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로드 (The Road, 2009)
마음 속 불꽃이 있는가?


코맥 맥카시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존 힐코트의 영화 <더 로드>는, 워낙에 많은 원작의 독자들 때문이라도 온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수 밖에는 없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코맥 맥카시의 원작 소설을 읽을 뻔했었는데, 다행히도(?) 막 읽으려는 찰나에 영화화 소식을 접한 터라 더 깨끗한 상태로 영화를 만나기 위해 독서의 즐거움을 포기하기도 했었다(그렇기 때문에 이 리뷰는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쓰여졌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사실 엄청난 베스트셀러라는 사실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긴 했지만, 베스트셀러의 영화화는 기대와 동시에 우려가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려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면, 비고 모르텐슨이라는 배우는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만한 믿음을 주어 결정적으로 이 작품을 주저없이 선택하게 되었다.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 이어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를 함께 하며 어쩌면 벗기 힘들었을 '아라곤'이라는 이미지를 너무 쉽게 벗어버린 비고 모르텐슨의 이름이 코맥 맥카시 보다 더 매력적이었던 건 아마 나 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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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알려주지 않지만 인류가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만큼의 재앙을 겪게 되어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쇼핑카트에 필요한 것들을 담아 인간들을 먹는 무리들을 피해 하루하루를 연명해 간다. 비고 모르텐슨이 연기한 남자는 아들과 함께 이 지구에 남겨졌으며, 아내의 마지막 말처럼 남쪽으로 남쪽으로 계속 힘든 여정을 이어간다.

혹자들은 왜 지구가 이런 재앙을 맞게 되었는지, 아니 그 이전에 정확히 어떤 재앙이 일어난 것인지조차 묘사나 설명이 없는 스토리에 대해 불만을 갖을 지도 모르겠다. 종종 이렇듯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해주지 않는 작품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물론 그 배경적인 이야기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쉽게 얘기해서 영화 속 부자에게는 그들에게 닥친 지구의 재앙이 지진이던, 온난화로 인한 재난이던, 멈추지 않는 화제던, 외계인의 침공이던 그 어떤 것이 되든 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더 로드>에서 닥친 재난은 '재난' 이상의 의미는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이런 재난을 맞닥들인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그 안에서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지가 핵심적인 이야기라는 말이다. 물론 지구가 어떤 재앙을 맞았고 아이가 다 크도록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불만으로 까지 전이될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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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재앙 앞에서 연약하기만 한 인간의 외로운 싸움을 그린 영화는 많은데, <더 로드> 역시 그 묘사 방법이 훨씬 더 정적이고 차분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많은 부분을 같이 하고 있다. 재난 앞에 무력함, 그리고 그 재난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는 전개, 항상 옳을 것만 같았던 우리의 주인공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욕구의 유혹에 넘어갈 때,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항상 강할 것만 같았던 역시 '우리의' 주인공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시퀀스 등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이야기 구성을 <더 로드>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물론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 영화의 접근 방식은 훨씬 정적이고 인상깊은 편이다).

개인적으로 <더 로드>에서 발견한 이 영화 만의 특별한 지점은 '따라온다'라는 개념이었다. 일단 이 영화에서는 굉장히 의도적으로 '따라온다'라는 대사를 사용하고 있다. 남자는 가끔씩 만나게 되는 불청객들에게 꼭 '언제부터 따라왔냐!'라고 묻곤 한다. 하지만 그 때마다 불청객들은 '따라오지 않았다'라고 얘기한다. 실제로 불청객들이 따라온 적은 없지만 남자는 항상 본인은 착한 사람으로서 나쁜 사람들에게 쫓기는 듯한 불안감에 살고 있다. 이것은 재앙이 닥친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라고 하더라도 이런 남자의 심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와 내 가족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회. 남자는 분명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홀로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아무도 믿지 못하고 스스로를 가두는 것으로 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믿고, 실제로 그렇게 생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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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들은 이런 재앙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이지만 본 적도 없는 착한 사람들(가족 외에)을 믿고 있다(정확히 얘기하자면 착한사람으로 믿고 있다). 길에서 만난 노인에게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남자는 누군가가 우리를 쫓고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아들에게는 이런 부정적인 걱정이 없다. 오히려 개가 있으니 한 무리의 가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다.
이런 아들과 남자의 미묘한 갈등은 이 영화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이런 재앙 속에서도 천사 같이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아들과 착한 사람이지만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재앙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를 일깨워 준다.

'따라온다'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자면 남자는 계속 불청객이 나타났을 때, 언제부터 우리를 따라왔냐며 의심했었지만 정작 그들을 계속 따라온 것은 영화 속에서 말하는 '착한 사람'들이었음이 밝혀지는 부분은 의미 심장했다(물론 영화에서 묘사하기로는, 왜 이 착한 사람들이 마치 부자를 시험이라도 하듯 계속 따라왔으면서 남자가 죽은 이후에야 나타났는지는 조금 의문이지만;;). 남자의 의심과는 다르게 계속 그들을 따라오던 이들은 착한 사람들이었고(개가 짖던 것도 순간도 그들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를 은연 중에 믿어오던 아들의 믿음은 결국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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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분명 컬러영화이지만 흑백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의 색이 드러나지 않는다. 색이 빠진 죽어있는 지구의 모습과 생존에 갈림길에 서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이로 인해 더 인상 깊게 다가왔으며, 별다른 스펙타클한 장면 없이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구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주연을 맡은 비고 모르텐슨은 다시 한번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흡입력 높은 연기를 펼친다. 비고는 실제로 아버지라는 캐릭터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항상 생각해왔었는데, <더 로드>에서 그런 진가가 제대로 드러나고 있다. 로버트 듀발과 가이 피어스는 워낙에 피폐한 캐릭터 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몰라볼 정도인데, 특히 가이 피어스의 경우는 까메오 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가이 피어스는 존 힐코트 감독의 전작 <프로퍼지션, 2005>에 출연했었다). 샤를리스 테론 역시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편인데, 개인적으로는 다른 의미에서 그녀의 출연이 굉장히 의미있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아들 역할을 맡은 코디 스미스 맥피 때문이었는데, 물론 이 아역 배우의 연기 역시 흠잡을데 없이 만족스럽긴 했지만, 별개로 이 아이의 얼굴에서 샤를리스 테론의 얼굴이 계속 비춰졌다는 것이 몹시도 흥미로웠다. 흡사 실제 모자 관계가 아닌가 (테론에겐 죄송;) 의심을 해볼 정도로 코디 스미스 맥피의 눈빛, 표정, 볼 에서는 샤를리스 테론의 이미지가 매우 자주 흘러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아들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서 단순히 아들 뿐만 아니라 아내를 그리는 그의 모습이 느껴져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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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닉 케이브 (Nick Cave)가 음악을 맡고 있습니다.
2. 존 힐코트 감독의 그의 아들인 Louie Hillcoat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 있습니다.
3. 이제야 마음 놓고 맥카시의 원작 소설을 읽어볼 수 있겠네요 ^^;
4. 엔딩 크래딧과 함께 시작되는 소리들을 귀 기울여 들어보세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Dimension Films에 있습니다.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2007)


영화를 보고 나면 대부분 감상기를 바로 올리는 편이지만, 쉽사리 감상기가 잘 써지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특히나 영화를 통해 엄청난 중압감을 받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감동과 무게를 느꼈을 때 그런 경우가 있는데
내 경우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바벨>을 보고 나서 그러했었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집으로 오면서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멍하게 돌아왔던 것만이 기억난다. DVD가 출시된 다음에 다시 리뷰를 써보려고 했었는데
잘 안되었던 것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신작 <이스턴 프라미스>를 보고 난 다음에도 이와 비슷한 먹먹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냥 한줄 평으로 마무리 할까도 했었지만, 이번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한번 끝까지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의외로 크로넨버그의 예전 작품들 가운데 못 본 것들이 많은데, 그래서 인지 내가 그를 기억하는 영화는
<폭력의 역사>였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여러가지면에서 전작인 <폭력의 역사>와 비교되고 함께 이야기 해야할
영화인데, 동전의 양면을 뒤집듯 정반대에 선듯한 두 캐릭터를 통해, 결국 감독은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현실적으로, 아주 무거운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아래 부터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으신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이 영화의 배경은 런던이다. 런던을 배경으로 러시아 마피아를 중심으로 그들의 생리와 관계, 그리고 이와 얽히게 된
한 여성과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얼핏 보면 이 영화의 스토리는 이미 <대부>를 비롯해 이런 러시아 마피아나
폭력 조직에 얽힌 이야기들을 통해 여러번 반복되었던 익숙한 구조라 할 수 있다. 겉으로는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는
점잖은 노인의 보스가 있고, 그 아래에는 야망만 있고 아직 미숙한 아들이 있으며, 그 아들의 주위에는 아들보다 훨씬
뛰어나 보스에게 오히려 더욱 신인받는 남자가 있고, 이 남자는 이런 폭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인정이 남아
한 여성과 교감을 나누게 되는데 결국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 얼핏 보자면 <이스턴 프라미스>의 이야기는
여기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듯한 통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면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듯이 조금만(아주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이 영화가 단순히 조직간의 암투나 혹은 그 속에서 발생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 혹은 한 남자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를 통해 이미 확실히
보여주었듯이 '폭력'에 관한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동시에 들려주고 있다.




전작 <폭력의 역사>에 주인공이 폭력적인 과거를 숨기고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라면, <이스턴 프라미스>의
니콜라이는 선한 본 모습을 숨기고 폭력적인 겉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캐릭터이다. 이를 비고 모텐슨이라는 같은 배우가
연기해서 더욱 인상깊기도 한데, 이 두 작품은 마치 하나인듯 다른 두 캐릭터를 통해 폭력성에 관해, 그리고 숨겨져있는
폭력적인 면에 대해서 깊게 관찰하고 있다. 극 중 니콜라이는 말끔하게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과 검은 선글라스,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옷차림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냉혈한 겉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조직의 멤버가 되고 더 나아가 보스가 되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갖은 굴욕도 참아낸다.

보통 같았으면 보스의 아들인 '키릴(뱅상 카셀)'이 모욕을 주었을 때 감정적으로 폭발했었겠지만 크로넨버그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보여지는 극적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모욕에 못이겨 하지 말아야 될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자신이 이루려는
바를 위해 갖은 모욕을 참아내고 마음 깊은 속에서 부터 칼을 가는 것이 더 큰 본능적 폭력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사실 이후에 니콜라이의 본래 정체가 밝혀지긴 하지만, 이를 통해 니콜라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정말 본래의 의도였던 스파이 활동을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견딘 것인지, 아니면 이 과정 속에서
가슴 깊은 곳에 존재했던 폭력성에 사로잡혀 스스로 그 세계에 물들어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크게
중요하지 않을런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무거운 대사와 함께 보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니콜라이의 모습에서는
작전 성공에 대한 기쁨도, 조직을 차지한 야망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희망을 다루고 있다고 얘기한 것은 바로 극중 타티아나의 아이의 존재 때문이다.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의
이 아이의 존재는 이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아이의 존재로 인해 이 이야기는 상당히
예수 탄생 신화와 비슷한 이야기 구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크리스마스에서 가져왔다는 이 아이의 이름도,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크리스마스도 이를 뒷받침하는 조건들이다). 일단 제목에서부터 동방박사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으며, 처녀인 안나(나오미 왓츠)가 이 아이를 자신의 딸로서 키우게 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아이를 존재를 둘러쌓고 있는 니콜라이의 존재가 마치 천사와 같은 의미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성인은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자로서 러시아를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들의 수호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주인공의 이름이 '니콜라이'라는 것은 더더욱 이런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안나의 딸로서 계속 살아나간다는 자체가 이 영화의 유일한 희망적 요소이기도 하다.
비록 이 아이의 실제 아버지는 조직의 보스인 세묜이며 어머니는 이미 죽고 없지만, 이 아이를 안나가 보듬고 자신의 딸로서
키워간다는 것은 희망의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아이를 비롯해 안나의 삼촌 등 이 가족을
지켜낸 것은 폭력의 한 중심에 있던 니콜라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생각해볼 거리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깊게 보지 않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가 폭력을 마치 조장하고 예술로서 승화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물론 현실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크로넨버그는 현실에 사람들이 폭력이라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며,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술로서 승화시켜버리기 까지 한 것에 대해 비판의 메시지를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겉으로 보여지는 폭력 뿐 아니라 상대를 위압하거나 억누르는 분위기에서 오는 폭력에도
주위를 기울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조직의 보스로 등장하는
세묜(아민 뮬러-스탈)의 경우 겉으로는 많은 가족을 아우르고 손녀들에게도 매우 친절한 할아버지로 보이지만,
그의 이면에는 단 한번의 주먹질을 하지 않더라도 폭력으로 이뤄낸 지배구조를 통해 조직을 이끌어가는 보스로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근데 크로넨버그는 이를 단순히 이면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좀 더 이 폭력적인 면 자체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건 영화적 기술로 인한 것인데, 영화에서 세묜이 이렇다할 나쁜 행동들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카메라 앵글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 이 존재에 대한 공포감과 위압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세묜에 모습에서 이런 폭력성을 엿볼 수 있었다면 오히려 그의 아들인 키릴에게서는 인간의 나약함과 희망을 느낄 수도 있었다.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아이를 강가에 버리려던 키릴은 끝내 이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는 마치 예수가 게쎄마니 동산에서
아버지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렸을 때처럼, 거둘 수 있다면 거둬달라고 울부짓는다. 하지만 만약 니콜라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미약한 존재는 결국 두려움에 못이겨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이는 이 조직의 비밀을 원치 않게 알게 된
안나의 가족 모습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주정뱅이 삼촌은 그런 놈들은 응징해야 한다며 큰소리를 치지만,
막상 폭력 조직과 대항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 이 같은 자신의 신념을 더 이상 주장하지 만은 못한다.
이렇듯 힘 앞에서, 폭력 앞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신념마저 저버려야 하는 폭력성을 영화는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 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목욕탕 격투씬은 크로넨버그가 폭력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언제부터가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에서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선의를 위한 폭력(여기서 선의란 어디까지나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의 입장에서만 보았을 때 선의)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고 오히려 필요하다고 까지 굳게 믿게 되고, 자신과 뜻이 다른 자에게(쉽게 말해 악당) 행해지는 폭력에 대해서는
미적 아름다움까지 찾게 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턴 프라미스>의 목욕탕 격투씬에서는 다른 액션 영화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폭력 자체의 잔인함이 느껴진다.
분명 주인공이 자신을 위협하는 악당들과 벌이는 격투씬이지만, 어느 한 순간에서도 짜릿함이나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폭력일 뿐이고, 폭력은 곧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불쾌하고 나쁜 것임을 관객들을 쉽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에서의 격투나 죽음의 묘사보다 훨씬 더 잔인한 묘사는 여럿 있지만, 이 영화에서의 폭력이 등장하는
격투씬에서는 다들 눈을 피하고만 싶어진다. 쉽게 말해 더 잔인한 묘사를 했었던 영화들 보다도 이 영화가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은 크로넨버그가 바로 그 폭력성 자체에 가장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폭력성에 길들여진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괴로운 영화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극중에서 벌어지는 인물들 간의 폭력성과 더불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내면에 있는 폭력성 마저 비판하려드는 것이
바로 크로넨버그의 영화인 것이다.




크로넨버그가 이 영화를 통해 폭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장치로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는 의도된 카메라 앵글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조직의 보스인 세묜이 이렇다할 나쁜 짓을 한 것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때도 그에게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배우의 연기와 더불어 카메라 앵글 탓이기도 했다. 이후에 그의 폭력성이 전면에 드러나고
나서는 더욱 노골적인 컷이 등장하는데, 특히 키릴을 내놓으라는 상대 조직의 조건을 보스에게 보고 하는 장면에서의
구도는 세묜을 더더욱 공포스럽게 조명하고 있다. 상하구조가 명확히 드러난 이 구도만으로도 캐릭터의 폭력성이
잘 살아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지하 저장실에서 뒤돌아 술을 마시는 장면 등에서도 구도를 통해 폭력성을(관객이 숨이 막히게끔)
더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워드 쇼어의 음악도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무거운 영화를 한시도 놓치지 않고 긴장감과 중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음악인데, 이렇다할 감정의 과함 없이 영화를 뒤에서 잘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겠다.




니콜라이 역할로 등장한 비고 모텐슨을 보면서, 정말 저 사람이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과 같은 사람인가 하고 생각할 만큼
그의 연기는 매우 훌륭했다. 특히 전작 <폭력의 역사>에서 정반대의 조건을 갖고 있던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가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보여준 연기는 말로다 표현하기 어려울 듯 하다. 러시아 식 억양의 영어 연기도 완벽했고,
동작 하나하나에서도 아우라가 느껴지는(눈빛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연기는, 그를 크로넨버그의 페르소나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하겠다.
키릴 역할로 등장한 뱅상 카셀은 오랜만에 좋은 영화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해 우선 반가웠는데, 니콜라이 역의
비고 모텐슨 만큼이나 키릴 역에 다른 배우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컴플렉스 많고 나약한 키릴이라는 캐릭터를 잘
소화한듯 싶다. 나오미 왓츠의 경우 생각보다 영화 속에서 역량을 발휘할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그녀 특유의 강인한 매력이 '안나'라는 캐릭터와도 잘 어울렸다고 생각된다.

세묜 역할의 아민 뮬러-스탈과 스테판 역할의 저지 스콜리모우스키, 그리고 헬렌 역의 시네드 쿠삭의 연기도 매우 훌륭했다.
특히 아민 뮬러-스탈이 연기한 세묜 캐릭터는 니콜라이 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연륜가 깊이가 묻어나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속 중압감을 피부로 느끼게 하고 있다. 시네드 쿠삭의 경우
<브이 포 벤데타>를 통해 낯이 익은 배우였는데, 어쩌면 영화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중간자적 입장에 있는 캐릭터를
깊은 눈빛으로 잘 전달해 내고 있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시종일관 무겁고 음울하게 진행되는 영화다. 특히나 영화가 끝나고 화면이 검게 변하면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먹먹해져서 한참을 앉아있어야 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드물게 리뷰에 영화 제목 외에 부제목을 달지 못했던
영화이기도 했고.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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