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도 : 민란의 시대

차라리 더 조윤의 영화였더라면



'범죄와의 전쟁'을 연출했던 윤종빈 감독이 다시 한 번 배우/스텝들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만든 사극 '군도 : 민란의 시대'는 그의 신작이라는 점과 하정우, 강동원의 대결 구도 등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다. 화려한 캐스팅은 물론이고 예고편에서 뿜어나오는 타란티노스러운 리듬감과 스타일은, 강동원이라는 보증되어 있는 비주얼과 함께 어떤 스타일리쉬한 액션 활극이 될지 큰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군도'는 위의 기대를 대부분 충족시킨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윤종빈 감독에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균형감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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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의 스토리는 대략 히어로물과 유사하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능력도 없고 평범한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이미 대의를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해 오던 무리에 일원으로 합류하게 되면서, 그들에게 훈련을 받아 그들이 오래 계획했던 대업을 결국 마무리하게 되는 중책을 맡게 되는 그런 구조인데, '군도'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조금씩 흔들렸다고 하겠다. 저런 스토리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 스토리가 관객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는 초반 평범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공감을 얻어야 하고, 무리로 등장하는 선의의 그룹의 이야기 역시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이유가 필요한데, '군도'의 경우는 이 두 가지가 조금은 부족했다. 돌무치는 불운한 사건을 겪으며 도치가 되지만 이 성장 아닌 성장 과정에서 관객은 별다른 동요를 느끼지 못하고, 불합리한 세상 속에서 백성을 위하고자 하는 도적떼의 이야기 역시 더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시간도 깊이도 부족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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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빈 감독은 이 부족한 부분을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하려 하는데, 아쉽게 느껴졌던 것은 이 부분에서 필요했던 건 설명이 아니라 공감대였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내용은 설명으로 해결이 될 수 있었지만 이 설명 만으로는 지리산 도적떼가 이루려고 하는 진짜 세상과 주인공 돌무치의 울분이 생각보다 와닿지 않았다. 써놓고 보니 특히 돌무치의 경우 그 울분이 더 강렬하게 표현되어도 좋았을 법 했는데 너무 쉽게 대의에 섞여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즉, 개인적인 사정과 시대적인 사정이 결합하는 구조에서 둘 모두가 조금은 미지근하게 표현되다 보니, 전반 부는 조금 지루하고 후반 부는 빠르게 진행되나 감정적으로 공감되기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연 강동원이 연기한 조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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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빈 감독이 설정한 이 영화의 대립 구도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도가 아니라 둘 다 갖지 못한 자들의 싸움 구도였다. 재산은 물론 먹을 것 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백성들과 처음 부터 서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던 이의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앞선 군도들의 이야기는 진정성이 미처 다 어필되지 못했지만, 그 반대 편에 서 있는 조윤의 이야기는 비교적 절제된 방식으로도 충분히 설명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후반 부의 클라이맥스에서도 도치가 아니라 오히려 조윤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결과까지 낳게 되었다. 솔직히 강동원이라는 배우의 연기가 100% 이를 가능케 했다기 보다는 조윤이라는 캐릭터와 강동원이라는 배우의 비주얼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다. 긴 도포를 휘날리며 신선처럼 걷고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를 겸비한 조윤은, 강동원이라는 배우를 통해 곱지만 강렬한 선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조윤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돌무치와 군도들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갖지 못한 것에서 시작되었기에, 말미에 가서도 그 반대 편에 서 있는 '적'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주인공 (사실상 주인공)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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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보니 차라리 더 조윤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캐스팅은 어려웠을 지도 모르지만, 조윤의 캐릭터가 워낙 강렬하다보니 조금 더 많은 비중을 조윤에게 할애하고 지금과 같은 구도가 아닌 조윤에게 더 포커스를 맞춘 구도였다면, 혹은 돌무치의 비중과 공감대를 조윤에게 버금가도록 끌어냈다면 (사실은 조윤을 넘어서야 하지만) 더 흥미로운 구도의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도'는 한 편으로 감독의 전작 '범죄와의 전쟁'과 닮아 있는데, 여럿을 등장시키면서도 그 균형점을 잘 잡아내었던 전작에 비해 이번 작품은 조금은 그 균형이 흔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조윤 때문이가. 극장을 나온 뒤로도 계속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영화이기도 하다.



1. 타란티노 스타일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텐데 (실제로 '장고'에 수록된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고), 그런 면에서 통쾌함을 주지 못했다는 건 아쉬운 점이었네요.


2.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극 중 캐릭터들의 나이였죠. 나중엔 이성민씨가 연기한 대호역시 25정도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요. 그 땐 정말 힘든 시기였나보네요;;;;


3. 처음 김성균씨가 등장했을 땐 까메오 정도인 줄 알았었는데 쭈욱 나오더라는. 결국 또 하정우의 오른팔인겁니까?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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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 (The King of Pigs, 2011)

그 때와 지금, 나는 어디에 있었나



연상호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한국 계급사회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다. 빈부격차, 권력으로 인한 계급차이 등 대한민국 사회에는 '계급사회'라고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을 만큼 그 그림자를 숨기고 있으며 (이제는 사실 더이상 숨기고 있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 이러한 계급사회를 꼬집는 작품들도 이미 여럿 있어왔다. 이러한 계급사회를 다룬 작품들은 주로 계급사회 자체를 주인공으로 하여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는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돼지의 왕'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돼지의 왕'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거다.


'그 때 너는 어디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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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오며 같이 본 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뭔가 찜찜한 느낌이야'. 나는 대답했다. '이 영화가 불편한 건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고, 떳떳하지 못한 마음의 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작품은 계급사회 속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개'들에게 용감하게 맞서 싸운 돼지의'왕'에 관한 영웅담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돼지의 '왕'마저 잠식해버린 '돼지'들의 관한 이야기다. 사실 확률적으로도 그렇고 청소년기를 보낸 대부분의 이들은 돼지의 왕이거나 개이기 보다는 돼지였을 것이다. 개들의 강압적인 태도에 공포를 느끼며 그저 이 시기가 빨리 지나기 만을 고대했던, 그냥 더 이상 볼일 없는 시간이 올 때까지 꾹꾹 참고 견뎠던 돼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돼지들에게는 극적인 스토리가 없어서 인지, 아니면 이 많던 돼지들이 어른이 되면 감쪽 같이 모두 다 돼지의 왕이나 개로 둔갑해서인지,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그리 주목하는 캐릭터가 아니었고 사람들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였다.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이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 돼지의 왕이 되지 못한 돼지들의 불편한 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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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돼지의 왕으로 등장하는 '철이'는 힘든 가정형편 속에서도 개들에게 홀로 맞서 싸우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자주 설명한다. '그 놈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이 때를 즐거운 추억이었노라 얘기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겠다'고. 이런 뉘앙스의 대사가 제법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나는 그래서인지 이 대사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이 계급사회에서 어디에 속했었는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는 계급사회가(지배세력인 개들이) 문제라는 얘기가 지속적으로 나왔음에도, 그에 반해 정작 (피지배 세력이라 할 수 있는)돼지들에 대한 깊은 성찰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철이의 대사를 연관지어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계급사회에서 지배층인 개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그 땐 그랬었지'하며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는 것도 물론 문제지만, 끝내 어른이 되어서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이 개였다고 거짓으로 말하고 다니거나 더 나아가 돼지의 왕이었노라 무용담으로 얘기하는 돼지들의 현실이 더욱 불편하고 쓰라리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는 계급사회 때문일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나선에서 아직 내려오지 못한 그리고 개가 되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이 돼지였노라, 그 때 미처 돼지의 왕과 개 사이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던 존재였노라 말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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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돼지의 왕'은 이런 돼지들의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수면으로 꺼내놓기 위해 스릴러라는 장르를 선택했다. 이 작전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이 작품을 소개할 수 있도록 만든 매우 영리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 걱정되는 것은 많은 관객들이 스릴러와 반전에만 집중해 작품 본연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할까 하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죽고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가 라기 보다는, 나는 그 때 어디에 있었고, 나는 그 곳에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돼지의 왕'이 그리고 있는 종석과 경민 그리고 철이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계급사회가 만든 희생양 혹은 불편한 진실 정도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것만으로도 괜찮지만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과연 돼지들이 정말 희생양일 수 밖에는 없었나? 라는 질문을 과감하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 때 나는 개들에게 강렬하게 저항해 본적이 있었던가, 말만 따라 그냥 시간이 지나 더 이상 볼 일 없게 될 날 만을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나? 라는 아픈 자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역시, 그러한 일들에 돼지처럼 그저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또 다른 돼지의 왕이 나서주기 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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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있게 글의 부제목으로 '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니?'라고 물을 수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 때, 그리고 지금. 나는 어디에 있었나.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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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Breathless, 2008)
폭력의 역사를 통한 가족의 탄생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던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는 그 제목 덕분에 일단 관심을 갖게 되었던 영화였다. 제목에 흥미를 갖게 되었을 때쯤 해외 유수 영화제의 수상 소식들도 부수적으로 들려왔는데, 그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까지는 할 수 없겠으나(오히려 이유라면 지인들과 취향이 비슷한 평론가들의 칭찬들이랄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연출과 주연을 맡은 양익준 감독은 이번이 장편 데뷔작이기는 하지만 인디 영화계에서 감독보다는 배우로서 더 인지도가 있던 인물이었다. 사실 처음 이 작품 <똥파리>에 대한 매우 소극적인 정보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단순히 폭력에 관한 이야기 일 줄로만 알았다. 메이저 영화에서는 잘 다루지 못하는 인디 영화만의 에너지와 이야기가 담긴 제법 괜찮은 영화일 줄로만 알았었는데, 막상 뚜겅을 열어보니 <똥파리>는 참으로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많은 작품이자 폭력과 가족에 대해 깊은 성찰이 담긴 영화였다.


(이후 부터는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는 여자를 때리는 남자와 이후 이 남자를 때리는 상훈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오프닝 장면은 영화에 대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집약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처음 남자가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만으로는 단순히 '폭력'에 관한 것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가해자가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에 폭력에 의해 피해자가 되는 상황은 단순히 '폭력'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폭력의 되물림'과 '폭력의 역사'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똥파리>가 단순히 폭력 그 자체만을 다룬 영화였다면 그저 용역 깡패로 살아가는 상훈의 일상적 에피소드를 전면에 배치해도 좋았을테지만, 이 영화가 말하려는 바는 그 자체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의미심장한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똥파리>는 크로넨버그의 영화처럼 폭력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이어져왔고, 인간 내면에서 살아왔는지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폭력의 역사를 통한 가족의 이야기,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포스터에 새겨진 저 문구는 참으로 멋지다.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보통 영화가 관심을 갖고 관객들이 호기심을 갖는 부분은 '세상은 엿같고'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 사실 <똥파리>를 보고 나니 그간 이 '엿같은 세상'을 사는 인물들을 그려낸 영화들이 초라하게 보일 만큼 그 자체로서는 적어도 이보다는 더 큰 의미를 갖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라는건 왠지 빠져나갈 수 없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엿같은 세상은 아무리 엿같아도 본인이 하기에 따라 즐길 수도 뛰쳐나갈 수도 있지만, 더럽게 아픈 핏줄은 어떻게 한다고해서 바꿀 수 있거나 탈출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양익준 감독이 만든 <똥파리>에서 이 더럽게 아픈 핏줄을 극복하거나 수용하는 방법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폭력의 역사'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현실들이다. 부모들의 싸움, 술먹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과 그로 인해 생긴 결손 가정. 그리고 나라에서 동원되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 세대가 겪는 아픔, 그리고 그 다음 세대가 그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들여하는 현실. 그리고 이로 인해 생긴 가난한 현실 역시 드러나고 있다. 이 같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결국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생각해보면 영화의 시작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폭력 자체에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내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 상훈이 이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 벌이는 피눈물나는 여정이며 결국 이뤘는지 이루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볼 만한 여정이다.

가난과 폭력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폭력으로 말미암아 생긴 가난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는 것이 폭력이다. 영화 속 상훈은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 속에서 자라 결국 가난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지만, 그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직업으로 갖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용역 깡패, 즉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해 돈을 버는 일이다. 이런 관계는 영재에게서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그 피해로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고 어머니는 이미 죽어버린 이 가정 속에서, 영재는 마치 상훈이 그랬던 것처럼 폭력으로서 세상에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상훈도 그렇고 영재도 그렇고 이 과정을 단순히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상훈이나 영재가 이렇게 폭력을 몸에 지니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가해졌던 폭력들 때문이며 자신 역시 폭력만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방법 밖에는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에 후반부 영재가 상훈에게 폭력을 가해 결국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깊다. 영재가 상훈을 공격했던 것은 단순히 돈을 훔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그저 혼내주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적당히 때렸어도 되었을터. 하지만 영재는 상훈이 죽음에 이르도록 폭력을 가하는데 이는 상훈에게로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가정에 대한 분노에로 향하는 폭력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영재가 상훈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동일한 메시지를 준다. 절대적인 폭력의 존재로만 보였던 상훈을 아직 미완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영재가 공격하는 장면은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결국 아버지 세대에서 가해진 폭력이 그 다음, 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영화의 마지막, 연희가 우연히 상훈과 똑같이 용역 깡패로서 활동하는 영재의 모습에서 상훈의 모습을 겹쳐보는 것은 굉장히 노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폭력의 되물림과 악순환. 아마도 상훈처럼 나중에야 이 폭력의 고리를 끊어야 겠다고 깨울칠 영재의 모습. 영화는 다 끝났다고 생각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되물림에 관한 아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따뜻하다'라고 느꼈던건 바로 주인공 상훈의 행동들 때문이었다. 상훈은 앞서 언급한 '엿같은 세상'을 그냥 막살고 말려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표현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되물림된 폭력의 사슬을 끊고, 이 모든 것을 잉태한 가족의 아픔을 다시금 새로운 가족의 탄생으로서 치유하고자 하는 인물에 가깝다.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 대사의 80%는 거의 욕설들로 채워져있다. 개인적으로는 욕설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을 때에도 잠시 머뭇거려지기도 했었는데, 영화 속 상훈의 대사는 분명 입에 담기 힘든 욕설들이기는 하지만 '똥파리'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그가 내뱉는 욕설은 단지 표현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마치 외국어나 사투리 등과 다르게 생각할 것이 없는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영화 초반 상훈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때에는 그가 내뱉는 욕설에 관객으로서 불편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점차 그를 알게 되면서 그의 욕설들은 대화 그 이상의 의미는 주지 않는다.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에서 주인공과 이탈리아계 이발소 주인이 나누는 대화가 욕설로만 느껴지지는 않듯이, 상훈의 욕설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일반적인 자존심 정도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일종의 필요악인 것이다.

그가 가족을 이루려는 노력은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배다른 누나의 아들인 형인을 아들같이 챙기면서 돈도 주고 아버지 노릇도 하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만약 일반적인 자존심으로 똘똘뭉친 인물이었다면 이런 노력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폭력을 되물림한 아버지에 대한 연을 끝네 끊지 못하는 심정도 그러하며, 연희와의 관계를 맺는 장면도 그러하다. 영화 속 상훈과 연희의 관계는 매우 독특하다. 일반적인 연인관계는 물론 아닐 뿐더러 단순한 남매같은 관계로 보기도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이 둘은 서로에게서 서로가 원하는 이상향을 발견한 듯 하다. 서로 모두 벗어나고만 싶은 현실에 놓인 이 둘은,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평가하지 않는 눈을 가졌으며 이 눈은 서로의 진심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이 둘은 지옥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순간에 가장 떠오르는 존재가 되었으며 표현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의지하는 관계가 된다.




영화 속에서 이 둘을 그리는 묘사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보통 치정극이나 영화에서라면 가만 두지 않았을 설정을 보기 좋게 무시해버린다는 것이다. 연희의 가정이 더 어려워지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인 연희 어머니의 죽음은 바로 상훈이 저지른 것이며, 상훈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은 다름아닌 연희의 동생 영재다. 보통 같았으면 이같은 관계설정을 영화 막판에 터뜨리면서 다시 또 하나의 갈등을 야기시켰을 테지만, <똥파리>는 이것에 집중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이렇게 얽혀버린 각자의 아픈 역사 속에서 상훈과 연희를 지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처마저 남기기엔 두 주인공의 현실과 짐이 너무 크게 느껴졌을 감독의 배려랄까(이런 점 또한 이 영화가 따뜻한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영화는 끝내 이런 사실을 주인공들에게 알리지 않은채 끝을 맺는다.

연희로 인해 조금씩 변화를 겪던 상훈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자살기도를 통해 자신의 숨겨왔던 진심을 드러내고야 만다. 앞선 과정들만 본다면 상훈은 자신에게 되물림된 폭력에 분노하여 어떻게든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이를 쏟아내려는 듯한 측면만 노출이 되지만, 사실 그는 이 더럽게 아픈 핏줄을 인정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이었고 자신은 이 폭력의 역사를 되물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와중에도 연희를 찾아간 상훈은 아무 이유를 말하지 않고 그냥 울기만 한다. 이것은 연희라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리라).

상훈이 맺는 결말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칼리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결국 용역깡패를 그만 두고 자신이 꿈꾸던 가족을 이뤄 정착하려고 드디어 마음을 먹은 상훈에게 이는 허락되지 않는다. 형인이 다니는 유치원 재롱잔치에 상훈의 누나와 연희, 그리고 용역회사의 사장이자 친구인 만식, 그리고 상훈이 초대된 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상훈이 꿈꾸던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었으며 자신의 대에서 끝내고 싶었던 폭력없는 가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훈은 여기에 오지 못한다. 또 다른 폭력의 되물림에 희생자인 영재가 가한 폭력에 사그라들고 만다.




그런데 인상적인건 이제부터다. 상훈이 죽고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이는 시점에 벌어지는 장면들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만식의 고깃집 오픈을 기념하려 모인 상훈의 아버지와 연희, 상훈의 누나와 형인의 모습 어디에서도 상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상훈의 죽음에 슬퍼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플래쉬백으로 스쳐 지나갈 뿐 고깃집에 모인 이들의 표정에서는 그 어디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인상깊게 볼 또 하나는 상훈의 아버지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폭력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 여기에 1세대이자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상훈의 아버지가 놓여있다. 이는 상훈과 상훈의 아버지는 결국 공존할 수 없음을 은연 중에 말하고 있는 듯하며 감독은 상훈의 아버지를 선택, 새롭게 탄생한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상훈이 스스로 자신 없는 가족을 꿈꿨다고 하기엔 (만약 그렇다면 이건 정말 슬픈 영화일듯)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상훈은 분명 상훈이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 본인이 있고 싶었던 것이고, 그것이 자신이 꿈꾸던 폭력의 역사가 지워진 새로운 가족이었을 것이다(상훈이 피범벅이 되어서도 조카 유치원에 가야된다고 중얼거렸던 것은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새롭게 태어난 가족에게는 여전히 불안요소가 있다. 영재는 이 가족에 직접적으로 속하지는 않았지만 상훈과 같은 폭력적인 전처를 그대로 밟고 있으며, 연희도 분식집 아르바이트로 생활이 갑자기 나아질리 없으며, 아버지의 언어폭력과 문제들은 여전할 것이다. 또한 상훈의 아버지 역시 완전히 죄를 뉘우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만약 그 자리에 상훈이 있었다면 좀 더 희망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관객이 바라는 장면일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 지겨운 폭력의 역사는 '똥파리(상훈)'가 사라지는 것으로 잠시 멈추었으며, 그가 꿈꾸었을지도 모를 새로운 가족은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올해 지금까지 본 영화들 가운데 올해의 '대화장면'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위의 사진 속 장면을 꼽겠다!)


1. 영화를 보고 리뷰를 다 쓰고나서 여기저기 리뷰를 읽어보니 감독의 개인적인 인생사가 많이 녹아있는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어떤 인생을 또 겪었을지 더 궁금해지네요.

2. 영화를 보고나서 고맙게도 무대인사자리도 함께 할 수 있어서 감독님과 주연배우분들도 직접 뵐 수 있어 좋았습니다!
   (똥파리 - 무대인사 사진 (2009.04.25, 아트하우스 모모)

3. 최근 본 영화들 가운데 가장 할 얘기가 많았던 영화였어요. 진짜 위 장면처럼 포장마차에서 양익준 감독님과 밤새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4. 제 취향은 역시 <워낭소리>보다는 <똥파리>인것 같습니다 ^^; (왠지 어감이 -_-;;)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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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우리 영화인 <똥파리>를 드디어 오늘(토) 감상하였습니다. 며칠 전 씨네토크 자리에는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해서 아쉬웠었는데, 오늘은 다행히도 무대인사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뜻깊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감독이자 주연을 맡은 양익준 감독님은 딱 보는 순간, 과연 영화 속 상훈과 저 사람이 같은 사람인가 할 정도로 웃는 모습이 선해보이고(?) 매력적이시더군요 ㅎ 유머를 섞어가며 거침없이 이야기하시는 모습에 영화를 막 보고난 감정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그 만큼 연기가 훌륭했다는 얘기도 되겠죠;). 관객과의 대화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작품의 의도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와 배우들의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꽃비씨도 참으로 아름다우 시더군요 ^^; 아역 연기자인 형인 역의 희수군은 나이가 안되어서 못봤지만 다들 재밌다고 한다며 영화 많이 홍보해 달라는 귀여운 멘트를 날리기도 ^^; 감독님은 지난 번 씨네토크때 댄스도 보여주셨다고 하는데, 오늘도 살짝이지만 나름 스텝을 보여주시기도 ㅎㅎ 다들 새벽까지 인터뷰와 각종 스케쥴들로 바쁜 와중에도 즐거워 보이는 듯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영화는 참으로 인상적이더군요. 폭력과 가족. 힘있고 따듯한 영화였어요. 자세한 리뷰는 자고 일어나서 써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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