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Drive, 2011)

이토록 황홀한 아름다움



매년 백 편이 넘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게 되면 그 가운데에는, 하마터면 놓칠 뻔 했으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스크린을 통해 보게 되는 감격을누리고 있구나 라고 실시간으로 체감하게 되는 작품이 한 두 작품 나오기 마련인데, 올 해는 아마도 이 영화 '드라이브 (Drive, 2011)'가 아닐까 싶다. 처음 11월에 봐야 할 영화 목록에 '드라이브'는 없었다. 그저 캐리 멀리건이 나오는 영화라 한 번 보고 싶기는 했지만, 더 보고 싶은 다른 작품들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만 같아 결국 다음으로 미루는 것으로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적은 상영관을 통해 (왜 항상 좋은 영화의 상영관 수는 이리도 적은 것일까!) 이미 본 이들의 반응을 보니 '엇, 이거 그냥 지나쳤다간 나중에 큰 후회를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안봤으면 큰 후회 정도가 아니라 계속 재개봉이라도 혹시 안하나 하는 마음으로 영화제 상영작 리스트를 체크하고 다니는 날들이 계속될 뻔 했을 정도였다. 쟁쟁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올해, 개인적으로는 올해의 영화의 손꼽는 후보작이 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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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팬들이라면 아마 '드라이브'에서 여러 영화의 감각과 향이 느껴질 것이다. 어두운 도시의 밤을 배경으로 조용히 (정말 조용히) 달리는 자동차와 한 남자. 그리고 핑크색 컬러로 뿌려지는 오프닝 크래딧과 마치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감각의 배경음악까지. 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드라이브'는 이미 오프닝만으로 관객을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마치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를 연상시키는 오프닝의 감각과 구성은 영화를 내내 감싸고 있는데, 이것 만으로도 '드라이브'는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주인공의 모습이나 포스는 '첩혈쌍웅'으로 대표되는 당시 홍콩 느와르 영화 속 주윤발의 그것을 정확히 떠올리게 했다. 입에 문 이쑤시게가 오히려 너무 노골적으로 느껴져 없었어도 충분한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드라이브'의 라이언 고슬링은 주윤발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당시 홍콩 영화를 즐겨봤던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당시 영화 속 주윤발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적 무언가가 충만한 이미지였다. 물론 라이언 고슬링이 이 한 편 만으로 시대를 관통했던 주윤발의 아우라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 홍콩 느와르 속 주윤발이라는 캐릭터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배경과 시대에 다시금 불러와 소화해 냈다는 점만은 이야기할 수 있을 듯 하다. 말 한 마디 보다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미세한 동선의 차이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라이언 고스링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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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러티브 측면에서 보자면 '드라이브'는 상당히 간과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은 편이다. 극중 라이언 고슬링과 캐리 멀리건이 가까워지는 속도에 있어서도 영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쿨하게 넘기고, 이름도 없이 그저 '운전사'로만 불리는 라이언 고슬링의 과거에 대해서도 영화는 거의 정보를 주지 않고 그저 분위기로만 슬쩍 풍길 뿐이다. 그리고 이 드라이버가 처하게 되는 상황의 큰 그림에 있어서도 영화는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는다.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영화는 뚝뚝 끊겨서 불편하고 주인공들에게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빠져들지 못하고, 결국 결론에 가서도 무슨 영화를 본 건가 싶어야 맞을 텐데, '드라이브'에게는 이런 점이 발견되기는 커녕 오히려 매우 깊은 만족감을 전해 준다.


또한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마치 주윤발이 주연을 맡은 '블레이드 러너'를 베이스로 하여,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 도시의 밤을 그리는 데에서는 마이클 만을, 그리고 폭력을 묘사하는데에 있어서는 크로넨버그마저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터미네이터'의 느낌마저 풍길 정돈데 (이 영화는 묘하게도 몹시 SF영화스럽다), 이런 점들 역시 말로만 전해 들으면 장점들을 다 가져다 놓기는 했으나 조합 측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번잡스러워 실패하는 경우가 아닐까 싶지만, 이 영화는 놀랍게도 거장들의 인장 과도 같은 장점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다 흡수해 소화까지 시켜버린 경우라고 하겠다. 즉, 이건 이 작품을 연상시키고, 이건 이 감독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럼에도 '드라이브' 자체는 독립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얘기다. 아... 이 얼마나 황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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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화를 본 소감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황홀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최근 본 영화 가운데 테랜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의 '황홀경'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의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드라이브'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듯 싶다. '트리 오브 라이프'의 경우 담고 있는 주제와 포괄하는 범위 자체가 근본적 아름다움과 우주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황홀경'을 담아내기에 비교적 용이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반 면, '드라이브'는 매우 상업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범죄, 액션, 로맨스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그와 동등한 영화적 아름다움을 담아냈다는 점이 이 영화가 칸에게도 선택 받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이 작품으로 감독 니콜라스 빈딩 레픈은 올해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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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는 첫 인트로 부터 액션과 스릴러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풍기고 있는 그 아름다움에 손에 땀을 쥐었던 흔치 않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극장을 나오며 '머니볼'의 대사 마냥 '이래서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라고 되내일 수 밖에는 없는 '황홀한' 작품이었다. 강력한 올해의 영화 추천작!



1. '황홀하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많이 쓴 리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어요, 황홀하니까!

2.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입할 예정입니다. 아마존으로 가야할듯.

3. 라이언 고슬링이 입고나온 그 스콜피온 점퍼! 저 점퍼 입는 다고 영화 속 고슬링처럼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소장하고 싶은 아이템이네요 ㅎ

4. 극장에서 벌써 대부분 내린 것 같은데, 꼭 상영관을 찾아서 한 번 더 보고 싶네요 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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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보이 2 : 골든 아미 (Hellboy 2: The Golden Army, 2008)
소박하고 사적인 영웅담


개인적으로 올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를 제외한다면, 가장 기대했던 블록버스터 영화는 바로
길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헬보이 2: 골든 아미>였다. 원래 주류보다는 비주류, 평범한 것 보다는 약간 이상한 것, 뻔한 것 보다는 특별한 것을 즐기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요상한 것들을 창조해 내는 데는 장인 수준에 다다른 델토로 감독의 신작이 기대될 수 밖에는 없었고, <헬보이>가 기대보다는 조금 심심했던 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속편이 좀 더 기대되던 바였다.


1편에서는 뭐랄까 헬보이라는 캐릭터와 그 역사와 배경에 대해 설명을 해야 되는 것도 있었고, 리즈 와의 관계 또한 처음 부터 보여주어야 했었기 때문에 재미 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길예르모 델토로 감독 작품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기대되는 창조적이고 아름답기 까지 한 기이한 캐릭터들과 역시 어두움을 근본으로 하고 있음에도 시각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디자인 적인 요소가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영화 자체도 무언가 심심하고 아쉽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런 면에서 <헬보이 2 : 골든 아미>는 기대했던 창조물들이 제법 등장해주어서 매우 반가웠으며, 내가 좋아하는
(특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영화에서 등장 할 때 더욱 반가운) 뻔하지만 눈물 나는 장면들이 포진되어 있어서, 기대하지 않았던 감성까지 자극 받았던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영화의 부제는 '골든 아미'인데, 이것은 마치 국내 개봉 시에 홍보 측면에서 떡밥을 강화 시키기 위해 추가한 제목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실제적으로 영화에서는 부제로 쓰일 만큼의 강력한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한 듯 하다)

사실 1편을 다시 떠올려 보면 주인공인 헬보이와 같은 편인 에이브, 그리고 몇몇 악당들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인상 깊은 캐릭터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신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신화 속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뛰어 들지는 않고  그 신화 속 인물들이 현대의 도심에 나타나 벌이는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이렇다 할 아기자기함과 디테일은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이번 속편에서는 이런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수준의 이야기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단 다시 한번 헬보이의 출생 과정을 짧게 나마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번 영화의 주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요정(요괴?)들의 오랜 전쟁과 협약에 관한 전설, 그리고 여기에 연관되어 있는 바로 그 '황금 군대'에 관한 설을 풀어놓으며, 무언가 미지의 것들이 등장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깔고 시작한다.

이를 통해 이 오래된 요정의 왕조가  현대에도 도심 지하 어느 곳에서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정과 '당연히' 봉인된 골든 아미를 부활시키려는 누군가가 있어 이를 두고 헬보이 일당과 대결을 벌이게 된다는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여기저기서 많이 등장했던 가장 뻔한 스토리이기도 하다. 특히나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인간들처럼 보이나 사실 알고 보니 트롤들이 인간 행세를 하고 다닌 다는 설정은 어렵지 않게 <맨 인 블랙>들의 외계인을 떠올릴 수 있으며, 왕이나 왕자 등 어떤 오랜 역사를 지닌 암흑 세계의 일파나 일족들이 도심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설정 또한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언더월드>나 <블레이드>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한다. 뭐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여기에 포함된 러브 스토리 요소는 더욱 뻔한 것이기도 하다.


(헬보이 2에는 길예르모 델토로 하면 떠오르는 아기자기하고 기이한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몇몇 캐릭터의 디자인은 감독의 전작 <판의 미로>를 떠올리게 했으며, 위의 스틸컷에 등장하는 캐릭터에서는 데이빗 보위, 제니퍼 코넬리 주연의 1986년작 <라비린스>를 떠올릴 수도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 자체가 그리 독특하거나 새로운 것은 아님에도 <헬보이 2>가 달리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앞서서도 언급했던 것 처럼 길예르모 델토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어둡고 기이하면서도 창조적인 캐릭터와 세계의 디자인을 들 수 있겠다. 이번 영화에서는 본격적으로 이 요상한 것들의 세계가 등장하는데, 단순히 도심으로 뛰쳐나온 소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들의 세계에 헬보이 일당이 쳐들어가는 시퀀스라, 델토로 만의 아기자기함을 여기저기서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길예르모 델토로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마음에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요상한 캐릭터들이 상당히 아날로그 적이고 마이너한 감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스틸컷 설명에서 말한 것처럼 <라비린스>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 디자인도 엿볼 수 있었고, 아래 등장하는 대형 돌무대기 캐릭터나 몇몇 캐릭터들에서는 유명한 판타지 어드벤처의 고전인 <네버엔딩 스토리>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그럼, 델토로의 캐릭터는 어차피 다 여기저기서 배껴온거라는 건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는데,  고전 SF영화들의 비주류 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는 것 뿐이지 절대 배꼈다고 말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미믹>부터 시작해 <판의 미로>까지 델토로 감독의 작품들과 DVD의 서플먼트를 통해 알 수 있었던 바로 미뤄볼 때, 델토로 감독은 영화 자체를 완성 시키는 것 만큼이나 기이한 캐릭터들을 만드는데 신경을 쓰고 있고, 그것 자체에 희열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예전에 보았던 영화에 그 캐릭터 좋더라 는 식으로 쉽게 소비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반대로 델토로 감독은 어떡하면 평범해 보이지 않고 좀 더 이상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 까를 머리를 쥐어 짜며 고민하는 감독이며, 일부 배우들에게서는 '괴물에 너무 집착 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스토리텔링 만큼이나 디테일한 판타지 세계 구현에 애쓰고 있는 감독이라 하겠다(그래서 그의 차기작 <호빗>이 너무도 기대되는 바이기도 하고).

(로케이션 정보를 보면 북아일랜드에 위치한 'giant's causeway'에서 촬영한 것 같은데, 로케이션 촬영이 많지 않고 또한 있어도 거의 밤 장면이 대부분이다 보니, 환한 로케이션 촬영 장면이 아주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골든 아미'도 그렇고,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만약 헬보이가 TV시리즈라고 가정 했을 때,
매우 특별한 날에 방영되는 특집 에피소드라던가 아니면 극장용 버전에 지나지 않는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상 이 이야기는 헬보이 자신과는 직접적으로 별로 연관이 없고(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비밀 특수 요원으로서 헬보이가 또 한번 해쳐나가야 할 하나의 '껀수' 밖에는 되지 않는 다고 봐도 될 정도다. 뭐 이런 식으로 따져보자면 많은 시리즈물들이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를 극대화 화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겠지만, 헬보이라는 캐릭터의 특성으로 보았을 때 무언가 좀 더 전설과 신화와 연관되어 헬보이라는 캐릭터에 더욱 밀접한 이야기로 끌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3편에서는 1편부터 계속 암시를 주었던 헬보이의 운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한 편으론 이런 에피소드식 이야기가 성에 안 차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이런 방식이 <헬보이 2>가 좋았던 다른 이유에 가장 근본적인 점도 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여겨진다. <헬보이 2>에서 헬보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일반적인 영웅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그저 그가 모습이 이상하고 악마의 아들이라는 베이스가 있다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그가 악당을 물리치는 방식이나 그 마인드에 있어서는 기본적 영웅들과는 매우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이런 점을 숨기지 않고 겉으로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텐데, 정의감에 불타거나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걸고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의 모습 이라기 보다는, 그저 '초자연 연구 방어국(BPRD)'에 속한 '직원'으로서 업무를 해결하는 것 정도의 느낌이 더 강하다. 이런 점에서 <맨 인 블랙>과의 비슷한 느낌도 받을 수 있겠는데, 헬보이는 이 영화에서 악당에 위치에 있는 누아다 왕자에게 어떤 원한이나 감정도 없으며, 오히려 동질감 마저 느낄 정도의 대화를 들려주기도 한다.  즉 '세상을 구해야지'하는 정의감 보다는 그저 '피하지 못할 바에야 즐기자'하는 식이 더욱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히어물에 비해서는 좀 더 절절함이 부족한 것도 사실인데, 오히려 그게 <헬보이 2>만의 쿨한 장점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완전 소소한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은 아니다. 마치 <다크 나이트>처럼 좋은 일을 하고도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헬보이는, 괴물을 죽이기 전에 왜 죽여야 하냐에 대해 고민도 하게 되고, 너도 어차피 인간들에게는 불청객일 뿐이다, 넌 우리과야 라는 식의 누아다 왕자의 말에 진심으로 흔들리기도 한다. 이런 정체성의 고민은 1편부터 계속 갖고 있던 것으로 나중에 어느 순간 이를 본격적으로 다룰 시점이 왔을 때를 위해, 짧은 분량이지만 가볍지 않게 다루고 있다.

(누아다 왕자와 골든 아미의 이야기는 제법 흥미로우면서도 뻔한 이야기이긴 했지만, 반드시 서사적으로 헬보이 영화에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약간의 스포일러성 장면 묘사가 있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 ^^;)

이렇듯 정의감 보다는 그저 즐기는 헬보이 이다 보니, 이 영웅담도 매우 사적으로 흐를 수 밖에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론 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연출이 매우 마음에 들기도 하였고. 1편에 비해 헬보이와 리즈의 관계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가 비중있게 그려지고 있으며, 전작에서는 그저 특수한 능력을 지닌 헬보이의 동료 중 하나 정도로만 그려졌던 에이브도 나름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비중 있는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건 한 명은 악마의 아들 이고 또 한 명은 물고기의 특성을 갖고 있는 독특한 캐릭터인 이들이, 매우 사적으로 돌아가 자신들만의 고민을 토로하는 장면이었다. 다른 타이틀 다 재치고 그저 남자라서 고민하는 것들. 좋아하는 여성과의 이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겪게 되는 남자들의 고민. 이를 술로 달래며 동병상련을 겪는 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흐뭇하고 아름답게 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영화 속에서 노래하는 장면을 특히나 좋아하는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파이더 맨 2>의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그랬고, <월-E>의 등장했던 <헬로 돌리>속 'Put On Your Sunday Clothes'가 그랬듯이, <헬보이 2>에서도 사랑에 아픔과 설레임을 겪는 두 남자가 한껏 소리내어 부르는 베리 매닐로우의 'Can't Smile Without You'는 약간은 생뚱맞아 보이기도 하지만 아련하고 따뜻한 감성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어찌나 온몸에 소름이 돋던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절로 미소 짓게 될 정도로 따뜻하면서도 애잔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던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쿠쿵'하는 웅장한 음악이 아닌 이런 말랑말랑 팝발라드가 흐를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헬보이 2>를 보고 아련한 감성을 느껴 소름이 돋았다고 하면 어디 가서 이상한 사람이라고 소리 들을지는 모르겠으나, 좋아하는 영화는 매번 영화적 감성을 120% 이상 흡수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ㅠㅠ

(저 갈퀴 달린 파란 손으로 '러브 히트송' CD를 야무지게 꼭 감싸 쥐고 있는 에이브의 모습을 보라. 그리고 동네 어르신처럼 건 하게 취해 벌건 얼굴이 더 벌게진 헬보이의 모습도 참으로 흐뭇하지 않을 수 없다~)

예고편이나 제목에서 보았을 때, '와, 저 무시무시한 골든 아미와 헬보이가 신나게 한 판 벌이는 모양 이구나'하고 기대했었으나 뭐 그 정도로 기대할만한 액션은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다만 누아르, 아니 누아다 왕자와의 1:1 대결 장면이 사실상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데, 마치 홍콩 무협영화를 보는 듯한 대결씬을 연출하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나 헬보이라고 하면 빠른 몸 놀림 보다는 느리지만 강력한 파워 만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결투 씬에서는 누아다 왕자의 빠른 몸 놀림 못지 않은 날렵한 몸 놀림을 선보여,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대결 장면을 선사하고 있다.

아까 베리 메닐로우의 곡 얘기를 하면서 영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다 하지 못했는데 추가해 보자면, 이 영화는 초반부터 상당히 의외로 최신 경향의 록 음악이 삽입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 이런 블록버스터 히어로 물이라면 보컬이 포함된 록이나 팝보다는 장엄한 오케스트라가 위주가 된 영화 음악이 쓰이는 것이 대부분인데, 마치 트랜드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록 음악이 사용된 장면들은 다소 의외였다. 아마도 이것 역시 '헬보이'라는 캐릭터와 영화를 거대하고 무거운 영웅담만으로 포장하기 보다는 쿨 하고 소박한, 다른 히어로물과는 차별 되는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사용된 것 같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헬보이'라는 이야기는 어차피 어두운 결말을 어쩌면 처음부터 준비해야만 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막판에 몰아서 심하게 어두울 공산으로(1,2편에서 '그렇게 쿨 하던 헬보이가...' 하며 더 슬퍼질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12세 관람가라는 낮은 관람가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길예르모 델토로 감독이라면  12세 관람가 보다는 더 높은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영화에서 좀 더 장기를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한데, 액션 장면 등에서도 낮은 연령대에 맞추어 이렇다 할 강한 표현이 없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판의 미로>의 '판'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죽음의 천사' 캐릭터의 모습. 이 캐릭터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독특하고 환상적인 모습 때문에 단번에 뇌리에 각인되고만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다)

헬보이 역할을 맡은 론 펄먼의 경우 <헬보이>이전에도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에이리언 4>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이 중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인상을 주었던 작품은 아무래도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였다)등 여러 영화들에서 인상 깊게 보았었는데 <헬보이>이후에는 저 벌건 분장이 너무 익숙해서 인지 원래 그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매우 독특한 마스크를 지닌 배우임에도 불구하고)헬보이 캐릭터로 금새 깊이 각인이 되어버린 듯 하다. 1950년 생으로 나이도 많으신데 저런 분장과 액션 연기를 다음 작품에서도 소화해내실 수 있을지도 살짝 걱정이고. '죠커'에게서 히스 레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처럼, 어느새 부턴가 '헬보이'에서도 론 펄먼의 이미지를 찾아보기가 어려워 진 것 같다. <헬보이>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론 펄먼이 분장했구나 하고 바로 느꼈던 것과 비교하자면, 이번 <헬보이 2>를 보면서는 전혀 론 펄먼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 리즈 역을 맡은 셀마 블레어도 나쁘지 않았고(개인적으로 리즈 역을 아시아 아르젠토가 맡고 18세 관람가로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해본다;;), 에이브와 챔버레인, 죽음의 천사까지 1인 3역을 맡은 더그 존스의 연기도 골룸 연기와 킹콩 연기로 이름을 알린 앤디 서키스에 버금가는 또다른 전문 연기자로 발돋움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존 허트는 전편에 이어 헬보이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브룸 교수 역할로 출연하고 있다.


<헬보이 2 : 골든 아미>는 분명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히어로 물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여름 블록버스터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12세 관람가라는 낮은 연령대에 맞추기 위해, 많은 것을 절제하고 있는 시리즈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지금의 버전도 매우 좋지만, 앞서 말한 두 가지 조건에 상관없이 길예르모 델토로 감독에게 만들어보라고 하면 좀 더 마이너하면서도 더 농도가 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된다.

<헬보이 2 : 골든 아미>를 보러 극장을 찾으면서 기대했던 것은 델토로 만의 아기자기한 캐릭터의 맛, 그것 뿐이었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 짠한 감동마저 전하는 이야기에 더욱 반하게 되어버렸다. <헬보이 2 : 골든 아미>역시 남에게 쉽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못될지 몰라도, 나는 꼭 한 번 더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인 것 같다 ^^;


1. 필름 상영으로 보았는데 디지털로 상영하는 곳이 있나 한번 찾아봐야겠다.
2. 만약 3편이 나오고, 3편이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라면, 아마도 3편이 가장 길예르모 델토로 스럽고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될 듯 하다.
3. 그래서 약간 심심하게 보았던 1편도 블루레이로 슬슬 구매를 알아봐야겠다 ;;
4. 지겹고 평소에 별로 안좋아하던 곡들도 영화에 잘 녹여내면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걸 또 한번 새삼 깨달았다 ㅎ
5. 취향이란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건 뭐 이래저래 아쉬운 점을 늘어놓긴 했지만 내 취향 --v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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