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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하루 (Worst Woman, 2015)

해피엔딩이 필요해



'조금만 더 가까이 (Come, Closer, 2010)'를 연출했던 김종관 감독의 신작 '최악의 하루 (Worst Woman, 2015)'는 주인공 은희 (한예리)가 만나게 되는 세 명의 남자와의 이야기를 다룬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또 한 여자와 세 명의 남자가 얽히게 된다는 줄거리에서 쉽게 홍상수의 영화들을 떠올려 보게 되는데, 영화는 실제로도 중반까지는 어느 정도 홍상수 영화에서 느꼈던 남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한다. 그렇게 은희가 만났던 두 남자의 한 편으론 찌질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찌질하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남산을 배경으로 즐기고 있는데, 소설가인 료헤이 (이와세 료)의 이야기가 조금씩 짙어질 수록 '아, 이 영화는 무언가 결이 좀 다른데?'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 부에 등장했던 료헤이의 내레이션과 연습실에서 대사를 읊던 은희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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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가혹한 상황 속에 몰아 넣고 탈출할 곳을 주지 않았던 작가의 이야기와 할 때는 진짜인데 끝나고 나면 가짜인 것이 연극(연기)이라는 영화 속 대사는, 은희가 하루 동안 겪게 되는 이른바 최악의 사건들 그리고 또 다른 최악의 하루를 맞게 된 소설가 료헤이의 이야기와 겹쳐지면서 단순한 남녀 관계의 시작과 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방향성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게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보다는 오히려 이와세 료가 출연하기도 했던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같은 이유로 시달리는 것에 가까운 은희와는 정반대로 배경이 되는 도시의 작은 골목들과 그 속에 위치한 자연에 가까운 공간인 남산 산책로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복선으로 볼 수 있다. 그저 아름다운 영상미 만을 위해 활용된 것이라기 보다는 메시지가 주는 희망과 포용의 느낌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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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극장에서 그 해피엔딩이 언급된 대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속으로 생각하기에도 '어? 이건 좀 너무 갑작스러운데?' 라고 스스로에게 느낄 정도로 갑작스러운, 하지만 송곳 같이 마음에 다다른 대사가 바로 해피엔딩, 어쩌면 너무 뻔하고 순진하다고 자주 여겨지는 해피엔딩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영화 글을 통해서도 종종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대책없는 순진함 혹은 무턱대고 해피엔딩스러운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최악의 하루'에 담겨 있는 해피엔딩에 관한 내용은 분명 그것들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건 그냥 연출의 힘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갑자기 다른 시공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공기가 달라진 늦은 밤 시간의 남산 산책로에서 영어가 서투른 두 남녀가 각자의 하루를 돌이켜 보며 (그럼에도)행복을 찾고자 하는 그 간절함은, 급작스러울 수 있는 해피엔딩의 감성을 너무나도 정확히 관통시켰다. 행복한 결말을 맺는 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새겨보는 동시에, 영화를 만드는 작업 혹은 영화 속 인물을 연기하거나 소설 속 인물을 대하는 (행하는)방식과 태도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영화였다. 소품 같은 이야기와 전형적인 메시지를 너무 판타지적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알맞게 그려낸 매력적인 영화였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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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가까이 (Come, Closer, 2010)
가을로 위로하는 러브스토리


김종관 감독의 첫 장편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는 각기 다른 다섯 커플의 러브스토리를 느슨한 관계로 엮은 하나의 러브스토리다. '러브 액츄얼리'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과는 달리 인물들 간에 조금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확실히 좀 느슨한 관계로 이뤄져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조금만 더 가까이'는 전혀 다른 다섯 편의 단편으로 볼 수 있는 동시에, 하나의 장편으로 봐도 무리가 없는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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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에피소드는 작은 프레임 안에서 진행된다. 이 이야기는 노트르담에 폴란드인인 그루지엑과 서울 카페에서 전화를 받게 된 효서와의 통화가 전부다. 이 첫 번째 에피소드는 장편 '조금만 더 가까이'의 시작이자 느슨한 옴니버스의 키가 되는 에피소드이기도 한데, 일단 뮤직비디오 같다는 것 보다는 훨씬 더 나은 표현이 필요할 영상미 덕분에 금새 이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이 에피소드에서 프레임을 나누는 방식이나 대사를 나누는 방식은 마치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을 연상시키게 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가까이'라는 제목을 한 번 쯤 생각하게 한다. 그루지엑과 효서는 각가가 노트르담과 서울에 떨어져 있지만 이들에게 그 만큼의 거리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통화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 번 더 '조금만 더 가까이'라는 제목을 떠올려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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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게이 인 영수와 그의 여자후배 세연의 첫 섹스를 담고 있는데, 이 에피소드는 단순한 첫 경험이라는 것보다는 더 많은 미묘한 감정이 담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감정이 피부로 다 느껴질 정도로 (장면의 수위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들의 아슬아슬한 감정선 때문에) 정말 '떨리는' 순간을 담고 있다. 게이인 남자가 여자와 갖는 첫경험의 측면에서도 이 에피소드는 특별할 수 있겠지만, 이런 점을 생각지 않더라도 그 '떨림'과 주저함이 에로티시즘과 함께 맞물려 숨을 멎게 한다. 사실 이런 에로틱한 장면이 있는 작품인줄 몰랐기 때문에 조금 놀랐기도 했었는데, 그 몰입감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정말로 이 시퀀스가 완전히 다 끝나기 전까지 극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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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오 (윤계상)와 은희 (정유미)의 이야기는 어쩌면 가장 보편적이 되어버린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놓아주지 못하는 미련 등에 관한 에피소드인데, 영화는 여기서 자신만의 장점을 마음껏 드러낸다. 김종관 감독은 '조금만 더 가까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주 '공간'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 영화의 공간이 되는 장소와 거리 그리고 무엇보다 '가을'이라는 공간의 장점이 이 에피소드에서는 좀 더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비가 오고, 보케가 아름답게 펼쳐진 창밖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이야기는 마치 비내리는 가을 밤에 수줍게 흘러나오는 이른 입김처럼 관객에게 전달된다. 영화는 이 이야기가 만약 다른 계절과 배경에서 이뤄졌다면 과연 지금과 같았을까 라는 물음을 갖게 한다. 그 만큼 철저히 공간 안에 놓인 인물들과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런 이들의 이야기는 가을이라는 계절로 인해 위로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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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윤희석)과 혜영 (요조)의 이야기도 직접적인 가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단풍으로 젖어있는 가을 남산을 오르며 나누는 이들의 대화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 가을을 배경으로 했을 때 이들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추억과 기억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 장면은 '조금만 더 가까이'를 마무리하는 멋진 피날레가 된다.

사실 '조금만 더 가까이'를 보면서 스스로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내게는 항상 위로보다는 우울함과 쓸쓸함을 증폭시키는 매개체로 함께 했던 가을이라는 존재가 '위로'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함께 들었던 음악, 서로에게 상처주는 말을 남겼던 거리, 뜨거운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그 곳과 그 계절의 기운이, 특히 가을이라는 것은 매번 아름답지만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들이 위로가 된다는 영화의 감성은 그간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진행되었던 GV에서 김종관 감독은 유독 '거짓말'이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자신의 추억이나 경험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수 많은 거짓말들이 더해지게 되고, 그 많은 거짓말들을 통해 본래 하고자 했던 얘기를 결국 돌려 말하거나 말하지 못하고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 말이다. 이 글을 쓰다보니 어쩌면 가을에 위로받는다는 이야기 역시 또 다른 거짓말이 아닐까 싶었다. 아직까지 가을에게 위로받는다기 보단 그로 인해 아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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