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엑스칼리버 (Excalibur, 1981)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매해 열리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오랜 만에 함께 했다. 이번 주말 보았던 작품은 존 부어맨의 1981년 작 '엑스칼리버 (Excalibur, 1981)'였는데, 변영주 감독의 추천으로 이번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이 영화를 언제 어떻게 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마도 어린 시절 홈비디오를 통해서 보았을 것이다. 내게 '엑스칼리버'라는 영화는 안개와 황금 갑옷의 이미지로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작품이었다. 아더왕과 엑스칼리버의 전설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니 대략적인 줄거리는 기억이 났었지만, 구체적인 영화의 내용이나 결말 등은 잘 기억나지 않고 오로지 황금 갑옷,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황금으로 된 투구가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에 보았을 텐데, 그 어린 기억에도 황금으로 된 갑옷과 투구는 강렬한 충격이라 깊이 각인 되었던 것 같다. 어찌 되었든 그 어렴풋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엑스칼리버'를 스크린으로 처음 보게 되었다. 그 것도 새롭게 DCP를 거친 좋은 화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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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보게 된 '엑스칼리버'는 세월이 흘러서 인지 조금은 유치하고 (특히 연기는 많이 들 어색하고), 과장된 측면이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상당히 과감하고 강렬한 작품이기도 했다. 가끔 예전 영화들을 보면서 느끼는 놀라움은 컷의 전환이나 시간의 경과, 장소의 변화 등을 처리할 때 상당히 과감하면서도 인상적인 방식들로 처리해 버린 다는 점인데, 이 작품에서 역시 그런 장면들을 여럿 만나볼 수 있었다. 이런 점은 한 편으론 '저렇게 그냥 무시해 버리나?' 싶기도 하지만, 적절하게 이루어졌을 땐 '단순히 저것 만으로 모든 것의 변화를 설명해 내다니!'라는 감탄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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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는 역시 빛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의 갑옷 이미지였다. 좋은 화질과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였는지 몰라도, 더욱 더 눈 부신 갑옷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단순히 빛나는 것 만이 아니라, 이 갑옷을 일종의 거울 삼아 표현해 내고 있는 방식이었는데, 분명 그 장면에서는 인물의 상대편에 그런 빛을 내는 환경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묘한 색의 빛을 갑옷을 통해 투영 시키는 방식은, 이 영화 전체에 드리워진 신화 적인 분위기를 더 고조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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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엑스칼리버' 하면 떠오르던 이미지는 오로지 황금 갑옷이었기에 그의 등장을 영화 내내 기다릴 수 밖에는 없었는데, 어린 시절의 인상이 워낙 깊었던 탓인지 그 기대보다는 조금 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확실히 기억은 조작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생각보다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고, 이 영화를 처음 보던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던 추가적인 아더왕 전설의 소스들이 더해져 더 많은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지금은 중년을 넘긴 배우들의 풋풋한 데뷔 시절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였다. 헬렌 미렌과 리암 니슨, 가브리엘 번 그리고 패트릭 스튜어트의 젊은 시절 모습은 보는 것 만으로도 흥미로웠는데, 다들 생각보다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도 재미있었다. 영화 정보를 보면 시아란 힌즈도 출연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나중에 DVD로 볼 때 다시 한 번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마지막은 이 영화를 소개해주신 변영주 감독과 GV에 함께 참여했던 허지웅씨 사진.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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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Tinker Tailor Soldier Spy, 2011)

쓸쓸한 공기를 머금은 스파이라는 존재에 대해



르카레의 원작 소설 팬들에게는 이 작품이 영화화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되는 바였겠지만, 역시나(?) 원작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렛 미 인'을 연출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신작이라는 사실과 게리 올드만, 톰 하디, 존 허트, 콜린 퍼스, 토비 존스, 마크 스트롱, 시아란 힌즈 그리고 최근 셜록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는 출연진에 도대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스파이 영화라고 했을 때 혹자는 '누가 스파이인가?'를 찾아내는 반전 영화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이하 TTSS)'는 결코 '범인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냉전 시기 유령처럼 활동하던 스파이라는 존재를 작전의 역동성이나 활동성으로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은퇴한 스파이가 조직 내의 이중 스파이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스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 시대의 산물인지를 그 시대와 함께 아주 덤덤하게 그려낸작품이었다. 많은 스파이 영화와는 달리 그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애잔한 시대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야 말로 TTSS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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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혹은 쫓겨난)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 (게리 올드만)는 조직 내에 스파이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고는 조용하고 빠르게 이중 스파이를 찾아나선다. 영화는 스마일리가 이중 첩자를 찾아내는 과정을 그리기는 하지만, 그것 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 속에서 조지 스마일리로 대변되는 스파이라는 존재에 대한 묘사에 더욱 많은 신경을 쓴다. 그의 회상을 통해 그 동안 이 인물들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묘사하는데, 이것 역시 양면의 활용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가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역시 '스파이'와 '세계' 그 자체다. 사실 나도 영화 감상 초반만 해도 일반적인 스파이 영화를 볼 때처럼 온몸에 감각을 최고로 곤두세운 상황에서 모든 단서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점점 영화가 전개될 수록 단서보다는 '공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영화는 클래식한 당시를 디테일하고 고풍스럽게 묘사하면서도 톤을 다운시켜 전반적으로 마치 추운 겨울 입 밖으로 내뱉는 차가운 입김처럼 싸늘한 공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서늘함은 곧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연결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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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영화 정말 쓸쓸하다. 영화 속 스파이들은 같은 편에 서있던 그렇지 않던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을 관객은 받게 된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신들이 스파이로서 이러한 외로운 존재라는 점을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듯 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이 어떠한 이유로든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사력을 다해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기 보다는, 마치 이 외로움을 누군가 끝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이 내 뿜는 공기는 주변의 것보다도 차가워 보였고, 홀로 남겨진 그들의 눈빛은 누구보다 애처로워보였다. 시종일관 이러한 분위기를 머금기만 해오던 영화는 종종 이를 분출하기도 한다. 주변을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연인과의 관계를 마무리하고 연인이 떠난 뒤 홀로 오열하는 모습이나,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를 죽음으로 종결시켜주길 바라는 이나 그런 연인의 바램을 들어줄 수 밖에는 없는 이의 '눈빛'은 다른 스파이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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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과 마찬가지로 스마일리가 이중 스파이를 찾는 과정은 마치 자신이 걸어온 스파이로서의 삶을 반추하며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되짚어가는 과정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역시 스마일리가 카를라(칼라)와 만났던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를 본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명장면으로 꼽는 이 장면은 회상 장면임에도 플래시백 없이 그저 현시점에서의 대화만으로 묘사되는데, 그럼에도 이 장면은 가장 소름돋는 '회상' 장면이자 간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이 대화, 아니 회상 시퀀스에도 역시 TTSS만의 쓸쓸한 정서가 담겨있는데, 단순히 경지에 오른 강호의 고수가 또 다른 고수에게 보내는 존경의 마음이 아닌, 냉전이라는 시대가 만들어낸 스파이라는 세계에서 서로를 인정함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아주 함축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그로 인해 영화가 시종일관 말하려고 하는 '스파이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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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이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된 것에는 역시 스마일리를 연기한 게리 올드만의 영향이 컸다.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에게 연기력을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그는 조지 스마일리를 통해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리뷰 중간중간 포함된 스틸컷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게리 올드만이 창조한 '조지 스마일리'는 절제로 가득 덮혀 있음에도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는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이 글에서 여러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냉전의 시대보다도 더 차갑고 쓸쓸한 스파이라는 존재를 묘사하는데에 있어 스마일리의 그 표정없는 얼굴은 정말 효과적인 거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이미지도 잘 어울렸다. '셜록'과는 묘하게 차별되면서도 이미지로서 전달하는 바가 충분하다고 느껴지는 캐릭터였다. 콜린 퍼스는 주연으로 홀로 나설 때보다 이렇게 여러 캐릭터에 섞여 있을 때 더 큰 매력을 발산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고, 마크 스트롱의 그 눈빛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못 잊을 이미지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비중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와 시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생각하는 '로이' 역의 시아란 힌즈의 이미지도 인상적이었으며, 톰 하디와 존 허트, 스티븐 그레헴 등 좋은 배우들의 멋진 이미지가 영화와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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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일반적인 영화가 스파이를 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함으로서, 오히려 가장 스파이 영화다운 작품이 되었다. 이던 헌트가 활약하는 스파이 영화도 좋지만, 조지 스마일리가 활약하는 스파이 영화도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다.



1. 



엔딩에 흐르던 훌리오 이글레아시스의 'La mer'는 정말 정말 탁월한 선곡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지금까지 도대체 몇번을 반복해서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2. 보통 원작이 있는 영화는 영화를 보고나면 크게 다시 찾아보고픈 생각이 들지 않곤 하는데, 이 작품은 원작을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기회가 된다면 BBC에서 제작한 알렉 기네스 주연의 TV시리즈도요.


3. 색감과 질감에 반한 탓인지 블루레이 출시를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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