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
한계와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찬사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2008년작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라는 배우 때문에 일단 주목하게 된 영화였다. 젊은 시절 그 누구보다 화려한 헐리웃의 섹시가이로 유명세를 떨치던 미키 루크는 마약을 비롯해 각종 안좋은 일들로 영화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었으나 몇해 전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씬시티>를 통해 다시금 메인 스트림에 복귀하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와 캐릭터로 또 다른 미키 루크를 선보이며 영화 팬들 곁을 다시 찾아왔었다.  그 이후 미키 루크의 새로운 행보를 주목하던 중 처음으로 접하게 된 영화가 바로 이 영화 <더 레슬러>였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 가운데 <파이>와 <레퀴엠>만을 보았었는데(<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dvd가 있음에도 아직 보질 못했는데, <더 레슬러>를 계기로 이번에 한번 봐야겠군요), 영화를 볼 때는 전작들과의 접점을 단번에 알아채기 어려웠으나, 리뷰를 쓰려고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이번 작품 <더 레슬러>역시, '레슬링'이라는 소재는 단지 거들 뿐, 현실과 이상의 갈등 속에서 한계에 부딪힌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주인공인 랜디 더 램(미키 루크)은 젊은 시절 프로레슬러로 큰 인기와 전성기를 누렸던 스타였으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보청기를 착용해야만 하고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일해야만 하는 노년에 가까운 남성일 뿐이다. 그런데 랜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점은 바로 그가 아직도 '프로레슬러'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스포츠를 주제로 신파성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성공스토리 영화들과의 분명한 차이점이다. 실버스타 스텔론의 <록키 발보아>같은 경우 (참고로 미키 루크에게 캐스팅 제의가 가기 전에 스텔론에게도 제의가 있었으나 바로 <록키 발보아>때문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전성기를 보냈던 주인공이 세월이 흐른 뒤 다시금 전성기 때처럼 열정을 가지고 한계에 도전한다는 것으로 감동을 그려내고 있지만, <더 레슬러>의 경우는 전성기를 보낸 주인공이 한참 떠나있던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계속 몸을 사용해야 하는 프로레슬러로서 활동을 해왔다는 점이다. 비록 엄청난 주목을 받던 젊은 시절에 비해 지금은 작은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오고 있으며 쉬지 않고 해왔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 랜디가 겪게 되는 갈등과 고통은 무엇일까. 다른 성공스토리가 '그래, 내가 전성기는 아니지만 아직도 할 수 있어!' 라는 식의 도전과 성공으 이야기였다면, <더 레슬러>의 구조는 '아,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의 고민과 고통에서 시작된다. 격한 프로레슬링을 하기 위해 수많은 약물과 편법등을 동원해서 커리어를 이어오던 랜디에게 어느날 심장에 무리를 주는 쇼크로 쓰러지게 되면서, 랜디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다. 그 동안 프로레슬러로서 소홀했던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에게도 좀 더 마음을 열기로 하고, 자주 가던 스트립바의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에게도 오랫동안 숨겨왔던 손님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심장에 이상이 왔다는 걸 알았을 때 좀 더 신파같은 줄거리였다면 단번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레슬링을 했었을테지만, <더 레슬러>의 랜디는 그 동안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위해 큰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주저없이 커리어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레슬링을 떠나서 그가 바로 피부로 겪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이다. 레슬링 비지니스 속에서만 살아온 랜디가 이를 관뒀을 때 겪게 되는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다. 그 동안 돌보지 못했던 하나 뿐인 딸은 자신을 아버지는 커녕 남 대하듯 쫓아내는 한편, 빈 트레일러 집에 덩그러니 누워서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며, 레슬링을 하지 않으면 생계에 직접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앞치마와 위생모를 머리에 쓰고 식품 코너에서 샐러드를 팔기도 해야한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불러온 동네 꼬마와 구형 닌텐도로 게임을 하는 장면에서, 랜디는 자신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레슬링 게임에 신나하는 것에 비해 아이는 최첨단 FPS 게임(콜 오브 듀티 4)을 이야기하는 것은, 랜디가 현실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그 거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랜디가 이 한계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랜디는 자신을 매몰차게 내치는 딸 스테파니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캐시디에게 살짝 고백을 했다가 거절 아닌 거절을 당한 뒤에도 (생각보다는) 약한 불만의 표현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애초부터 하고 싶지 않았을 식품 코너 일도 긍정적이고 즐겁게 하려는 모습이 오히려 안쓰럽기까지 했다. 랜디가 맞닥 들이게 되는 현실의 묘사도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랐다.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뿌리치는 스테파니의 입장은 사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부분이다. 아버지가 필요할 때는 없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병을 얻고 나서야 나타나서 호의를 배푸는 아버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 당연하고, 캐시디 역시 그간 아무리 자주 오가며 정을 쌓았다 하더라도 막상 고백까지 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일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기에 랜디에게 다가오는 현실이 그리 가혹한 것만은(자초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랜디가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은 너무 순응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닥쳐올 현실을 모두 다 세상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랜디의 모습은 애처로운 동시에 너무도 현실적이다. 사실 이런 현실이 닥쳤을 때 고통을 조금 호소하다가 바로 불만과 용기를 동시에 뿜어내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너무도 영화적이었던 것에 반해, 랜디의 모습은 너무 현실적이라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딸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기 위해 노력하다가 자신의 진심을 얘기하며 그 거친 피부 아래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눈물 이상의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장면이기도 했다 (랜디가 현실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유일한 부분은 '랜디'라는 레슬러로서의 이름으로 반드시 불리길 원하는 것이 전부인것 같다).




랜디가 처하는 현실의 극적인 대비 측면을 위해 영화는 프로 레슬링의 세계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흔히 '쇼(Show)'로만 알고 있는 프로 레슬링을 위해 얼마나 많은 '현실'의 사람들이 많은 준비와 노력을 들이는지를 구차할 정도로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보통 같으면 프로 레슬링의 링 뒷면에서는 서로 저렇게 미리 합을 짜고 스토리를 준비하는구나 하고 알 정도였다면 초반 한 두번 연관 장면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쳤을텐데, <더 레슬러>에서는 이 부분은 랜디가 링에 오를 때마다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미리 칼날을 숨겨 이마에 커트를 내고 사용할 무기들에 관해 미리 준비를 하는 기술적인 측면 뿐 아니라, 이렇게 치열한 경기를 치르고 링을 내려와 쇼 뒷면에 현실로 돌아왔을 때 레슬러들의 세계를 가까운 곳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이다. 보통 일반적 영화같았다면 퇴물쯤 되는 랜디를 젊은 레슬러들이 그야말로 퇴물 취급하며 왕따 비슷하게 몰아갔을테지만, 이것은 너무 극적인 요소만을 강조한 전개일뿐, 현실성과 메시지를 중시하는 <더 레슬러>에서 젊은 레슬러들에게 랜디의 존재는 존경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링을 내려온 랜디에게 서로 등을 두드리며 나누는  '굉장했다' '죽여줬다' '영광이다' 등의 말들은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말들인 것이다.

가장 쇼에 가까운 프로레슬러에게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또 하나의 진부한 설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더 레슬러>는 이런 논란에서는 거뜬히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 현실감을 불어넣은 또 하나의 장치는 바로 카메라 워크라 하겠는데,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시종일관 랜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카메라 워킹과 굉장히 인물에 가깝게 밀착되어 있는 카메라와의 거리는  이 영화의 인물들에 좀 더 현실적인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스트립바에서 댄서로 일하고 있는 캐시디는 이 영화에서 무시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단순히 랜디와의 로맨스 적인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랜디와 비슷하게 한계에 부딪혀 갈팡질팡하는 캐릭터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녀 역시 젊은 댄서들에 밀려서 손님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자신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보인 랜디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랜디에 대한 사랑의 감정만이라기 보다는 랜디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나서 용기를 얻고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 전이된 경우라고 봐도 좋을 듯 하다. 그래서 캐시디는 랜디가 스트립바에 와서 돈을 주고 나체의 자신을 보는 것이 못 마땅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목숨을 걸고 레슬링을 다시 하려고 하는 랜디가 안쓰러운 것이다. 

랜디를 이러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링 위 임을 깨닫고 20년 만에 열리는 기념 경기에 보수도 없이 참가하기로 한다. 링 위의 공간은 철저한 쇼의 무대이자 다른 한편으론 가장 치열한 랜디의 현실이기도 하다. 마지막 경기에서 이미 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이뤘고, 상대 레슬러도 랜디의 상태가 걱정되어 이쯤에서 끝내자고 하지만 랜디는 결국 더 완벽한 쇼를 위해 마지막 기술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링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영화의 엔딩은 마치 한계와 맞서싸우다가 산화해 버린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하지만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듯한 느낌은 분명 아니었다. 랜디는 자신의 인생과 현실, 링을 돌아보며 한계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인채, 자신 만의 방법으로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카메라 워크도 그렇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미키 루크라는 점에서 이야기에 깊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속 랜디와 실제 미키 루크의 삶은 여러 모로 유사점이 많다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속 랜디처럼 자신의 한계와 과오를 인정하고 다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돌아간(돌아온) 미키 루크의 열연은 그래서 더욱 눈물겹다. 사실 개인적으로 한창 때 미키 루크가 출연한 영화들을 그리 많이 본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영화 속 랜디를 연기한 미키 루크의 모습에서는 진정과 인생이 느껴졌다. 미키 루크 본인은 극 중 랜디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 비슷해 처음에는 출연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랜디처럼 미키 루크도 더 이상 이 같은 점을 외면하려고만 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 더 좋은 결과와 그의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미키 루크의 오랜 팬이 <더 레슬러>를 보게 된다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를 듯 하다. 


1. 평소 WWE를 그래도 챙겨보는 입장에서 레슬링 관련 영화라 혹시나 관련 선수들이 잠시라도 스쳐가지 않을까 해서 눈에 불을 켜고 봤는데, 적어도 WWE소속 선수들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더군요.

2. 극중 래니의 딸 이름이 스테파니 라는 점도 살짝 흥미로웠습니다. 잘 알다시피 WWE의 회장 격인 빈스 맥맨의 딸 역시 이름이 스테파니이기 때문이죠 ㅎ

3. 캐시디 역할을 맡은 마리사 토메이의 경우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어 다른 영화에서 본 적이 있나보다 했는데,
그렇다기보다는 여러 여배우들의 얼굴이 겹쳐보인 것 때문인듯 하네요. 그녀는 이미 조 페시와 연기한 <나의 사촌 비니>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적도 있습니다.

4. 스테파니 역할을 맡은 에반 레이첼 우드는 처음에는 몰라보겠더군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때와는 머리 색도 틀리고 화장도 진하게 한터라 약 10초간 못알아볼 뻔 했네요 ^^;

5. 극 중 랜디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등은 숀 마이클스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6. 엔딩에 흐르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는 이 영화와 그리고 무엇보다 미키 루크와 너무도 잘 어울리더군요.




7. 제 리뷰의 제목인 '한계와 가치있는 것들의 대한 찬사'는 좀 맞는 거 같지 않아서 '한계 그리고' 뭐 이런식으로 수정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한계'라는 것 역시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것 같네요. 극중 랜디와 같다면 한계를 접했다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일이고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니까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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