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더 레슬러>는 이런 논란에서는 거뜬히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 현실감을 불어넣은 또 하나의 장치는 바로 카메라 워크라 하겠는데,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시종일관 랜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카메라 워킹과 굉장히 인물에 가깝게 밀착되어 있는 카메라와의 거리는  이 영화의 인물들에 좀 더 현실적인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스트립바에서 댄서로 일하고 있는 캐시디는 이 영화에서 무시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단순히 랜디와의 로맨스 적인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랜디와 비슷하게 한계에 부딪혀 갈팡질팡하는 캐릭터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녀 역시 젊은 댄서들에 밀려서 손님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자신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보인 랜디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랜디에 대한 사랑의 감정만이라기 보다는 랜디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나서 용기를 얻고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 전이된 경우라고 봐도 좋을 듯 하다. 그래서 캐시디는 랜디가 스트립바에 와서 돈을 주고 나체의 자신을 보는 것이 못 마땅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목숨을 걸고 레슬링을 다시 하려고 하는 랜디가 안쓰러운 것이다. 

랜디를 이러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링 위 임을 깨닫고 20년 만에 열리는 기념 경기에 보수도 없이 참가하기로 한다. 링 위의 공간은 철저한 쇼의 무대이자 다른 한편으론 가장 치열한 랜디의 현실이기도 하다. 마지막 경기에서 이미 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이뤘고, 상대 레슬러도 랜디의 상태가 걱정되어 이쯤에서 끝내자고 하지만 랜디는 결국 더 완벽한 쇼를 위해 마지막 기술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링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영화의 엔딩은 마치 한계와 맞서싸우다가 산화해 버린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하지만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듯한 느낌은 분명 아니었다. 랜디는 자신의 인생과 현실, 링을 돌아보며 한계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인채, 자신 만의 방법으로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카메라 워크도 그렇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미키 루크라는 점에서 이야기에 깊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속 랜디와 실제 미키 루크의 삶은 여러 모로 유사점이 많다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속 랜디처럼 자신의 한계와 과오를 인정하고 다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돌아간(돌아온) 미키 루크의 열연은 그래서 더욱 눈물겹다. 사실 개인적으로 한창 때 미키 루크가 출연한 영화들을 그리 많이 본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영화 속 랜디를 연기한 미키 루크의 모습에서는 진정과 인생이 느껴졌다. 미키 루크 본인은 극 중 랜디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 비슷해 처음에는 출연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랜디처럼 미키 루크도 더 이상 이 같은 점을 외면하려고만 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 더 좋은 결과와 그의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미키 루크의 오랜 팬이 <더 레슬러>를 보게 된다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를 듯 하다. 


1. 평소 WWE를 그래도 챙겨보는 입장에서 레슬링 관련 영화라 혹시나 관련 선수들이 잠시라도 스쳐가지 않을까 해서 눈에 불을 켜고 봤는데, 적어도 WWE소속 선수들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더군요.

2. 극중 래니의 딸 이름이 스테파니 라는 점도 살짝 흥미로웠습니다. 잘 알다시피 WWE의 회장 격인 빈스 맥맨의 딸 역시 이름이 스테파니이기 때문이죠 ㅎ

3. 캐시디 역할을 맡은 마리사 토메이의 경우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어 다른 영화에서 본 적이 있나보다 했는데,
그렇다기보다는 여러 여배우들의 얼굴이 겹쳐보인 것 때문인듯 하네요. 그녀는 이미 조 페시와 연기한 <나의 사촌 비니>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적도 있습니다.

4. 스테파니 역할을 맡은 에반 레이첼 우드는 처음에는 몰라보겠더군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때와는 머리 색도 틀리고 화장도 진하게 한터라 약 10초간 못알아볼 뻔 했네요 ^^;

5. 극 중 랜디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등은 숀 마이클스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6. 엔딩에 흐르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는 이 영화와 그리고 무엇보다 미키 루크와 너무도 잘 어울리더군요.




7. 제 리뷰의 제목인 '한계와 가치있는 것들의 대한 찬사'는 좀 맞는 거 같지 않아서 '한계 그리고' 뭐 이런식으로 수정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한계'라는 것 역시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것 같네요. 극중 랜디와 같다면 한계를 접했다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일이고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니까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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