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표류기
그들은 과연 괜찮아졌을까?


사실 장진+정재영 조합에 어느 정도 지쳐있기도 했고, 완전 코미디인 것만 같은 홍보방향에 안봐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크게 계획에 없던 영화였는데, 시사회를 통해 들려오는 지인들의 소문은(이 '지인'가운데는 저만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_-;;) '괜찮은' 영화다가 지배적이어서 내심 속으로, 역시 <천하장사 마돈나>를 이해영 감독과 함께 쓰고 연출했던 이해준 감독이 재능이 어디가진 않았나보다 라는 생각에 개봉 첫 주에 냉큼 보게 되었다. 얼핏 보면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김씨 표류기>는 코믹한 요소를 전면에 배치하고는 있지만, 잘 따져보면 되게 슬픈 영화인 동시에 이런 코미디 영화에서는 잘 취하지 않는 결론을 택하면서 요즘 한국영화계에 불고 있는 약간의 '일본식' 감성이 더해진 묘한 영화 한편을 만들어냈다.



(아래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는 카드빛이 억대가 되어 갚을 능력이 없게 된 남자 김씨(정재영)가 자살을 기도하며 한강 다리 위에서 떨어졌으나 죽지 못하고 밤섬에 표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게 된다. 또 다른 주인공인 여자 김씨(정려원)는 히키코모리로서 벌써 몇 년째 방안에 틀어박혀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내고 있으며, 유일한 취미는 달 사진을 찍는 것 뿐이다.

일단 이 영화를 사사건건 따지고들자면 애초의 설정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밤섬에서 몇 달 동안이나 표류하게 된다니. 핸드폰 베터리가 떨어졌다는 설정이 가미된다고 해도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논리적으로 파고들게 되면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말이 안되는 설정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캐스트 어웨이>처럼 정말 무인도를 배경으로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도심 한가운데 맨홀 구멍에 빠진다던가 해서 고립되게 되는 좀 더 설득력있는 설정을 가져올 수도 있을텐데 왜 밤섬에 남자가 표류된다는 설정을 가져오게 된 것일까. 해답은 영화 속 카메라 앵글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무인도는 말그대로 사방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이기 때문에 별로 희망자체가 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없다기 보다는 완전히 막연한 공간이랄까. 하지만 <김씨 표류기>속 밤섬은 완전히 다르다. 마치 탈출을 시도하고자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멀지 않은 곳에 서울시내가(속세) 보인다. 63빌딩이고 한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고, 유람선이고, 고층 아파트고 다 보인다. 카메라는 이를 의식하듯 남자 김씨의 시선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밤섬에 앉아서는 거의 섬 밖 서울을 바라본다.

처음 자살을 시도하는 것에서 부터 드러났지만, 남자는 자살까지할 용기도 없는 사람이다. 정말 자살을 원했다면 애초부터 63빌딩 정도로 향해야 했을 것이고 섬에서 그렇게 오래 표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밤섬이라는 공간은 그냥 카드빛 등 경제적인 문제, 이성 문제등으로 속세에서 지친 영혼이 모두 훌훌 털고 떠나고만 싶은 일종의 파라다이스에 가깝다. 무인도라는 공간이 어떻게 낙원이 될 수 있는가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속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이에겐 아무런 속박없이 지낼 수 있는 무인도 만큼 좋은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초반에 잠깐 탈출을 꿈꾸던 남자는 이내 이 곳에 적응하게 되고 자신만의 공간을 이곳에 꾸미게 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 또 하나의 자신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쓰레기를 주어다가 이것저것을 만들고 고장난 티비를 주어다가 안에다가 사루비아 꽃을 넣어두고, 패트병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는 것들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라기 보다는 또 하나의 소유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사회의 경제논리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 와서도 결국 몸에 밴 습성대로 자신만의 욕망을 채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짜파게티'를 먹기 위해 직접 씨앗을 심고 결국 세상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을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속세에 물든 남자가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로운 공간에 놓여졌음에도 결국 속세의 연을 끊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를 꼽으라면 '진화라는 건 점점 맛있어 지는 것을 뜻하나 봅니다'라는 대사였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조크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보았을 때 여러가지 면에서 꼽씹어 생각해 볼만한 대사였다고 생각된다. 폭풍우가 치는 밤에 결국 집과 같은 오리배를 떠나보내게 되는 것은 자세히 보면 '놓쳤다'기 보다는 '놓아주었다'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듯 싶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오리배를 떠나보낸 건 세상 속에서 다시 싸울 용기가 없는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밤섬에 남고 싶은 욕망이 발휘된 행동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남자가 흘린 눈물은 집을 잃어서 라기 보다는 결국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를 얻지 못하는 본인에 대한 연민이기도 할 것이다.

보통같으면 마지막에 군인들이 섬에 도착했을 때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만 남자는 반기기는 커녕 오히려 잡히지 않으려도 안간힘을 쓴다. 그 때 그는 '그냥 여기살면 안되요?' '이것 조차 허락 안되는거에요?'라고 얘기하는데 여기서도 앞서 언급한 욕망의 고리와 자기 연민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무인도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이런 경우라면, 단순히 오랫동안 머물렀던 공간에 대한 추억과 정이랄까, 일종의 시원섭섭한 감정 때문에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갈 자신도 없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가 슬프게 다가왔던건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이런 처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영화 속에서 슬픈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은근히 먹는 장면에서 울컥하는 장면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지금 막 떠오르는 예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온천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하쿠를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는 순간 갑자기 슬픔이 밀려와 눈물을 왈칵 쏟는 장면!), 이 영화에서는 직접 짜파게티를 조재해 먹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친듯이 이 짜장라면이 먹고 싶은 남자에게 여자는 짜장면을 배달시켜 주지만 남자는 보란듯이 거절하고 만다. 일종의 자존심이라는 얘긴데, 이건 이미 남자가 밤섬에서 어느 정도 살만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여기서 짜장면을 그저 눈물 흘리며 먹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진정성이 있음은 물론 덜 유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직접 씨뿌리고 반죽하고 '조리예'를 정확히 지켜 예시 그림의 상태로 완벽한 시식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맛있어'서도 있겠지만 남자 스스로 '내가 겨우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짜파게티를 직접 만들어 먹는 것 뿐이구나'라는 것에서 울컥했던 것이며 속세에서 해내지 못한 자신의 무능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가 감정적으로 좀 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려면 왜 이 남자가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어느 정도로 한계에 몰렸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로 인해 잃게 되는 부분도 분명 생겼겠지만, 이런 과정이 없다보니 이 남자가 밤섬에 표류하며 하는 일들에는 별로 '절실함'이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그저 용기없는 낙오자로 생각될 뿐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나은 낙오자라기보다는 세상이야 어떻튼 낙오될 확률이 높은 사람으로 밖에는 생각이 안든달까. 남자 김씨에게 절실함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다면 영화는 아마 더 좋지 않았을까.




사실 히키코모리이기는 하지만 여자 김씨의 설정 자체는 더 영화적이다. 영화 속 정려원 같은 미모를 같은 여자가 외모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점도 설득력이 부족하고(ㅎ), 역시 왜 그렇게 마음을 닫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공감대까지 얻기는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밤섬에 표류한 남자와 도심 속 방안에 표류하고 있는 히키코모리를 접합시킨 것은 흥미로운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공감대를 100% 느끼기 어려웠음에도 이 영화가 괜찮은 영화로 느껴진데에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조금이나마 영화를 통해 배우게 되는, 발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의 주인공을 배치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히키코모리인 여자는 남자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룰을 깨트려 가면서 대화하는 법,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를 통해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에서 혹은 돌아올 자신이 없던 세상에 미약하나마 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면서(물론 자의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결국 세상으로 나오려는 절실함과 용기가 없었던 이들이 조금이나마 에너지를 얻게 되는 영화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개인적으로 좀 더 좋았던 건, 마지막에 마냥 행복하게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룰을 많이 깨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금방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기는 어려울 것이고, 남자 역시 수억원의 빛이 갑자기 없어질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둘이 급속도로 사귀기라도 할 것 같은가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결국 두 김씨는 일종의 해프닝을 겪으면서 조금 배우게 되었지만 세상은 그대로이고 담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그래도 이 영화가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던 건, 작지만 배움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배움이 갑작스럽지 않고 갑자기 모든 것을 해결할 정도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깔끔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보면 일시에 '결심했어'하고 단숨에 모든 것을 바꿔버리곤 하는 영화/드라마 속 인물들보다는 더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느린 속도도 마음에 들었고.




1. 그런데 엔딩 크래딧에서 정작 '농심'의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었는데(정확하진 않지만. 그래서 일부 상품은 다른 의도로 쓰이지 않았다는 문구도 삽입되었죠), 이런 경우라면 예전 <여.친.소>와 비교하자면 훨씬 좋은 방향의 PPL이라고 생각되네요. 정식으로 협찬 받지 않았다면 PPL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 아닐까요.

2. 히키코모리가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이건 정말 부자들만 할 수 있는 거에요. 가난하면 은둔생활 할려고 해도 일하지 않으면 못한다는 ;;; 한강이 바로 보이는 뷰를 갖춘 고층 아파트에 살 정도니 역시 잘사는 집인듯.

3. 옥수수콘 깡통에 다시 옥수수를 심는 설정도 재밌더군요.

4. 뽁뽁이로 이뤄진 침대는 한번쯤 해보고 싶더군요. 아, 그리고 크리닝 테이프로 수면 최면 거는건 정말 탁월했어요.

5. 은근히 CG가 많이 사용되었더군요. 특히 하늘 묘사 부분에 CG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6. 음악이 처음에는 정말 많이 좋았었는데, 갈수록 조금씩 진부해지긴 하더라구요;;

7. 민방위 훈련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대국민 홍보영화랄까요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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