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 (The King of Pigs, 2011)

그 때와 지금, 나는 어디에 있었나



연상호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한국 계급사회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다. 빈부격차, 권력으로 인한 계급차이 등 대한민국 사회에는 '계급사회'라고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을 만큼 그 그림자를 숨기고 있으며 (이제는 사실 더이상 숨기고 있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 이러한 계급사회를 꼬집는 작품들도 이미 여럿 있어왔다. 이러한 계급사회를 다룬 작품들은 주로 계급사회 자체를 주인공으로 하여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는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돼지의 왕'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돼지의 왕'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거다.


'그 때 너는 어디있었어?'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All rights reserved


영화를 보고 나오며 같이 본 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뭔가 찜찜한 느낌이야'. 나는 대답했다. '이 영화가 불편한 건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고, 떳떳하지 못한 마음의 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작품은 계급사회 속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개'들에게 용감하게 맞서 싸운 돼지의'왕'에 관한 영웅담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돼지의 '왕'마저 잠식해버린 '돼지'들의 관한 이야기다. 사실 확률적으로도 그렇고 청소년기를 보낸 대부분의 이들은 돼지의 왕이거나 개이기 보다는 돼지였을 것이다. 개들의 강압적인 태도에 공포를 느끼며 그저 이 시기가 빨리 지나기 만을 고대했던, 그냥 더 이상 볼일 없는 시간이 올 때까지 꾹꾹 참고 견뎠던 돼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돼지들에게는 극적인 스토리가 없어서 인지, 아니면 이 많던 돼지들이 어른이 되면 감쪽 같이 모두 다 돼지의 왕이나 개로 둔갑해서인지,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그리 주목하는 캐릭터가 아니었고 사람들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였다.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이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 돼지의 왕이 되지 못한 돼지들의 불편한 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All rights reserved


극 중 돼지의 왕으로 등장하는 '철이'는 힘든 가정형편 속에서도 개들에게 홀로 맞서 싸우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자주 설명한다. '그 놈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이 때를 즐거운 추억이었노라 얘기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겠다'고. 이런 뉘앙스의 대사가 제법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나는 그래서인지 이 대사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이 계급사회에서 어디에 속했었는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는 계급사회가(지배세력인 개들이) 문제라는 얘기가 지속적으로 나왔음에도, 그에 반해 정작 (피지배 세력이라 할 수 있는)돼지들에 대한 깊은 성찰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철이의 대사를 연관지어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계급사회에서 지배층인 개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그 땐 그랬었지'하며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는 것도 물론 문제지만, 끝내 어른이 되어서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이 개였다고 거짓으로 말하고 다니거나 더 나아가 돼지의 왕이었노라 무용담으로 얘기하는 돼지들의 현실이 더욱 불편하고 쓰라리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는 계급사회 때문일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나선에서 아직 내려오지 못한 그리고 개가 되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이 돼지였노라, 그 때 미처 돼지의 왕과 개 사이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던 존재였노라 말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All rights reserved



영화 '돼지의 왕'은 이런 돼지들의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수면으로 꺼내놓기 위해 스릴러라는 장르를 선택했다. 이 작전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이 작품을 소개할 수 있도록 만든 매우 영리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 걱정되는 것은 많은 관객들이 스릴러와 반전에만 집중해 작품 본연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할까 하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죽고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가 라기 보다는, 나는 그 때 어디에 있었고, 나는 그 곳에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돼지의 왕'이 그리고 있는 종석과 경민 그리고 철이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계급사회가 만든 희생양 혹은 불편한 진실 정도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것만으로도 괜찮지만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과연 돼지들이 정말 희생양일 수 밖에는 없었나? 라는 질문을 과감하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 때 나는 개들에게 강렬하게 저항해 본적이 있었던가, 말만 따라 그냥 시간이 지나 더 이상 볼 일 없게 될 날 만을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나? 라는 아픈 자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역시, 그러한 일들에 돼지처럼 그저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또 다른 돼지의 왕이 나서주기 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All rights reserved


나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있게 글의 부제목으로 '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니?'라고 물을 수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 때, 그리고 지금. 나는 어디에 있었나.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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