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August, 1998)
촬영감독 유영길 특별전 - 허진호 감독 씨네토크


제가 <8월의 크리스마스>란 영화를 본 지도 거의 10년이 다 된 것 같네요. 1998년에 개봉을 한 작품이었지만
당시에는 극장에서 보질 못했었고, 비디오로 출시된 다음에야 감상할 수 있었던 기억입니다. 당시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기 때문에 주인아저씨에게 비교적 싼값에 VHS 테입을 샀던 기억도 나네요.
그러던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의 시간표를 확인하던 중 '유영길 촬영감독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했고,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인지한 동시에,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본 한국영화 중 하나인 <8월의 크리스마스>의 상영과
허진호 감독님의 씨네토크가 있다는 알게 되었고, 주저 할 것 없이 바로 극장으로, 극장으로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스크린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DVD가 출시되었을 때 다시 한번 보았던 기억이 얼핏 나기도 하지만,
제대로 영화를 본 것은 사실상 비디오로 접한 뒤 처음이라, 러닝타임내내 심하게 몰두한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도 <8월의 크리스마스>는 상당히 슬픈 영화였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새로운 인연이 등장하고, 이 남자를 둘러싼 삶의 풍광을 담담히 그려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영화였죠.

그런데 거의 10년만에 이 영화를 스크린을 통해 다시 보니 내가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한 슬픔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이유를 들자면 이 영화를 처음 비디오로 접했을 때에는 없었던 개인적인 아픔이
생겼기 때문에 더 깊이 공감하며 마음이 동요한 것도 이유겠지만, 좋은 영화들이 그렇듯이 언제 어느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영화가 다르게, 혹은 감동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극중 한석규가 멍하니 차창을 바라보는 장면이라던가, 마루에 앉아 발톱을 깍는 장면, 천둥이 치는 밤 장면 등 장면 하나 하나가
깊이있게 다가오더라구요. 버스를 타고 오는 중에 열린 차창으로 바람을 맞으며 창밖을 보는데, 버스내 방송에서는 김창환의
노래가 흐릅니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에요' 이런 장면은 감정을
쥐어짜거나 극적인 장면이라고는 볼 수 없는데, 절제함으로서 깊은 곳에서 슬픔이 우러나오는 장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는 했었지만, 이번에 느꼈던 이런 깊이는 아니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예전에는 한석규와 심은하의 관계에 대해 더욱 집중하며 보았다면, 이번에 다시 볼 때는 한석규와 그의 아버지로
출연하는 신구씨와의 장면이 더욱 깊이 다가오더군요(영화 상영뒤 갖은 씨네토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유영길 촬영감독
역시 이 영화 촬영 몇년 전에 아드님을 먼저 떠나보내신 슬픔이 있어, 이와 같은 이야기가 등장하는 영화를 촬영하실때
가슴이 많이 아프시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신이 떠나면 홀로 남을 아버지를 위해 매번 자신이 해오던
비디오 작동법을 아버지께 가르치는 장면에서 아버지가 잘 작동법을 익히시지 못하자 짜증을 내며 방문을 나서는 것은,
그냥 짜증이 아니라 자신이 없으면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가실까 하는 걱정과 죽음에 대한 또 한번의 인식 때문에
자신에게 화와 슬픔이 동시에 드는 장면이죠. 이런 장면이 얼마나 섬세하게 촬영되었는지 이번 기회를 통해 세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꼭 유영길 촬영감독님의 특별전이라 카메라의 위치나 분위기를 특별히 보려하지 않아도, 절로 장면 장면 담긴 따듯함이
엿보였습니다. 이 영화는 시한부 인생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전혀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여기에는
물론 통속적이지 않은 결말부분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감정을 과잉표현하지 않고 계속 절제하고 비워나가는 방식으로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거의 움직임이
없다시피한 장면이 3분 가까이 진행됨에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던 절제된 카메라의 연출이라고 생각되구요.

극중 한석규의 심리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올 때 마다 속으로 얼마나 울컥했었는지 모르겠네요.
쉽게 말해, 눈물 나는 슬픈 영화라는 사실은 이미 봐서 잘 알고 있었음에도, 이렇게까지 슬픈 영화일 줄은 몰랐다고 할까요.
2008년에 다시 보게 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참으로 슬픈 영화더군요.


영화가 끝나고 허진호 감독님과 함께하는 씨네토크 시간이 있었습니다.
일단 개봉된지 10년이 된 작품이라 감독님께서도 기억을 더듬으며 친절히 답해주셨고, 이 영화의 오랜 팬들이 모인
자리답게 그 어느 자리 못지 않은 애정 가득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터져나왔습니다(거의 2시간 가까이 진행된 느낌이었는데
끝날 때까지도 계속 손을 드는 분위기였고, 손을 들었는데 질문을 결국 못하신 분들이 있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영화를 깊이 보게되면 영화 속에 소품이나 각종 장면들에 대해 어떤 의미나 상징을 부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8월의 크리스마스>같은 경우 허진호 감독님은 이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오히려 피하려고 했다고 하시더군요.
곧 의도 되지는 않았던 의미들이었고, 가능하면 이런 것들을 빼려고 하는 작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씨네토크 중에 가장 재미있던 것은 군산에서 촬영할 때 한석규씨가 탕수육을 좋아해 자주 먹곤 했는데, 영화 말미로 갈수록
얼굴에 살이쪄서, 그러니까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얼굴에 살이 올라 클로즈업 촬영시에 곤혹을 겪었다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이 외에도 유영길 촬영감독님과의 추억, 그리고 <그 섬에 가고 싶다>에 참여한 많은 감독님들의 이야기(이 자리에서 이 영화에
참여한-지금은 다 이름있는 감독분들이 이 영화에 다 스텝으로 참여하고 있더라구요- 스텝들의 이름을 들으니 꼭 한번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그리고 허진호 영화라 불리는 그의 네 작품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짧게 코멘트 하자면 생각보다 의도되지 않은 것들이 많은 것이 허진호 감독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초등학생 일기에나 등장할 법한 표현이지만,

참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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