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2007)
자본주의와 종교에 관한 무서운 예언서


(스포일러 있음)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작품은 몇 작품 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전작 <매그놀리아>와 <펀치 드렁크 러브>는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영화들 중 하나로,
폴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감독의 작품을 지금까지도 계속 기다리게 하는 원인이 된 영화들이었다.
그가 2002년 <펀치 드렁크 러브>를 연출한 뒤, 5년이라는 제법 긴 텀을 두고 지난해 선보인 영화가
바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의 <데어 윌 비 블러드>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로 이미 많은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작품상, 작곡상, 촬영상 등을 수상하며 화제를 불러모았던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드디어
3월에 이르러서야 소규모 단위의 개봉관에서 만나볼 수가 있었다.
사실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작품들은 흔히 기대 만큼이나 걱정도 하게 마련인데,
폴 토마스 앤더슨 만은 걱정하지 않았었다. 많은 작품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분명 '장인'의 분위기를
갖고 있음을 적은 연출작에서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역시! 폴 토마스 앤더슨 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무거운 주제를 깊은 성찰과 통찰력으로 풀어낸 또 하나의 수작이었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의 미국. 석유 개발이 아메리칸 드림으로 자리잡던 이 시기를
배경으로, 폴 토마스 앤더슨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와 종교의 폭력성과 모순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일단 석유개발자인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 라는 캐릭터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그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말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 가운데서 유전을 발견한 뒤
특유의 사업수단으로 이 유전사업을 무섭게 번창해 나간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다가가길 원하는데, 유전 개발 중 목숨을 잃은 동료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키우면서,
사람들에게 가족이 중심이 되는 경영전략을 이해시키는 도구로 사용한다. 하지만 아들 H.W가 불의의 사고로
청력을 잃게 되면서 다니엘은 H.W를 버리듯이 다른 곳에 보내고 만다. 이후 자신의 이복 동생이라는 헨리가
등장하는데, 그 동안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던 다니엘은, 헨리를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고
중요한 일들을 함께 하게 된다. 초반에는 완벽하게 헨리를 믿는 듯 하지만, 나중에 헨리가 결국 거짓말을
한 것을 실토하기 전에도, 다니엘은 헨리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결국은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성공을 공유할 수 없고, 나 외에는 모두 적이라는 그의 논리에 있어서는 가족조차(이복 동생이긴 하지만)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니엘은 자신을 속인 헨리를 결국 자신의 손으로 살해하기에 이르고, 자신의 일을 계속 방해하는
선교사 일라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에는 기본적으로 경제논리, 즉
자본주의의 이념이 깔려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서 그 성공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한다는 의미의 행동들이지, 이것이 그가 본래 나쁜 사람이라던가 폭력적인 성향을 갖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큰 모순점이라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만 풀어가고,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시되며, 경쟁에서 성공하는 소수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이 인정이 되는,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이 영화는 무섭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 그저 석유개발이 성행했던 시대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아메리칸 드림과 자본주의의 모순만을 그렸다면
(뭐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멋진 작품이 되었을 듯 싶지만), 아마도 이 영화가 이 정도로 무섭고 처절한
인간의 군상을 보여준 영화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더불어 종교의 모순을 함께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다니엘 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이 바로
선교사 일라이의 역할이다. 개척교의 예언자이자 선교사로 등장하는 일라이 선데이는, 처음부터 다니엘에게
매우 호전적이다. 왜냐하면 점점 세를 불려나가길 원하는 그의 교회에는 자본이 필요하고, 그 자본은
바로 다니엘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중반까지 일라이의 모습은 그저 광신도 정도로만 그려진다.
퇴마의식을 갖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모습이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그에게서
다니엘 만큼의 폭력성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반으로 갈 수록, 일라이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댓가를 치르지 않는(금전적으로) 다니엘에게 계속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의 직접, 간접적인 대결 구도는 매우 흥미롭다. 흔히 등장하는 선악 구도가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기도, 혹은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경쟁관계로서 두 모순된 가치관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대결구도는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오래전 석유 개발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교회에 가서 일라이에게 무릎을 꿇고,
뺨을 맞아가며 자신의 죄를 소리 높여 크게 외쳤던 다니엘은, 자본이 궁해 자신을 찾아온 일라이에게
자신이 예전 당했던 그 모욕을 그대로 돌려줄 기회를 맞는다. 다니엘이 교회에서 '나는 죄인이다'라고
목청 높여 소리지르기를 강요당하던 장면이 자본주의의 무섭고도 처절한 면을 보여주었다면,
반대로 일라이가 '나는 거짓 예언자다'라고 크게 말하길 강요당하는 장면에서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퇴색되어 버린 종교의 처절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두 장면은 이 영화에서는 물론이고,
최근 본 영화를 통틀어서도 가장 무서운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이 영화의 제목을 우리말로 해석해보자면
'피를 부를 것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텐데, 이 제목은 이 영화의 의도를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순수함과 정의를 잃은 폭력적인 자본주의와 종교는 결국 피를 부르는 파국으로 치닫을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을 원작자와 감독은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나의 왼발>도 그렇고, <갱스 오브 뉴욕>에서도 그랬고, 특히 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연기를 보여준다. 흔히들 배우들이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캐릭터가 되어 버린다'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아마도 이런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를 꼽으라면 단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아닐까 싶다.
얼핏 보면 감정이 고조된 장면에서 단순히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 연기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감이 단순히 윽박지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콧수염 만큼이나 진한 눈섭과 그보다 더 깊은 눈에서 쏘아내는
검은 광선은 웃으면서 얘기할 때에도 폭력성이 느껴질 정도로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 만큼이나 인상깊었던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바로 일라이 선데이와 폴 선데이 역할을 맡은 폴 다노 였다. 개인적으로 2006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리틀 미스 선샤인>에서 침묵 수행을 하는 역할로 등장했던 폴 다노는(아이러니하게도 두 배우 모두
자신의 본명과 같은 이름의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그 무서운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겨뤄도 주눅들지 않을 만큼 신인으로서는 해내기 힘든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와 평화로운 표정 속에 퇴색된 인간성을 드러내야 하는 일라이 역할을
소화해낸 것도 대단하지만, 그 무서운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같은 수준의 에너지를 내며,
연기를 주고 받은 것 만으로도 그로서는 대단한 경험과 필모그래피에 있어서도 중요한 영화가 될 듯 싶다
(이런 것에 비해서 상에 있어서는 너무 외면을 당한 것이 개인적으론 아쉽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주목 받는 것은 바로 음악인데, 밴드 라디오헤드(Radiohead)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가
맡은 음악은, 굉장히 이질적이고 날카로움을 들려주며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불안함과
불편함을 조성하게 한다. 극적인 부분에서도 보통 우리가 들어왔던 방식으로 감정을 고조시키기 보다는,
약간은 어긋나는 음들과 강한 악기의 사용으로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면서,
무거운 주제의 영화를 좀 더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영화를 딱 보고나서는 이 영화가 쉽게 피부로 느껴지지 않았었다.
배우들의 무서운 열연과 무거운 이야기가 인상적으로 느껴지긴 했었지만,
단번에 느껴지는 걸작은 아니었는데, 감상기를 쓰며 영화를 되돌이켜보고, 곱씹어 볼수록
참 무섭도록 깊은 통찰력과 연출력이 만들어낸 걸작이 아니었나 싶다.



* / 영화의 마지막 부분,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나고 말미에
'이 영화를 로버트 알트만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로버트 알트만 감독에게 얼마나 영향을 받았고,
그 존경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마지막 문구였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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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언제인지 모르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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