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 2014)

유인원이기에 힘을 갖는 영화


루퍼트 와이어트의 2011년 작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수 많은 리부트 작품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작품이었다.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시저라는 유인원 캐릭터를 완벽하게 공감가도록 만들어 낸 동시에, 이 시리즈 전체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 역시 도출해 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루퍼트 와이어트의 손을 떠나 맷 리브스가 맡게 된 속 편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은 전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승계한 동시에 시저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전 작에서 'No!!'라는 시저의 한 마디가 강렬하게 가슴을 때렸다면, 이번엔 거의 초반 부에 말을 할 수 있는 시저의 모습과 더 나아가 인간 세계처럼 집단을 이루고 발전한 유인원 세계를 보여주며, 좀 더 집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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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다시피 전 작에서는 시저가 말을 한 마디 하게 된 것이 엄청난 임팩트가 있었을 정도로, 동물로만 여겨졌던 침팬지가 인간에 가까운 유인원이 되어 감정을 나누는 과정을 그렸다면, 이번 속 편에서는 그로부터 거의 10년의 세월이 지난 뒤 자신 만의 세력은 물론 의사 소통과 사회를 이룬 시저와 유인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바이러스로 인해 멸종에 위기에 처한 인간 세계도 다른 한 편으로 등장한다. 사실 '반격의 서막'의 줄거리는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전혀 다른 경쟁과 적대 관계의 두 세계가 등장하지만, 그 각각에는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캐릭터들이 있고, 이를 못 마땅해 하는 캐릭터 역시 각각 존재하며, 뭔가 잘 해보려고 할 때 이 캐릭터들이 문제를 일으켜 결국 더 큰 사건과 사고로 이어져 버리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각각의 가족에 관한 설정 역시 존재한다. 전개는 물론 끝날 때 까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대로 흘러가지만, 그럼에도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은 지루하지 않고 흥미로운 편이다. 그 이유는 이 한 편의 주인공이 바로 유인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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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관객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밖에는 없을 텐데, 그런 측면에서 유인원인 시저에게 느끼는 감정은 정확히 공감이라고 하기 보다는 동정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즉, 극 중에서 시저는 유인원들이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있지만, 관객인 우리가 보기에는 시저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건 유인원으로서 대단하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앞서 말한 전형적인 전개와 구성은 이 영화에 큰 단점이 되지 못한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감정선들이 주된 테마를 이루고 있지만, 이를 수행하는 캐릭터들이 바로 유인원들이기 때문에 (아직은)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전 편에서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 (아마도, 내가 침팬지를 보고 반할 줄이야 라고 했던...)로 등장한 시저의 연속되고 더 강해진 카리스마는 그가 인간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더 임팩트있게 느껴지는 부분이었으며, 더더욱 전형적이었던 시저와 아들의 관계 역시 감정이 동했던 건, 아들의 그 눈빛이 정말로 묘하게 감정을 흔드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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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만약 이 영화가 '혹성탈출' 아닌 다른 작품의 속 편이었다면 (물론 그렇다면 전 작도 달랐겠지만) 조금은 실망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시저와 유인원 무리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으나 그의 반해 말콤이 주가 된 인간들의 이야기는 크게 어필하지 못하였으며, 사실상 매력을 어필할 충분한 기회도 제공되지 못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균형이 맞지 않아도 괜찮았던 건,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직은' 이 시리즈가 유인원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이유(매력) 자체만으로 충분히 즐기고 감동할 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의 엔딩을 보아 이 시리즈는 또 다른 속편을 암시하고 있는데, 속편에서는 단순히 이러한 기본 매력만 가지고는 버티기 힘들 것 같다는 예상도 해보게 되었다. 시저는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이지만 세 편 연속으로 주 된 롤을 맡기엔 힘에 부칠 것 같다는 생각. 그래도 속편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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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들과 유인원들의 관계를 보면서, 미국인 개척자(혹은 침략자)들과 인디언들의 관계도 떠오르더군요.


2. 재미있는 건 이번에는 시저의 얼굴을 처음 스크린으로 본 순간, 앤디 서키스의 얼굴이 그냥 연상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였다는 점이에요. 그의 표정 연기와 그 과정을 담은 메이킹 영상을 워낙 많이 봐서 그런지, 시저의 얼굴에서 앤디 서키스의 얼굴이 그대로 보이더군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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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캅 (RoboCop, 2014)

로보캅과 머피의 경계



영화를 선택할 때도 선입관이라는 것은 무섭게 작용한다. 처음 폴 버호벤의 '로보캅'이 리메이크 된다는 얘기를 듣고, 검은 색의 날렵한 수트를 입은 새로운 로보캅의 이미지를 보는 순간, '아, 이건 액션이 중심이 된 영화가 되겠구나' 싶었다. 흔한 국내 포스터의 홍보 문구를 흉내 내 보자면 '더 빠르고, 강한 놈이 온다!' 뭐 이런 식의, 액션 중심으로 좀 더 세련되진 영화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막상 보게 된 조세 파디야 감독의 '로보캅'은 어쩌면 액션과 철학 가운데서 줄 다리기를 하던 폴 버호벤 보다도 더 로보캅이라는 존재의 태생적 고민을 담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즉, 로보캅과 머피의 경계에 관한 것 말이다.



ⓒ Metro-Goldwyn-Mayer (MGM). All rights reserved


일단 조세 파디야의 '로보캅'은 액션이 아주 드문 편이다. 로보캅이라는 캐릭터를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액션을 기대한 이들이라면 실망을 할 수 밖에는 없는 부분일 텐데, 내용적으로도 액션이라기 보다는 드라마에 가깝고, 몇 안되는 액션 장면도 연출을 논하자면 조금은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호불호가 갈리는 더 큰 지점은 액션의 비중이 아니라 로보캅(머피)을 영화가 다루는 방식과 비중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로보캅을 다루는 방식은 영웅이자 주인공으로서 다룬 다기 보다, 오히려 그 로보캅을 둘러 쌓고 있는 각자의 이해관계와 철학을 갖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즉, 나쁘게 이야기하면 극 중 로보캅이 감정을 제어 당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가 로보캅을 활용하는 방식은 그 주변의 이야기를 하는데 도구로 사용하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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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데넷 노튼 박사와 마이클 키튼이 연기한 옴니코프 회장 셀라스를 내세우는 한 편, 로봇 경찰과 관련된 법안을 두고 벌이는 사회적인 반대 의견에 더 주목한다. 사실 이 영화가 모호해 지는 것은 명확한 선악 구조가 등장하지 않는 다는 점인데, 오히려 캐릭터의 관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고 서로의 이해관계로 묘사하려 한 방식이 그 가운데 놓인 로보캅과 머피라는 존재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영화는 초반 머피가 로보캅으로서의 자신을 처음 인지하는 장면에서, 사실상 뇌 말고는 아무 것도 본래의 것이 남아있지 않은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이 장면은 이전과 달리 머피의 고통이 실제로 느껴져 더욱 끔찍한 장면이었다), 이는 영화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주제, 즉 로보캅과 머피의 경계 혹은 로보캅에서 머피가 차지하는 비중, 서로의 지배 관계 등에 대해 관객들로 하여금 있는 한 번 쯤 제로의 상태에서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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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팻 노박 캐릭터를 상당한 비중으로 내세운 것도 그렇고, 확실히 이 영화는 머피의 개인적인 고뇌에 집중하기 보다는, '로보캅'이라는 존재를 두고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의견으로 나뉘는 지에 대한 논의를 던지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영화의 마지막 팻 노박이 던지는 말은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이 작품이 새로운 리부트의 시작으로서 추후 속편이 나올 수 있다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작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로보캅'의 시작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인 동시에, 만약 이 것이 한 편으로 끝난다면 아직 로보캅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끝나버리는 것이 몹시 안타까울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마지막에서 오리지널의 복귀와 속편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은 적지 않게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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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 제가 '로보캅'의 메인 테마음악을 이렇게 좋아하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첫 소절만 들어도 소름이~


2. 영웅에 대한 대사를 주고 받다가 카메라가 '매덕스' 역할을 맡은 잭키 얼 헤일리를 비추는 장면은 나름 흥미로웠어요. 아무래도 그가 로어셰크 이다보니 ㅎ


3. 확실히 예전 '로보캅'에 비하면 머피의 매력은 아직 많이 부족한 편이에요. 이번 작품에서는 그럴 만한 여지가 별로 없었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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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Tinker Tailor Soldier Spy) 블루레이가 출시되었습니다


출시가 된 지는 조금 되었는데 뒤늦게 소개하게 되었네요.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2011년 작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블루레이가 국내에 정식 출시되었습니다. 국내 협소한 시장 탓에 하마터면 출시가 어려울 수도 있었는데 프리오더 후반부에는 더 적극적인 판매가 이뤄지면서 무리 없이 발매될 수 있었네요. 개인적으로도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해외 판 구매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멋진 라이센스 반으로 출시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 블루레이에도 제가 제작에 조금이나마 참여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 위주로 간단하게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화의 포스터 이미지로 꾸민 전면과 영화 속 '서커스'의 문장을 담은 후면 디자인 입니다. 게리 올드만이 서 있는 저 이미지를 참 좋아하는 터라, 블루레이의 커버도 만족스럽네요. 심플하니 좋습니다.






투명 케이스로 제작된 블루레이 타이틀 내부에는 디스크와 함께 라이센스 블루레이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소책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존에 소책자를 포함했을 경우 아웃케이스를 만들어 외부에 수록하는 방식을 택했었는데, 근본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케이스의 비닐이 우는 문제가 발생하여 이번에는 내부에 소책자를 포함하는 형태로 제작이 되었습니다. 대신 소책자의 사이즈는 조금 작아진 편입니다. 오히려 좀 더 아기자기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 팅테솔 블루레이에 개인적으로 가장 뿌듯한 점은 제 글이 실린 것 보다도 두 감독 님의 멋진 추천사가 포함된 것인데, 굉장히 촉박한 일정으로 부탁을 드렸었는데 흔쾌히, 그것도 짧게 써주신다고 해서 정말 한 문장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긴 추천사를 써주신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이 자리를 빌어 또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박찬욱 감독 님은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 연락하게 되었는데, 처음 박감독 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을 때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ㅎㅎ 또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현재 차기 작 자료 조사 중이시라 바쁘실 텐데, 긴 추천 글은 물론 박찬욱 감독 님과도 적극적으로 연결해주신 저의 절친(?) 이고 싶은 류승완 감독 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번 '베를린' 인터뷰 차 뵈었을 때 감독 님이 팅테솔을 참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조심스럽게 부탁 드렸었는데, 바쁜 일정에도 멋진 글을 보내주셔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곧 '베를린' 블루레이가 출시될 예정인데, 그 때 '베를린' 블루레이를 들고 다시 한 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그 날이 기다려지네요~






이번 소책자는 제가 참여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 깨알 같은 읽을 거리 들이 제법 있습니다. 오히려 이미지 컷들보다도 읽을 거리가 많은 점이 좋았어요.





그리고 또 한 번 영광스럽게 제 글도 소책자에 수록이 되게 되었습니다. 국내 정식 출시된 블루레이에 제 글이 수록된 것이 이번이 아마도 일곱 번째 인 것 같은데, 모두 다 제 돈을 들여서라도 참여하고 싶었던 작품들이라 참여하는 자체가 몹시 뿌듯한 프로젝트 들이었습니다. 이번 '팅테솔'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영화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누군 가는 이렇게도 보았구나'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씩 읽어봐 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번 '팅테솔' 블루레이는 화질과 사운드, 그리고 소책자는 물론 기존 극장 판에서 큰 문제가 되었던 오역이 모두 수정된 버전이라,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던 분들이라면 전혀 다른 영화를 보시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실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여러 번의 중역과 번역, 검수를 통해 탄생한 완성도 높은 자막 만으로도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는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음에 또 좋은 영화를 수록한 블루레이 타이틀 발매 소식으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 사진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다크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2012)
놀란의 배트맨, 이렇게 마무리 되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삼부작이 '다크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2012)'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완결되었다. 놀란의 배트맨 영화가 처음부터 삼부작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개인적 의문이 있지만 ('라이즈'를 보고 '비긴즈'와 '다크나이트'를 다시 본 결과 놀란은 분명히 '다크나이트'에서 종결 짓고자 하지 않았나 싶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분명히 '종결'의 의미를 가득 담은 성격의 작품이었다.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던 점은 물론 아쉬운 점들도 없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배트맨이라는 코믹스의 영웅을 완벽한 스크린의 영웅이자 현실의 영웅으로 만들어낸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감사의 인사와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그로 인해 몇 년간 기다림의 가치와 영화를 본다는 것의 즐거움을 새삼 즐길 수 있었기에...



(삼부작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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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 (크리스찬 베일)이 하비 덴트를 영웅으로 만들고 스스로 고담의 악당이 되버린 채 떠나버린 그 이후, 하비 덴트 법을 통해 더이상 배트맨이 필요 없어진 고담시를 배경으로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첫 번째 배트맨의 부제를 묘사하는데 그리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몇 대사들과 상황 묘사를 통해 지난 수년간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이 어떤 시간을 보내왔고, 고담시는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는 영화 인트로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베인 (톰 하디)이라는 캐릭터를 지체하지 않고 고담으로 끌어 들인다.



베인. 베인은 어쩔 수 없이 전편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비교 대상이 될 수 밖에는 없는 운명을 타고 난 캐릭터였는데,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중반까지 베인이라는 캐릭터는 충분히 조커와 비견될 수 있을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캐릭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라이즈'가 '다크나이트'와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베인이라는 캐릭터를 영화의 메시지와 결부시킨 정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후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라이즈'는 '다크나이트'와 사실상 비교대상이 되기 어려운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작품은 메시지가 핵심이라기 보다는 그간 쌓아왔던 캐릭터, 감정, 이야기들을 마무리하는 것에 목적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베인이 중반까지 보여준 메시지의 힘이 마스크를 쓴 인상적인 외모나 특유의 발성이나 압도하는 근육질의 몸매보다도 더 강렬하게 다가왔었기에, 베인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이야기를 '다크나이트' 조커의 경우처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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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가 '혼란 (Chaos)'을 통해 메시지를 던진 경우였다면 베인은 좀 더 계획과 의지를 갖고 있었던 '혁명가'였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베인이 고담에 던진 이 혁명의 메시지는 '그냥 내가 도시를 지배하겠다'와는 달리, '고담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라는 것이었기에 여러가지로 깊이 있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담론이었다. 특히 증권거래소를 공격하고 그 과정 속에서 부자들의 돈 놀이를 비판하는 대사들이나, 이후 월가에서 벌어지는 혁명군과(사실 이때는 이미 혁명군으로 불리기에는 그 의미가 퇴색된 이후였지만) 경찰들과의 대규모 전투씬 들을 보며, 지난해 미국내 가장 큰 사회문제였던 1:99의 월가 시위와 연결지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인이 처음 고담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 이것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치 매트릭스 속을 사는 것이 더 편한 사람들처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좋은 결과를 내던 나쁜 결과를 내든 상관없이 누군가 혹은 자본이나 세력에게 지배 당하는 것에 불만 조차 갖고 있지 않은 시민들에게, '본래 네 것이었던 것을 이제 온전히 네게 돌려주마' 라고, '너희가 99%인데 왜 1%에게 지배 당하는 것에 대해 부당함을 이야기조차 하지 않느냐!'라고 외부적인 쇼크를 베인이 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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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베인이 던진 이 혁명과 질문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했더라면 전작 '다크나이트'에서 조커가 그랬던 것처럼 이 깨우침 (혹은 혼란)을 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다크나이트'에서 두 유람선의 실험이 그랬던 것처럼)에 따라 더 큰 담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 텐데, 꺼내어 놓은 주제에 비해 사실상 답을 하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만약 이 혁명을 영화에 주된 테마로 가져와 이를 두고 배트맨과 베인이 벌이는 극렬한 신념의 대립을 메인 테마로 가져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아마도 계속 남을 듯 하다. 이렇게 소모되기에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베인이라는 캐릭터의 비중은 너무도 컸고 매력적이었기에 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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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인이라는 캐릭터의 담론을 어느 정도 끌어 올린 시점에서 영화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인 블레이크 (조셉 고든 래빗)의 이야기를 꺼낸다. 사실상 블레이크라는 캐릭터가 맨 마지막에 밝혀지는 '로빈' 이라는 풀 네임 때문에 단순히 '로빈'으로만 해석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블레이크가 지니는 가치는 단순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배트맨 & 로빈'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로빈이 아니라고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한 편으론 마지막에 등장한 이 조크와도 같은 풀 네임에 대한 언급을 아예 하지 않았더라도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블레이크의 존재는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자신의 자리를 대신 할 빛의 사도로서 믿고 선택했었던 하비 덴트와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이라는 존재가 더 이상 필요없는 고담을 꿈꿨던 브루스 웨인은 결과적으로 타락해버린 하비 덴트의 실패를 통해 수 년간 은둔하고 고담을 떠나다시피 했을 만큼 (레이첼에 대한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배트맨이라는 존재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기회를 - 배트맨은 고담에 있어 필요악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에 - 놓쳐버린 것에 대한 실망과 자책이 더 컸을 것이다) 타격을 받게 되는데, 그런 그에게 스스로 접근해 와 다시금 희망의 가능성을 갖도록 한 것이 바로 블레이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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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하비 덴트에게 자연스러운 이양을 하려다 실패했던 배트맨은 다시 한 번 블레이크를 통해 이러한 가능성을 갖게 되자, 조심스럽지만 상당히 직설적인 화법으로 블레이크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동시에 더 확실한 메시지를 심으려 한다. 이미 블레이크가 브루스 웨인 = 배트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는데,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일 때도 배트맨일 때도 블레이크에게 지속적으로 고담시의 수호자로서 겪어야 하는 일들, 해야만 하는 일들 또한 감수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 이미 레이첼을 잃는 경험을 했던 브루스로서는 아직 신념만으로 뭉쳐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블레이크에게 '혼자 활동하려면 마스크를 써'라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임을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이라는 것이 고아라는 것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임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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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이 블레이크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이 정도면 정말 친절한 거라고 할 수 있다) 거듭 설명해주는 건 다시 말하지만 하비 덴트에 대한 아픈 상처와 자책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블레이크는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진실을 왜곡한 고든 (게리 올드만)을 강하게 질책할 정도로 정의와 신념으로 똘똘 뭉친 청년 (누가 이 열혈 경찰 좀 데리고 나가지 ㅎ)인데, 사실 이런 정의로움이나 신념으로만 따지자면 '다크나이트'의 하비 덴트 역시 결코 뒤쳐진다고 볼 수는 없는 캐릭터였다. 그렇기에 이미 하비 덴트의 실패를 겪었던 배트맨은 이 신념만을 믿기보다는 (I Believe in Harvey Dent) 좀 더 구체적인 방법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블레이크를 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 속 블레이크 (새로운 고담시의 수호자)의 이야기가 로빈 혹은 또 다른 수호자의 '비긴즈'에 수록되지 않고 배트맨 삼부작의 마지막에 위치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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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전편에서 실패를 겪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신념에 관한 이야기다. 앞서 이야기한 블레이크의 이야기가 그렇고 (알다시피 배트맨의 성격상 자신이 피곤하다고해서 그냥 고담시를 적당한 사람에게 맡기고 방관할 수 있는 양반이 아니다), 셀리나 카일 (앤 해서웨이)의 이야기가 그러하며 알프레드 (마이클 케인)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극중 캣 우먼으로 등장하는 (극중에서 실제로 고양이와 관련하여 그녀를 표현한 대사는 처음 웨인 저택에서 만났을 당시의 언급 밖에는 없다) 셀리나 카일과 배트맨의 관계를 보자면 결국 배트맨의 입장에서는 전혀 믿을 만한 위치와 관계에 있지 않은 셀리나를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길 정도로 믿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러닝 타임상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배트맨과 캣우먼 사이에 다른 요소를 가미하지 않은 것은 이 믿음이라는 테마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결국 배트맨의 믿음은 셀리나 스스로도 믿지 못했던 결과를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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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리즈 내내 배트맨이 아닌 브루스 웨인을 믿어왔던 알프레드였기에 어쩌면 가장 필요할 때 떠나버린 그의 존재가 더 안타깝기만 했다. '비긴즈'와 '다크나이트'를 함께 했던 이들이라면 누구도 알프레드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알프레드가 끝까지 지키지 못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항상 자신보다도 더 자신을 믿어주었던 알프레드에 대한 브루스의 보답에 관한 이야기하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삼부작을 마무리하는 작품으로서 '라이즈 (Rises)'라는 제목처럼 배트맨으로서나 브루스 웨인으로서나 완전히 일어서는 모습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자신을 항상 믿음으로 돌봐주던 알프레드에 대한 완벽한 보답으로, 그 알프레드가 믿음을 저버렸을 때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 믿음으로 답하는 브루스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화의 구성과는 별개로 브루스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에 진심으로 눈물 흘리며 그를 떠날 때, 그리고 브루스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알프레드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마이클 케인이 연기한 알프레드 캐릭터의 묘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브루스 웨인과 알프레드의 관계를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가 아니라 어쩌면 토마스 웨인이 채워주지 못한 부분들까지 든든하게 지원하는 아버지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로 그리면서, 배트맨 영화의 또 다른 담론과 감정선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선이 드디어 폭발한 이 작품에서 알프레드가 눈물을 흘릴 때 나도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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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삼부작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인 신념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또 다른 테마인 자경단에 관한 이야기 역시 풀어낸다. 자경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주제인 '감시하는 자는 누가 감시하는가'라는 담론을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는, '결국 이 거대한 권력을 쥔 자가 타락하거나 혹은 한꺼번에 힘(권력)을 빼았겼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어떠한가?'라는 화두로 가져와 후자의 경우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 가운데 역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었다면 배트맨의 모든 기술과 무기를 만들어내던 응용과학부서를 베인이 통째로 갖게 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위험으로 작용한 신에너지의 핵폭탄화 역시 이 같은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초반 만약 악당들이 이 힘을 얻게 될 경우에 대한 질문이 나오는데, 그럴 경우를 대비해 침수해 폐기하도록 되어 있다는 장치를 설명하지만, 이것 또한 힘을 가진 자의 자만이었다는 것을 영화는 그대로 보여준다).

 

'다크나이트'에서도 그랬지만 (마지막 조커의 위치를 찾기 위해 고담 시민 전체의 휴대폰을 감청하는 반인권 방식을 택했지만, 조커라는 위험을 제거하고 나서는 이 시스템 자체를 폐기시킨 것)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주제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확실히 어느 한 편에 서기보다는 양날의 경우를 모두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을 텐데,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특수성으로 인해 완벽한 중립에서기 보다는 좀 더 필요악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편에  더 기울어 있지 않나 싶다. 앞서 이야기했던 '다크나이트'의 휴대폰 감청 시스템도 그렇고 (폐기하긴 했지만 사용했으니. 폭스였으니까 이번만 합니다 라고 했지 블레이크였다면 절대 수긍하지 못했을 것이다 ㅎ),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도 결국 배트맨이 필요 없어진 고담시를 만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배트맨 아니 또 다른 어둠의 기사를 키워낸 것으로 마무리 된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놀란의 영화는 물론,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와 텍스트 자체가 바로 이 완전하지 않은 것 때문에 가장 흥미롭고 여러가지 다른 담론이 가능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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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배트맨 비긴즈'를 다시 보고 쓴 글(배트맨 비긴즈 다시보기 - 공포를 극복하고 배트맨으로 태어나다)에서도 이야기했 듯이 '배트맨 비긴즈'의 주요 테마는 '두려움' 그리고 '극복'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는 이와는 어쩌면 전혀 상반되는 주제를 담고 있다. 바로 두려움의 극복이 아닌 '인정' 이다. 브루스 웨인은 부모를 잃은 상처와 그로 인한 복수, 그리고 어린 시절 동굴에 떨어져 겪었던 두려움과 박쥐 등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면서 진정한 배트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러한 극복의 테마는 고담을 어지럽히는 악당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으로도 표현되는데, 이러한 갈등은 조커와 하비 덴트의 일을 겪은 뒤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그저 보지 않으려 한 것 뿐). 하비 덴트 법이 무너지고 베인이라는 고담의 커다란 재앙이 다가오자 브루스는 다시 한 번 '고담에는 배트맨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생각으로 고담시에 나타나 베인과의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베인에게 부러지고 난 뒤 감옥에 떨어지게 된 브루스 웨인은 여기서 극복이 아닌 두려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깨우침을 얻게 된다.

 

즉,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해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감옥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인정함으로서 표면적인 감옥에서는 물론 오랫동안 브루스 웨인을 짓누르고 있던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트맨 비긴즈'에 등장했던 토마스 웨인의 '떨어지면 다시 올라오면 돼'라는 대사는 역시나 의미심장하게 쓰이고 있다. 일어나라 (Rises)라는 죄수들의 외침과 함께 말이다). 이제 두려움을 인정하고 강박에서 자유로워진 배트맨은 혼자 다 해결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고 셀리나에게 믿음으로서 역할을 부여하고, 배트맨으로서 산화하는 것이 아니라 브루스 웨인으로서 살아 남는 것을 택하였으며, 자신의 자리를 다른 이에게 물려주는 것 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보자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삼부작'은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물이 트라우마를 겪고 또 싸우고 결국에는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이야기를 그렸다고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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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제(?)의 캐릭터인 탈리아 알굴에 대해서 조금만 이야기해보자면, 사실 누구나 그녀가 탈리아 알굴 일 거라고 많이들 예상했었기에 그녀가 스스로 '내 이름은 탈리아야'라고 했을 때 극중 배트맨 만큼 놀라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건 놀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로 인해 베인이라는 멋진 캐릭터가 한 순간에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누구보다 '순정마초'스러운 이야기에도 쉽게 동화되는 편이지만 베인은 한 여인을 향한 충성에 가까운 애정보다는, 혁명가로서 더 깊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캐릭터였기에 이렇게 탈리아의 정체와 함께 한 방에 (실제로도 한방에 ㅠ) 무너져 버린 것이 여러가지로 아쉬운 점이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에는 몇 가지 비중을 줄이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이야기와 캐릭터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갑은 역시 탈리아 알굴이었다. 놀란이 마무리해야할 배트맨 이야기에 탈리아의 자리는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에필로그에 가까운 엔딩 부분. 이 작품이 종결의 의미가 가장 크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엔딩 부분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놀란의 영화치고는 너무도 직설적이고 친절하게 하나 하나 논란의 여지 없이 정리하는 마무리에 사실은 조금 놀라기도 했을 정도였다. 블레이크의 부상 (Rises), 알프레드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이야기로 정리되는 브루스 웨인의 미래는 사족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 작품이 '다크나이트'와는 달리 최소한 바로 이어서 4편을 기대할 수는 없도록 완전히 종결지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고 보았을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신파스러운 장면에서도 위엄을 만들어 냈다 (물론 더 위엄있는 마무리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여지가 남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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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전 '인셉션 (Inception, 2010)'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놀란의 영화를 보며 이야기의 구조나 구성 등에 대해서만 주로 언급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감정적인 부분을 이끌어 내는 데에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셉션'에서는 꿈 속의 꿈이라는 구조를 영화적으로 기가 막히게 표현해 낸 것도 물론 좋았지만 아내를 잃고 아이들을 그리워 하는 코브의 이야기가, 그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감정적으로도 공감되고 마음이 흔들리는 작품이었다. 이번 '다크나이트 라이즈' 역시 시리즈 내내 그 곳에 서 있었던 알프레드의 눈물을 보았을 때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고, 브루스 웨인이라는 캐릭터가 배트맨을 거쳐 다시금 브루스 웨인으로 돌아가게 된 과정에서 오는 고통과 깨달음, 결심을 보았을 때 액션이나 볼거리, 이야기적인 흥미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동요되는 것을 또 한 번 경험할 수 있었다. 좀 가볍게 얘기해서 '고담 밖에 모르는 바보'의 이야기가 그냥 흥미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갈등이 한 알 한 알 느껴진 덕분에 가슴 깊이 흔들려 결국 소름과 동시에 울컥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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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다시 생각해보아도 액션 블록버스터 상업영화의 범주 내에서, 특히나 전 세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작품에서 감독 자신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철학을 이 정도로 과감하고 자신감 있게 표현해낸 것이야 말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가장 큰 업적이 아닐까 싶다.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으로 그러하였듯,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를 통해 그러했듯,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신 만의 비전으로 전 세계 누구나 아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자신의 영화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게 만드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이 삼부작에 참여한 주요 배우들은 모두들 하나 같이 이야기한다. 더이상의 배트맨은 없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다면 출연할 의지가 있다.


나 역시 언제라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배트맨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면 만사를 재쳐두고 극장으로 향할 의지가 있다. 아..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1. 그냥 담론에만 집중해서 쓰다보니 액션, 한스 짐머의 영화 음악, 트리비아와 영화 속에서 발견한 인물들과 소소한 설정 들에 대해서는 아예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는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보고 짧게 정리해 봐야겠네요. 아이맥스로만 2번 관람했는데 이번에는 메가박스 M관의 4K로 볼지 아님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볼지 (행복한) 고민입니다.


2.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두 번째 보고 온 날 집에오자마자 '다크나이트'를 다시 보았어요. '라이즈'를 보니 더 더욱 '다크나이트'가 보고 싶어지더라구요. 아, 물론 아직 '비긴즈'를 다시 보시지 않았다면 이게 무조건 우선입니다.


3. 아직 기다림이 다 끝나지는 않았군요. 블루레이 발매를 또 기다립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Warner Bros. 에 있습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Tinker Tailor Soldier Spy, 2011)

쓸쓸한 공기를 머금은 스파이라는 존재에 대해



르카레의 원작 소설 팬들에게는 이 작품이 영화화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되는 바였겠지만, 역시나(?) 원작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렛 미 인'을 연출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신작이라는 사실과 게리 올드만, 톰 하디, 존 허트, 콜린 퍼스, 토비 존스, 마크 스트롱, 시아란 힌즈 그리고 최근 셜록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는 출연진에 도대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스파이 영화라고 했을 때 혹자는 '누가 스파이인가?'를 찾아내는 반전 영화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이하 TTSS)'는 결코 '범인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냉전 시기 유령처럼 활동하던 스파이라는 존재를 작전의 역동성이나 활동성으로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은퇴한 스파이가 조직 내의 이중 스파이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스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 시대의 산물인지를 그 시대와 함께 아주 덤덤하게 그려낸작품이었다. 많은 스파이 영화와는 달리 그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애잔한 시대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야 말로 TTSS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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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혹은 쫓겨난)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 (게리 올드만)는 조직 내에 스파이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고는 조용하고 빠르게 이중 스파이를 찾아나선다. 영화는 스마일리가 이중 첩자를 찾아내는 과정을 그리기는 하지만, 그것 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 속에서 조지 스마일리로 대변되는 스파이라는 존재에 대한 묘사에 더욱 많은 신경을 쓴다. 그의 회상을 통해 그 동안 이 인물들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묘사하는데, 이것 역시 양면의 활용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가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역시 '스파이'와 '세계' 그 자체다. 사실 나도 영화 감상 초반만 해도 일반적인 스파이 영화를 볼 때처럼 온몸에 감각을 최고로 곤두세운 상황에서 모든 단서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점점 영화가 전개될 수록 단서보다는 '공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영화는 클래식한 당시를 디테일하고 고풍스럽게 묘사하면서도 톤을 다운시켜 전반적으로 마치 추운 겨울 입 밖으로 내뱉는 차가운 입김처럼 싸늘한 공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서늘함은 곧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연결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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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영화 정말 쓸쓸하다. 영화 속 스파이들은 같은 편에 서있던 그렇지 않던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을 관객은 받게 된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신들이 스파이로서 이러한 외로운 존재라는 점을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듯 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이 어떠한 이유로든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사력을 다해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기 보다는, 마치 이 외로움을 누군가 끝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이 내 뿜는 공기는 주변의 것보다도 차가워 보였고, 홀로 남겨진 그들의 눈빛은 누구보다 애처로워보였다. 시종일관 이러한 분위기를 머금기만 해오던 영화는 종종 이를 분출하기도 한다. 주변을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연인과의 관계를 마무리하고 연인이 떠난 뒤 홀로 오열하는 모습이나,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를 죽음으로 종결시켜주길 바라는 이나 그런 연인의 바램을 들어줄 수 밖에는 없는 이의 '눈빛'은 다른 스파이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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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과 마찬가지로 스마일리가 이중 스파이를 찾는 과정은 마치 자신이 걸어온 스파이로서의 삶을 반추하며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되짚어가는 과정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역시 스마일리가 카를라(칼라)와 만났던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를 본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명장면으로 꼽는 이 장면은 회상 장면임에도 플래시백 없이 그저 현시점에서의 대화만으로 묘사되는데, 그럼에도 이 장면은 가장 소름돋는 '회상' 장면이자 간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이 대화, 아니 회상 시퀀스에도 역시 TTSS만의 쓸쓸한 정서가 담겨있는데, 단순히 경지에 오른 강호의 고수가 또 다른 고수에게 보내는 존경의 마음이 아닌, 냉전이라는 시대가 만들어낸 스파이라는 세계에서 서로를 인정함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아주 함축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그로 인해 영화가 시종일관 말하려고 하는 '스파이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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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이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된 것에는 역시 스마일리를 연기한 게리 올드만의 영향이 컸다.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에게 연기력을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그는 조지 스마일리를 통해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리뷰 중간중간 포함된 스틸컷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게리 올드만이 창조한 '조지 스마일리'는 절제로 가득 덮혀 있음에도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는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이 글에서 여러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냉전의 시대보다도 더 차갑고 쓸쓸한 스파이라는 존재를 묘사하는데에 있어 스마일리의 그 표정없는 얼굴은 정말 효과적인 거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이미지도 잘 어울렸다. '셜록'과는 묘하게 차별되면서도 이미지로서 전달하는 바가 충분하다고 느껴지는 캐릭터였다. 콜린 퍼스는 주연으로 홀로 나설 때보다 이렇게 여러 캐릭터에 섞여 있을 때 더 큰 매력을 발산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고, 마크 스트롱의 그 눈빛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못 잊을 이미지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비중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와 시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생각하는 '로이' 역의 시아란 힌즈의 이미지도 인상적이었으며, 톰 하디와 존 허트, 스티븐 그레헴 등 좋은 배우들의 멋진 이미지가 영화와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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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일반적인 영화가 스파이를 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함으로서, 오히려 가장 스파이 영화다운 작품이 되었다. 이던 헌트가 활약하는 스파이 영화도 좋지만, 조지 스마일리가 활약하는 스파이 영화도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다.



1. 



엔딩에 흐르던 훌리오 이글레아시스의 'La mer'는 정말 정말 탁월한 선곡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지금까지 도대체 몇번을 반복해서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2. 보통 원작이 있는 영화는 영화를 보고나면 크게 다시 찾아보고픈 생각이 들지 않곤 하는데, 이 작품은 원작을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기회가 된다면 BBC에서 제작한 알렉 기네스 주연의 TV시리즈도요.


3. 색감과 질감에 반한 탓인지 블루레이 출시를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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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 (The Book of Eli, 2010)
세상을 구하는 서부극


언제나처럼 아무런 정보 없이 보게 된 영화 <일라이 (The Book of Eli)>는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종말 후의 지구(혹은 대재앙 뒤의 지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종의 서부극이었다. <프롬 헬>을 연출했던 휴즈 형제가 연출한 이 작품은 묵시록적이고 종교적인 색체와 서부극의 분위기, 그리고 액션의 요소까지 다루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볼 만한 작품이긴 하지만 이 세가지 중에 어떤 한 가지에 조금 더 비중을 실었다면 더 좋은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반전이 있지만 (사실 후반에 드러나는 반전 외에 영화의 주된 소재인 '그 책'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은 반전이라고까지 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나로서도, 대재앙 이후의 지구와 주인공과 이 책을 갖으려는 카네기(게리 올드만)로 미뤄보았을 때 너무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는 명확하지만, 거기까지 끌고 가는 과정의 맛은 조금 덜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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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를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대재앙으로 인해 야외에서 활동할 때는 선그라스를 써야만 하는 그러니까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버린 지구를 배경으로 수십년간을 떠도는 주인공 (덴젤 워싱턴)이 등장하는데, 이 주인공은 무언가 임무가 있는 듯하고 무술에도 초고수다. 그러다 만난 어떤 작은 마을의 지배자 카네기는 자신이 갖은 권력을 어떤 한 권의 책을 갖기 위해 모두 쏟고 있는데, 주인공을 만나게 되면서 이 책의 비밀에 좀 더 가까워 진다.

<일라이>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역시 최근 보았던 <더 로드>를 들 수 있겠다. 이 작품 속 지구의 풍광은 <더 로드>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으며, 몇몇 장면은 그대로 가져온 듯한 느낌이 날 정도다. 하지만 <더 로드>의 풍광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듯한 매마름의 황폐함이라면, <일라이>의 풍광은 전체적으로 황폐하지만 서부극의 그것과도 같은 황폐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영화의 대부분은 서부극의 구성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일라이>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서부극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마을의 묘사는 물론, 주인공과 악당들이 대결하는 구도 역시 서부극에서 거의 다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심지어 캐릭터 중 한명은 모리꼬네의 유명한 스코어를 휘파람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또한 한 세대가 끝나고 다른 세대가 시작되는 것 역시 서부극에서 종종 만나볼 수 있었던 모티브로서, <일라이>는 전체적으로 서부극을 깔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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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살펴볼 만한 요소는 역시 '포스트 묵시록'적인 종교적 색체다. 이 작품은 너무 표면적으로 종교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어 오히려 종교적이지 않게 느껴질 정도인데, 덴젤 워싱턴이 맡은 캐릭터는 처음부터 무언가 '임무'에 충실한 것이 너무 역력히 드러나고(혼자 반복하는 대사들도 그렇고), 나중에 악당들과 대치했을 때의 장면 구성에서는 더더욱 그를 메시아 혹은 메신저로 여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종교적 색체가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종교적인 작품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은 분위기를 위한 트릭일 뿐 본연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종교적인 것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다. 마지막 결말과 결부지어 이것저것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도 있고, 성경의 내용들과 결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점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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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라이>의 아쉬운 점이라면 서두에 이야기 했던 것처럼, 종교적인 색체는 트릭으로 분위기만 흘리고, 액션과 스타일은 과하고 본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이들에 가려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언가 이 셋 중의 하나만 집중했더라면 영화의 호불호는 더 갈렸을지언정 적어도 지지하는 편의 힘은 더 강해졌을 터인데, 중간의 모호한 지점에 남게 된 경우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과 거의 비슷한 표현을 이미 한 평론가가 있어 말을 빌려오자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오웬 글라이버맨은 “이 무거운 실패작은, 카 체이스가 없는 <매드 맥스 2: 로드 워리어>이자, 휴머니티가 없는 <더 로드>이다"라고 평했는데, 정확히 맞지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이 많은 편이었다. 어쩌면 치열했던 <더 로드>보다 더 깊은 철학은 물론 더 깊은 세계관을 품어낼 수도 있었던 그릇이었고, <매드 맥스>보다 더 세련되고 묵시록적인 액션과 분위기를 낼 수도 있었던 작품이었지만, 두 가지 모두 이들에게 한참 못 미치는 작품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보니 맨 마지막에 본래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반전으로 풀어내었을 때, 그 반전의 충격 정도를 떠나서 크게 공감대를 얻기 어려운 부분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쓰다보니 스포일러 없이 써보자는 글이 되어버려 반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만약 영화 내내 주인공의 여정에 좀 더 공감할 수 있었더라면 마지막 반전에 당연히 더욱 빠져들 수 있었을텐데, 반전은 반전대로 여정은 여정대로 심심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떤 장면이 등장했을 때, 왜 저런지 머리로는 알면서도 심정으로는 '왜 저러는 거지?'라고 묻고 싶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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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큰 기대 없이 본다면 제법 볼만한 작품인 것은 틀림 없다. <더 로드>같은 깊이를 기대한다면 너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그래서 계속 그냥 '그 책'이라고만 숨기는 주인공들이 안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책의 비밀과, 크게 놀라게 되지는 않는 반전 (고로 메시지)에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관객에게 믿을 주는 덴젤 워싱턴의 연기와 오랜만에 악역으로 돌아온 게리 올드만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볼 만한 작품일 듯 싶다.


1. 역시 세상이 아무리 황폐해도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음악인듯. 거의 첫 장면에서 Al Green의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가 극장 가득 울려퍼졌을 땐 소름이 돋더군요. 워낙에 좋아하는 곡이었는데 이런 황폐한 지구에서 또 만날 줄이야. 마치 <12 몽키스>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듣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2. 극중 노인들만 사는 집이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해요. 집주인이 무려 '덤블도어'니까요.

3. 마지막에 친절하게 '어디 버전'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더 좋을 뻔 했어요. 그냥 그 유명한 다리와 멀리서 본 모습만으로도 어디인지 다 알 수 있었으니까요.

4. 영화가 갖고 있는 메시지 자체는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뻔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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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은 대부분의 슈퍼히어로 물이 그러하듯 만화책을 원작으로 영화화되어 인기를 얻으며
시리즈물로 거듭난 작품이다. 코믹스에 원작을 두었다는 것은 다르게 해석해보면 국내보다는
미국 내에서 훨씬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기도 하다

(배트맨을 비롯한 ‘슈퍼맨’ ‘스파이더맨’ 등 미국 내에서의 슈퍼 히어로를 그린 코믹스의 인기는,

일반 영화 속에서 가끔 광적으로 만화책에 유난히 집착하는 주인공들을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슈퍼 히어로 장르를 이야기 할 때마다 다른 히어로 캐릭터들과 비교가 빠질 수 없는데,
배트맨은 다른 히어로들과 극을 달리는 캐릭터임으로 비교가 쉬운 편이다.



슈퍼맨은 타고난 능력을 가진 크립톤 행성 출신의 외계인이니 일단 접어두고,
헐크나 스파이더맨은 방사능 노출이나 후천적 사고에 의해 능력을 갖게 된 경우이나,
배트맨은 이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배트맨에겐 선천적으로 주어진 탁월한 능력도 없으며
후천적으로 얻게 된 능력 또한 없다. 그에겐 오직 부모님께 물려받은 엄청난 재력.
재력을 바탕으로 갖게 된 최첨단의 신형 무기들. 그리고 후천적 트레이닝을 통해
얻게 된 능력 들이 전부이다. 슈퍼 히어로들 가운데에는 가장 일반인스럽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소시민을 대변했던 스파이더맨과는 또 다른 차이가 있는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배트맨은 매우 우울하고 슬픈 히어로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살해되는 장면과
동굴에서 박쥐들에게 느꼈던 공포를 바탕으로 분노와 복수심에 시작된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그 시작이 중요한 캐릭터가
바로 배트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배트맨 시리즈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팀 버튼의 ‘배트맨’과
 ‘배트맨 리턴즈’에서도 배트맨이 어떻게 배트맨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물론 비긴즈에도 등장하는 부모님에 살해 장면은 등장하지만,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이후 갖가지 잡다한 캐릭터들을 등장시킨 ‘배트맨과 로빈’ ‘배트맨 포에버’ 등은
거론할 필요도 없을 듯. 팀 버튼의 배트맨 이후 나왔던 두 편의 배트맨은 연기력, 캐스팅,
작품성 등 모든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작품들이었다.
배트맨 슈트를 아무나 입혀놓는다고 흥행할 수는 없었던 것.



이에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새 천년에 새롭게 시작될 배트맨의 감독으로
워너가 점찍은 감독은 크리스토퍼 놀란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니지만, 워너 입장에서
배트맨이라는 블록버스터의 감독으로 ‘메멘토’나 ‘인썸니아’에서 연출력을 인정받았던
크리스토퍼 놀란을 선뜻 감독으로 캐스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듯싶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워너에서 3편과 4편의 실패 요인을 제대로 분석한 처방이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들어내는 배트맨이 화려함에서 뒤 떨어질 것 같은 우려는 할 수 있을지라도,
이야기 구조가 엉성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액션의 화려함도 화려함이지만, 배트맨이 어떻게 배트맨이 되었나를 비중 있게
그려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놀란을 감독 의자에 앉힌 것은 매우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겉으로 드러날 정도의 엄청난 초호화 캐스팅은 아니지만, 아놀드 슈왈제네거,조지 크루니,
우마 서먼, 알리시아 실버스톤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만(?) 모았던 ‘배트맨 & 로빈’에
전혀 뒤질 것이 없는 화려한 캐스팅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배우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어느 영화에도 뒤지지 않는 탄탄한 연기파 배우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배트맨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무래도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 일 텐데, 배트맨과 웨인의
이중적인 모습을 연기해야 하며, 쉽지 않은 액션도 소화해야하고 무엇보다 내면연기를 이어가야 하는
복잡한 캐릭터임을 감안하였을 때, 크리스찬 베일이 재 창조해낸 배트맨은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배트맨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싱크로 율을 선보인다.
크리스찬 베일은 영화 제작 전에 팬들에게 의견을 물었던 설문조사에서도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배우였었다.

크리스찬 베일 외에 가장 눈에 띠는 배우 중 하나는 바로 리암 니슨일텐데, 지금까지 주인공의
스승이나 현자 등 지적이고 좋은 역할로만 분했던 그가, 이번 영화에서는 거의 처음 악역을 맡아
새로운 악역 캐릭터를 그려낸다. 완전 나쁜 놈이라기보다는 그저 주인공과 이상향이 다른 인물로
느껴지는 것도 그의 우아한 연기덕분 일터.



이와 반대로 악역 연기에 고수로 널리 알려진 게리 올드만은 참으로 오랜 만에 선한 역할을 맡아
극의 깊이와 재미를 동시에 선사하고 있다. 특히나 그의 캐릭터 ‘고든’은 코믹스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으로 만화책의 열렬한 팬들에게도 적극적인 지지를 얻을 만한 캐릭터라 생각된다.
이 밖에도 이전 시리즈의 알프레드 보다 더욱 인자하고 아버지에 느낌을 물씬 전해주는 캐릭터를 그린 마이클 케인과 주인공을 돕는 조연 역할로는 최고의 선택이었을 모건 프리먼,
여자 주인공으로 나름대로 자연스런 연기를 보여준 케이티 홈즈, 이 밖에도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인
실리안 머피와 켄 와타나베,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 룻거 하우거까지...
꼼꼼히 따져보면 모든 배우들 중 아무나 주연을 맡아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을 정도의
화려한 캐스팅을 갖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출시된 DVD는 블록버스터에 걸 맞는 수준급 화질과 음질을 수록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흔히 액션 블록버스터 하면 떠올리게 되는 DTS사운드는 제공되지 않지만
돌비디지털 5.1채널만으로도 만족할만한 사운드를 들려준다(워너는 DTS사운드를 수록하지 않기로 유명한데, 배트맨 비긴즈에는 역시나 수록되지 않았지만 최근 이와 함께 출시된 전작들의 SE버전에는 DTS트랙이 수록되어 놀람과 반가움을 동시에 전하기도 했었다).
슈퍼 히어로를 다룬 영화답게 멀티 스피커를 최대한 이용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동굴에서 박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때의 공간감이라던가, 영화의 하이라이트 겪인 텀블러(배트카)를 타고 벌이는 추격 씬 에서의 사운드는 레퍼런스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조금 못 미치는 매우 우수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텀블러가 만들어내는 그 묵직한 사운드는 우퍼 스피커를 통해 무겁게 전달된다.



이 바로 전에 ‘킹덤 오브 헤븐 DE'를 리뷰 한 뒤라 그런지 모르지만, 배트맨 비긴즈의 화질은 레퍼런스에는
역시나 조금 못 미치는 우수한 영상을 수록하고 있다. 영화 자체가 어두운 장면이 많았던 터라 화질의
여부는 여느 때보다 매우 중요한데, 암부의 표현력도 우수한 편이여서 감상에 전혀 지장을 주지는 않을 듯하다.
서플먼트는 두 번째 디스크에 따로 수록되었는데 코믹스 풍의 메뉴 화면이 인상적이다.
마치 이스터 에그를 찾듯 하나씩 공개되는 서플먼트에는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과 프로듀서의
인터뷰를 통해 마치 비밀스런 007작전과도 같았던 배트맨 프로젝트의 탄생과 준비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또한 크리스찬 베일을 비롯한 여러 배우들의 인터뷰와 만화가 영화로 옮겨지기까지의 과정,
배트맨 하면 절대 빠질 수 없는 배트맨의 특별한 의상의 제작과정 등이 흥미롭다.



특히 영화를 위해 실제로 운전이 가능한 텀블러를 제작하여 영화에 적용하기까지의 과정은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이밖에 각 캐릭터들을 설명해주는 파일 형식의 메뉴와 배트맨의 각종 무기 등을 설명해주는 영상이 수록되었다. 최근 서플먼트의 경향을 보았을 때 감독과 배우, 스텝의 음성해설이 수록되지 않은 점, 그리고 기존 시리즈가 DTS를 포함한 SE버전으로 재 출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때, 더 나은 버전에 ‘배트맨 비긴즈’가 나올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최근 출시된 버전으로도 저렴한 가격과 스펙을 감안하였을 때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DVD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2005.10.17
글 / ashit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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