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Love Letter, 1995)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회상


내게 있어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기억하는 것 만큼 아련한 작품은 사실 아니었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사실 그다지 영화를 많이 보던 시절이 아니었던 것도 있고, 그냥 단편적인 기억에 '오갱끼데스까~ 와따시와 갱끼데스~'로만 기억되는 러브 스토리로만 기억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더불어 이와이 슌지 보다는 이누도 잇신에 감성에 더 가까운 편이었고 그의 작품들 가운데도 '러브레터' 보다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더 좋아하는 부류였다. 이렇듯 개인적으로는 너무 일반적이리만큼 유명해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러브레터'가 며칠, 아니 몇 달 전부터 몹시 아련해져오기 시작했다. 특히 너무나도 익숙한 사운드트랙인 'A Winter Story'의 피아노 선율이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맴돌았고, 이런 앓이는 결국 아주 예전에 구입하였지만 거의 꺼내어 보지 않았던 DVD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꺼내어 보도록 이끌었다.





그렇게 거의 10년 만에 다시 보게 된 '러브레터'는 확실히 달랐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너무나도 유명해서 굳이 꺼내어 듣게 되지 않는 뮤지션의 최고 히트곡이 어느 날 갑자기 너무도 와닿으면서 '그래, 역시 명곡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왜 '러브레터'인가 라는 것에 대해 새삼 아니 비로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예전에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조금 특별한 구조로 풀어놓은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다시 보게 된 '러브레터'는 그것 보다는 결국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이와이 슌지가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묘사는 너무 직접적이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인데, 예전에는 이 비유가 그냥 겉도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이번에는 그 비유가 너무 직접적으로 느껴질 만큼, 체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극 중 후지이 이츠키는 오해로 인한 와타나베 히로코의 편지를 받고서야 자신의 시간 속에 동명이인이었던 남자아이 후지이 이츠키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고, 그와 연관된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놓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소녀 시절의 기억들도 떠올리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또 한 명의 후지이 이츠키와 공유한 시간들을 기억해 내게 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어린 시절 자신과도 같은 소녀들이 전해주는 도서대출카드에 숨겨진 진실은 이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영화의 메시지에 확실한 마무리를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만약 이 마지막이 없었더라도 이미 후지이 이츠키가 와타나베 히로코를 통해 겪게 되는 회상의 일들은, 그것으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얘기지만 예전에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는 '오갱끼데스까~ 와따시와 갱끼데쓰~'의 정서를 100%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니 못했던 것을 이번에 보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장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서는 수많은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들이 모두 잊혀지고도 남을 만큼 깊은 것이었으며, '잘 지내시나요~ 나는 잘 지내요~' 라는 그 말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그 때보다는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달까. 그리고 '나는 잘 지내요'라는 말이 얼마나 하기 힘든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달까.




그렇게 몇 달 동안이나 아무 이유없이 간절했던 '러브레터'를 비로소 보고 나니, 무언가 큰 일을 치른 것만 같은 감흥마저 들었다. 10년 만에 다시 본 '러브레터'. 과연 또 한 번의 10년 뒤에 다시 보게 된 다면 또 어떨까. 그 때는 '나는 잘 지내요'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를 깨달을 지도 모르겠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A Shunji Iwai Film 에 있습니다.







뉴욕, 아이 러브 유 (New York, I Love You, 2008)
아기자기한 영화적 순간들


2006년작 <사랑해, 파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익숙할 또 하나의 시티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한편이 우리 곁을 찾아왔다. 파리를 배경으로 수많은 감독들과 배우들의 에피소드를 옴니버스로 만나볼 수 있었던 <사랑해, 파리>에 이은 프로젝트 영화로서 이번엔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참고로 영화 엔딩 크래딧 말미에 소개하듯이 이 프로젝트의 다음 행선지는 '상하이', 즉 다음 작품의 제목은 <사랑해, 상하이>이다). <사랑해, 파리>를 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 작품은 파리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다른 인물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뉴욕, 아이 러브 유> 역시 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기존 옴니버스 형식과는 조금 다른 '느슨한 옴니버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하니 기존 옴니버스 영화의 경우 각개의 작품의 맺고 끊음의 확실해 에피소드의 크기를 정확히 분간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암전등을 통한 완전한 맺고 끊음 없이 전체적인 큰 틀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이해되도록 애쓰고 있다. 물론 이렇다고는 하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등장인물들과 이야기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몇몇의 컨 전환(뉴욕의 풍경을 비추는)과 흐르는 배경음악 만으로도 구별이 가능한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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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 쿠퍼의 새로운 별명은 '택시남'??)

전체적으로 하나의 작품으로 보여지길 원했던 제작자 에마뉘엘 벤비히의 의도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듯 한데, 개인적으로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작품처럼 결국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인물들이 '우연'이라는 것을 가장해서 모두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야기처럼 하나의 작품이라는 느낌은 덜했고, 오히려 옴니버스라는 구성 특유의 맛은 조금 덜해진 감이 없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이냐리투의 그것처럼 각기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간의 조우를 시도하고 있는데, 크게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거나 시너지 효과를 내진 못한 듯 하다(오히려 몇몇 관객들에게는 혼란을 심어 주기도 한듯;;). 만약 이 작품을 보러오면서 일반적인 기승전결을 기대했다면 아마도 '이게 뭐야'할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아무리 한 작품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해도 엄연히 옴니버스 영화이고, 각개의 이야기가 스스로 서면서 큰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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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로 좋아하는 배우들이 화면을 가득채우며 각자의 한정된 공간과 시간을 나누어 쓰며 자신 만의 매력을 뽐내고 있는 점,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 작품을 보러 올 때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예전 <사랑해, 파리>의 경우도 그랬지만 일단은 에피소드 마다 등장하는 익숙한 얼굴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헤이든 크리스텐슨과 레이첼 빌슨은 <점퍼>에 이어 또 한번 함께 연기하게 된 점이 흥미로웠고, 아무리 다른 영화들을 보아도(심지어 그 가운데에는 <미드 나잇 미드 트레인>이 있었음에도) 아직까지는 미드 <앨리어스>의 그 남자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래들리 쿠퍼를 비롯해, 전작에 이은 출연과 동시에 이번에는 연출까지 맡은 나탈리 포트먼과 지저분해 질 수록 조니 뎁을 닮아가는 올랜드 블룸, 그리고 오랜만에 한 장면만으로 자신의 매력을 완전 발산한 크리스티나 리치도 빼놓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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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 호크가 이런 역할 맡은지가 언제인지 잘 기억도 나질 않는데, 주름은 여전하지만 오랜만에 활발한 캐릭터로 등장한 그의 모습이 오랜 팬으로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얼굴에 주름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오는 에단 호크와 자신이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를 보여준 로빈 라이트 펜, 역시 캐릭터와 멋진 조화를 이룬 매기 큐도 반가웠다. 제임스 칸과 앤디 가르시아, 존 허트, 엘리 웰라치, 크리스 쿠퍼, 버트 영 등 노련한 연기자들의 깊은 연기를 만나볼 수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거리이며, <스타트랙>에서 반짝 했던 안톤 옐친의 경우 그 만의 귀여움을 드디어 제대로 보여준 듯 하다. 그리고 점점 나이들 수록 공리를 닮아가는 듯한 서기의 모습도 오랜만에 스크린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고, 점점 <트랜스포머>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샤이아 라보프와 줄리 크리스티의 연기 호흡도 정말 멋졌다. 줄리 크리스티의 경우 몇해 전 개봉했던 <어웨이 프롬 허>에 이어 그래도 익숙한 편이었는데, 역시나 줄리 크리스티는 줄리 크리스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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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크리스티와 샤이아 라보프가 연기한 에피소드는 따로 장편으로 만들어져도 기대할 만 하겠다. 무엇보다 줄리 크리스티를 만난 반가움, 그리고 샤이아를 재발견한 놀라움을 얻을 수 있었다)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세자르 카푸르 감독이 연출하고 줄리 크리스티와 샤이아 라보프가 출연한 순간이었다. 일단 샤이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예전 <이글 아이>를 리뷰하면서 점점 그에게서 <트랜스포머>를 벗어난 성인 연기자의 연기가 엿보인다 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좀 더 이런 생각을 굳건히 하게 될 정도로 깊은 내면연기를 선보였다. 샤이아의 조용한 눈빛을 크로즈업 했을 때 이런 감흥을 느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고, 캐릭터를 위한 독특한 억양들의 메쏘드 연기는 재쳐두더라도 이런 깊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상대역은 줄리 크리스티가 아니었는가!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뉴욕, 아이 러브 유>라는 작품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는 듯 보이기도 했는데, (스포일러가 될까 말할 순 없지만)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훨씬 무거운 이야기와 절제된 표현들, 그리고 이야기를 보태려 삽입된 수많은 영화적 장치들로 인해 특별히 인상이 깊은 에피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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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사랑해, 파리>가 그랬듯이 전체적으로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파리와 뉴욕의 분위기가 같을 수 없기에 이야기의 느낌은 사뭇 다르지만, 이끌어가는 방식은 같다. 어떤 이야기는 뉴욕의 지명과 장소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에 등장시키며 멋진 홍보영화에 가까운 구성을 갖고 있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뉴욕을 사는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통해 '뉴욕은 이런 곳이에요'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말하는 화자로는 귀여운 어린 소녀부터 종교적으로 다른 남녀와 이곳에서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사람들, 그리고 죽음과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등 여러 입장을 통해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야기 자체는 <사랑해, 파리>에 비해 신선한 맛이 떨어지고 감독 개개인의 장기들이 덜 부각되기는 했지만, 이런 측면보다는 익숙한 배우들 혹은 오랜만에 만나는 배우들의 아기자기한 순간의 연기, 그리고 대화의 스킬이랄까? 주고 받는 짧은 호흡에서 오는 영화적 쾌감에 포인트를 둔다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순간의 모음들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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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시 이 작품은 엔딩 크래딧을 평소보다 더욱 주목해서 보게 되더군요.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어떤 감독의 작품인지 여기서야 뒤 늦게 확인할 수 있거든요. 이와이 슌지의 이름이 등장했을 땐 '역시'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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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와이 슌지 작품의 올랜도 블룸도 잘 어울렸습니다. 재미있는 건 극중 올랜드 블룸의 직업이 영화음악가 인데, 작업하고 있는 작품이 다름 아닌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인 <게드전기>였다는 점이었죠. 혼자서 알아보고 큭큭 거렸네요; 방안에 <데쓰 노트> 애니메이션 포스터도 붙어있고, 누가 이와이 슌지 작품 아니랄까봐 일본 작품의 소품들이 여러군데서 발견되더군요.

3. 본래는 스칼렛 요한슨이 연출한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하는데 빠지게 되어 아쉽네요. 제작자의 말로는 흑백으로 제작된 것도 있고 전체적으로 조화가 맞지 않아 최종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하네요.

4.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프로젝트의 다음 작품은 <사랑해, 상하이>입니다.

5. 이 작품은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안소니 밍겔라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안소니 밍겔라 역시 이 프로젝트 중 하나의 에피소드를 직접 쓰기도 했죠.

6. 엔딩 크래딧 맨마지막에 스페셜 땡큐를 지나 퍼스널 땡큐에서 'Park Chan Wook'이라는 이름을 제일 먼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박찬욱 감독이 맞는걸까요?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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