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열악한 블루레이 시장에서 소비자가 직접 참여하여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출시되기 힘든 작품들을 우수한 퀄리티로 블루레이를 내고 있는, DVDprime (이하 DP)의 DP시리즈 6,7호인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 커피북 한정판이 어제 출시되었습니다. 저도 오랜 DP의 회원이자 DP를 통해 블루레이/DVD를 소개하는 공식 리뷰어로서 당연히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지요. 지금까지의 DP시리즈 가운데 개인적으로 '우앗!! 이 작품이 국내에, 그것도 DP시리즈로 출시되다니!!'라고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속 5cm'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였는데요 (그 때 감독님을 직접 뵙고 감동의 눙물을 흘렸던 기억이 ㅠㅠ),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 나온다고 했을 때의 충격은 이 보다 더한 것이었습니다. '잘알지도 못하면서' 이후로 '하하하'를 거치면서 저는 어느새 이른바 '홍상수빠'가 될 정도로 흠뻑 빠지게 되었는데, 그런 그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인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을 블루레이로 소장할 수 있다니, 이 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은 없었더랬죠.





그렇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타이틀을 프리오더한지 어느덧 시간을 훌쩍 흘러, 드디어 어제 이 두 타이틀을 제 손에 받아보게 되었습니다. 커피북 한정판으로 나온 타이틀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패키지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타이틀이었습니다. 국내 블루레이 시장에 대해 이해가 없으신 분들께서는 이 정도(?) 패키지의 퀄리티에 대해 감흥이 없으실 수 밖에는 없을 텐데, 국내 블루레이 시장을 고려했을 때 이런 패키지는 제작사 입장에서 완전히 사치이며 욕심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영화에 대한 애정, 그리고 블루레이 시장 자체를 생각하는 애정없이 오로지 비지니스 적인 측면만 따져보았을 때는 굳이 할 필요없는 방식이죠. 물론 여기에 비지니스 적인 측면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봉사'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분명 앞서 이야기했던 것들이 동반된 결과물이라는 것에는 한 목소리를 더 보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튼, 이러저러한 사연과 스토리가 담긴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 블루레이를 받아보았습니다. 정말로 국내 패키지를 이렇게 오랜 시간 살펴볼 만한 시간이 필요했던 경우가 언제였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할 정도로 양과 질적으로 만족스러운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커피북이라는 패키지의 특수성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 있을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의 풍성함에 대해서는 누구나 반길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커피북에 담긴 콘텐츠 들이 개봉당시 보도자료에 근거한 자료들이기는 하나 블루레이를 위해 통일된 디자인으로 재구성하여 일관성이 돋보였고, 영화 속 인상적이었던 스틸컷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볼거리도 충족시켜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옥희의 영화' '북촌방향' 블루레이가 제 개인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옥희의 영화' 블루레이에 수록된 제 글 - '모호함으로 완성되는 논리')



커피북 콘텐츠에 영화에 대한 글로는 유일하게 제 글이 수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원고를 전달한 것은 오래되었지만 실제 타이틀이 나오기까지는 조금 조마조마한 느낌이 솔직히 없지 않았었는데, 타이틀이 도착하자마자 뜯어보고는 떡하니 실린 제 글을 보니 정말 살짝 울컥하면서 소름이 돋더군요 ㅠ 기존에도 여러 잡지에 1년 넘게 기고한 적도 있었고, DP에서도 공식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스케일의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ㅠ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예전부터 꿈꿔오던 것이라 더욱 그러했는데, 내가 정말 좋아하고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감독과 작품의 블루레이나 DVD 타이틀에 마치 음반 해설 속지처럼 영화에 대한 내 글을 부족하나마 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전 부터 해오고 있던터라, 이번 타이틀에 실린 제 글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더군요. 더 황당할 정도로 감동적인 건 이런 첫 작품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거죠 ㅠ (감독님 보고 계시죠 ㅠㅠ) 어제 하루 종일 이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났었는지 몰라요 ㅋ 정말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제게는 너무 영광스럽고 행복한 일이어서요 ㅠ






이번 타이틀 역시 기존 DP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타이틀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미리 프리오더 해준 분들의 이름(혹은 닉네임)이 기재되었습니다. 커피북으로 보니 더 좋네요~ 제 닉네임도 보이구요 ^^









제 글 외에도 영화를 사랑하는 소비자가 직접 만든 타이틀 답게 사전에 공모했던 커버 이미지들도 다시 만나볼 수 있으며, 작품과 관련있는 멋진 사진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겔러리도 수록되었습니다 (90년생김정훈 님의 사진 멋지네요!)





('북촌방향' 블루레이에 수록된 제 글 - '시공간 속 가능성을 얘기하는 홍상수')





일단 홍상수 감독의 열렬한 팬으로서 이번 블루레이는 저에게 너무 영광스러운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었죠 ^^;


(사건 1. 뭐라고? 홍상수 감독 작품이 국내에 블루레이로 출시된다고?

 사건 2. 뭐라고?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이 나오는데, DP컬렉션으로 나온다고??

 사건 3. 뭐라고? (리얼리?) 이 한정판 타이틀에 내 글이 실렸다고???)


그리고 부족하지만 오랜 시간 나만의 글을 열심히 써온 사람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발걸음을 한 발 더 내딛게 된 의미있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부족함을 매일 느끼고 있기에 더 갈길이 멀어 오히려 '희망적'이기도 하구요 ^^


너무 혼자 여러번 자주 감격하는 글이 되어버렸지만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ㅎㅎ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 국내 블루레이 출시를 위해 힘써주신 제작사 디에스 미디어와 저의 오랜 홈그라운드 DP! 그리고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매번 올리는 영화 글을 정성껏 읽어주신 수많은 DP회원 여러분들께 무엇보다 가장 큰 고마움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어느 덧 2011년 한 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그 말은 다른 얘기로 하자면 올해 열심히 극장에서 챙겨 본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들을 손꼽아 볼 시기가 되었다는 얘기. 한 해를 쭉 돌아보며 봤던 영화 목록을 들춰보니 지난해와 비교하자면 조금은 심심했던 (더불어 개인적으로 극장을 찾을 시간이 좀 더 부족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10작품을 꼽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며 간발의 차로 여기에 들지 못한 작품도 2~3 작품 정도가 있었다 (너무나 동경해마지 않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의 '히어애프터', 올해 또 하나의 발견이었던 '혜화, 동', 마이크 리의 쓸쓸한 '세상의 모든 계절' 등이 바로 그 작품이다). 올 안해도 나를 울렸다가 웃겼다가 오감을 자극시켰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10작품을 '올해의 영화'라는 타이틀로 꼽아보았다.

(순서는 관람 순)




1. 블랙 스완 (Black Swan, 2010)
극한의 백조의 호수

http://www.realfolkblues.co.kr/1447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촬영 방식을 택한 반면,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통해 판타지에 가까운 극적 변화를 담아냈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야심작. 후반 부 백조의 호수가 시작되며 치닫는 극의 과잉된 리듬은 심장을 미치도록 요동치게 한다.





2. 파수꾼 (Bleak Night, 2010)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애처로운 간극
http://www.realfolkblues.co.kr/1451


역시 올해의 한국 영화!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무게감은 지금까지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적으로도 너무 아름답고 깊은 것은 물론, 과연 나는 기태였을까, 희준이었을까 아님 동윤이었을까를 떠올려 보게 했던 올해의 발견!





3. 수영장 (Pool, 2009)
꿈만 같은 치유의 슬로우 무비

http://www.realfolkblues.co.kr/1471



보는 내내 평화로움이, 보고나서는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평온함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 자연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지에 대해 말이 아닌 그림 같은 장면으로 보여주는 영화. 올 한해 수 많은 작품에서 수 많은 명장면이 있었지만, 내가 꼽은 올해의 장면은 바로 저 장면.





4. 슈퍼 8 (Super 8, 2011)
너무 행복했던 J.J의 스필버그 종합 선물세트

http://www.realfolkblues.co.kr/1505



스필버그라는 이름을 빼놓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영화.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며 영화 감독을 꿈꾸었던 한 남자가 스필버그와 함께 그의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말도 안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남. 이것만으로도 J.J는 올해 가장 부러운 남자.





5.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 (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 Part II)
마지막이 실감나지 않는 마법의 피날레

http://www.realfolkblues.co.kr/1518



보는 동안에도 실감나지 않았고 이후 블루레이로 다시 볼 때도 실감나지 않았고 지금도 실감나지 않는 해리와의 이별. 난 소설을 읽지도 않았고 다른 시리즈에 비해 특별한 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함께 해오며 같이 성장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올해의 10작품 가운데 이 피날레를 꼽을 이유는 충분했다.





6.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2011)
전편을 돌아보게 만드는 깊이 있는 프리퀄

http://www.realfolkblues.co.kr/1529



프리퀄이라는 유행의 한자락 인줄로만 알았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가장 모범 답안이었던 작품. 혹성탈출 시리즈 가운데 실망했었던 팀 버튼의 리메이크작까지 다시 보고 싶게끔 만든 놀라운 작품. 인간이 아닌 캐릭터에게도 이 정도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시저'라는 캐릭터는 올해의 캐릭터에 이름을 올리기에 충분할 듯. 이제 앤디 서키스가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을 날도 머지 않았다!





7. 북촌방향 (The Day He Arrives, 2011)
시공간 속 가능성을 얘기하는 홍상수

http://www.realfolkblues.co.kr/1538



아...홍상수. 홍상수의 마법은 '북촌방향'에서도 계속 되었다. 남녀상열지사를 그리는 것을 넘어서서 시공간의 무한한 가능성마저 열어둔 작법에 혀를 내두를 정도. 올 한해 극장에서 느꼈던 가장 따듯했던 순간은, 성준(유준상)이 여주인을 쫓아 소설을 나와 골목을 걷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8.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2011)
경이로운 우주 속 나를 느끼다

http://www.realfolkblues.co.kr/1560



테렌스 맬릭은 항상 철학적이고 심오한 주제를 다뤄왔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트리 오브 라이프'는 직설적이라고 할 만큼 그 탄생으로의 여행을 자처한 작품이었다. 인간의 역사를 비롯해 우주적 세계관과 그 안에 매우 사소한 인간의 감정적 부분들까지. 이 영화를 단순히 종교적인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9. 머니볼 (Moneyball, 2011)
야구에 빗대어 전하는 삶의 위로

http://www.realfolkblues.co.kr/1567



처음엔 '단장'을 중심으로 한 디테일한 야구 영화라길래 기대를 했었는데, 아론 소킨이 참여한 이야기는 역시 야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야구를, 특히 메이저리그를 즐겨보는 이들이라면 흥미진진할 만한 내용들이 디테일하게 담긴 동시에, 극장을 나올 때면 Lenka의 'The Show'의 가사를 흥얼거리며 인생의 위로를 받게 되는 참 '좋은' 영화였다.





10. 드라이브 (Drive, 2011)
이토록 황홀한 아름다움

http://www.realfolkblues.co.kr/1570



'드라이브'는 올해를 통틀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 중 하나였다. 누군가 '이제 라이언 중에 고슬링이 최고'라고 얘기할 만큼 그가 만든 캐릭터의 이미지는 강렬했으며, 다양한 감독들과 걸작들의 향수를 담고 있으면서도 조잡하거나 유치하기 보단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이 영화의 이미지는, 뒷면에 선명한 스콜피오 자켓처럼 앞으로도 오래 기억될 듯 하다.




11.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奇跡, 2011)
크리스마스의 기적같은 영화

http://www.realfolkblues.co.kr/1585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을 보기 전에 올해의 영화를 정리한 것은 분명한 실수였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풀어낸 기적같은 영화는 보는 내내 행복함과 말못할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이 영화를 만난 것이야 말로 올해 크리스마스에 내게 일어난 기적같은 일이었다.


이렇게 짧게나마 2011년 극장에서 본 영화들을 정리해보았다. 내년에는 제목만으로도 영화팬을 다리 떨리게 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마지막 배트맨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리들리 스콧이 손수 만들고 계신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이후의 공허함을 채워줄 피터 잭슨의 '호빗'까지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을 예정이다. 이 생각 만으로도 2012년은 충분히 기대된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각 영화사 에 있습니다.




북촌방향 (The Day He Arrives, 2011)

시공간 속 가능성을 얘기하는 홍상수



홍상수 감독의 열 두 번째 장편영화 '북촌방향'을 보았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항상 '영화'라는 것 자체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는데, 언제부턴가는 여기에 '마법'과도 같은 '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 곧 영화로 직결된다고 볼 수 있겠지만. '북촌방향'은 그의 전작 '옥희의 영화'와 짝을 이루는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인데, 개인적으로는 굳이 두 작품의 연결고리를 찾지 않더라도 '북촌방향'은 정말 묘한 가운데 홍상수 영화의 정수를 잘 담아내고 있는 멋진 작품이라 하겠다 (진짜 '멋진'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화 감독이었던 성준(유준상)이 친한 선배 영호(김상중)를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와 북촌에서 겪는 우연과 운명의 시간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성준의 내레이션을 통해 그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이 시점에는 여러가지 함정과 여지가 가득하다. 1차적으로 '북촌방향'은 성준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지점에 놓이게 된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성준과 영호가 만날 때 연속으로 같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즉, 다른 시간과 날이 아니라 같은 날의 다른 기억으로 가정할 여지도 있는 것이다)


유준상이 연기한 성준이라는 캐릭터는 본인 스스로도 불안함과 우유부단함을 많이 노출하고 있는 캐릭터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영화는 완전한 객관적 3자가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준이 1인칭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했을 때 여기에 어느 정도 힌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흔들리는 성준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그와 만나게 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늘어 놓게 된다. 사실 이 영화의 모호함은 이미 여러 관객들이 별다른 의심을 갖지 않고 바로 수긍해 버리는 김보경의 1인 2역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한 배우가 각기 다른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아주 원초적인 영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텐데, 관객은 너무나 당연히 '아, 김보경이 성준의 옛 여자친구와 술집 주인 모두를 연기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이지만 홍상수는 이 뻔한 1인 2역의 장치를 이야기와 맞물려 매우 영민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준의 이야기 속에 김보경이 연기한 두 명의 캐릭터는 단순한 1인 2역의 범주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이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성준 밖에는 없는데, 그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술집 주인의 대사와 태도는 옛 여자친구와 동일시 할만한 요소가 충분해 보인다. 갑작스레 술집 주인이 성준을 '오빠'라고 불렀을 때 1차적으로는 영호가 들려준 그녀의 이야기들에 빗대어 무척이나 외로운 존재여서라고 인식할 수 있지만, 2차적으로는 아니 이미 옛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성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그래, 내 새끼'하며 둘을 동일 인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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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여주인은 매번 어딜 갔는지 자리를 비우는 것도 이상하지만 - 마치 1인 2역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 테이블에 앉아있는 영호 무리를 대할 때마다 매번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인사하는 것도 흥미롭다. 여러번 같은 대답을 하는 영호의 대답도 그렇고)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흑백 영화로 인한 날과 시간의 모호함 혹은 분명함이다. '북촌방향'은 '오!수정'에 이은 홍상수 감독의 두 번째 흑백영화인데, 이번 작품에서 흑백영상이 갖는 의미는 시각적으로 오는 아름다움과 영화다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 영화는 흑백 영상으로 인해 날과 날의 경계가 흐려짐과 동시에 낮과 밤의 경계도 흐려졌다. 처음 성준이 서울에 올라온 뒤 북촌을 기웃거리다 낮술을 한 잔 하고는 다시 젊은 영화하는 남자 세 명과 택시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이미 아주 늦은 밤인줄로만 알았었는데, 옛 여자친구와 헤어져 나온 뒤 만나게 된 영호의 첫 마디는 '너 술마셨구나'다. 즉, 이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물론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도 혼자 술을 한 잔 하고 영호를 만났다고 할 수도 있으나, 이쪽이 더 가깝다) 흑백 영상에서는 이러한 경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즉, 이렇게 되면 성준이 옛 여자친구의 집에서 얼마의 시간 동안 머물렀는지에 대한 추정이 어려워지는데,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북촌방향'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처럼 사실을 추론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중요한 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모호함의 여지는 매우 흥미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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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은 소설의 여 주인과 이별하며 그녀를 위한 세 가지 좋은 충고를 약속받고 떠난다. 이 약속은 과연 누구에게 하는 것일까?)



날과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진 가운데 공간적인 장소의 개념은 더욱 선명해진다. 영화 속 성준의 동선은 매우 한정적이다. 영호를 만나기 위한 길, 그리고 영호와 만나서 함께 가는 '소설'이라는 술집. 그 외에 등장하는 공간들도 반복되는 곳들이 많다. 같은 공간, 모호한 시간의 경계 속에 성준은 극 중 대사를 통해 운명론에 가까운 인연에 대해 이야기 한다. 지금까지 영화가 보여준 태도로 보았을 때 이 인연에 관한 이야기는 역시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볼 수 있겠다. 뭐랄까, 영화 속 주인공들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스스로가 그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텍스트라는 점이 '북촌방향'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영화 속 성준의 얘기와도 같이 주인공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로서의 인연과 가능성도 흥미롭지만, 영화 스스로가 막연히 모호한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다양한 가능성의 활로를 열어두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인연들의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구성은 생각하면 할 수록 놀라운 구조라 하겠다. 누군가 '북촌방향'을 '인셉션'과 연관지은 제목을 스치듯 본 기억이 있는데, 홍상수 감독은 '나도 몰라'하며 허허 웃지만 이 영화의 구조는 '인셉션'의 그것처럼 깊이와 가능성이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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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이 보여준 '가능성'에 흠뻑 빠져있다보니 너무 이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이 와중에도 홍상수는 자신이 그 동안 지속적으로 보여준 남녀상열지사, 아니 인간 관계에 대한 매우 섬세한 과정 역시 담아내고 있다. 전작인 '하하하'에 대한 글을 쓰면서 '좋은 것' '좋은 것만 보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 '북촌방향'은 '착한 것'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좋은 것'에 대해서도 그러했지만, 홍상수가 화두를 던지는 방법은 너무나도 본편적인 것, 그래서 오히려 단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 다시금 (혹은 처음) 생각해보게끔 하는데, 이번 작품 역시 대중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유행섞인 '착하다'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의미로서의 '착하다'에 대해 떠올려 보게 했다. 홍상수 영화에서 처음 이런 대사를 만났을 때만 해도 '큭'하며 코웃음 치는 것으로 그치곤 했는데, 이제는 '넌 너무 착해'라고 이불 속에서 얘기해도 '야, 저런 속물이 다있네'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렇다면 착하다는 것은 진정 어떤 것인가?'라는 걸 떠올려보게 되니, 이렇든 저렇든 결과를 떠나서 참 대단한 작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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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안할 수가 없는데, '성준' 역할을 맡은 유준상의 경우 이미 '잘알지도 못하면서'를 통해 홍상수 세계에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터라 이번 작품이 처음부터 기대되었던 경우인데, 역시나 김상경과는 다른 그 특유의 깔끔하면서도 나태한(?) 목소리는 '성준'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빛나게 했다. 기존 TV드라마 출연을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배우 유준상의 가능성은, 이제 더 이상 가능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 작품을 통해 충분히 발휘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마치 '잘알지도 못하며서'의 유준상 처럼 '북촌방향'을 통한 개인적 발견이라면 '보람' 역할의 송선미를 들 수 있겠다. 기존 TV를 통해 접했던 그녀의 이미지는 사실 와닿는 것이 없는 평범한 연예인의 그것이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녀가 보여준 캐릭터는 '잘알지도 못하면서'의 고현정이 그러하였듯, 새로운 가능성과 동시에 홍상수 세계에도 썩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더불어 '이렇게 목소리가 좋았던가'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으며, 그 미소 역시 그간 TV를 통해 보았던 얼굴이었으나 처음보는 미소였다.

1인 2역을 연기한 김보경의 이미지도 좋았다. 그녀 역시 발견이라 할 만한 것이었으며 여배우가 가질 수 있는 매력을 거의 대부분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호'를 연기한 김상중은 마치 계속 홍상수 세계에 존재했었던 인물 마냥 그 자리에 떡 하니 있는데,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면 이제야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김상중 역시 발견 또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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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이 일은 몇 일 간의 이입니까 아니면 하루 동안의 일입니까?' 그러자 선생이 대답했다. '허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홍상수의 열 두 번째 장편영화 '북촌방향'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홍상수! 홍상수!'를 외치게 한 마법 같은 작품인 동시에, 왜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하고 기다리고 빠져들게 되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했던 경험이었다. 그의 가능성 더 나아가 영화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1. 적어도 극장에서 한 번은 더 볼 작정입니다. 반복으로 이뤄진 작품임에도 또 무엇이 있을까 또 보고 싶은 작품이라서요!

2. 이 영화를 시간의 의미로 풀어낸 글 가운데는 씨네21 정한석 님의 글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영화 만큼이나 흥미로운 글이었어요!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67246&page=1&menu=&keyword=&sdate=&edate=&reporter=)

3. 언젠가 한적한 날을 골라 북촌방향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네요. 물론 '소설'에 가서 맥주도 한 잔 하구요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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