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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러제트 (Suffragette, 2015)

싸워야만 가질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


20세기 초 영국을 배경으로 여성들의 투표권을 주장하며 거리에서 투쟁하는 '서프러제트 (Suffragette)' 무리의 이야기를 그린 사라 개브론 감독의 '서프러제트'는, 근래 개봉했던 스티브 맥퀸의 '헝거 (Hunger, 2008)'와 에바 두버네이 감독의 '셀마 (Selma, 2014)'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응당 누려야 할 권리 혹은 자유를 갖지 못했던 이들의 투쟁 혹은 그 투쟁 자체에 관한 이야기다.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영화 속 런던의 배경 역시 20세기 초로 아주 가까운 과거이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우 올해가 되어서야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했을 정도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근 과거의 이야기 혹은 현재 진행형의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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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러제트'는 캐리 멀리건이 연기한 모드 와츠라는 평범한 인물이 어떤 일들과 변화를 겪으며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운동가로 변모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주목한다. 이런 구조는 전형적일지 몰라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투쟁이나 운동에 큰 관심은 없었던 평범한 인물이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며 결국 서프러제트가 되는 이야기는 반복이지만, 투쟁 혹은 운동에 있어서 이 반복된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가를 떠올려 보면 이 영화의 선택은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주장을 관철 시키기 위해 거리에 나와 운동을 하거나 투쟁을 하는 이들을 그저 원래 그런 사람들로 생각하거나, 특별한 이해 관계가 있어서, 성질이 그러해서 그러는 거라고 오판하는 경우가 많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수 많은 사고 혹은 피해로 인해 거리에 투사가 된 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평소 여성의 정치 참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역시 누군가 정해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로만 알고 있었던 모드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게 되면서 운동에 뛰어 들게 되는 것처럼, '서프러제트'의 이야기는 그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아주 평범한 이가 투쟁해야 한다는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이미 여러 차례의 반복이 있었음에도 재차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직도 다수는 내가 자의 혹은 타의로 인해 당사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프러제트'의 이야기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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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묘사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공권력에 의해 폭력을 당하거나 하는 종류의 고통 보다는 오히려 주변과 가족으로부터 겪는 이질감과 몰이해에서 오는 외로움과 괴로움, 갈등에 주목한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줘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가치 판단의 중요성 보다는 사회의 분위기가 투표권을 주장하는 여성들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과 억누르려는 방향성을 갖고 있을 때, 나서서 피해를 감수하거나 투쟁하기 보다는 그저 조용히 침묵하기를, 적어도 나와 내 가족은 침묵하기를 바라는 답답하고 차가운 공기는, 모드에게 그 어떤 무력을 통한 폭력 보다도 더 큰 고통으로 파고 든다. 시위를 하다 경찰에게 잡힌 모드를 풀어주면서 '체포하지 말고 그냥 집 앞에 내려줘. 남편이 알아서 하게'라는 식의 대사는 이 같은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사 중 하나다. 그렇게 평범한 인물이 가족과 소중한 아들, 직장 등 모든 것을 잃고, 누군가는 목숨을 통해 쟁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만, 반면 그 무언가를 남성들은 너무 쉽게 소유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부당함, 너무 쉽게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이들의 무지함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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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라보면 '서프러제트'의 이야기는 결코 과거의 역사 속 투쟁으로 읽을 수가 없다. 최근 마치 바이러스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여성 혐오 범죄를 비롯해, 다른 곳도 아니고 '서프러제트'의 상영관에서 벌어진 여성 혐오 및 비하, 폭력 사건은, 솔직히 내가 지금 어떤 수준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처참한 기분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서프러제트'는 누군가가 싸워야만 가질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사실은 그것들을 싸우지도 않고 애초부터 갖고 있어서 자신만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들과, 왜 이것들을 싸워야만 가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부끄럽고 반성해야 할 역사와 현재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이들이 그것을 행동으로 거침 없이 옮길 정도로 사회의 분위기가 썩어버렸다는 것에 한심함 마저 든다. 지금은 우리 사회는 후퇴해도 너무 후퇴했다.



1. 벤 위쇼는 출연하는 지도 몰랐었는데 반갑더군요. 그래도 꾸준히 스크린을 통해 만나게 되네요

2.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고 살아온 많은 것들에 대해 적지 않은 수가 혐오 혹은 분노를 느낀다는 걸 근래 종종 느끼게 되어 당황스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요즘이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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