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Pool, 2009)
꿈만 같은 치유의 슬로우 무비



태국의 '치앙마이'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 한 여자가 도착하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알고 보니 이 여자 사요는 이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인 쿄코의 딸이다. 손님 없는 한적한 게스트 하우스에는 일을 도와주는 이치오와 가끔 놀러오는 키쿠코 그리고 어린 태국 소년인 비이가 함께 살고 있다. 

오모리 미카 감독의 '수영장 (Pool, 2009)'의 이야기 구조는 사실 위의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미약하나마 갈등의 구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가 '카모메 식당'과 같은 선상의 프로젝트로 기획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슬로우 무비'의 전형을 맛볼 수 있다. 이미 전작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슬로우 무비가 담고 있는 '치유'의 과정은 갈등을 극적으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지루하리만큼의 여유로움을 통해 절로 아무는 과정이라고나할까, 아니 더 나아가 갈등 극복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유 그 자체가 주인공인, 그래서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조제. All rights reserved
 

일본 영화에서는 자주 소소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기는 하지만 '수영장'은 그 가운데서 가장 느린 영화 중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앞서 '지루하리만큼' 여유로운 영화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기존의 영화들이 너무 자극적이기만 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매번 영화를 통해 '무언가 더! 더!' 만을 바라며 오감을 자극하는 민감한 것들에만 반응하느라 자칫 잃어버릴 수 있었던 혹은 누군가는 이미 잃어버렸던 느린 템포의 여유를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얘기다.

확실히 이런 '슬로우 무비'를 지향하는 작품들은 극중 캐릭터들 간에 감정을 주고 받는 것 보다,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감정이 더 도드라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게스트 하우스에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들 믿기 힘들 정도의 여유를 한껏 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현재가 마냥 평온한 것 만은 아니다. 영화는 그런 배경을 아주 살짝 드러내는 것에 그치는데, 이 작은 단서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자세와 마음가짐에 따라 스스로를 온전히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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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의 가능성을 돕는 장치 중 첫 번째는 바로 태국 '치앙마이'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 그 자체를 들 수 있겠다. 손님 하나 없고 자연과 맞닿아 있는 이 게스트 하우스의 정경은 그 것 만으로도 여유가 가득 느껴질 만큼 평화롭고 심지어 고요함까지 느껴진다. 리뷰의 부제목을 '좋은 아침의 영화'라고 쓰려고 했을 만큼 '수영장'에는 아침인사 (ぉけょぅ)가 자주 등장한다.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인사말이 여러 번 등장할 만큼, 이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얘기하면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인사말이 형식적인 인사로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좋은 아침'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을 보고 이렇게 만든 요리를 둘러 앉아 맛보고, 근처에 살고 있는 고양이와 개들과 자연스럽게 공생하며, 수영장에 함께 모여 말없이 함께 노래할 수 있는 분위기 그리고 평화로움. 삶에 지쳐있는 관객들에게 이런 여유로움은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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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요리들이다. '카모메 식당' '안경' '심야식당'의 음식을 담당했던 푸드 스타일리스트 이이지마 나미가 만든 요리들은 전작들처럼 그 자체로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이 느리고 여유있는 삶을 더욱 동경하게 만드는 강력한 장치로서 작용한다. 단순한 '음식'이 아닌 '요리'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순간을 맛볼 수 있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 영화에서 이이지마 나미의 요리는 그 과정 없이도 '슬로우 무비'를 대변하는 중요한 요소다. 

마지막으로 '수영장'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음악, 노래다. 영화에는 두 번 정도 인물들이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첫 번째는 쿄코가 혼자 기타치며 노래하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장을 배경으로 쿄코와 사요, 이치오, 비이가 함께 노래하는 장면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두 번째 장면을 내 인생의 장면 중 한 컷으로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운 장면은 그 어떤 영화적 장치도 인물들의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지만, 비이가 몸을 살랑살랑 흔드는 작은 움직임과 넷이서 입을 맞춰 함께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영화라는 장르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그리고 여유라는 것이 어떤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것인지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자연과 사람 그리고 이를 더 완벽한 하나로 만들어주는 음악. 이 장면은 완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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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수영장'은 보는 내내 평화로움이, 보고나서는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평온함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이 되어다. 답답하고 빠르게만 치닫는 삶 속에서 훌쩍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마다, 이 영화의 여유로움과 아침의 공기를 떠올려보게 될 것 같다. 아마 그것 만으로도 내 삶은 더 평온해지지 않을까.


1. 물론 그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들 땐, 무리해서라도 치앙마이로 떠날 수도 있죠;;
2. 아니면 이 유튜브 영상을 무한반복 하거나요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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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それでもボクはやってない, 2007)

<으랏차차 스모부> <쉘 위 댄스>로 일본 내에서도 코미디와 드라마를 오가며 큰 인정을 받고 있는 수오 마사유키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카세 료의 영화이기도 하구요.
제목과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일본의 사법재판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강하지만 조용하게 비판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일단 이 영화가 의외스러웠던 것은 앞선 영화들처럼 주로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왔던(코미디 영화가 아닌 
영화들에서도 유머러스함을 언제나 숨기지 않았던)수오 마사유키 감독이, 이렇듯 심각한 주제와 법정드라마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배우란 어차피 감독과 작품에 따라 연기변신을 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기까지
하지만, 감독의 경우는 자신 만의 스타일이나 세계에서 쉽게 벗어나기도, 전혀 다른 이야기나 장르의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도 드물 뿐더러 결과물들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도
걱정이 되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올해 본 영화들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수작이었으며,
특히 이렇다할 영화적 장치 없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구성되어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와 분노를 동시에 일으키는
순작용을 만들어낸 영화였습니다(여기서 분노란 영화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영화 속 이야기에 의한 분노죠).




잘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는 어느 출근 길에 만원 지하철에 탔던 텟페이(카세 료)가 한 여학생으로 부터 치한으로
오해를 받게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고 이후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벌이는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이 과정 속에는 그 어떤 영화적 장치들도 없고, 관객의 감정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설정된 장면이나 이야기도 없습니다.
감독인 수오 마사유키는 일본 사법재판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알게 된 뒤 200건에 달하는 재판에 참가하면서
실제로 어떤 일들이 재판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떤 이 제도의 문제점이 정확히 무엇이며 어떤 개선
여지가 있는지를 파악한 뒤, 이 이야기를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죠. 그래서 영화는 어찌보면 시종일관
참으로 답답하고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보듯 혀를 차게 만듭니다.

사실 이 영화처럼 감상기의 내용과 영화 속 텍스트가 중복되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극 중 인물들의
대사나 독백등을 통해 감독은 물론, 관객들이 하고자 하는 말까지 모두 다 담고 있습니다. 그 만큼 감독이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흔히 법이라는 것을 적용할 때, 죄인에게 유죄를 어떻하면 선고할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죄가 없는 이들이
어떻하면 유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는 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물며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의
생각도 이런데, 그 가장 가까이 있는 법을 집행하는 이들의 관심은 더더욱, 유죄에만 관심이 있을 수 밖에는 없는 것이죠.
죄인을 잡아다놓고 무죄라고 판명해 버리면, 자신들의 경력에 흠이 생기게 되고 능력없는 검사, 재판관으로 평가받으며,
결과적으로 정부 권력에서 집행한 선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은 영화 속에서도 언급되듯이 99.9% 입니다. 극중 야쿠쇼 쇼지의 대사처럼 '이 99.9%라는 것이 확률이 아니라
전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죠. 결국 그 0.1%의 케이스가 자신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며, 대부분이 유죄를
받을 죄인들이기 때문에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경우에도 공정하게 재판받지 못한 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억울하게 유죄를 선고받은 이는 자신이 스스로 무죄를 입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죠.
이 영화의 주인공인 텟 페이의 여정은 바로 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텟 페이도 처음에는 '자신은 정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차피 재판으로 가봐야 무죄를 받을 가능성은 없으니, 그냥 유죄를 인정하고 보석금을 내면 당일날 풀려날 수
있다는 당직변호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은 '정말로'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당연한 생각을 하고 있던 텟페이의 생각이 옳았느냐를 넘어서서, 얼마나 힘든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선택이었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판을 받기 전이라면 당연히 무죄 상태로서 죄인 취급을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맞지만, 법 제도는 일단 유죄로 판명하여
아직 재판을 받기 전이라도 유치장에 몰아넣고 중범죄자들과 똑같이 취급을 하게 됩니다. 영화는 좁은 유치장에서 생활하고,
취급받는 텟 페이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줍니다. 텟페이는 이 같은 취급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이런 잘못된 시스템을 돌아보게 끔 하는 계기가 됩니다. 영화적인 요소를 더 살리려고 했다면,
텟페이가 강하게 반항하고 소리지르며 무죄를 입증하려고 했겠지만, 극중에서는 거의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실제로 텟페이와 같은 현실에 놓여지게 된다면, '자신은 정녕 무죄이기에' 얼떨떨함에 아무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영화는 텟페이만을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억울하게 잡혀 있는
존재에 대한 시선도 있지만, 그 만큼이나 그로 인해 고통받고 변해버린 주변 사람들에게도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아무 생각 없이 지내던 친구가 어느새 완전히 법 전문가가 되어 있다던가, 출근길 복잡한 지하철 역에서
광고판을 몸에 쓰고 목격자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어머니와 친구의 모습을 보면, 이 잘못된 시스템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격지 않아도 될 고통을 주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과정을 그리는 수오 마사유키의 시선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조금도 극적이지 않고 조금도 더하거나 줄이지 않는 것 만으로도 관객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자신과 메시지의 힘을 믿었던 것이지요. 결국 어머니가 유죄선고를 받고 울부짓을 때보다도 처음 광고판을 몸에 두르고
인파속으로 나설 때가 더 슬펐던 것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결론을 예상할 수 있고,
그런 결과가 별로 중요한 영화는 아닙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실제로 무죄이기에) 점점 텟페이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지만, 자신 만의 곧은 주관이 있었던 재판관이
결국 교체되고 이 시스템에 익숙해 있는 이들에게 유리하도록 평가가 조정되면서 점점 텟페이는 유죄로 굳어지게 됩니다.
더군다나 재판 시작부터 애타게 찾았던 결정적 증인을 찾았을 때 관객들은 '아, 이제는 살았구나'하는 생각도
잠시 하게 되지만, 이것 역시 그들 나름대로 '해석'되기에 따라 아무런 증언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동영상이 나와도, 직접 방송에서 말을 해도, 오해가 있었다고 하면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현실과 다를 것 없죠).

이렇게 까지 울화가 치미는 일들이 계속 생기지만, 그래도 텟페이는 마지막 유죄를 선고 받기 직전까지도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정말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 진실을 알아줄 것이라는것'
'진실은 결국 승리한다'라는 순진하지만 틀리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죠. 하지만 현실과 너무 닮아있는 이 영화 속에서는
이런 당연한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텟페이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자신의 무죄를 합리적으로 증명했음에도
이를 판단하는 법과 제도, 그들에 의해 결국 판단되어 유죄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영화 속에서는 법 제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지만, 따져보면 그냥 큰 이익이나 불익이 되지 않는 일들에는
무슨 일이든 대충대충 처리하려들고, 쉽게 말해 '그냥 좋게 좋게 하는게 서로 좋은거 아니냐'라는 식이 팽배해져 있는
요즘, '아닌건 아닌거다'라고 꼭 외쳐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겨있다 하겠습니다.




주연을 맡은 카세 료의 연기는 정말 발군입니다. <구구는 고양이다> <도쿄!> <허니와 클로버> <하나>까지, 최근 일본에서
감독들이 가장 선호하는 남자배우라는 그의 연기는 흠잡을데가 없습니다(<박치기>에도 출연했다는데, 이 영화를 매우
인상적으로 보았음에도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DVD를 다시 꺼내봐야 겠네요). 극중 스물 여섯이라는 나이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리 많지 않은 나이 인줄 알았는데, 74년 생으로 올해 서른 다섯이더군요.
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 감정을 폭발하지 않고 시종일관 한정된 내면의 연기로 인물의 심리를 전달해야 하는데,
카세 료는 어찌보면 아무 것도 안한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토 아사카, 야마모토 코지, 야쿠쇼 코지 등의 연기도 특별히 나무랄데는 없지만,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카세 료의 영화이긴해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라는 제목에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 모든 메시지와 하고 싶은 말이 다 담겨있어서, 감상기를 별도로 쓰기 어려웠던 작품이기도 하구요.

사회 비판적인 텍스트를 오히려 영화적으로 표현하려 하지 않았음에도, 다큐멘터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깊게 어필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1. 다케나카 나오토가 까메오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2.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이 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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