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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세상의 끝 (It's Only the End of the World, Juste la fin du monde, 2016)

가족이라는 깊은 상처


자비에 돌란의 '단지 세상의 끝 (It's Only the End of the World, Juste la fin du monde, 2016)'은 다시 한번 가족이라는 운명적인 상처에 대해 말한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너무도 돌란다운 이야기에 당연히 그가 창작한 이야기일 거라고 여겼었는데, 동명 희곡의 원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오히려 조금 놀랐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단지 세상의 끝'은 가족이라는 주제에 대한 자비에 돌란의 관심이 재차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었다. 그것이 전작들과 비교해 한 발 더 성장한 것이든 정체된 것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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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고향을 떠난 지 1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족을 만나게 되는 이 짧은 이야기는, 러닝 타임 상으로도 99분의 짧은 분량이지만 호흡 면에서는 오히려 더디고 답답한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공기 가득한 답답함과 긴장감 그리고 인물의 감정을 화면 가득 담아내는 클로즈업과 외적으로 과잉에 가깝게 느껴지는 음악은, 마치 영화를 보는 내내 무거운 무언가에 짓눌려 있는 듯한 피로감을 준다. 죽음을 앞두고 이번에야 말로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에게 조차 여지를 주지 않을 만큼, 이 가족이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각각 견디고 있었던 감정의 골은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해 보인다. 여백이 없이 꽉꽉 들어 차 있다는 말이 이 가족에게도, 이 영화에게도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단면적으로 보면 자비에 돌란이 묘사한 이들의 몇 시간은 마치 탈출구가 없는 무호흡의 상태처럼 상처와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지만, 한 편으론 옅은 위로가 느껴지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무언가 경멸하고 상처가 더 깊어지기보다는 그 자체로 인정하고 순응하게 되는 측면이 아주 미묘하게 남는다. 가족이라는 특수한 공동체 혹은 운명 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끝에 대한 해답을 내놓기보다는, 그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자체에 머무르는 선택이 '단지 세상의 끝'의 가장 만족할 만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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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평과 혹평,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음악이었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각각 수록된 삽입곡의 선택은 너무 직접적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영화적으로는 괜찮은 시도였다고 느껴진 반면, 대화 장면에서 배경에 흐르는 스코어들은 단순히 스타일이나 기법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이질적이고 또 과한 느낌이 강했다. 몇 장면은 음악이 너무 감정을 부추기는 (대사 만으로도 이미 가득 차 있는데) 면이 있었고 또 몇 장면들은 다른 영화 음악을 잘못 삽입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실험적인 요소보다는 실패한 측면이 더 강해 보였다. 


나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수상 때문에 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수상 사실이 없었다면 자비에 돌란이 유명 배우들과 함께 마치 연극처럼 만들어 낸 짧고 강렬한 소품 같은 영화로 더 평가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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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본 (Jason Bourne, 2016)

영원히 고통받는 제이슨 본



1. 이번 '제이슨 본'은 길게 쓸 내용까지는 없어서 간단히 코멘트 하는 방식으로만.


2.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이 다시 뭉친 '제이슨 본'은 확실히 또 한 번 요원물의 재미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제 C.I.A.요원 이야기는 영화로나 다큐로 너무 많이 접해서 신선한 감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기대하는 바는 충분히 충족시켜주는 액션 영화였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본이 그 특유의 빠른 걸음걸이로 군중 속을 휘젓고 다니는 장면만 봐도, '아, 본이 돌아왔구나!' 싶다.


3. 가장 격렬한 격투 액션을 보여주었던 '본 얼티메이텀'에 비하자면 이번 영화는 격투 액션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이미 레전설이 된 제이슨 본 답게, 직접 격투를 최대한 피하면서도 추격 장면만으로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지 않다. 격투 액션 얘기가 나온 김에, 아무리 본이 최정상급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한 특수요원이라지만 같은 C.I.A.요원들이 본에게 거의 한 방에 다 기절하고 마는 장면을 보면, 이것이 진정한 C.I.A.의 위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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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이슨 본의 과거 찾기 이야기와 더불어 영화에는 C.I.A.와 거래를 한 거대 IT회사 대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 흥미로운건, 보통 이런 첩보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위협이나 음모 등의 경우 현실성이 있는 수준의 가까운 미래 혹은 아직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는 공포에 대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감시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 비지니스의 이야기는 이미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스노든의 폭로를 비롯해 많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피부로 느껴지는 수준의 공포, 더 나아가는 과거의 위협으로까지 볼 수 있던 점이라 공포감이 덜했다고나 할까. 영화의 메인 테마가 제이슨 본 한 사람의 과거와 정체성 찾기에 맞춰져 있다보니, 이 거대한 위협은 비교적 축소되고 또 영화적으로 매력은 덜했던 측면이 있다. 차라리 이 이야기를 제외하고 본의 이야기에만 집중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


5. 스노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무래도 서브 테마의 이야기의 성격이 성격이다보니 스노든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데, 미정부 그리고 C.I.A.에게 스노든의 폭로가 얼마나 큰 상처이자 걸림돌이었는지 (마치 영화 속 제이슨 본의 존재처럼)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었다. 참고로 에드워드 스노든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시티즌포'를 권하고 싶다. 



시티즌포 _ 다음 사람들을 위한 프로파간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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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줄리 스타일스도 참 오래 버텼다.


7. 아마도 이 영화가 제이슨 본 이야기의 마지막 편일 가능성이 높지만, 특성상 하려고만 하면 충분히 계속 시리즈를 이어가는 것이 가능은 할 것이다. 제목에 '영원히 고통받는..'이라고 쓴 것처럼, C.I.A.국장이 바뀌고, 담당자가 바뀌고, 조직이 개선되고, 프로그램이 완전 패기 된다하더라도, 그 자체가 실패한 프로그램의 상징인 제이슨 본을 가만히 둘리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게임은 제이슨 본이 죽어야만 끝나는 얘기이기 때문에, 그가 죽지 않는 이상 영원히 고통 받으며 시리즈를 이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


8.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정말 매력적인 배우지만 이 영화에서는 캐릭터의 한계가 있어서 그녀의 본래 매력을 다 뽐내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뭐 그건, 뱅상 카셀도 마찬가지고.


9. 마치 아쉬운 점들만 늘어 놓은 것 같지만, 2시간을 쉼 없이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딱 기대했던 본 시리즈의 새 영화를 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관람이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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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아로노프스키의 극한의 백조의 호수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항상 그랬다. 그의 이름을 알게 해주었던 영화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 2000)'이 그랬고, 얼마 전 왕년의 스타 미키 루크를 다시금 끌어올린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에서도 그랬다. 아로노프스키는 항상 대상을 어떤 상황에 던져 두고 적당히 마무리하는 것보다는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불안한 심적 갈등과 신체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왔었다. 극한이라는 것은 언제나 완벽이라는 것과 강박이라는 것을 동반하게 되는데, 이런 것에 관심이 많던 아로노프스키에게 '백조의 호수' 는 언젠가는 반드시 영화화 해야 했을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아로노프스키는 백조의 호수를 상당히 늦게 접하게 되어, 한 명의 배우가 백조와 흑조의 두 가지 자아를 연기해야만 하는 심리적 압박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감독 스스로도 정작 백조의 호수라는 작품에 자세한 내용은 뒤늦게 알았던 터인지, '블랙 스완'에서는 누구나 알법한 이 유명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두 차례나 거듭 설명하고 있다).
 




뉴욕 발레단의 무용수 니나 (나탈리 포트만)는 누구보다 완벽한 안무와 실력을 갖고 있는 발레리나지만 백조와 흑조를 모두 연기 해야 하는 발레단의 새해 첫 작품인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을 단장 인 토마스 (뱅상 카셀)로 부터 듣는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가능성을 보게 된 단장은 니나를 주인공인 백조 여왕으로 캐스팅하고, 그녀는 더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품에 몰입 또 몰입한다. 그 과정 속에서 니나는 자신이 잘 하지 못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는 흑조를 더 완벽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박과, 같은 발레리나로서 딸을 지극정성으로 보호하는 동시에 큰 기대를 품고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압박, 그리고 자신에게 자리를 빼앗겨 버린 전 백조 여왕인 베스 (위노나 라이더)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자신이 갖지 못한 흑조의 매력을 갖고 있는 릴리 (밀라 쿠니스)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강박까지, 이 모든 것들을 여린 몸으로 견뎌내야 한다.





결국 '블랙 스완'은 강박으로 인해 극한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텐데, 물론 이 강박은 완벽하기 위함 때문이다. 즉 완벽을 향해 달려가는 니나는 (사실 이 작품은 강박 그 자체에 대한 텍스트에 더 가깝기 때문에, 본래 니나가 완벽주의자였는지 아니면 정황상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완벽해야만 했던 상황에 놓인 것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분위기로만 보자면 영화 속 니나는 둘 다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나친 강박으로 인해 과도한 스트레스와 환상을 보게 되고, 더 나아가 자아분열까지 일으키게 된다. 이로 인해 니나는 엄마와 릴리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 속의 모습으로 보게 된다. 어디까지가 니나의 환상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 역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이 허상이라는 것은 영화 내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근접한 카메라를 통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조명하는 듯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완전하게 니나의 심리와 결합되어 움직인다. 여기에 동참한다면 관객 역시 니나가 겪는 불안한 심리와 강박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지하철 창에 비친 니나의 모습을 그리는 영상에서 우리는 감독의 전작 '더 레슬러'를 그대로 떠올려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주인공 뒤에 근접해서 들고 찍기 (Handheld)로 촬영된 방식에서 역시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작품은 아로노프스키의 전작 '더 레슬러'와 짝을 이루는 영화이기도 하다. '더 레슬러'에서 미키 루크가 연기한 랜디와 '블랙 스완'의 니나 모두 신체를 이용해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인 동시에, 부상에 대한 (혹은 신체의 변화) 공포가 있으며 신체를 활용하는 직업을 갖은 이로서 노쇠화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을 안고 있다. 또한 서로에게 작용하는 방식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가족이라는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어쩌면 극복 이상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한계에 자신을 밀어붙여 결국 크게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맺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상 측면에 있어서도 다큐멘터리를 찍듯 거칠고 현실적인 질감을 보여주고 있는데, 같은 촬영 감독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동일한 컨셉과 분위기로 구성된 영상을 만나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작품의 촬영 감독인 매튜 리바티크 (Matthew Libatique)가 아로노프스키와 '레퀴엠' '파이' 등 여러 번 호흡을 맞춰왔던 터라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블랙 스완'을 보고 나서 '더 레슬러'를 보게 된다면 좀 더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블랙 스완으로 돌아와) 아마 다른 감독이었다면 백조와 흑조를 모두 연기해야 하는 니나의 강박을 그리되, 심리적 갈등에만 집중하거나 관객에게 보여지는 영화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덜 신경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 같은 심리변화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에도 몹시 흥미를 갖고 있는 감독이다. '블랙 스완'에서는 이런 불안함과 강박이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정도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조금씩 강도를 높여가더니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그야말로 그 강도와 속도가 심장을 뚫고 나올 정도로 폭발한다. 개인적으로는 아로노프스키가 택한 바로 이것. 주저 없이 극한까지 몰고 가는 영화의 속도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리듬) 강도에 흠뻑 반했다. 사실 '블랙 스완'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발레 작품 '백조의 호수'를 그대로 다시 쓴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감독처럼 이 이야기를 잘 몰랐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 이야기를 겉핥기로만 알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주는 매력에도 흠뻑 빠질 수 있을 정도로 '블랙 스완'의 몰입 감은 최고수준이다. 또한 '블랙 스완'은 완벽한 '백조의 호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니나가 백조와 흑조 연기에 모두 완벽해 질 수록 영화는 점점 더 '백조의 호수'에 가까워 진다.
 





다시 매력을 느꼈던 그 '극한'의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블랙 스완'은 주인공인 니나가 극심한 자아분열을 겪게 되면서부터 백조의 호수가 공연되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강도를 계속 높여 끝에 가서는 마치 '에반게리온'에서 에바와 신지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일정 수준의 극점을 뛰어넘어 버린다. 이런 시각적인 표현 방법과 클라이맥스의 속도 그리고 이야기의 세기는 분명 과잉이다. 과잉이라는 것은 본래의 그릇을 넘어 넘쳐난다는 것인데, '블랙 스완'은 이 넘쳐나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부터 넘쳐나기를 작정하고 만든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잉이 불필요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감정선을 잃지 않은 채 과잉의 끝까지 극한을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나는 이 극한을 영화와 함께 경험했다. 진짜 얼마 만에 영화를 보며 손에 땀을 쥐는 것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터질 듯하게 극중 주인공과 같은 박동으로 뛰고, 허기지고 힘이 들 정도로 몰입하며 보았는지 모를 정도로, '블랙 스완'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도 이것은 분명 과잉이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과잉이었다.
 





작품의 매력을 잘 살려낸 또 다른 주역은 역시 배우들이었다.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는 실로 대단했다. 동년배 여자 연기자들보다 항상 한 발 앞서는 연기를 보여주었던 그녀였지만, '블랙 스완'에서 그녀의 연기는 극한까지 몰고 간 감독 아로노프스키처럼 극한까지 표현해 내고 있었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작품이 끝난 뒤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아마도 이 작품은 시각적인 표현이 지금처럼 없었더라도 아주 무서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만큼이나 무섭도록 연기하고 있는 나탈리 포트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탈리 포트만이 발레 연기에 대역을 썼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이 판단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뱅상 카셀의 경우, 아주 오래 전 '증오' 때부터 좋아했던 배우였는데 (나에게 있어 뱅상 카셀은 모니카 벨루치의 남편이 아니라 그냥 오롯이 뱅상 카셀이다), 오랜만에 큰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주는 캐릭터를 연기한 것 같다. 특히 뱅상 카셀이 이렇게 목소리가 좋았었나? 라고 느낄 정도로 세련된 발레단 단장의 캐릭터를 세련되고 멋지게 소화해 내고 있다. 확실히 얼굴 속에 독기를 가득 담고 있는 뱅상 카셀의 캐스팅은 나탈리 포트만 만큼이나 완벽했던 것 같다. 그리고 덴젤 워싱턴과 함께 했던 '일라이'에서는 비주얼 외에 아무것도 보여주지는 못했던 것과는 달리, 밀라 쿠니스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릴리' 라는 캐릭터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데에 아마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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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ray : Picture Quality

MPEG-4 AVC 포맷의 1080P 화질 평가에 있어서는 앞서서 여러 번 언급했던 작품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다큐멘터리를 보듯 거친 입자의 영상을 만나볼 수 있는데, 최신 영화 블루레이와 1:1 화질 비교했을 때에는 '아니 화질이 왜 이래?'하고 놀랠 수도 있으나, 본 소스를 트랜스퍼한 결과물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우수한 화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측면의 평가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 부분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의도된 거친 입자와 차별화되는 선명하고 깨끗한 화질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하 스크린샷은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확실히 샤프니스라던가 선명도와는 거리가 먼 화질이고 그레인을 가득 머금은 영상이지만, 이 모두가 의도된 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코 나쁘지 않은 화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만약 '블랙 스완'의 영상이 칼 같은 선예도로 표현되었더라면 전혀 다른 작품이 (단순 화질 측면에서는 만족스러운 타이틀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감독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겠다.


Blu-ray : Sound Quality

DTS-HD MA 5.1 채널의 사운드는 극한으로 치닫는 작품의 리듬을 전달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특히 전작 '더 레슬러'와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 이어 이 작품의 음악을 맡고 있는 클린트 만셀 (Clint Mansell)의 사운드 트랙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는데, 강약의 세기 전달에 있어 여느 액션 영화 못지 않은 쾌감을 준다.




클래식한 발레 음악과 기괴함과 불안함을 더해주는 인더스트리얼 계열 사운드의 조화는, '블랙 스완'의 음악을 단순한 클래식이 아니라 좀 더 특별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는데, 블루레이의 차세대 사운드는 이 두 가지을 모두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섬세함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액션 영화 못지 않은 우퍼의 활용과 몰아치는 사운드의 향연 역시 추천할 만 하다.


Blu-ray : Special Features



부가영상에서 첫 번째로 만나보게 되는 것은 '제작과정'인데, 총 세가지 챕터로 나뉘어 각 주제별로 제작과정을 만나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감독인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인터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그 밖에도 편집자, 촬영 감독 외 스텝 들의 전문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촬영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아, 무엇보다 풀HD의 깔끔하고 쨍한 화질로 만나볼 수 있는 것이 반갑다.
 





프로덕션 디자인에 관한 내용들도 비중 있게 들려주는데, 작품 속에서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던 니나의 방과 같은 특별한 세트 외에도 뱅상 카셀의 연기한 단장의 공간들에서도 숨겨져 있는 디자인적 디테일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촬영을 맡은 매튜 리바티크의 인터뷰와 작업 방식을 통해 이 작품의 독특한 영상이 어떻게 촬영되었는지를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나탈리 포트만을 비롯해 뱅상 카셀, 밀라 쿠니스, 위노나 라이더 등 배우들의 인터뷰를 만나볼 수 있다. 자신이 맡은 캐릭터들의 대한 이야기는 물론,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계기와 감독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 작품을 연기하기 위해 각각 준비해야만 했던 것들에 대해 들려준다. 나탈리 포트만의 경우 니나를 연기하기 위해 수개월간 발레 연습과 혹독한 트레이닝을 해야만 했었는데, 물론 실제 영화에 사용된 장면들 가운데는 그녀가 연기하지 않은 장면이나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얼굴을 대체한 장면들도 있지만, 그녀의 많은 연습과 발레리나 연기에 의문 부호를 갖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세 번째 챕터에서는 '블랙 스완'에 사용된 특수 분장 및 효과,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 등에 대해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에도 CG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좀 더 실제 분장을 선호하는 아로노프스키의 성향에 맞게 가능한 부분은 최대한 실제의 것을 활용하는 한 편, CG의 경우도 실제 발레리나의 연기와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를 합성하는 모션 캡쳐를 비롯, 극 중 니나의 환상을 표현하는 데에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작과정 외에 '발레' '프로덕션 디자인' '의상 디자인' '나탈리 포트만 – 프로필' '대런 아로노프스키 – 프로필'에서는 각각 2~3분 여의 짧은 분량으로 각 주제에 대한 짧은 영상과 인터뷰를 수록하고 있다.

 




이 밖에 '감독과 배우의 대화 – 역할 준비하기'와 '감독과 배우의 대화 – 카메라와 함께 춤추기'에서는 각각 4분여, 1분 30초 정도의 짧은 분량이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와 나탈리 포트만의 대화 형식으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폭스 무비 채널로 제공되는 감독과 4명의 배우들에 대한 인터뷰 영상이 수록되었다 (폭스 무비 채널 영상만 SD로 제공).

 



[총평]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은 완벽 그 자체에 관한 텍스트이자, 아로노프스키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신체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자아분열의 심리묘사를 거침없는 과잉의 리듬으로 쏟아낸 심장 뛰는 작품이었다. 이런 극한의 백조의 호수를 다시 금 체험하기에 블루레이 타이틀만큼 좋은 선택은 아마 없을 듯 하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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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Black Swan, 2010)
극한의 백조의 호수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항상 그랬다. 그의 이름을 알게 해주었던 영화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 2000)'이 그랬고, 얼마전 왕년의 스타 미키 루크를 다시금 끌어올린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연출할 작품인 '로보캅'과 '엑스맨 : 울버린 2'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애로노프스키는 항상 대상을 어떤 상황에 던져 두고 적당히 마무리하는 것보다는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불안한 심리와 신체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왔었다. 극한이라는 것은 언제나 완벽이라는 것과 강박이라는 것을 동반하게 되는데, 이런 것에 관심이 많던 애로노프스키에게 '백조의 호수' 같은 작품은 언젠가는 영화화 해야 했을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애로노프스키는 백조의 호수를 상당히 늦게 접하게 되어, 한 명의 배우가 백조와 흑조의 두 가지 자아를 연기해야만 하는 심리적 압박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감독 스스로도 정작 백조의 호수라는 작품에 자세한 내용은 뒤늦게 알았던 터인지, '블랙 스완'에서는 누구나 알법한 이 유명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두 차례나 거듭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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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발레단의 무용수 니나 (나탈리 포트만)는 누구보다 완벽한 안무와 실력을 갖고 있는 발레리나지만 백조와 흑조를 모두 연기해야 하는 발레단의 새해 첫 작품인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을 단장인 토마스 (뱅상 카셀)로 부터 듣는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가능성을 보게 된 단장은 니나를 주인공인 백조 여왕으로 캐스팅하고, 그녀는 더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품에 몰입 또 몰입한다. 그 과정 속에서 니나는 자신이 잘 하지 못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는 흑조를 더 완벽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박과 같은 발레리나로서 딸을 지극정성으로 보호하는 동시에 큰 기대를 품고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압박, 그리고 자신에게 자리를 빼았겨 버린 전 백조 여왕인 베스 (위노나 라이더)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자신이 갖지 못한 매력을 갖고 있는 릴리 (밀라 쿠니스)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강박까지, 이 모든 것들을 여린 몸으로 견뎌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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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블랙 스완'은 강박으로 인해 극한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텐데, 물론 이 강박은 완벽하기 위함 때문이다. 즉 완벽을 향해 달려가는 니나는 (사실 이 작품은 강박 그 자체에 대한 텍스트에 더 가깝기 때문에, 본래 니나가 완벽주의자였는지 아니면 정황상 자의반 타의반으로 인해 완벽해야만 할 상황에 놓인 것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분위기로만 보자면 영화 속 니나는 둘 다인것 같지만) 지나친 강박으로 인해 과도한 스트레스와 환상을 보게 되고, 더 나아가 자아분열까지 일으키게 된다. 이로 인해 니나는 엄마와 릴리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 속의 모습으로 보게 된다. 어디까지가 니나의 환상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 역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이 허상이라는 것은 영화 내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근접한 카메라를 통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조명하는 듯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완전하게 니나의 심리와 결합되어 움직인다. 여기에 동참한다면 관객 역시 니나가 겪는 불안한 심리와 강박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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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다른 감독이었다면 백조와 흑조를 모두 연기해야 하는 니나의 강박을 그리 되, 심리적인 면에만 집중하거나 관객에게 보여지는 측면에 있어서는 덜 신경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그가 앞으로 맡게 될 '로보캅'과 '울버린 2'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같은 심리변화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더 흥미를 갖고 있는 감독이다. '블랙 스완'에서는 이런 불안함과 강박이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정도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늘어가서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그야말로 그 강도와 속도가 심장을 뚫고 나올 정도로 폭발한다. 사실 나는 바로 극한까지 몰고가는 영화의 이 속도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리듬) 강도에 흠뻑 반했다. 사실 '블랙 스완'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백조의 호수'를 그대로 쓴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감독처럼 이 이야기를 잘 몰랐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 이야기를 겉핥기로만 알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주는 매력에도 흠뻑 빠질 수 있을 정도로 '블랙 스완'의 몰입감은 최고수준이다. 또한 '블랙 스완'은 완벽한 '백조의 호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니나가 백조와 흑조 연기에 모두 완벽해 질 수록 영화는 점점 더 '백조의 호수'에 가까워만 진다.

다시 매력을 느꼈던 그 '극한의'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블랙 스완'은 주인공인 니나가 극심한 자아분열을 겪게 되면서 부터 백조의 호수가 공연되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강도를 계속 높여 끝에 가서는 마치 '에반게리온'에서 에바와 신지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일정 수준의 극점을 뛰어넘어 버린다. 이런 시각적인 표현 방법과 클라이맥스의 속도 그리고 이야기의 세기는 분명 과잉이다. 과잉이라는 것은 본래의 그릇을 넘어 넘쳐난다는 것인데, '블랙 스완'은 이 넘쳐나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부터 넘쳐나기를 작정하고 만든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잉이 불필요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감정선을 잃지 않은 채 과잉의 끝까지 극한을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나는 이 극한을 영화와 함께 경험했다. 진짜 얼마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손에 땀을 쥐는 것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터질 듯하게 극중 주인공과 같은 박동으로 뛰고, 허기지고 힘이 들 정도로 몰입하며 보았는지 모를 정도로, '블랙 스완'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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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는 실로 대단했다. 동년배 여자 연기자들보다 항상 한 발 앞서는 연기를 보여주었던 그녀였지만, '블랙 스완'에서 그녀의 연기는 극한까지 몰고간 감독 애로노프스키처럼 극한까지 표현해 내고 있었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작품이 끝난 뒤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아마도 이 작품은 시각적인 표현이 지금처럼 없었더라도 아주 무서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만큼이나 무섭도록 연기한 나탈리 포트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뱅상 카셀의 경우, 아주 오래 전 '증오'부터 은근히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배우였는데 (나에게 있어 뱅상 카셀은 모니카 벨루치의 남편이 아니라 그냥 오롯이 뱅상 카셀이다), 오랜만에 깊은 인상을 주는 캐릭터를 연기한 것 같다. 특히 뱅상 카셀이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었나? 라고 느낄 정도로 세련된 발레단 단장의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해 내고 있다. 확실히 얼굴 속에 독기를 가득 담고 있는 뱅상 카셀의 캐스팅은 나탈리 포트만 만큼이나 완벽했던 것 같다. 그리고 덴젤 워싱턴과 함께 했던 '일라이'에서는 비쥬얼 외에 아무것도 보여주지는 못했던 것과는 달리, 밀라 쿠니스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릴리' 라는 캐릭터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데에 아마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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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아주 불안하고 관객이 공포를 느낄 정도로 자아분열의 심리묘사를 다룬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은 개인적으로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다. 그리고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기가 빨려버린 것만 같은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또 한 번 이 극한의 예술을 한 번 더 맛보고 싶다.


1. 예전에는 그냥 흘려보거나 지나쳤던 발레 '백조의 호수'를 '블랙 스완'을 보고나니 너무도 다시 보고 싶어지더군요! 갖고 있는 DVD들 중에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 타이틀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어요!

2. 잔잔한 것만큼이나 극한에 대한 도전적인 영화를 즐기는 저에게 있어서 '블랙 스완'은 올해의 영화 중 하나로 손 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3. 글을 쓰며 영화를 한 번 더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오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Fox Searchlight Pictures 에 있습니다.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2007)


영화를 보고 나면 대부분 감상기를 바로 올리는 편이지만, 쉽사리 감상기가 잘 써지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특히나 영화를 통해 엄청난 중압감을 받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감동과 무게를 느꼈을 때 그런 경우가 있는데
내 경우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바벨>을 보고 나서 그러했었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집으로 오면서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멍하게 돌아왔던 것만이 기억난다. DVD가 출시된 다음에 다시 리뷰를 써보려고 했었는데
잘 안되었던 것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신작 <이스턴 프라미스>를 보고 난 다음에도 이와 비슷한 먹먹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냥 한줄 평으로 마무리 할까도 했었지만, 이번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한번 끝까지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의외로 크로넨버그의 예전 작품들 가운데 못 본 것들이 많은데, 그래서 인지 내가 그를 기억하는 영화는
<폭력의 역사>였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여러가지면에서 전작인 <폭력의 역사>와 비교되고 함께 이야기 해야할
영화인데, 동전의 양면을 뒤집듯 정반대에 선듯한 두 캐릭터를 통해, 결국 감독은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현실적으로, 아주 무거운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아래 부터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으신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이 영화의 배경은 런던이다. 런던을 배경으로 러시아 마피아를 중심으로 그들의 생리와 관계, 그리고 이와 얽히게 된
한 여성과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얼핏 보면 이 영화의 스토리는 이미 <대부>를 비롯해 이런 러시아 마피아나
폭력 조직에 얽힌 이야기들을 통해 여러번 반복되었던 익숙한 구조라 할 수 있다. 겉으로는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는
점잖은 노인의 보스가 있고, 그 아래에는 야망만 있고 아직 미숙한 아들이 있으며, 그 아들의 주위에는 아들보다 훨씬
뛰어나 보스에게 오히려 더욱 신인받는 남자가 있고, 이 남자는 이런 폭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인정이 남아
한 여성과 교감을 나누게 되는데 결국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 얼핏 보자면 <이스턴 프라미스>의 이야기는
여기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듯한 통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면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듯이 조금만(아주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이 영화가 단순히 조직간의 암투나 혹은 그 속에서 발생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 혹은 한 남자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를 통해 이미 확실히
보여주었듯이 '폭력'에 관한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동시에 들려주고 있다.




전작 <폭력의 역사>에 주인공이 폭력적인 과거를 숨기고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라면, <이스턴 프라미스>의
니콜라이는 선한 본 모습을 숨기고 폭력적인 겉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캐릭터이다. 이를 비고 모텐슨이라는 같은 배우가
연기해서 더욱 인상깊기도 한데, 이 두 작품은 마치 하나인듯 다른 두 캐릭터를 통해 폭력성에 관해, 그리고 숨겨져있는
폭력적인 면에 대해서 깊게 관찰하고 있다. 극 중 니콜라이는 말끔하게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과 검은 선글라스,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옷차림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냉혈한 겉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조직의 멤버가 되고 더 나아가 보스가 되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갖은 굴욕도 참아낸다.

보통 같았으면 보스의 아들인 '키릴(뱅상 카셀)'이 모욕을 주었을 때 감정적으로 폭발했었겠지만 크로넨버그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보여지는 극적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모욕에 못이겨 하지 말아야 될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자신이 이루려는
바를 위해 갖은 모욕을 참아내고 마음 깊은 속에서 부터 칼을 가는 것이 더 큰 본능적 폭력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사실 이후에 니콜라이의 본래 정체가 밝혀지긴 하지만, 이를 통해 니콜라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정말 본래의 의도였던 스파이 활동을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견딘 것인지, 아니면 이 과정 속에서
가슴 깊은 곳에 존재했던 폭력성에 사로잡혀 스스로 그 세계에 물들어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크게
중요하지 않을런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무거운 대사와 함께 보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니콜라이의 모습에서는
작전 성공에 대한 기쁨도, 조직을 차지한 야망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희망을 다루고 있다고 얘기한 것은 바로 극중 타티아나의 아이의 존재 때문이다.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의
이 아이의 존재는 이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아이의 존재로 인해 이 이야기는 상당히
예수 탄생 신화와 비슷한 이야기 구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크리스마스에서 가져왔다는 이 아이의 이름도,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크리스마스도 이를 뒷받침하는 조건들이다). 일단 제목에서부터 동방박사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으며, 처녀인 안나(나오미 왓츠)가 이 아이를 자신의 딸로서 키우게 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아이를 존재를 둘러쌓고 있는 니콜라이의 존재가 마치 천사와 같은 의미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성인은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자로서 러시아를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들의 수호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주인공의 이름이 '니콜라이'라는 것은 더더욱 이런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안나의 딸로서 계속 살아나간다는 자체가 이 영화의 유일한 희망적 요소이기도 하다.
비록 이 아이의 실제 아버지는 조직의 보스인 세묜이며 어머니는 이미 죽고 없지만, 이 아이를 안나가 보듬고 자신의 딸로서
키워간다는 것은 희망의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아이를 비롯해 안나의 삼촌 등 이 가족을
지켜낸 것은 폭력의 한 중심에 있던 니콜라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생각해볼 거리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깊게 보지 않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가 폭력을 마치 조장하고 예술로서 승화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물론 현실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크로넨버그는 현실에 사람들이 폭력이라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며,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술로서 승화시켜버리기 까지 한 것에 대해 비판의 메시지를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겉으로 보여지는 폭력 뿐 아니라 상대를 위압하거나 억누르는 분위기에서 오는 폭력에도
주위를 기울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조직의 보스로 등장하는
세묜(아민 뮬러-스탈)의 경우 겉으로는 많은 가족을 아우르고 손녀들에게도 매우 친절한 할아버지로 보이지만,
그의 이면에는 단 한번의 주먹질을 하지 않더라도 폭력으로 이뤄낸 지배구조를 통해 조직을 이끌어가는 보스로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근데 크로넨버그는 이를 단순히 이면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좀 더 이 폭력적인 면 자체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건 영화적 기술로 인한 것인데, 영화에서 세묜이 이렇다할 나쁜 행동들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카메라 앵글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 이 존재에 대한 공포감과 위압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세묜에 모습에서 이런 폭력성을 엿볼 수 있었다면 오히려 그의 아들인 키릴에게서는 인간의 나약함과 희망을 느낄 수도 있었다.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아이를 강가에 버리려던 키릴은 끝내 이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는 마치 예수가 게쎄마니 동산에서
아버지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렸을 때처럼, 거둘 수 있다면 거둬달라고 울부짓는다. 하지만 만약 니콜라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미약한 존재는 결국 두려움에 못이겨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이는 이 조직의 비밀을 원치 않게 알게 된
안나의 가족 모습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주정뱅이 삼촌은 그런 놈들은 응징해야 한다며 큰소리를 치지만,
막상 폭력 조직과 대항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 이 같은 자신의 신념을 더 이상 주장하지 만은 못한다.
이렇듯 힘 앞에서, 폭력 앞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신념마저 저버려야 하는 폭력성을 영화는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 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목욕탕 격투씬은 크로넨버그가 폭력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언제부터가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에서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선의를 위한 폭력(여기서 선의란 어디까지나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의 입장에서만 보았을 때 선의)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고 오히려 필요하다고 까지 굳게 믿게 되고, 자신과 뜻이 다른 자에게(쉽게 말해 악당) 행해지는 폭력에 대해서는
미적 아름다움까지 찾게 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턴 프라미스>의 목욕탕 격투씬에서는 다른 액션 영화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폭력 자체의 잔인함이 느껴진다.
분명 주인공이 자신을 위협하는 악당들과 벌이는 격투씬이지만, 어느 한 순간에서도 짜릿함이나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폭력일 뿐이고, 폭력은 곧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불쾌하고 나쁜 것임을 관객들을 쉽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에서의 격투나 죽음의 묘사보다 훨씬 더 잔인한 묘사는 여럿 있지만, 이 영화에서의 폭력이 등장하는
격투씬에서는 다들 눈을 피하고만 싶어진다. 쉽게 말해 더 잔인한 묘사를 했었던 영화들 보다도 이 영화가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은 크로넨버그가 바로 그 폭력성 자체에 가장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폭력성에 길들여진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괴로운 영화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극중에서 벌어지는 인물들 간의 폭력성과 더불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내면에 있는 폭력성 마저 비판하려드는 것이
바로 크로넨버그의 영화인 것이다.




크로넨버그가 이 영화를 통해 폭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장치로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는 의도된 카메라 앵글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조직의 보스인 세묜이 이렇다할 나쁜 짓을 한 것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때도 그에게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배우의 연기와 더불어 카메라 앵글 탓이기도 했다. 이후에 그의 폭력성이 전면에 드러나고
나서는 더욱 노골적인 컷이 등장하는데, 특히 키릴을 내놓으라는 상대 조직의 조건을 보스에게 보고 하는 장면에서의
구도는 세묜을 더더욱 공포스럽게 조명하고 있다. 상하구조가 명확히 드러난 이 구도만으로도 캐릭터의 폭력성이
잘 살아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지하 저장실에서 뒤돌아 술을 마시는 장면 등에서도 구도를 통해 폭력성을(관객이 숨이 막히게끔)
더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워드 쇼어의 음악도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무거운 영화를 한시도 놓치지 않고 긴장감과 중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음악인데, 이렇다할 감정의 과함 없이 영화를 뒤에서 잘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겠다.




니콜라이 역할로 등장한 비고 모텐슨을 보면서, 정말 저 사람이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과 같은 사람인가 하고 생각할 만큼
그의 연기는 매우 훌륭했다. 특히 전작 <폭력의 역사>에서 정반대의 조건을 갖고 있던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가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보여준 연기는 말로다 표현하기 어려울 듯 하다. 러시아 식 억양의 영어 연기도 완벽했고,
동작 하나하나에서도 아우라가 느껴지는(눈빛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연기는, 그를 크로넨버그의 페르소나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하겠다.
키릴 역할로 등장한 뱅상 카셀은 오랜만에 좋은 영화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해 우선 반가웠는데, 니콜라이 역의
비고 모텐슨 만큼이나 키릴 역에 다른 배우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컴플렉스 많고 나약한 키릴이라는 캐릭터를 잘
소화한듯 싶다. 나오미 왓츠의 경우 생각보다 영화 속에서 역량을 발휘할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그녀 특유의 강인한 매력이 '안나'라는 캐릭터와도 잘 어울렸다고 생각된다.

세묜 역할의 아민 뮬러-스탈과 스테판 역할의 저지 스콜리모우스키, 그리고 헬렌 역의 시네드 쿠삭의 연기도 매우 훌륭했다.
특히 아민 뮬러-스탈이 연기한 세묜 캐릭터는 니콜라이 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연륜가 깊이가 묻어나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속 중압감을 피부로 느끼게 하고 있다. 시네드 쿠삭의 경우
<브이 포 벤데타>를 통해 낯이 익은 배우였는데, 어쩌면 영화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중간자적 입장에 있는 캐릭터를
깊은 눈빛으로 잘 전달해 내고 있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시종일관 무겁고 음울하게 진행되는 영화다. 특히나 영화가 끝나고 화면이 검게 변하면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먹먹해져서 한참을 앉아있어야 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드물게 리뷰에 영화 제목 외에 부제목을 달지 못했던
영화이기도 했고.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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