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울트라 (American Ultra, 2015)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스파이 영화



흔히 말하는 킬링 타임용 영화로 가장 사랑 받는 장르는 이른바 요원물 이라고 할 수 있는 스파이 영화일 것이다. CIA, IMF, MI6 등 국가의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특수한 능력의 요원들이 펼치는 불가능한 미션들은 2시간 남짓 한 짧은 시간 내에 기승전결을 펼쳐내기 가장 좋은 재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니마 누리자데가 연출한 '아메리칸 울트라 (American Ultra, 2015)' 역시 일종의 요원물이다. 기본 설정이 가장 유사한 작품을 꼽으라면 맷 데이먼 주연의 제이슨 본 시리즈를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어떤 연유로 인해 자신이 비밀 작전을 통한 요원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는 주인공 마이크 (제시 아이젠버그)가 그 사실을 어떤 사건을 통해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본 시리즈와 다른 점이라면 '아메리칸 울트라'는 훨씬 더 가볍고, 개인적이며, 현실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사실 이미 스파이 코미디 액션 물로 홍보되었던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즐겁게 러닝타임을 보낼 생각만으로 관람하게 되었는데, 조금은 의외로 가볍지 만은 않은 스파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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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자신이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이전의 이야기가 '아메리칸 울트라'에서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연인 관계인 마이크와 피비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로맨스는 영화의 특성상 큰 비중을 갖고 묘사되지는 않지만,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을 만큼 핵심은 계속 놓치지 않고 있다. 즉, 그냥 쿨하기만한 스파이 액션 영화인 줄로 알았던 '아메리칸 울트라'를 조금 특별하게 하는 첫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두 주인공의 애틋한 로맨스는 뻔한 듯 하지만 의외의 감동도 불러 일으키며 아주 명확한 기승전결을 그려낸다.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서 주인공의 로맨스는 어느 정도 전형화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데, 마이크와 피비의 로맨스는 조금은 더 일반적 로맨스 영화에 등장할 법한 구성으로 이뤄져 있어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의외의 감동 포인트마저 불러 일으킨다.


그냥 쿨하기만한 스파이 액션 영화가 아닌 조금 특별한 두 번째 이유는, 이 '요원'이라는 캐릭터를 아주 가볍게만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통 쿨함이 강조된 액션 코미디 장르에서는 쉽게 정형화되고 단순화 되는 경향이 많은데, '아메리칸 울트라'는 그런 가운데서도 아주 심각한 스파이 영화에서 주로 나올 법한 갈등 요소를 녹여내는 데에도 비중을 두고 있다. 가볍게 이야기하자면 거대한 국가를 통해 벌어진 인간에 대한 실험과 그 실험을 통해 인간성을 잃게 된 요원들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은, 이러한 영화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조금은 '어라?'하고 놀라게 되는 부분이었다. 즉, 이런 장르 영화의 경우 주인공의 특수 능력을 화려하게 그리는 것에 주목하지만, 이 영화는 화려함이 최우선이라기 보다는 고통스러움도 동반하고자 하는 것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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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찌 되었든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을 꼽으라면 제시 아이젠버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를 꼽을 수 있겠다. 두 배우 모두 캐릭터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싱크로율을 보여주고 있는데, 더 나아가 특히 제시 아이젠버그의 경우 그가 출연했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연기한 '마이크' 역시 마이크 라기 보다는 제시 아이젠버그를 만나볼 수 있어 더 만족스러운 경우였다. 배우들 가운데는 작품마다 전혀 다른 인물로 태어나는 메소드 연기를 보여주는 이들도 있지만, 정반대로 무슨 영화에 출연하든 배우가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제시 아이젠버그도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운 배우인 듯 하다. 이러한 경우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텐데 (비슷한 배우로는 키아누 리브스가 있다) 글쎄 아직까지 제시 아이젠버그는 그의 특별한 연기 톤과 발성, 목소리 등의 매력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계속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는 것에 거부 반응은 없는 편이다. 이 작품 역시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더 뻔하지 않은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와 아주 딱 맞는 캐릭터처럼 느껴졌는데 제시 아이젠버그와의 호흡도 좋아서 정말로 오래된 커플을 보는 듯 했다. 참고로 '아메리칸 울트라'는 속편의 가능성도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데, 속편은 확실히 전작에 비해 더 뻔한 영화가 될 확률이 높지만 이 두 배우의 호흡이라면 한 번쯤은 더 기대해 볼 만 하겠다.



1. 아무래도 한국사람으로서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쩔 수 없이 너구리 일 것 같네요 ㅋ 미국에서는 그래도 슾이라고 수저로 떠먹는 것이 인상적이더군요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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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Kingsman : The Secret Service, 2014)

매튜 본의 온고지신 스파이 영화



매튜 본이 콜린 퍼스와 액션 영화를 찍었다고해서 기대는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처음엔 그냥 액션 영화인줄로만 알았기 때문인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정통 스파이물의 구조 안에 있는 영화이자 구체적으로는 007 시리즈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오마주 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스파이 영화치고 007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가 없는 작품이 드물고, 이 작품의 전체 방식 역시 스파이물과 매튜 본이 잘 하는 액션을 더 가미한 작품 정도로 볼 수 있겠지만, '킹스맨'을 단순히 이 정도로 표현하기엔 턱 없이 부족할 듯 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난 매튜 본의 전작 '킥 애스'도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도 참 좋아하지만, 이들 작품 가운데 이제부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킹스맨'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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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본의 '킹스맨'은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전형적인 스파이 영화의 구조 안에 있지만 그 안에서 최신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오래 된 007 시리지의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비틀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007 시리즈의 오랜 팬들에게는 향수를, 스파이 하면 제이슨 본을 더 먼저 떠올리는 요즘 관객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라는 얘기다 (극 중 JB라는 이니셜을 두고 제임스 본드와 제이슨 본, 잭 바우어까지 언급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모두 인정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캐릭터의 구성으로 부터 살펴볼 수 있다. 콜린 퍼스가 연기한 해리는 전통적인 007 영화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고풍스럽고 세련되었으며 수트가 누구보다 잘 어울려 근사하고 무엇보다 매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캐릭터다. 이에 반해 태런 에거튼이 연기한 에거시는 힙합 스타일을 즐겨 입고 출신은 보잘 것 없으며, 삶은 퍽퍽하고 비행 청소년에 가깝지만 야마카시를 연상시킬 만한 신체적인 우수함을 타고 난 캐릭터다. 이 둘 사이의 공통점 아니 전형적인 면에서 벗어나는 장점들이 있다면, 해리는 흡사 제이슨 본과 같은 완벽한 격투 능력을 지녔으며, 에거시는 결과적으로 해리를 통해 매너를 습득하게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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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매튜 본이 스파이 영화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점은 한 쪽에 치우쳐 있지 않다. 007 시리즈에 대한 존경과 명예는 인정하지만 다른 시대에 맞춰 바뀌어야만 할 것들에 대한 한계도 분명 인지하고 있으며 (이는 극 중 마이클 케인이 연기한 캐릭터의 한계로 빗대어 볼 수 있겠다), 반대로 최근의 단순한 스파이 영화들에는 없는 품격과 매너에 대해서도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아크로바틱한 액션의 가미에 대해서는 적극 반영을 주장하고 있다. 사자성어로 이야기하자면 온고지신 (溫故之新)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관객으로 하여금 단순히 논리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 모두를 간절히 원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튜 본의 이 방식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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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에는 이 외에도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만한 요소들이나 대중들에 대한 풍자 등으로 볼 수 있는 설정 등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무겁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지나가도 상관없고 안다한 들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리듬감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심각한 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지 만은 않은, 말은 쉽지만 실제 구현하기는 어려운 중도를 잘 표현해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사실 '킹스맨'이 매력적인 영화라는 인상을 주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콜린 퍼스라는 배우를 활용한 방법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존에도 멋지게 수트를 차려입은 역할은 여러 번 했었지만, 이처럼 영화를 보고 나서 콜린 퍼스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은 작품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연기력의 측면이 아니라 분명 그 '이미지'에 관한 것일 터. 수트를 평소 즐겨 입지 않은 남자라 하더라도 이 영화를 보면 당장 양복점으로 달려가 맞춤 양복 한 벌 맞추고 싶은 욕망이 들 정도로, 완벽한 핏의 수트 차림으로 (여기엔 안경과 우산을 비롯한 소품들도 포함된다) 벌이는 액션과 액션이 아닌 장면들이 주는 품격은, 왜 이 영화의 주인공이 콜린 퍼스여야 했는 지를 설득 없이 이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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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은 무엇보다 최근 본 영화들 가운데서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장면과 이미지가 주는 원초적인 쾌감과 일부 장면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의외의 쾌감과 속시원함이 금새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1. 콜린 퍼스와 마크 스트롱은 또 다른 스파이 영화였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도 아주 각별한(?) 사이였는데, 이렇게 또 다른 스파이 영화에 출연한 것만으로도 흥미롭더군요 ㅎ


2. 여기 또 다른 흥미로운 커플이 있습니다. 루크 스카이워커와 마스터 윈두 ㅋ


3. 시리즈 물이 가능한 구조에요. 후속편이 꼭 나왔으면 좋겠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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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The Berlin File, 2013)

류승완의 본능적 느와르 영화



류승완 감독의 신작 '베를린'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팬임을 밝히고 시작하자면, 본래도 박찬욱, 봉준호 감독과 함께 좋아하는 감독이었지만 몇 년 전 '다찌마와 리 : 극장판'을 통해 직접 인터뷰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더욱 친근하고 응원하고픈 감독이 된 것이 사실이다. 류승완의 전작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좀 더 대중적으로 큰 인기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던 '부당거래'였다. 그런 그가 '부당거래' 이후 더 화려한 캐스팅과 제작비로 해외 로케이션 스파이 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 부터, 과연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무척이나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기대와 동시에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작은 영화에서 류승완 특유의 색깔을 보여주었던 것과는 달리, 대형 프로젝트의 규모 탓에 자신의 색깔을 잃고 흔한 대중적 포인트에 휩쓸려 성공은 거두더라도 팬으로서 아쉬움은 남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류승완의 '베를린'은 다양한 장르 영화의 클리셰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분명히 류승완이 뿌리로 삼고 있는 성룡 영화와 쇼브라더스의 무협 영화와 골든하베스트의 액션 영화들, 그리고 홍콩 느와르 영화들의 정서를 고스란히 만나볼 수 있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본 시리즈나 007, 더 나아가 톰 롭 스미스의 소설 '차일드 44'에 관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가급적 피하였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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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은 '베를린'과 관련된 여러 번의 인터뷰를 통해 그 모티브를 '스파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것에서 시작했다'라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결과물에 있어서는 방향성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방향성이 달라졌다'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류승완 감독이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장르와 정서를 스파이 영화인 '베를린'에 무엇보다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얘기다. 아쉬운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앞선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작 가장 디테일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져야 할 '스파이'의 이야기가 조금은 힘을 잃은 것 같았다. 베를린이라는 멋진 로케이션과 북한 정보원과 남한 정보원, 여기에 CIA에 모사드와 아랍 단체까지 엮여 있는 구조는 스파이 영화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이들이 만드는 그 비밀스러운 일의 과정과 정보를 다루고 처리하는 정보원 특유의 스킬을 관객에게 100% 흡입시키기에는, 무언가 이미지와 정서에 기대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 시리즈가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서 수시로 케이블에서 재방송을 해주는데도 그 때마다 잠깐만 봐야지 했다가 몰입해서 한참을 보게 되는 이유는, 결과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 과정의 세밀함이 워낙 흥미로워서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마저 의심하게 될 정도의 재미와 긴장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를린'에는 바로 이러한 점이 조금은 아쉬웠다. 특히 스파이 영화인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라면 바로 '배신'을 들 수 있을 텐데, 이 배신이 더 충격적이고 재미있게 받아들여지려면 그 정황이나 배경이 더 분명하게 설명되어야 했으나, 초중반의 흐름은 이와 같은 스파이 영화의 디테일한 재미를 주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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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디테일한 측면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 탓에 정서적인 측면은 오히려 더 부각되고 깊은 인상을 주었다. 스파이 영화이 대표격인 '007'시리즈의 최근 작 '스카이폴'과 존 르 카레의 소설에서 느껴졌던 쓸쓸하고 차가운 스파이 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비교적 성공했으며, 글의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류승완 특유의 액션이 강조되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평소 동경하고 있던 홍콩 영화들의 정서가 은연 중에 함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액션 스타일 등을 들어 '제이슨 본'을 연상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가깝다면 '스카이폴'이 더 가깝다고 여겨졌으며 근본적으로는 오우삼의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 같은 작품에 더 큰 정서적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직접 가르친 동생 같은 존재에게 배신 당한 것이나, 가장 멀리 있다고 느껴진 상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나, 하정우가 연기한 표종성이라는 캐릭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홍콩 느와르에 열광했고 류승완의 팬인 내가 보기엔 영락없이 동일한 정서가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즉, 오우삼의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이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지와 대칭점에 선 두 인물의 공감대를 보여주어 깊은 인상을 남긴 것처럼, 단순히 버림 받은 스파이의 이야기를 다룬 전문적인 스파이 영화가 아닌 이를 배경과 도구로 하는 느와르적 정서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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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 흥미로워지는 또 다른 지점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 남과 북의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사실 '베를린'은 기획 초기에 남한 캐릭터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을 정도로, 남북의 이념이 주제가 되거나 부각되는 영화는 전혀 아닌데,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바로 이 남북이라는 설정이 특별한 감정을 불러왔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과 예상하지 못했다는 이유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가 전향이나 남북의 주인공들이 등장해도 전혀 이념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딱 한 마디의 대사에서 다른 스파이 영화에는 없는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련정희 (전지현)'를 발견한 '정신수 (한석규)'는 '같은 편이야'라는 말을 한 뒤 점점 숨을 잃어가는 련정희에게 이렇게 묻는다. '고향이 어디에요?'


개인적으로 이 한 마디는 영화가 지금까지 달려올 때까지 단 한 번도 인식하지 못했던 두 주인공의 국적을 한 번에 인식하는 순간이었으며, 더 나아가 분단된 국가라는 새삼스러운 사실 역시 떠올리게 된 의외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영어를 범용으로 사용하는 서양의 스파이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제3의 언어를 공유하는 관계라는 점을 넘어서서, 고향을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는 서로 다른 주인공이라는 점은, 적어도 대한민국을 사는 관객으로서는 이 장면에 흐르는 묘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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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액션 연출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정두홍 무술감독과 함께 만든 기술적인 측면은 재쳐두더라도 연출 측면에서 다른 스파이, 범죄 영화와는 다른 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후반부 표종성과 동명수 (류승범)의 한계까지 몰아 붙이는 액션 시퀀스를 보면서, 최고의 기술자들이 한계에 달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임팩트도 물론 느낄 수 있었지만 그 보다는 정서적으로 진이 빠지도록 만든 연출이 더 인상적이었다. 류승완 영화의 액션 클라이맥스 들은 대부분 이렇게 주인공을 더 이상 소모할 체력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소모시켜서 관객 역시 피로함이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베를린'의 클래이맥스 역시 바로 이 점이 테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장철 영화에서 느꼈던 비장함이나 처절함도 엿볼 수 있었는데, 이미 숨을 거둔 련정희의 시체를 표종성이 들쳐 업고 나오는 장면만 봐도 다른 영화였다면 더 간결하게 갈대 숲 안의 장면으로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으나, 류승완은 이 정서를 더 연장하여 몇 번이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갈대 숲을 빠져나와 슬픔과 아픔에 녹초가 되어버리는 표종성을 계속 응시한다. 이런 시퀀스에서 좀 더 류승완 만의 정서를 분명히 전달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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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최근 이 영화를 둘러싸고 논란이 되고 있는 표절 혹은 클리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실 관람하기 전 이미 '제이슨 본' 시리즈의 표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간 상태였기 때문에 걱정을 하기도 했었는데, 결론적으로 이 부분은 클리셰로 볼 수 있는 부분이라 크게 문제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노래에서 코드 진행이 같다는 사실 만으로 표절이라고 부를 수는 없듯이, 스파이 장르와 특히 최정예 요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액션 영화에서 클리셰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상당 부분 많기는 했지만 이것의 유사점을 들어 표절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제이슨 본' 시리즈 보다는 '스카이폴'이 연상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실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이후 논란이 된 톰 롭 스미스의 소설 '차일드 44'에 대한 내용을 읽고 나서는 쉽게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베를린'과 유사점이 의심되는 '차일드 44'의 소설 부분 부분을 확인해본 결과 이는 단순히 클리셰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디테일한 설정과 장면의 유사점이 발견되었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변함이 없으나,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들의 유사점 만으로도 소설 '차일드 44'와의 논란은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누구보다 류승완 감독의 팬이기에 이 부분은 좀 더 명확한 이야기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1. 표절 논란으로 발전적이지 않은 추가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2.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감독님과 인터뷰해보고 싶었는데, 이제 안되려나요? 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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