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 (The Fighter, 2010)
가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


매 작품마다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크리스찬 베일과 (이젠 많이 지겨운 얘기지만) 화려했던 과거는 접고 배우로서 꾸준한 필모그래피를 보여주고 있는 마크 월버그, 그리고 에이미 아담스까지 출연하고 있는 데이빗 O.러셀의 신작 '파이터 (The Fighter)'는 라이트웰터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동생 미키 워드와 슈가 레이 레너드와 경기를 치르기도 했던 형 디키 애클런드의 실화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미키 워드는 'Irish'라는 별명으로 불리웠으며 아투로 가티와의 기념비적인 경기로 더욱 유명한 복서인데, '쓰리 킹즈 (Three Kings, 1999)'를 연출했던 데이빗 O.러셀 감독은 이 실화를 권투 영화로 그리지 않고 가족 영화로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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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파이터'에는 권투 영화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패배를 계속해 오던 복서의 재기와 성공, 마약 중독으로 힘겨워 하던 주인공이 이를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과정 등 시련을 이겨내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권투 영화와 스포츠 영화의 기본적인 줄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파이터'는 스포츠 영화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가족 영화의 측면에서 미키 워드와 디키 애클런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복서의 삶에 중심을 둔 스포츠 영화가 아니다보니 주인고은 오히려 미키 워드가 아니라 디키 애클런드에 더욱 가까워졌다.

둘의 비중은 거의 비슷하지만 후자에게 조금 더 힘을 실어주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비교적 보편적인 캐릭터인 미키 워드에 비해 디키 애클런드의 캐릭터가 훨씬 더 입체적으로 느껴졌기 때문, 그리고 놀라운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 덕이었다 하겠다. 크리스찬 베일은 체중을 자유자제로 조절하는 것과 더불어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파이터'에서 보여준 디키 애클런드의 연기는 그 가운데서도 기존의 그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크리스찬 베일이 주로 맡아온 역할은 (몸무게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주로 무겁거나 어두운 캐릭터가 많았는데, 그런 면에서 '디키 애클런드'는 경망에 가까울 정도로 가볍고 사고 뭉치인 동시에 떠벌이기 좋아하는 외향적인 캐릭터였기에 더욱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에 놀라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염 기른 점잖은 모습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던 그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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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의 본론인 '가족'의 이야기로 돌아와서보자면, 극 중 등장하는 미키의 가족 묘사가 매우 흥미로웠는데 아들을 끔찍히 아끼기는 하지만 너무 아낀 나머지 아들을 위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위한 인생이 되어버린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아버지에게서 나온 많은 누나들. 멜리사 레오가 연기한 어머니 역할과 여러 명의 누나들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다 (누나들은 여럿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마치 '하나'처럼 행동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의 캐릭터로 보기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 사실 이런 억척스러운 부분에 있어서는 외국의 경우보다는 우리 영화에서 더욱 자주 등장하고 보아왔던 문화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렇기에 이런 가족의 이야기가 우리의 입장에서는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데이빗 O.러셀은 이 가족이라는 캐릭터를 조금은 공포스럽게도 또 한 편으로는 코믹하게도 그려내고 있는데, 두 형제가 벌이는 갈등의 든든한 배경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갈등은 많지만 철옹성 같이 두터운 가족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고자 하는 '샬린 (에이미 아담스)'의 존재도, 이 가족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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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영화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파이터'는 가족이라는 선택할 수 없었던 운명을 굴레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이 마저도 극복해 나가느냐에 대한 과정의 이야기로 말할 수 있겠다. 극중 미키와 디키가 겪는 갈등의 핵심은 성공도 사랑도 아닌 바로 가족이다.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쉽게 떠나지 못하는 (떠난다는 그 말이 가족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 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미키와 가족에 모든 기대를 받았고 아직도 받고 있지만 이제는 그 자리를 자신이 아닌 동생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만 하는 디키, 이 영화가 선택한 과정은 챔피언으로 가는 여정이 아니라 가족 관계의 회복이었다. 만약 이 영화가 간절하게 챔피언이 되어야만 하는 미키 워드를 주인공으로 한 권투 영화였다면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가족은 아마도 일찌감치 그의 인생에서 배제되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키 워드는 가족족을 배제하지 않은 채 챔피언이 되길 원했고, 그 이야기 속에는 또 다른 복서였던 형 디키의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어쩌면 '파이터'는 결국 권투영화일지도 모른다. 미키와 디키 그리고 가족들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챔피언이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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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답게 영화의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기 전 실제 주인공들의 뒷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는데,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실제 주인공들의 모습을 스크린에 나타낸다. 영화를 보고 난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별다른 코멘트가 없어도 이들이 실제 미키와 디키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영화 속 처럼 활발한 모습의 디키와 이런 형의 넉살에 사람 좋은 웃음으로 넘기는 미키의 모습은, 그야말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에서만 만나볼 수 있었던 훈훈한 보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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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적으로 영화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 중 하나는 주인공들이 함께 아무말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장면인데, 이 영화에서도 디키와 엄마가 차 안에서 Bee Gees의 'I Started a Joke'를 부르는 장면은 역시나 인상적이었어요. 평소에 좋아하던 곡이라 더욱 그랬구요. 여기에 Red Hot Chili Peppers의 'Strip My Mind'까지 나와서 황홀!

2. 하도 가족영화, 가족영화해서 권투영화로서의 장점을 조금 보태보자면, 극중 권투 경기 장면은 실제와 같은 현실감을 주기 위해 당시 방송촬영 영상을 컨셉으로 수록되었습니다. HBO의 유명한 방송스타일 말이죠.

3. 극중 등장하는 슈가 레이 레너드는 실제 그가 연기하기도 하였습니다.

4. 극중 디키가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던 슈가 레이의 다운 장면. 이것이 슬립 다운인지 넉다운인지는 직접 판단하시길.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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