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The Imaginarium Of Doctor Parnassus, 2009)

난 그래도 테리 길리엄을 응원한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신작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The Imaginarium Of Doctor Parnassus)>은 아무래도 히스 레저의 유작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된 작품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로 최고의 화제를 모으긴 했지만, 진정한 그의 유작은 이 작품이라는 점에서, 스크린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다른 여러 이유들을 재쳐두더라도 남다른 의미를 갖는 작품 임은 부인할 수 없겠다. 히스 레저의 유작이기는 하지만 끝까지 본인의 촬영 분을 모두 마치지 못하고 요절하였기 때문에, 그의 동료인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파렐이 히스 레저가 맡았던 캐릭터를 나누어 연기했다는 것이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제 막 배우로서 빛을 보려던 히스 레저의 죽음을 누구 보다 아쉬워 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어쨋든 이 작품은 테리 길리엄 감독의 신작이라서 더욱 기대가 되었던 작품이었다. <브라질 (Brazil, 1985)>과 <바론의 대모험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 1989)> <12 몽키스 (Twelve Monkeys, 1995)> 등으로 자신 만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미장센을 선사했던 테리 길리엄의 신작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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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길리엄의 작품은 확실히 일반 대중적인 코드로 받아들이기에는 불편한 경우가 잦은 편이다. <브라질>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수 많은 영화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긴 하지만 반대로 수많은 영화팬들 사이에서 잘 이해 안되는 작품으로 꼽히기도 하는 것처럼, 친절하고 쉽게 설명해주기 보다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이 잘 하는 이야기만을 그 만의 화법으로 표현해내곤 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장센(Mise-en-Scène)으로 흔히 얘기할 수 있는 독특한 영상과 미술적인 측면이다. <브라질>을 본 이들은 적어도 나중에 이 영화를 돌이켜 봤을 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었지? 하고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지언정, 그 독특한 영상과 미술은 어렴풋이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영화나 뮤직비디오 등에서 비슷한 류의 영상을 보게 되었을 때, 저거 어딘선가 본 듯 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좀 더 확실하게 '테리 길리엄 영화였지!'라고 떠오르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이 그가 대중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어쨋든 개인적으로 테리 길리엄의 작품을 기다리고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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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신작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이런 그의 특징이 좀 더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반대로 그의 독특함과 대중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경우라면 <12 몽키스> 정도가 될 것 같다). 다시 말해 내러티브나 이야기가 주는 재미나 감동은 부족한 편이지만, 다른 감독의 작품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황홀한 영상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런 그의 특성을 분명 인지하고 감수하고 보기 시작한 영화임에도 이야기의 허술함(아니 허무함이라고 해야겠다)과 지루함은 눈에 띄게 발견되었다. 이 작품은 얼핏 들여다봐도 테리 길리엄스러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악마와 거래를 하고, 상상 속의 세계가 등장하고,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이 세상 이야기가 아닌 듯 싶다. 그런데 한 꺼풀 더 벗겨보고 나니, 이 이야기만큼 신파와 통속적인 이야기가 없다. 결국 바탕에 깔린 이야기는 악마와 거래를 한 한 남자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 약속의 하나인 딸을 두고 벌어지는 일에 가깝다.

여기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영화의 제목인 '상상극장'처럼 상상극장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을 더 주된 메인 스토리로 이끌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었다. 다른 감독이었다면 모르겠지만 테리 길리엄이 남들 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이 상상극장 속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상상극장 밖 현실의 이야기는 사실 테리 길리엄이 짊어지기에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상상극장 속 초현실적인 꿈의 이야기는 만화같은 영상과 황홀한 이미지로 이야기 자체를 사로잡고 만다. 이 상상 극장을 소재가 아니라 더 큰 주제로 삼았더라면 오히려 더 테리 길리엄 작품 답지 않았을까(물론 그로 인해 대중과 더 멀어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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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길리엄의 작품을 보면서 예전부터 종종 들었던 생각이었지만, 이번 작품을 보면서 더욱 확실해 진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참 순수한 존재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유치함과 순수함은 구분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차이점인데, 이번 작품을 보면서 테리 길리엄은 참 순수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마치 자신의 아기자기한 세상에 빠져있는 미셸 공드리가 떠올랐달까(물론 반대로 테리 길리엄을 보며 공드리가 떠올라야 정상이겠지만 ;;).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의 이야기는 유치하기 보다는 순수한 것에 가깝다. 사실 일반적인 시선에서는 영화가 중요한 순간에 반전이라고 내놓은 이야기에 '피식'하고 유치함을 참을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유치함이 느껴지는 한 편으론 '이 사람 정말 참 순수하구나'하는 애틋한 정마저 느껴졌다.

마치 감독 자신이 상상극장 속에 있는 것처럼, 관객들에게 너무도 순수하게 '여기서 감동적이지 않아요?' '놀랐죠?'라고 얘기하는 듯 했다. 만약 다른 잘 모르는 감독이 이런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나 역시 '피식'하며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테리 길리엄의 이 허술한 이야기에는 뭔지 모를 순수함이 느껴졌다. 물론 이런 부족한 이야기에서 순수함이 느껴진 것은 이야기 외적인 영상과 미술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에서는 제대로 부숴주고 극장 예술에서만 느낄 수 있는 스펙터클을 안겨주는 것으로 만족스럽고, 제임스 카메론에게는 현대의 최고수준의 영화기술을 통해 역시 영화라는 매체만이 갖는 매력을 안겨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면, 테리 길리엄의 영화에서는 상상극장 속 꿈꾸는 듯한 세계와 미장센이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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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팬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테리 길리엄은 단순히 연출 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직접 감독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 직접 자신이 음악 작업까지 참여하는 감독이다(사실 나도 음악까지 이렇게 많은 곡을 참여하고 있는 줄은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 봤다). 그의 영상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CG가 화려해서도 아니고, 압도하는 스케일 때문도 아니다. 그저 독특함과 신비로움 때문이랄까. 다른 판타지 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 만의 감성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감성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여러 조형물들과 영상, 캐릭터들은 어딘가 모를 매력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사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을 특히 좋아하는 것도 그만의 크리쳐들 때문이고, 앞서 언급한 미셸 공드리의 경우도 상상과 현실을 아날로그한 감성으로 표현해 내는 아기자기한 소품과 아이디어 때문인데, 테리 길리엄 역시 이런 측면이 강한 편이다.

이런 점만으로 그의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번 작품도 제법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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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히스 레저가 워낙에 화제가 되긴 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영화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파르나서스' 박사 역할을 맡은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아니었나 싶다. 분량을 봐도 그렇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스토리의 주인공이라는 점도 그렇고 따져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나 싶다. 워낙에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인상이 강한 터라 아직까지도 본 트랩 대령으로 더 익숙한 배우인데, 오랫만에 주인공에 가까운 비중으로 출연한 작품을 극장에서 보게 되어 일단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몇몇 장면에서는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가 연상되기도 했지만(그러고보면 이안 맥켈런이 만든 '간달프'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새삼 실감한다), 복잡/순수한 캐릭터를 연기내공으로 무리없이 소화하고 있다.

히스 레저는 본인을 <다크 나이트>와 <브로크백 마운틴> 이전에 캐스팅 해 주었던 테리 길리엄의 신작에 스타가 된 이후에도 일종의 보은 차원에서 출연을 결심한 듯 한데, 결국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지만 그로 인해 테리 길리엄의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을 일부 관객들 마저 히스 레저 때문에 보게 된 경우가 제법 있었으니, 결과적으로는 큰 도움을 준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인지 이 작품은 굉장히 노골적으로 히스 레저의 유작임을 작품에 심어놓고 있는데, 엔딩 크래딧에 간단한 한 줄 추모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히스 레저 유작'이라고 강하게 힘 주어 말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이것도 테리 길리엄이 너무 순수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ㅎ). 여튼 히스 레저는 그리 강력한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없겠지만(만약 다른 새 배우가 맡은 역할을 본래대로 모두 그가 연기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다크 나이트>이후 전혀 다른 캐릭터에 다시 빠져든 모습을 볼 수 있어 다시 한번 아쉬움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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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 레저의 역할을 대신하여 출연한 삼총사인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파렐은 짧은 분량 탓인지 자신들 만의 매력을 연기로서 펼쳐보이기 보다는 그저 '등장'과 '분위기'로서 전하는데에 만족해야 했다(확실히 이런 면에 있어서 조니 뎁의 강한 마스크와 분위기는 타 배우를 압도한다). 이들 외에 새롭게 눈길을 주게 된 배우라면 발렌티나 역할을 맡은 릴리 콜을 들 수 있겠는데, 그 묘한 눈빛과 표정(그리고 볼살)은 테리 길리엄의 세계에 정말 잘 어울리는 마스크였으며 앞으로도 다른 작품에서 어떤 연기로 만나게 될지가 더욱 기대되는 배우였다.

그리고 배우로서도 커리어를 갖고 있는 뮤지션 톰 웨이츠는 미스터 닉 역할을 맡고 있는데, 한 편으론 참 톰 웨이츠 스러운 캐릭터와 연기가 아니었나 싶다. 마치 노래 한 자락 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거기까지 발전되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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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분명 지루하고 이야기는 허술하고, 어쩌면 판타지와 영상마저 커다란 임팩트를 주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난 그래도 테리 길리엄을 응원한다.


1. 아디오스, 히스 레저.
2. 히스 레저만 믿고 극장을 찾으셨다면 후회하실 확률이 높습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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