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 Road, 2008)


1. 원래 리뷰를 반 이상 굉장히 많이 써놓았었는데, 도저히 정리가 안되더군요. 가끔 그럴 때가 있는데 이번 경우는
<바벨>의 경우처럼 영화에 완전히 압도당해 쓸 엄두를 못 내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좀 처럼 정리가 되지 않더라구요;;

2. 사실 반 이상 써놓았던 리뷰만 봐도 그렇지만, 이 영화는 굉장히 할 얘기가 많은 영화였어요.
그냥 <타이타닉>의 두 주인공이 나온다길래 워낙에 좋아하는 배우들이라 주저없이 선택한 영화였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할 얘기거리도 많았고,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들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좀 처럼 하나의 '글'로서 마무리 짓지를 못하겠더군요;

3.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 편하지 만은 않더라구요. 이 영화는 굉장히 내면을 건드리는 영화인데, 상당히 냉소적이고 현실적인데다가 비관적인 논조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괴롭더군요. 꼭 내 얘기가 아니더라도 주인공에게 쉽게 동화되는 저로서는 역시나 괴롭더라구요 ^^;

4. 영화를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영화 속 케이트 윈슬렛이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감독인 샘 멘더스가 감독으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남편으로서는 상당히 독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아무리 영화라지만 저 같으면 자신의 아내에게 이런 캐릭터를 연기시키지는 못할 것 같아요;;

5. 마이클 샤논이 연기한 '존'이라는 캐릭터는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속에서 보면 존이 휠러 부부에게 따지듯이 얘기하는 장면이 나와요. 근데 이 장면은 존이 휠러 부부의 내면의 욕망과 허영과 모든 것을 겉으로 끄집어 내어 까발리는 굉장히 괴로운 장면이라 할 수 있는데, 관객들이 이 장면에서 웃더라구요. 도대체 뭐가 우스웠던 겁니까. 정신적으로 문제있는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라 우스웠던 것인지 묻고 싶어지더라구요.

6. 안좋았던 기억에 대해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영화를 본 아트하우스 모모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래딧이 모두 끝날 때까지 불이 켜지지 않는데(이게 맞죠), 뒤에 앉으신 여자 분 두 분이 계속 작지 않은 소리로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여기 왜 불 안켜줘' '뭐야 이거 다 봐야 되는거야?' '뭐야 우리 무슨 극장에 갇힌거야?'
저 정말 거의 처음으로 극장에서 큰 소리로 누구에게 따질뻔했어요. 엔딩 크래딧을 저처럼 모든 관객들이 보길 원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고, 보고 싶어도 시간 때문에 일찍 나가야할 수도 있을거고. 하지만 보고 싶지 않으면서 보고 싶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짜증이 나더군요.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이것들 때문에 영화평을 정리 못한 것은 아니에요 ^^;)

7.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영화의 초반에 부부관계인 두 주인공이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 왠지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가 죽지 않고 계속 부부관계를 유지했다면, 아마도 이런 권태기를 한번쯤은 겪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왠지 잭과 로즈의 연장선으로 느껴져서 재미있기도 했죠.

8. 결국 영화는 현실과 이상에 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데, 제 생각은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이상인가 하는 것이었어요. 즉 이상으로 여겼던 것들이 어쩌면 또 다른 현실일 수도 있고, 현실로만 생각해왔던 것이 어쩌면 이상과 별 차이가 없는 것 일 수도 있다는 거죠.

9. 가장 좋아하는 남녀 두 배우들 하나인 레오와 케이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더라구요. 멋지게 배우로 성장한 둘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어서 이기도 했고, 그냥 둘이 좋아서이기도 했구요.

10. 음악도 참 좋았습니다. 스코어 앨범이 나온다면 구매하고 싶을 정도로요.

11. 그냥 두 배우가 나오는 로맨스 물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으시면 될 것 같아요. 인간관계과 현실과 이상, 그리고 결혼에 관한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담긴 영화에요.

12. 마지막 극중 케시 베이츠의 남편의 행동이 이 영화에 심정을 말해주는 것 같아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드림웍스 픽쳐스에 있습니다.







아래는 반도 못 쓴 리뷰인데, 혹시나 나중에라도 이어쓰거나 수정할 일이 생길지 몰라 남겨두려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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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 Road, 2008)
무엇이 현실이고 이상인가.

리처드 예이츠(Richard Yates)의 소설을 원작으로 <아메리칸 뷰티>를 연출했던 샘 멘더스와 <타이타닉>의 커플이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케이트 윈슬렛이 출연한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지금까지 언급한 이유만으로도 일단은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잘 알다시피 샘 멘더스와 케이트 윈슬렛이 부부관계인 것 또한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이었으며, <타이타닉>의 커플이 11년 만에 다시 커플로 스크린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영화팬들에게는 분명 설레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재미있는건 이들 외에 역시 <타이타닉>에 함께 출연했었던 케시 베이츠 역시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비중있는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원작이 된 예이츠의 소설도 읽어보질 못했고, 영화에 대한 정보라고는 감독과 배우들 뿐이었기에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관람하게 되었는데, 영화는 생각보다 상당히 냉소적인 동시에 괴롭기까지한 영화였다.


(이후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는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심하게 다투는 휠러 부부의 언쟁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일단 이 첫 장면부터 한 번에 체감할 수 있었던 건 이 영화의 화면비였다. 드라마 장르치고는 드물게 2.35:1의 와이드 비율로 영상을 제공하고 있는데, 스펙터클한 장면이 많은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2.35:1의 화면비를, 드라마가 주가 되는 이 영화에서 사용한 이유는 바로 인물들간의 거리를 더 표면적으로 느끼게 해주어 관객들로 하여금 캐릭터들이 한 공간안에 있어도 그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 생각하도록 만들게 된다. 초반 좁은 자동차 앞 좌석에 앉아 두 주인공이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차안 옆 좌석에 앉아있음에도 이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다. 사실 더 인상적인건 극중에서 두 인물이 표면적으로는 다투고 있지 않을 때라고 할 수 있을텐데,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있을 때도 그렇고 우리가 현실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는 인물들 간의 거리를 눈에 확 띄도록 설정함으로서 이 영화에서 말하려고 하는 현실과 이상간의 간극, 인물들 간의 갈등에 대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극중 휠러 부부가 사는 거리의 이름이다. 잘사는 중산층을 대변하는 일종의 상징으로서 인식할 수 있을텐데, 이 거리와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전형적인 보기 좋은 상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휠러 부부는 이 가운데서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선망에 대상이며, 그들 스스로도 이를 인지하고 보여지는 것에 더욱 신경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생계를 위해 하고 싶지 않은 뻔한 세일즈 일을 해오고 있는 프랭크(디카프리오)와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가사를 꾸려가고 있는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우연한 기회에 파리로의 여행이 아닌 이민을 계획하게 된다. 현재의 삶에 무력함과 공허함을 느끼던 에이프릴은 예전 사진을 정리하다가 파리에 꼭 다시 가보고 싶다던 프랭크의 말을 떠올려 급작스레 이를 계획하게 된다. 프랭크도 처음에는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현실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터라 이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 계획에 함께 하게 된다.

이 계획이 있기 전 프랭크가 기차를 타고 회사에 출근하는 장면은 그의 삶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출근 시간 다른 사람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 똑같은 양복과 모자, 무엇보다 표정으로 무의미하게 회사 건물로 들어서는 프랭크의 모습은, 프랑스 이민을 결정하고 나서 180도 달라진다. 분명 똑같은 옷과 시간이지만 현실에서의 탈출구를 계획하고 있는 프랭크에게는 유난히 빛이 나게 마련이다. 휠러 부부는 친한 부부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데, 이 부부는 이들 앞에서는 말하지 못했지만 이들이 가고나자 말도 안되게 유치한 계획이라며 서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들 부부의 행동과 설정은 휠러 부부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역시 자신들의 솔직한 마음을 얘기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그 앞에서는 그러지 못한다. 말하고 싶은건 이상이고, 그럼에도 말못하고 나중에 뒤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현실이다. 이 친구 부부의 남편은 자신의 집 마당에서 휠러 부부의 집을 멀찌감치 동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오래전부터 에이프릴에게 연정을 품었지만 이를 고백하지 못한다.

이렇게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때조차 믿어주지 못하는 거품으로 덮힌 관계 속에 영화는 현실과 이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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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이라 할 수 있는 '존'과 연관 지은 이야기는 시작도 못하고 리뷰를 접게 되었네요;;;





왓치맨 (Watchmen, 2009) (IMAX DMR 2D)
히어로에 빗댄 정치와 권력에 대한 담론



<300>을 연출했던 잭 스나이더 감독의 <왓치맨>은 일찌감치 부터 올해 가장 큰 기대작 중 하나였고, 그 이유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는 드물게 원작인 그래픽 노블을 이미 영화 감상 전에 읽게 되었던 흔치 않은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영화 감상 전에 원작이 된 텍스트를 먼저 접한다는 것은 일종의 선택일 것이다. 원작을 미리 본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 되겠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또한 원작이 존재할 경우, 원작을 미리 인지하고 영화를 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 있는 것도 물론일 것이다(물론 지론은 영화는 원작이 있을 경우라 하더라도 영화만을 통해 100%를 보여주어야 하지 원작을 읽어야만 100%가 완성되는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원작을 읽었을 경우 100%가 120% 200%되는 것이 되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왓치맨>은 그래픽 노블이 원작이라는 소식을 듣고 조금은 일부러 원작을 찾아 읽게 된 경우였다. 물론 <씬시티>때 반짝했다가 <다크 나이트>이후 본격적으로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그래픽 노블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간 그래픽 노블이나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의 경우, 영화 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은 그 세계관과 캐릭터, 비하인드 스토리 등이 많아 왠지 영화만으로는 100%를 얻지 못하는 것 같은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왓치맨>의 경우는 미리 그래픽 노블로 출판된 2권의 책을 미리 개봉전에 읽어보게 되었고, 더더욱 영화를 기대하게 되었었다.

개인적인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영화화는 원작과 비교하여 만족스러웠으며, 원작을 미리 읽었던 것은 약이 된 경우였다 하겠다.


(이후 부터는 영화와 그래픽 노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앨런 무어의 원작인 그래픽 노블 '왓치맨'은 현실과 픽션이 적절히 섞인 이른바 '팩션(Faction)'이었다. 베트남전과 닉슨 대통령, 케네디 암살, 소련과의 냉전 등 실제 미국 역사의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그 가운데 마치 진짜처럼 가상의 캐릭터들을 끼워넣는 스타일이었다. 이 같은 방법은 <스파이더 맨>처럼 누구나 우연한 기회에 히어로가 될 수 있다라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라 할 수 있겠는데, 실제 역사속에 히어로를 삽입함으로서 허무할 수도 있는 이야기에 좀 더 공감대를 불어넣는 동시에, 관객들에게 원초적으로는 '정말 그랬다면 어땠을까?' 혹은 '그런 일이 어디선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왓치맨'은 만약 미국이 배트남 전에서 패하지 않고 다양한 국가적 사건들에 알게 모르게 히어로들이 개입되어 있었다고 가정한 상태로 진행이 된다. 이 국가적 사건들에 가상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심은 것은 제법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특히 영화의 인트로 시퀀스는 인물들의 대략적 역사와 더불어 시대적 상황을 간략하지만 임팩트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확실히 실제 미국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있을 수록 흥미로운 인트로가 아닐 수 없다(더군다나 여기는 상당히 많은 패러디나 인용들이 담겨있어 더욱 흥미롭다. 그 유명한 종전 사진을 레즈비언의 키스로 묘사하는 센스라던가, 히어로의 은퇴장면을 예수의 최후의 만찬으로 표현한 장면 등만해도 그렇다).

사실 원작 코믹스는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이나 역사에 대해 상당히 불친절한 경우였는데, 영화는 이 부분을 비교적 잘 압축하여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미닛맨 (Minutemen)'으로 활동했던 1기 히어로들이 어떻게 활약했고 사회에서는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어떻게 사라져갔는지와 케네디 암살이나 인류의 달 착륙 같은 국가적 사건에 어떻게 개입이 되어있는지, 기본적으로는 어떤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었는지, 그리고 각 캐릭터들의 어린 시절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 보여주면서 영화 속 주인공들인 '왓치맨'이 구성되는 시기까지 이를 함축적으로 아주 잘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근래에 본 오프닝 시퀀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은 확실히 고심하고 노력한 기색이 역력히 보이는 작품이다. 아마 본인도 꼭 왓치맨은 아니었더라도 어느 코믹스나 그래픽 노블의 팬보이였을 잭 스나이더는, 원작의 수 많은 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의식은 전체적으로 큰 각색보다는 원작의 세계관과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겨오는데에 더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원작을 읽은 입장에서 봤을 때 영화는 전체적으로 그래픽 노블을 그대로 다시 한번 영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 정도로, 몇몇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들과 결말 부분만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신문 가판대 소년이 전하는 화물선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빠진 경우이며, 결말 부분도 원작과는 조금 다르게 변형이 된 경우라 하겠다). 예전 <씬시티>영화를 보고 나서 뒤늦게 원작인 그래픽 노블을 보고는 영화 속 장면이 얼마나 그래픽 노블을 그대로 옮겨오려 노력한 것인가를 확인하고는 놀란적이 있었는데, <왓치맨>의 경우는 원작을 먼저 읽은 경우라 영화를 보는 중에 너무도 똑같은 장면 구성에 놀라게 되는 장면이 몇몇 있기도 했다.

원작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면, 워낙에 원작의 세계관과 캐릭터의 깊이가 깊고 이야기가 다중적이기 때문에 단 한편으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영화에서(그것이 2시간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다 소화하고 설명하고 풀어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잭 스나이더는 몇몇 장면을 영화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함축적 장면들로 표현하고 몇몇 시퀀스들은 과감히 제외하면서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영화화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이 정도의 영화화라면 다른 어떤 감독이 만들어도 쉽게 구현해내기는 어려운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잭 스나이더가 좀 더 스타일리쉬한 부분에 치우쳐서 메시지보다는 보여지는 것에 더욱 치중한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그는 자신만의 장기는 살리되 메시지에 흠이 가는 부분은 최소화 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몇몇 액션 장면에서는 <300>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베리 슬로우 모션 액션을 엿볼 수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과하지는 않았으며(그래서 300 같은 액션영화를 떠올리며 극장을 찾은 많은 관객들이 허탈해하며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액션보다는 원작의 그 질감과 느낌을 스크린으로 옮겨오는데에 더 공을 쏟은 것이 만족스러웠다.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 원작을 읽은 이들 가운데서도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에 대해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편에 서고 싶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굉장히 정치적일 수 밖에는 없다. 그리고 철학적일 수 밖에 없는 텍스트이다. 실제 미국의 정치적 배경을 영화의 주된 배경과 소스로 사용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어찌보며 이 배경 속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존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어떻게 사회의 폭동과 범죄를 야기시키고, 이를 막기 위해 스스로 일어난 자경단과 같은 히어로들을 또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을 영화는 시종일관 보여준다. 이런 과정이 거듭되면서 코스츔을 입은 히어로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기에 이르고, 스스로 환멸과 후회, 덧없음을 느끼고는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반 사회적으로 그려지지만 어찌보면 본래 마스크를 쓰고 히어로가 되기로 했던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신념대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로어셰크 뿐이며, 나머지 히어로들은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 은퇴했다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스스로의 절망 때문이라 해야겠다. 각 히어로들에게는 자신 만의 고통과 이유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생각해볼만한 캐릭터는 역시 닥터 맨하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고로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존은 철저히 국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이용되고 사용되어 진다.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끌게 되고 소련과의 냉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 무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이 존재하고, 그는 미국인이다'라는 말처럼 대외선전용으로도 사용되게 된다.




영화 속 닥터 맨하튼이 겪는 고뇌는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고민과 같은 선상에 놓인다고 볼 수 있겠다. '신'으로 묘사된 것처럼 절대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닥터 맨하튼이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은, 결국 영화과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권력'에 대한 것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왓치맨>은 굉장히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묻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절대적에 가까운 힘을 갖고 있지만 닥터 맨하튼이 결코 절대선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는 극중 코미디언의 말처럼 막을 수도 있던 재앙들을 결국은 막지 '않'은 경우도 많았으며, 인간들에 대한 환멸로 치부하기는 했지만 그조차 인간적인 면에 휩쓸려 어느 한 편을 들고 편협함을 은연 중에 갖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절대자라기 보다는 '미군'에 가까운 행동을 벌여왔던 지난 날들에 뒤늦게 덧없을 느끼고 지구를 떠나지만, 화성에서 그가 갖게 되는 고민들 역시 이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있지는 못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이 엔딩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뒤늦게 이 모든 음모가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 로어 셰크와 댄(나이트 아울 II)은 오지맨디아스를 찾아가보지만 이미 이들이 막기에는 늦어버린 때였다. 나중에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알게 된 닥터 맨하튼 역시 오지맨디아스를 막기 위해 나타나지만 결국 막지 못한다. 아니 막지 못했다기보다는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에 결국 수긍하게 되어버린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 평화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식의 논리. 엄청난 큰 재앙이 닥치게 되자 오랫동안 핵전쟁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를 유지하던 미국과 소련은 더 큰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연합하게 되고, 이른바 '평화'를 이루게 된다. 오지맨디아스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결국 다수가 행복한 평화만 이루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 그런데 나댄과 닥터 맨하튼은 이 같은 오지맨디아스의 논리에 반박을 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계획 시전이 아니라 이미 시행된 이후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핵전쟁 바로 직전까지 갔던 세계의 정세를 평화의 무드로 만든 것이 거대한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 '만들어진 평화'를 굳이 깨는 방식을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거대한 재앙 앞에 다툼과 혼란이 하나로 융합되고 평화를 이루는 과정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여럿 있어왔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9.1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음모설 따위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여러가지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부시 정부에게 단 한 방에 국민의 힘을 실어준 것은 다름 아닌 9.11 참사였으며, 결국 기름전쟁이었던 빈 라덴 잡기 전쟁의 명분을 준 것도 9.11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 같이 큰 재앙이 닥치면 미국의 침공이 부당하고 믿고 있던 사람들의 신념마저 약해져서 '그래,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이젠 충분한 명분이 있잖아?'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왓치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이 잘못된 것은 댄도 닥터 맨하튼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일이 벌어진 바에야 이를 깨고 싶지 않은 것이다. 거짓으로 만들어진 평화지만, 이 거짓을 알게 된다면 겪게 될 혼란과 핵전쟁 위기를 굳이 초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래 이미 일은 벌어졌잖아, 이 평화를 잘 지켜내기만 하면 돼'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끝까지 여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자신의 본래 신념대로 가겠다던 로어 셰크를 닥터 맨하튼이 손수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며, 댄 역시 좀 더 강하게 로어 셰크를 설득하거나 맨하튼을 막아볼 수도 있었지만(물리적으로는 못하겠지만), 그러지 않고 로어 셰크가 죽은 다음에야 '안돼~!'하며 역시 자기 합리화를 하고야 만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곧이 곧대로 융통성 마저 없어보였던 로어 셰크의 길이 옳은 것인지(죽음을 뻔히 알고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 아니면 이미 일이 벌어진 뒤라면 그리고 진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더 큰 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면 이 평화를 지켜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대답이 결코 쉽지 만은 않다. 솔직히 대답은 로어 셰크를 응원하다고 쉽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저런 상황에 닥쳤을 때 과연 로어 셰크처럼 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 것이다.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쓸쓸한 것은 비단 어두운 스타일과 고어한 장면들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관객에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와 현실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채 노출시켜 자기 합리화와 신념 가운데서 고민하도록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 인상적인 건 오지맨디아스가 정말 '평화'만을 위해 이런 계획을 세웠다고 보기엔 후에 상황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폐허를 제건하는 회사는 다름아닌 '바이트'사이고 하늘에도 '바이트'사의 비행선이 떠있고, 결국 이 재건될 세계에서 주도권과 권력을 쥐게 될 것은 오지맨디아스의 '바이트'사가 될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결국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국제 사회에서 주인 노릇을 하려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일 것이며, 더나아가 이를 자기합리화하며 신경쓰지 않으려 하거나 남의 탓으로만 돌리려 하는 전 세계인들에게 보내는 비판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왓치맨>에 현실감을 불어넣어 준 것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영화 속에 삽입된 곡들은 <포레스트 검프>처럼 당시를 느낄 수 있는 곡들이어서, 마치 실존했던 비화를 듣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살짝 들게도 했다. 오프닝에 사용된 밥 딜런의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을 비롯해,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 제니스 조플린의 'Me And Bobby McGee' 등은 당시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곡들이었다. 아, 그리고 코미디언이 살해를 당하는 장면에 사용된 냇 킹 콜의 'Unforgettable'도 기가 막힌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의 'All Along The Watchtower'도 인상적이었는데, 밥 딜런의 곡이나 지미 헨드릭스의 곡 등 당시 히피정신으로 자유와 반전을 부르짖었던 정서를 담고 있는 곡들이 사용된 것도 단순히 시대적 상황만을 고려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대부분 다 인상적이고 적제적소에 음악들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나 단 하나 댄과 로리의 베드씬에서 흘러나오던(그것도 크게!) 'Hallelujah'는 조금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것이 레너드 코헨 버전이라 조금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제프 버클리나 루퍼스 웨인와잇이 부른 버전이었다면 좀 더 쓸쓸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으나, 레너드 코헨의 버전은 '할렐루야'라는 가사와 맞물려 자칫 웃음이 지어지는 시츄에이션을 자아내기도 했다;; (잭 스나이더가 의도한 것이 어쩌면 이것일지도 ㅎ).




일단 잭 스나이더의 영화답게 영화 속 캐릭터들의 모습이라던가 그 스타일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역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로어 셰크였다. 계속 변형하는 가면의 표현도 인상적이었고 그 거친 나레이션과 건조함은 엄청난 포스를 뿜어냈다. 특히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을 때도 인상적이었는데, 잭키 얼 헤일리는 원작이 로어 셰크와 거의 흡사한 느낌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잭키 얼 헤일리는 어디서 본듯 했으나 잘 기억이 나질 않았었는데, 찾아보니 바로 케이트 윈슬렛이 출연했던 <리틀 칠드런>에서 주변에서 소외받고 의심받는 인물을 연기했던 그 였다. 재미있는건 이 <리틀 칠드런>에 등장했던 또 한 명의 배우가 <왓치맨>에 출연하고 있다는 점인데 그는 다름 아닌 나이트 아울 II 역할을 맡은 패트릭 윌슨이다. 원작과의 조금 차이점이라면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원작에서 댄은 좀 더 나이가 많은 인물로(그래서 로리와 나이차이가 좀 있는) 생각되었는데, 극 중에서는 조금 젊은 듯했다. 그래서 로리와도 약간 안어울린다기 보다는 남녀관계로서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도 있었고. 큰 뿔테 안경을 고쳐쓰는 모습이 마치 <슈퍼맨>에서 클락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여러 배우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역시 인상적인 다른 배우를 꼽으라면 빌리 크루덥이었다. 사실 단 번에 얼굴을 알아본 배우는 그 뿐이었다(생긴건 제일 외곡되었는데도 말이다 ㅎ). <미션 임파서블 3>와 <빅 피쉬>를 통해 눈에 익었던 그는 <왓치맨>에서 닥터 맨하튼 역을 맡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빨리 DVD나 블루레이가 출시되어 그의 출연분이 어떻게 촬영되었는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왓치맨>은 분명 원작 코믹스와 더불어 그리 친절한 작품은 아니다. 더군다나 만약 이 영화를 전형적인 액션 히어로 블록버스터로 인식하게 된다면 더더욱 그럴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상당히 매니아적인 요소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며, 우울하고 씁쓸한 사회의 뒷맛 역시 숨기지 않고 내놓고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단순히 주말 시간을 즐기기 위한 영화로는 절대 비추이며 (그래서 오히려 긴 러닝타임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시간 여유가 된다면 원작인 그래픽 노블을 먼저 읽는 편이 조금 더 도움이 되는 듯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나서 원작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원작을 읽었을 때 100%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아마도 영화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면 또 한 번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튼 나는 좋아! 왓치맨!


1. 왕십리 CGV에서 아이맥스 DMR 2D로 감상하였는데, 일산 아이맥스를 안본 입장에서는 엄청난 스크린 크기에 일단 압도. 많은 분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소리가 조금 과하게 큰 듯한 느낌도 분명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영화도 영화지만 영화 상영전 작게 뿌려지던 일반 광고와 예고편들 ;;

2. 마지막 시퀀스에서 오지맨디아스가 보는 많은 영상들 가운데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람보 2>와 <매드맥스>를 들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나름 이유를 가지고 삽입되어 있는데 하나하나 연관성을 따져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되겠다.

3. 나이트 아울 II과 로리가 아키를 타고 불난 건물의 사람들을 구출하는 시퀀스에서 커피를 나눠 마시는 장면이 추가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웠다. 이 장면은 원작을 읽을 때 왠지 인상적으로 느껴졌었는데, 영화에서는 종이 커피잔을 정리하는 것 정도로만 묘사되었다.

4. 원작을 보면 극중 인물들이 보는 신문들이나 길가에 현수막 혹은 TV속 내용들에 대해 자막이 지원되었는데, 영화 속에서는 여기까지는 지원이 되지 않아 살짝 아쉬웠다. 물론이것이 조금은 과한 요구일 수도 있겠지만 원작을 읽은 분들은 아시다시피 이것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전달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 부분이 지원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5. 사실 영화가 영화인지라 하고 싶은 말들이 더 많았는데 한번에 정리하기는 좀 어려웠던 것 같다. 추가로 생각이 떠오르거나 한번 더 보게 된다면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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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 (The International, 2009)
괜찮은 다 아는 이야기


이 영화 <인터내셔널>은 역시 두 배우, 클라이브 오웬과 나오미 왓츠 때문에 보게 된 영화였다. 감독 이름은 미리 확인하지도
못할 정도로 별 다른 정보 없이 보게 되었는데, 감독은 다름아닌 <롤라 런>과 <향수>를 연출했던 톰 튀크베어 였다.
사실 감독이 누구인지 모르고 영화를 보게 된 드문 경우이긴 했으나 중간에 '혹시'하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도 있었다
(이 부분은 맨 마지막에 얘기하도록 하죠).
사실 애초부터 그리 큰 기대를 했던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럭저럭 볼 만한 영화였던 것 같다.
정부와 대규모 범죄조직들이 연루된 음모를 파해치는 주인공, 그 와중에 중간중간 밝혀지는 작은 반전들, 그리고 가미된 액션들.
2시간을 즐기기에 부족함은 없었지만, 이미 비슷한 영화들을 통해 너무 많이 보았던 이야기들을 모은 것 이상의 감흥은 없었으며,
결국 소스를 빌려온 영화들 이상은 보여주지 못했던 평범한 영화이기도 했다.




클라이브 오웬이 연기한 주인공 루이 셀린저는 인터폴 소속의 형사로 은행과 연관된 대규머 범죄조직의 음모를 파해치고 있으나,
워낙에 연관된 정부와 기업들이 많아 내부적으로도 협력이 부족한 상태다. 이런 셀린저를 돕는 인물이 바로 나오미 왓츠가 연기한
뉴욕의 보조검사 휘트먼이다.

영화의 대략적 줄거리라인은 이미 범죄 스릴러 혹은 액션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영화들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마치 또 하나의 다른 에피소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여러가지 영화의 잔상들이 엿보이는데, 옥상을 넘나들며 추격전을 펼치는 장면에서는 <본 얼티메이텀>으로 대표되는 '본 시리즈'가 연상되고, 거대 범죄조직을 상대로 제목처럼 '국제적인' 로케이션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첩보 장면들은 007 시리즈를 비롯한 이른바 '요원'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요소들이었으며, 이 영화가 후반부에 깊게 다루고 있는 메시지 측면은 <다크 나이트>를 절로 떠올리게 한다. 사실 이 같이 여러 영화들의 요소들이 비쳐지기는 하지만, 톰 튀크베어 감독은 비교적 이를 잘 버무린 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 앞서 언급한 이런 영화들을 감상하지 않은 관객들이라면 (그런 관객들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고, 이미 본 이들이라도 그리 지루하지 않게 러닝타임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조직을 상대하는 '요원'의 활약상을 다룬 영화들과의 유별난 차이점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후반부에 삽입하고 있는 <다크 나이트>의 메시지는 이미 <다크 나이트>를 통해 완벽하게 구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이 영화에서는 분명 이것이 핵심은 아니었다고 생각되기에, 여기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통해 인물들의 동기나 연관관계를 좀 더 심도있게 풀어내지 못한 것도 조금 아쉬운 점일 수 있겠다(역시 본 처럼 3부작으로 가야만 완벽한 캐릭터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첫 번째 장면은 박물관에서 벌어지는 총격 씬을 들 수 있겠는데, 독특한 원형 구조로 되어 있는 장소의 장점을 100% 활용한 멋진 구성이었다. 뭐랄까 클라이브 오웬이 처음 이 공간에 들어서면서 한 번 주위를 쓰윽 둘러보는 장면서 부터, 왠지 이 장소가 완전히 망가지겠구나 했는데, 역시 장소를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액션 장면이 벌어지게 된다. 톰 튀크베어 감독은 이 원형구조를 액션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아주 잘 활용하고는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니 임팩트 면에서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확실히 총격 액션 장면에서는 마이클 만이 항상 떠오를 수 밖에는 없는 것 같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극중 클라이브 오웬과 아민-뮬러 스탈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치 <다크 나이트>를 연상시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시퀀스였다. 개인적으로는 이 둘의 대화 장면도 장면이었지만 이를 작은 틈 사이로 나오미 왓츠가 바라보는 시점이 인상적이었는데, 극 중에서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클라이브 오웬이 연기한 셀린저와 현실적인 면을 인정해야 한다는 아민-뮬러 스탈이 연기한 웩슬러를 번갈아 보는 시선 연출은, 어쩌면 꼭 법의 테두리 내에서 범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과 법으로는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범죄에 한해서는 법을 초월해야만 제거할 수 있다는 현실의 가운데서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케 하는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출이었다고 생각된다. 영화는 결국 엔딩 장면에서도 이런 점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어떤 것이 결국 옳았는지 보다 과연 멈출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너무 익숙한 주제들을 다룬터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그리 흥미롭지 못했지만, 그래도 감독의 매끄러운 연출과 뉴욕, 프랑스, 터키의 이스탄불, 베를린 등등 다양한 로케이션 장소, 특히 인상적인 디자인의 건축물들을 만나보는 재미도 쏠쏠했던 영화였다.
클라이브 오웬의 연기는 그리 부족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바바리를 걸치고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 <칠드런 오브 맨>의 이미지가
너무도 겹쳐보였으며, 나오미 왓츠의 경우는 캐릭터 자체가 좀 심심한 캐릭터였던 것 같다(누군가의 파트너가 아니라 그녀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를 어서 다시 보고 싶다!). 아민-뮬러 스탈의 경우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보여주었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또 한 번 기대했으나 캐릭터 자체가 보스 역할이 아니라서 였는지, 이에는 못미치는 살짝 아쉬운 연기였다.


두 배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패스하기엔 아쉬움이 남는 영화겠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과감히 패스해도
될 듯 하다.


1. 인터폴 본부가 나오는 장면에서 잠시 남자 배우 한명이 대사 한마디와 함께 스쳐 지나가는데, 분명 벤 위쇼였다! 그래서 '엇! 벤 위쇼가 이 영화에 나온단 말이야?'하고 놀랐다가 단 몇 초 이후엔 등장하지 않길래 혹시나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했었는데, 엔딩 크래딧을 확인해보니 역시나 벤 위쇼가 맞았다. 나중에 이 영화가 <향수>를 연출한 톰 튀크베어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야 벤 위쇼가 까메오 출연한 것에 '이유'를 수긍할 수 있었다(혼자 알아보고 혼자 좋아했다는 ㅎ)

2. 한 때 제임스 본드 후보로 거론되었던 클라이브 오웬은 이 영화를 통해 어느 정도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한 것 같네요 ㅎ

3. 감독인 톰 튀크베어는 음악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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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와 나 (Marley and Me, 2008)
반려동물을 통해 보는 인생


<말리와 나>라는 제목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제법 오래전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역시 반려동물들과 인간간의 이야기를
다룬 이누도 잇신 감독이 참여한 프로젝트 영화 <우리 개 이야기>때문이었는데, <우리 개 이야기>DVD 출시 당시 프리오더
이벤트로 '말리와 나'라는 제목의 도서를 증정하는 행사로 미리 책을 먼저 받아볼 수 있었고, 바로 이 책을 원작으로 영화화가
진행되었다는 것 정도를 미리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은 아직까지도 읽지 못하였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집에와 책 첫머리를
들춰 보니, 저자의 이름이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과 같은 '존 그로건'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저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것인데, 뒤늦게 생각해보니 한편으론 드라마틱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너무도 평범한 일상들의
이야기를 영화 화법으로 잘 풀어낸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말리와 나>를 처음부터 보려고 마음먹었던 이유는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 일것이라는 단순한 추측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우리 개 이야기>가 그랬고, 고양이와의 애틋한 감정들을 소소하게 다룬 <구구는 고양이다>가 그랬으며,
애니메이션 <볼트> 역시 그런 이유에서 보게 된 영화들이었다. 이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조금은
신파적이고 미흡한 부분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별다른 불만없이 보게 되는건 영화 속에 담긴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 만으로도 어느 정도 개인적인 이유를 더해 충분히 만족스러운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인데,
<말리와 나>는 반려동물과 인간 과의 관계, 그 것 자체에 포커스를 두고 있는 영화는 분명 아니었다. 이 부분이 살짝 의외
이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론 결과적으로 더욱 만족스러운 부분이기도 했다. 매우 평범한 이야기들을 잘 풀어내는 동시에
잊지 말아야할 것들을 빼먹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 의외의 만족스러움을 주었던 <인 굿 컴퍼니>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래 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선 맨 아래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둘 다 기자로서 바쁜 날들을 보내던 존 그로건과 제니퍼 그로건 부부는, 덥석 아이를 키우기엔 부족한 시간들과 두려움으로
인해 먼저 강아지 한마리를 키워보게 된다. 이 강아지의 이름이 바로 '말리'이고, 이 녀석은 엄청난 말썽꾸러기다('말리'라는
이름은 유명한 레게 음악의 레전드 '밥 말리'에서 따온 것이다). 얼마나 말썽을 부리는지 집 안에 남아나는 것을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못쓰게 만들고 나름 엄하다는 애견 교육관도 두손 두발 들어버린 정말 '최강'의 말썽꾸러기 강아지다.
처음 존과 제니퍼는 관객들이 생각했을 때 '와, 저 정도까지 참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리가 일으킨 사고(?)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보인다. 말리가 어떤 사고를 치던 신혼이고, 아직은 말리가 그저 귀여워만 보이는 존과 제니퍼에게는
다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런데 이 부부에게는 미묘한 갈등이 하나 있다. 둘 다 기자이지만 아내인 제니퍼는 좀 더 좋은 직장에서 명성이 있는 기자이고,
남편인 존은 작은 신문사에서 부고란 정리가 주된 업무인, 영향력이 아직은 별로 크지 않은 기자이다. 이런 갈등이 표면적으로
크게 폭발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지만, 결혼 생활이 계속되고 다툼이 일 때마다 이 부분은 조금씩 문제로 부각된다. 남편인
존은 아내에 비해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격지심을 은연 중에 갖고 있으며, 아내인 제니퍼 역시 진심으로 남편을 응원해주기는
하지만 역시 마음 한 켠엔 이런 마음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부부 간 일종의 신분 구조에 대한 갈등은 존이 더 좋은
신문사로 스카우트 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지만, 아이를 유산하고 다시 얻고 키우는 과정 속에서 부부 간의 미묘한
힘겨루기는 계속된다.




이 영화의 이야기들은 매우 현실적이고 미묘한 감정과 갈등들을 보이지 않게 담아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유일하게 비현실적인 요소를 들라면 남자주인공인 존의 태도일 것이다. 보통 같으면 힘겨루기에 있어 한 번쯤 크게
폭발할 것도 같은데 존은 말리가 친 사고들에도, 아내의 투정에도 거의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참아낸다.
존에게는 앞서 언급한 제니퍼와의 부부로서 갈등 외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가족을 위해 참아야만 하는 갈등도 존재한다.
그는 전쟁 기사를 쓰러 출장을 가는 친구 기자와 함께 기자로서 더 역량을 발휘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가족과 말리를 위해
이런 꿈들을 스스로 많이 억제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해 가며 가족 중심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성공을
이루게 된다. 본인은 그렇게도 '기자'를 원했으나 하는 수 없이 떠맡은 칼럼니스트 코너는 연일 인기를 끌어서 더 큰 신문사로
스카우트도 되고, 그렇게 원하던 기자가 된 이후에도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고는 다시금 칼럼니스트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런 점을 보면 역시 인생은 아이러니이고 무엇이 반드시 옳은 것응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듯 하다.
본인의 꿈과 이상을 이루는 것만이 행복한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만 사는 것 또한 반드시 옳다고 이야기
할 수 없음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진리의 경지의 메시지이겠지만, 이 영화는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이런 것들을
슬쩍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외에도 이 영화는 겉으로는 신파극처럼'만' 보이지만, 그 속에 인생과 결혼, 그리고 가족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거의 드러나지 않도록 담아내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부부간의 직업적 상하구조로 인해 갖게 되는 고민들이라던가, 아이를
갖게 되면서 부부간의 변화가 생기는 부분, 그리고 모든 것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열정적이다가 시간이 갈 수록 애정과 관심이
식어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은연 중에 잘 표현해 내고 있다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같은 미묘한 감정들을 이렇게
보일듯 말듯 배치해 놓은 시나리오가 매우 마음에 들었으며, 오히려 이를 대놓고 공개했을 때보다 더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영화의 마지막 존의 내레이션은 갑자기 너무 신파로 마무리 지으려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앞서 이 영화에서 은근히 언급했던 현실의 이야기들을 다시금 정리하는 내레이션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얼핏보면 반려동물의 소중함과 애정만을 담은 내레이션과 마무리로 보이기도 하나, 결국 말리와 함께 했던 삶을 통해
인생에서 소홀히 했고 서로에게 상처주었던 부분들을 반성하고 스스로 껴안음으로서, 전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장치로 내레이션이 사용되고 있다 하겠다. 자신보다 짧은 인생을 사는 '말리'를 통해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랄까. 단순히 항상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것 정도만 이야기하려는 영화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항상 곁에서 함께 한 존재라는 메시지에 울컥하지 않을 순 없었다. 특히 부부의 아들인 패트릭이, 어린 시절
촬영했던 홈비디오를 보는 장면은 너무도 인상적이었는데, 자신이 아기였을 때에도 항상 말리가 함께 했음을 예전 비디오를
통해 새삼 알게 되어 눈물 흘리는 패트릭의 모습은, 반려동물이 한 가족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의지 할 수 있었던
존재였는지 역시 새삼 느끼게 해주는 명장면이었다. 그리고 이런 영화라면 의례 주인공인 동물이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나올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예전처럼 활발하지 못하고 점점 힘을 잃다가 목숨을 잃고 마는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신파라 욕해도 좋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너무도 슬프게 다가왔던 이유는 극 중 '말리'의 모습이, 예전에 개인적으로 함께 했던 고양이
'일루'의 모습과 너무도 겹쳐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루는 말리처럼 엄청난 말썽꾸러기라서, 생전 처음 큰소리로 꾸짖어본 적도
있고 가끔은 귀찮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을 정도로 사건이 많았었는데, 영화 속 말리의 이야기와 일루의 이야기가 다른 점이라면,
영화 속 주인공들은 끝까지 말리를 가슴으로 품었지만, 나는 이사라는 형식적 핑계를 들어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일루를 다른
사람에게 떠나보냈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끝까지 일루를 포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죄책감이 들었고,
회환이 몰려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더욱 슬픈 영화였으며, 또 한 번 반려동물을 키우는 건 매우(아주 매우)
고심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1. 두 주인공 배우는 알았지만 그 외에 캐스팅은 전혀 몰랐던 터라 앨런 아킨의 등장이 무척 반갑더군요!

2. 패트릭으로 등장한 아역배우는 <다크 나이트>와 <미스트>등을 통해 익숙했던 나단 겜블군이라 역시 반가웠습니다.

3.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얻을 수 있었던 영화라 만족스러웠습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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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
한계와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찬사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2008년작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라는 배우 때문에 일단 주목하게 된 영화였다. 젊은 시절 그 누구보다 화려한 헐리웃의 섹시가이로 유명세를 떨치던 미키 루크는 마약을 비롯해 각종 안좋은 일들로 영화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었으나 몇해 전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씬시티>를 통해 다시금 메인 스트림에 복귀하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와 캐릭터로 또 다른 미키 루크를 선보이며 영화 팬들 곁을 다시 찾아왔었다.  그 이후 미키 루크의 새로운 행보를 주목하던 중 처음으로 접하게 된 영화가 바로 이 영화 <더 레슬러>였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 가운데 <파이>와 <레퀴엠>만을 보았었는데(<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dvd가 있음에도 아직 보질 못했는데, <더 레슬러>를 계기로 이번에 한번 봐야겠군요), 영화를 볼 때는 전작들과의 접점을 단번에 알아채기 어려웠으나, 리뷰를 쓰려고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이번 작품 <더 레슬러>역시, '레슬링'이라는 소재는 단지 거들 뿐, 현실과 이상의 갈등 속에서 한계에 부딪힌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주인공인 랜디 더 램(미키 루크)은 젊은 시절 프로레슬러로 큰 인기와 전성기를 누렸던 스타였으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보청기를 착용해야만 하고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일해야만 하는 노년에 가까운 남성일 뿐이다. 그런데 랜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점은 바로 그가 아직도 '프로레슬러'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스포츠를 주제로 신파성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성공스토리 영화들과의 분명한 차이점이다. 실버스타 스텔론의 <록키 발보아>같은 경우 (참고로 미키 루크에게 캐스팅 제의가 가기 전에 스텔론에게도 제의가 있었으나 바로 <록키 발보아>때문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전성기를 보냈던 주인공이 세월이 흐른 뒤 다시금 전성기 때처럼 열정을 가지고 한계에 도전한다는 것으로 감동을 그려내고 있지만, <더 레슬러>의 경우는 전성기를 보낸 주인공이 한참 떠나있던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계속 몸을 사용해야 하는 프로레슬러로서 활동을 해왔다는 점이다. 비록 엄청난 주목을 받던 젊은 시절에 비해 지금은 작은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오고 있으며 쉬지 않고 해왔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 랜디가 겪게 되는 갈등과 고통은 무엇일까. 다른 성공스토리가 '그래, 내가 전성기는 아니지만 아직도 할 수 있어!' 라는 식의 도전과 성공으 이야기였다면, <더 레슬러>의 구조는 '아,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의 고민과 고통에서 시작된다. 격한 프로레슬링을 하기 위해 수많은 약물과 편법등을 동원해서 커리어를 이어오던 랜디에게 어느날 심장에 무리를 주는 쇼크로 쓰러지게 되면서, 랜디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다. 그 동안 프로레슬러로서 소홀했던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에게도 좀 더 마음을 열기로 하고, 자주 가던 스트립바의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에게도 오랫동안 숨겨왔던 손님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심장에 이상이 왔다는 걸 알았을 때 좀 더 신파같은 줄거리였다면 단번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레슬링을 했었을테지만, <더 레슬러>의 랜디는 그 동안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위해 큰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주저없이 커리어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레슬링을 떠나서 그가 바로 피부로 겪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이다. 레슬링 비지니스 속에서만 살아온 랜디가 이를 관뒀을 때 겪게 되는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다. 그 동안 돌보지 못했던 하나 뿐인 딸은 자신을 아버지는 커녕 남 대하듯 쫓아내는 한편, 빈 트레일러 집에 덩그러니 누워서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며, 레슬링을 하지 않으면 생계에 직접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앞치마와 위생모를 머리에 쓰고 식품 코너에서 샐러드를 팔기도 해야한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불러온 동네 꼬마와 구형 닌텐도로 게임을 하는 장면에서, 랜디는 자신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레슬링 게임에 신나하는 것에 비해 아이는 최첨단 FPS 게임(콜 오브 듀티 4)을 이야기하는 것은, 랜디가 현실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그 거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랜디가 이 한계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랜디는 자신을 매몰차게 내치는 딸 스테파니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캐시디에게 살짝 고백을 했다가 거절 아닌 거절을 당한 뒤에도 (생각보다는) 약한 불만의 표현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애초부터 하고 싶지 않았을 식품 코너 일도 긍정적이고 즐겁게 하려는 모습이 오히려 안쓰럽기까지 했다. 랜디가 맞닥 들이게 되는 현실의 묘사도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랐다.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뿌리치는 스테파니의 입장은 사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부분이다. 아버지가 필요할 때는 없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병을 얻고 나서야 나타나서 호의를 배푸는 아버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 당연하고, 캐시디 역시 그간 아무리 자주 오가며 정을 쌓았다 하더라도 막상 고백까지 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일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기에 랜디에게 다가오는 현실이 그리 가혹한 것만은(자초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랜디가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은 너무 순응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닥쳐올 현실을 모두 다 세상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랜디의 모습은 애처로운 동시에 너무도 현실적이다. 사실 이런 현실이 닥쳤을 때 고통을 조금 호소하다가 바로 불만과 용기를 동시에 뿜어내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너무도 영화적이었던 것에 반해, 랜디의 모습은 너무 현실적이라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딸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기 위해 노력하다가 자신의 진심을 얘기하며 그 거친 피부 아래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눈물 이상의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장면이기도 했다 (랜디가 현실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유일한 부분은 '랜디'라는 레슬러로서의 이름으로 반드시 불리길 원하는 것이 전부인것 같다).




랜디가 처하는 현실의 극적인 대비 측면을 위해 영화는 프로 레슬링의 세계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흔히 '쇼(Show)'로만 알고 있는 프로 레슬링을 위해 얼마나 많은 '현실'의 사람들이 많은 준비와 노력을 들이는지를 구차할 정도로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보통 같으면 프로 레슬링의 링 뒷면에서는 서로 저렇게 미리 합을 짜고 스토리를 준비하는구나 하고 알 정도였다면 초반 한 두번 연관 장면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쳤을텐데, <더 레슬러>에서는 이 부분은 랜디가 링에 오를 때마다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미리 칼날을 숨겨 이마에 커트를 내고 사용할 무기들에 관해 미리 준비를 하는 기술적인 측면 뿐 아니라, 이렇게 치열한 경기를 치르고 링을 내려와 쇼 뒷면에 현실로 돌아왔을 때 레슬러들의 세계를 가까운 곳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이다. 보통 일반적 영화같았다면 퇴물쯤 되는 랜디를 젊은 레슬러들이 그야말로 퇴물 취급하며 왕따 비슷하게 몰아갔을테지만, 이것은 너무 극적인 요소만을 강조한 전개일뿐, 현실성과 메시지를 중시하는 <더 레슬러>에서 젊은 레슬러들에게 랜디의 존재는 존경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링을 내려온 랜디에게 서로 등을 두드리며 나누는  '굉장했다' '죽여줬다' '영광이다' 등의 말들은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말들인 것이다.

가장 쇼에 가까운 프로레슬러에게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또 하나의 진부한 설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더 레슬러>는 이런 논란에서는 거뜬히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 현실감을 불어넣은 또 하나의 장치는 바로 카메라 워크라 하겠는데,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시종일관 랜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카메라 워킹과 굉장히 인물에 가깝게 밀착되어 있는 카메라와의 거리는  이 영화의 인물들에 좀 더 현실적인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스트립바에서 댄서로 일하고 있는 캐시디는 이 영화에서 무시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단순히 랜디와의 로맨스 적인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랜디와 비슷하게 한계에 부딪혀 갈팡질팡하는 캐릭터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녀 역시 젊은 댄서들에 밀려서 손님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자신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보인 랜디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랜디에 대한 사랑의 감정만이라기 보다는 랜디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나서 용기를 얻고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 전이된 경우라고 봐도 좋을 듯 하다. 그래서 캐시디는 랜디가 스트립바에 와서 돈을 주고 나체의 자신을 보는 것이 못 마땅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목숨을 걸고 레슬링을 다시 하려고 하는 랜디가 안쓰러운 것이다. 

랜디를 이러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링 위 임을 깨닫고 20년 만에 열리는 기념 경기에 보수도 없이 참가하기로 한다. 링 위의 공간은 철저한 쇼의 무대이자 다른 한편으론 가장 치열한 랜디의 현실이기도 하다. 마지막 경기에서 이미 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이뤘고, 상대 레슬러도 랜디의 상태가 걱정되어 이쯤에서 끝내자고 하지만 랜디는 결국 더 완벽한 쇼를 위해 마지막 기술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링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영화의 엔딩은 마치 한계와 맞서싸우다가 산화해 버린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하지만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듯한 느낌은 분명 아니었다. 랜디는 자신의 인생과 현실, 링을 돌아보며 한계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인채, 자신 만의 방법으로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카메라 워크도 그렇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미키 루크라는 점에서 이야기에 깊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속 랜디와 실제 미키 루크의 삶은 여러 모로 유사점이 많다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속 랜디처럼 자신의 한계와 과오를 인정하고 다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돌아간(돌아온) 미키 루크의 열연은 그래서 더욱 눈물겹다. 사실 개인적으로 한창 때 미키 루크가 출연한 영화들을 그리 많이 본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영화 속 랜디를 연기한 미키 루크의 모습에서는 진정과 인생이 느껴졌다. 미키 루크 본인은 극 중 랜디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 비슷해 처음에는 출연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랜디처럼 미키 루크도 더 이상 이 같은 점을 외면하려고만 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 더 좋은 결과와 그의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미키 루크의 오랜 팬이 <더 레슬러>를 보게 된다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를 듯 하다. 


1. 평소 WWE를 그래도 챙겨보는 입장에서 레슬링 관련 영화라 혹시나 관련 선수들이 잠시라도 스쳐가지 않을까 해서 눈에 불을 켜고 봤는데, 적어도 WWE소속 선수들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더군요.

2. 극중 래니의 딸 이름이 스테파니 라는 점도 살짝 흥미로웠습니다. 잘 알다시피 WWE의 회장 격인 빈스 맥맨의 딸 역시 이름이 스테파니이기 때문이죠 ㅎ

3. 캐시디 역할을 맡은 마리사 토메이의 경우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어 다른 영화에서 본 적이 있나보다 했는데,
그렇다기보다는 여러 여배우들의 얼굴이 겹쳐보인 것 때문인듯 하네요. 그녀는 이미 조 페시와 연기한 <나의 사촌 비니>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적도 있습니다.

4. 스테파니 역할을 맡은 에반 레이첼 우드는 처음에는 몰라보겠더군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때와는 머리 색도 틀리고 화장도 진하게 한터라 약 10초간 못알아볼 뻔 했네요 ^^;

5. 극 중 랜디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등은 숀 마이클스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6. 엔딩에 흐르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는 이 영화와 그리고 무엇보다 미키 루크와 너무도 잘 어울리더군요.




7. 제 리뷰의 제목인 '한계와 가치있는 것들의 대한 찬사'는 좀 맞는 거 같지 않아서 '한계 그리고' 뭐 이런식으로 수정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한계'라는 것 역시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것 같네요. 극중 랜디와 같다면 한계를 접했다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일이고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니까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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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트 (Doubt, 2008)
신앙과도 같은 의심의 나약함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그리고 에이미 아담스까지.이 작품 <다우트>는 정말로 오로지 이 배우들의 이름들만으로 선택을 하게 되었던 영화였다. 최근 <맘마 미아!>를 통해 수준급의 노래실력과 색다른 연기변신을 통해 역시 헐리웃 최고의 명배우임을 새삼 확인시켰던 메릴 스트립과 <카포티>로 비로소 더 큰 인정을 받게 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카포티>이전에도 그의 연기는 항상 최고였다), 그리고 <준벅>과 <마법에 걸린 사랑>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에이미 아담스까지. 이 영화 <다우트>는 원작인 연극을 전혀 모르더라도 이들만 믿고 선택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영화였고, 결과적으로도 그랬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바로 '의심'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이들을 통해 매우 효과적이고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후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아래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는 '성니콜라스'라는 한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이며,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수녀가 교장을 맡고 있으며,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이 곳의 주임신부이며,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제임스 수녀 역시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를 교훈으로 삼는 무서운 교장이자 의심이 많은 수녀이고 이에 반해 플린 신부는 술을 즐기고 아이들과도 격없이 지내는 것들에서 알 수 있듯 상당히 진보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제임스 수녀는 말그대로 주께 모든것을 바치기로 종신서원을 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는 듯한 순수함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날 플린 신부는 '의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론을 하게 되는데, 모든 일에 날이 서 있는 듯한 알로이시스 수녀는 왜 '의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플린 신부가 강론을 했을지,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이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제임스 수녀조차 플린 신부가 학교에 새로 전학온 유일한 흑인학생인 도널드와의 관계를 서서히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러닝타임은 이 세 인물의 갈등구조에 있다. 그리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또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표현되는 인물들 간의 세력다툼과 갈등에 대한 묘사가 몹시도 매력적이다. 원칙과 규율을 중시하는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진보적 성향의 플린 신부는 어찌보면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다. 정확한 상하관계는 아니지만 신부와 수녀의 관계이면서도 한편으론 학교의 교장으로서 더 높은 지위임을 확인시키려는 알로이시스 수녀와 이에 은근히 신부로서 수녀에게 지지 않으려는 플린 신부의 미묘한 밀고 당기기는 교장실을 배경으로한 장면에서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설탕 같이 단 것은 죄악시 하는 알로이시스 수녀와 설탕을 무려 3개나 타서 먹는 플린 신부, 연필을 고수하는 수녀와 볼펜을 선호하는 신부, 교장실에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럽게 교장의 자리인(그러니까 알로이시스 수녀의 자리인) 곳에 앉는 신부와 이를 처음부터 불편하게 생각하다가 플린 신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냉큼 자리에 앉는 수녀의 모습까지.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소소한 표현들만 봐도 이 두 인물이 얼마나 다른 캐릭터인가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자신 만의 세계가 확고한 이 두 인물 사이에 놓인 순수한 제임스 수녀라는 캐릭터도 매우 흥미롭다. 순수함을 상징하는  제임스 수녀답게 그는 이 두 인물 사이에서 몹시도 갈팡질팡 한다. 알로이시스 수녀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플린 신부를 함께 의심했다가 플린 신부의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서는 다시 알로이시스 수녀를 의심하게 된다. 제임스 수녀라는 캐릭터는 본인 스스로의 능동적인 부분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 간의 힘겨루기에 있어 중요한 캐스팅보트로 작용되고 있기도 하다. 둘의 의견 중 어느 한 쪽이 완벽하게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간자적 입장인 제임스  수녀를 자신의 편으로 영입하려 드는 것이다. 결국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의 진심에 서게 되지만, 그렇다고 플린 신부가 일종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 <다우트>가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제목인 '의심'에만 집중할 뿐 '진실' 자체에는 그리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니다. 스릴러였다면 바로 그 진실에 집중해서 플린 신부가 정말 도널드를 비롯해 예전 교구에서도 그렇고 무슨 문제를 일으켰던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알로이시스 수녀에 의심으로 인한 오해였던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마무리했겠지만, <다우트>는 진실 자체보다는 제목처럼 '의심'이라는 것에 더 큰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진실보다는 의심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도널드의 어머니인 밀러 부인(비올라 데이비스)과 알로이시스 수녀의 대화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플린 신부를 의심하는 수녀의 말에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반적인 대답으로 대응하던 밀러 부인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플린 신부의 잘못을 얘기하는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결국 본심을 이야기하고 만다. 그 본심인 즉슨 플린 신부가 실제로 아이를 유혹했던 그렇지 않았던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도널드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이미 여러 학교들을 전학다녔었고, 성 니콜라스 학교를 졸업하면 더 좋은 학교로 진학할 수  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조금만 더 서로 눈감고 지내기만 한다면 된다는 것, 그리고 플린 신부가 아이를 유혹했다 하더라도 도널드가 신부에게 지금처럼 의지한다면 크게 문제가 될 것 없다고 얘기하는 이 장면은, 실체보다는 그저 자신이 믿는 그대로 이루어만 지면 상관없다는 나약한 인간들의 군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시퀀스였다.

영화의 마지막 플린 신부는 더 좋은 곳으로 일종의 승진이 되어 부임하게 되었고, 잠시 아픈 오빠를 간호하기 위해 고향에 갔다가 돌아온 제임스 수녀에게 알로이시스 수녀는 울면서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자신에게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만 알았던 알로이시스 수녀에 의심과 믿음에는 결국 아무런 실체도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막연한 확신과 선입견을 통해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도 완벽히 옳다고 확신할 만큼 강한 자기 최면을 걸어온 것이다. 영화 내내 그 어떤 공포영화의 캐릭터 못지 않는 강한 포스를 내 뿜던 알로이시스 수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이 마지막 장면을 보니, 결국 가장 나약한 캐릭터는 알로이시스 수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자꾸 의심되서 어쩔 수가 없다는 그녀의 눈물의 고백은, 특별한 케이스라기보다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컴플렉스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과 여러가지로 맞지 않는 이의 행동과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등은 어찌보면 가장 태생적인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어쩔 수 없는 의심스러움을 결국 인정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구실들을 만들어가면서 자기 최면을 걸어왔던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녀가 수녀가 된 것은 어쩌면 이런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도피 행동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 실체없는 의심에 가득차 있는 그녀에게 절대자인 '종교적 믿음'은 분명히 편안한 도피처가 되었을테니 말이다.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다우트>의 강점은 연기력에 근거한 전개 방식에 있다. 그런 이유로 배우들의 연기력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작품에 비해 더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언성을 높여가며 열연을 펼치는 장면은, 마치 액션영화의 '듀얼'신을 보는 듯한  치열함과 임팩트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으며, 아무런 영화적 장치없이 배우의 연기만으로 압도당하는 느낌마저 받을 수 있었다. 극중 알로이시스 수녀 역할을 맡은 메릴 스트립을 보면,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에서 수많은 캐릭터를 연기해온 배우이지만 마치 알로이시스 수녀 역할을 처음부터 맡기위해 정해진 배우처럼 또 한번 완벽한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를 보면서 객석 여기저기서 너무도 동요된 나머지 혀를 차거나 탄성을 내질렀을 정도로 (마치 아주머니들이 일일연속극 속 나쁜 역할로 출연하는 배우를 실제 나쁜 사람인걸로 오해하는 것처럼),  어찌보면 그저 이상하게만 보일 수 있었던 캐릭터에 영혼을 불어넣은 깊은 연기 내공을 그야말로 '시전'하고 있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서두에 얘기했듯이 대중들에게 늦게 인정받았을 뿐이지, 이미 최고의 연기를 여러 번 보여주었었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능글맞게 신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는 것이 역시 그 답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도 선과 악을 동시에 담고 있는 마스크와 연기력을 갖고 있는 몇 안되는 배우라고 생각되는데, 의심을 받고 있어 관객조차 이것이 의심인지 진실인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플린 신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워낙에 쟁쟁한 두 배우 덕에 조금 소외된 듯한 경향도 있지만, <다우트>에서 에이미 아담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녀가 영화 속 제임스 수녀를 통해 다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그녀의 순수한 표정 연기와  두 거대한 주장들 속에서 갈등하고 흔들리는 캐릭터를 떨리는 눈동자와 소극적인 움직임으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포스터 이미지나 영화의 내용적인 면들에서도 은유적을 표현되듯이 <다우트>는 삼각관계 혹은 삼위일체의 구성을 담고 있는 영화이고, 그 축의 당당한 하나는 바로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제임스 수녀라 할 수 있겠다.

혹자는 '마법의 10분'이라고도 표현했듯이 극중 도널드의 엄마 역할 출연한 비올라 데이비스가 메릴 스트립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비올라의 연기는 이 영화의 최고의 순간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에이미 아담스와 함께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다우트>는 군더더기 없이 훌륭한 연기를 통한 생각해 볼 거리에 극도로 집중하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중견 배우들의 최고 수준의 연기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고도 넘치며,  무엇보다 관계와 갈등, 과정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한줄평 : 최고 연기 내공의 고수들이 펼치는 의심과 확신의 나홀로 줄다리기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Miramax Films에 있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2008)
눈뜬 자들의 삶은 과연 행복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개봉 전, 아니 영화화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부터 많은 영화팬들과 원작 소설 팬들이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은 베스트셀로로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읽혀져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고, 영화화에 참여하게 된 감독과 배우들의 면면이 충분히 기대해볼 만한 라인업이었기에
영화 팬들은 기대를, 소설을 읽었던 팬들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게 했었더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 가운데 소설을 먼저 읽었던 경우가 극히 드문
케이스였는데, 이번 <눈먼 자들의 도시>의 경우는 바로 그 '드문'케이스 중 하나였습니다.
우연히 오랜만에 심도이는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점에 들러 눈에 띄는 책을
고르게 되었고, 그 책이 바로 하얀 표지의 '눈먼 자들의 도시'였죠
(참고로 역시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뜬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이 있는데,
이는 '눈먼 자들의 도시' 이야기에서 시간 상 4년이 흐른 뒤의 시점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얘기라고 합니다. 서점에 갔었을 때 두 권을 다 사려다가, 일단 먼저 나온
'눈먼 자들의 도시'부터 사게 되었죠).

이 소설은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참 영화화 할 만한 소지가 다분한 작품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는데, 동시에 영화화 하기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주제 사라마구는 그래서 쉽게 소설의
영화화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소설 - 눈먼 자들의 도시)




영화화가 결정되고 나서 감독과 배우들의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콘스탄트 가드너> <시티 오브 갓>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은 물론, 무거운 이야기를 진중하게 이끌어
가는 재능을 가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 만으로도 일단 원작에 현저하게 못 미치는 영화는
나오지 않겠구나 하는 믿음을 갖을 수 있었죠. 또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인 줄리안 무어가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은 무엇보다 이 영화를 기대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재미있는건 누가 캐스팅 되었는지 모른 상태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여자 주인공인 의사 부인 역할로 줄리안 무어가 제일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었다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녀가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뭇 놀라기도 했었죠 ;;).

줄리안 무어 외에 캐스팅된 배우들 중에는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출연이 가장 반가웠고,
<이터널 선샤인>과 <조디악>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특히 조디악!) 마크 러팔로도 워낙에 좋아하는 배우라 그랬었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허니와 클로버>에서 만났었던 이세야 유스케의 출연도 반가웠습니다.
물론 대니 글로버의 든든한 출연과 최근 윌 스미스와 함께 출연했던 <나는 전설이다>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앨리스 브라가의 모습도 반가웠구요.

이런 기대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99%는 원작 소설보다 덜한 감동과 여운을 준다는
통계적 우려를 적잖이 물리치고(원작을 먼저 읽은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저 나머지 1%에 속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반지의 제왕' 정도만을 꼽을 수 있겠네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를 개봉일에 감상하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는 99% 법칙이 그대로 통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소설을 이미 읽어버린 나머지 영화를 원작과 비교하면서
볼 수 밖에는 없었는데, 소설과 비교해 많은 아쉬움이 남았던 영화였습니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과감히 이동해 주세요)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점은, '만약 내가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봤더라면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까?'하는
궁금함이었습니다. 소설을 이미 봐버린지라 비교할 수 밖에는 없었는데, 소설과 비교해 너무도 빠른 전개는 아쉬움을 넘어서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더군요. 특히 초반 주요인물들이 눈이 멀고 수용시설에 모이게 되는 부분도 너무 빨리 전개가
되었고, 수용소 안에서 대표나 배식을 타기 위해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급작스럽게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받게는
없더군요. 물론 그렇다고해서 단순히 시간을 늘려서 배분하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 보다는, 핵심만 짚 되 소설 속에서
잘 표현되었던 바로 그 공간의 지옥같은 느낌, 이 느낌이 제대로 우려나기도 전에 정리해 버렸다는 기분이었습니다.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주인공들이 처하게 된 상황이 단지 눈이 멀어서 라기 보다는 그로 인해
벌어지는 수용시설 안의 지옥 같은 환경 때문인데, 이 환경적인 요소를 오히려 더 영화적으로 오버해서 표현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은 건조하고 스피디하게 진행이 되더군요. 핵심적인 사건들은 영화에서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앞 뒤의 분위기를 한 두 장면 만으로 스치듯 표현하다보니 극적인 상황을 그릴 때 조차 그 몰입감이
조금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물론 배식을 타기 위해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바치게 되는
그 장면의 지옥 같음은 눈을 찌푸리고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불편하게 표현되었지만, 반대로 3병동의 남자들이
그런 권력을 갖게 되는 순간이 조금은 어이없게 그려진 것도 같고 아쉬움이 남더군요.




인물들 간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도 조금은 단편적으로 그려진 것 같습니다(뭐 이 모든것이 축약할 수 밖에 없는 영화화의
숙제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요). 소설 속에서는 수용시설 안에서 의사와 의사의 아내,
그리고 썬글라스를 낀 여자와 애꾸눈의 흑인노인과의 관계(이 부분에 대한 묘사는 사실상 마지막에 단 한 번 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쉽더군요. 영화만 보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진터라), 그리고 아이가 썬글라스를 낀 여자에게 얼마나 의지하는지에
대한 묘사도 조금 아쉬웠구요(뭐 관계를 새로 설정했다고 말하신다면 할말은 없습니다만, 영화를 보면 새로 설정까지는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원작자인 주제 사라마구는 영화화에 부탁하기를 '눈물 핥아주는 개'는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구체적 주문은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눈물 핥아주는 개'가 영화에서 등장하는 장면도 상당히 의외의 반응을 불러오는
결과를 만들더군요. 소설을 읽으면서는 이 개를 단 한 번도 공포의 존재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사람의 시체를 먹는 개들의 무리가 등장한 뒤 바로 이어서 이 개가 등장하기 때문에, 줄리안 무어의 뺨 쪽으로 이 개가
얼굴을 들이밀 때 '줄리안 무어를 깨무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들 때문에, 대부분의 관객들이 공포의 탄성을 내뱉게
되었거든요. 소설을 읽으면서는 생각해볼 수 없었던 구성과 반응이라 한 편으론 재밌기도 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었던 것은 물론 '눈이 멀게 되면 어떻게 될까'가 아니라,
'우린 지금 제대로 눈을 뜨고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것에 가깝겠지요.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중간중간 의사 아내의 독백들이 등장합니다. 혼자만 볼 수 있는 존재인 의사 아내는 눈먼 자들의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행동들을 모두 눈으로 목격하고 스스로도 처음에는 자신 만이 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이들을 도와야 겠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의 만류와 전개되는 상황들 속에 결국 그녀도 자신 만의 볼 수 있는 특권을 자신의 남편, 그리고 몇몇 동료들
즉 어떤 집단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것 이상으로는 발전시키지 않는, 안주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그녀는 한 편으로는 배식을 위해 여성들이 나서야 할 때 제일 먼저 나서기도 하고, 남편의 만류에도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바쁘게 노력하긴 하지만, 마지막에 다른 이들이 하나씩 시력을 회복하게 될 때 그녀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이제 해방이다' '다들 돌아와서 다행이다'라는 것 보다는, '홀로 눈뜬 자였던 내가 과연 역할을 다 했는가' 또는
'나는 눈뜬 자로서 과연 눈먼 자들에 비해 행복했는가'를 자문했을 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눈먼 자들의 우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반대로 눈뜬 자들은 과연 행복한가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주제 사라마구가
던진 화두이자, 이 답변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의사의 아내 역할을 맡은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역시 흠잡을데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
가는 원동력은 누가 뭐래도 그녀의 지친 얼굴과 힘겨운 걸음걸음 이니까요. 그녀는 참 여배우로서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부분을(뭐 쉽게 얘기하면 이뻐보이는 요소랄까요) 연기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포기해버리는 배우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영화였는데, 거의 화장기 없이 그녀의 주근깨 가득한 피부가 심할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그렇고,
피폐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배우가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훨씬 과감하고
높은 수준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썬글라스 쓴 여자나 일본 여자배우만 봐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나,
줄리안 무어처럼 이른바 '망가지지'는 않죠).

극중 줄리안 무어의 남편인 의사 역할로 출연하고 있는 마크 러팔로는 흠잡을 데는 없으나, 그렇다고 열연이라고 까지
얘기하기엔 부족한 평균적인 수준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연기에 수준 논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나, 딱 어울리는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부득이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사실 마크 러팔로도 그렇고 대니 글로버도 그렇고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연 캐릭터들이라
크게 튀지도 않지만 크게 인상적이지도 않은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던 건 가엘 베르시아 베르날이 연기한 캐릭터였는데, 소설 속에서 표현되었던 캐릭터와는 달리
이렇다할 포스가 느껴지지 않고 공포스러움도 덜한 '약한' 캐릭터였던 것 같습니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키가 작은 것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조금은 전체적으로 아쉬웠던 캐릭터와 연기였던 것 같습니다.

아, 음악에 대한 점을 빼놓은 거 같아 마지막으로 언급하자면, 후반 부의 음악은 그나마 조금 괜찮았으나,
초반 인물들이 눈이 멀게 되고, 수용소로 오게 되고, 거기서 일들을 겪게 되는 부분에서 흐르는 음악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더 우울하고 답답함을 강조한 음악이면 좋을 듯 한데, 조금은 장난스럽고 너무 리듬감을
주고 있는 음악이라 개인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소설을 먼저 읽은 입장에서는 좋은 점 보다는 아쉬운 점이 더 많았던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였습니다.
서두에도 남겼듯이 과연 소설을 읽지 않은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 느꼈던
생각과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1. 산드라오가 거의 까메오 수준으로 등장하더군요. 그녀가 맡은 직책이 직책인지라 좀 더 비중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까메오로 그쳤다는(물론 첨에 나오고, 조금 지나서 다시 나오긴 하지만요).

2. 눈먼 자들이 가득한 도시의 풍경은 CG보다는 실제 거리를 통제하고 촬영했다고 하는데, 분위기는 좋았으나
    좀 더 '눈먼 자들'을 거리에 많이 좀비처럼 배치하여서 피폐해진 도시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3. 이제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어봐야 겠습니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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