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왕 랄프 (Wreck-It Ralph, 2012)

픽사와 디즈니는 변하고 있다



'주먹왕 랄프'도 놓칠 뻔한 영화였다. 제목이나 분위기에서 아동용 영화인 줄 오해했었고, 디즈니 영화라는 점에서 특별한 흥미를 갖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요 근래 디즈니 영화가 그리 나쁜 편만은 아니었다. 2008년작 '볼트 (Bolt)'는 새롭지는 않았지만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변화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을 엿볼 수 있었고, 2010년작 '라푼젤 (Tangle)'은 디즈니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로 완벽하게 성공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먹왕 랄프'가 처음부터 끌리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보고 나서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이 영화를 안봤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싶을 정도로 만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디즈니가 변하고 있다 라고만 생각했는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건 단순히 디즈니 만의 변화라고 볼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즈니가 인수한 '픽사'도 함께 이야기해야만 할 것 같았다는 얘기다.



ⓒ Walt Disney Animation Studios. All rights reserved


'주먹왕 랄프'는 몇 해 전 '슈렉'이 디즈니를 비판하던 때를 떠올리면 도저히 디즈니에서 만들어졌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단 주인공은 '펠릭스'가 아닌 악당 '랄프'이며, 그렇다보니 배경이 되는 공간도 랄프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니까 착한 주인공이 악당 역할에 처한 억울한 상황을 극복하는 얘기도 아니고, 온갖 악당들로 부터 이겨내는 영웅 이야기도 아닐 뿐더러, 악당 그 자체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인정하면서 진정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악당으로 알고 있는 캐릭터들 혹은 보여지는 외모 측면에서 비호감적인 캐릭터들이 사실은 순수한 영혼과 사랑받고 싶어하는 외로움을 갖고 있다 라는 것까지만 얘기했어도 '이런 얘기를 디즈니가?'라며 놀랐을 텐데, '주먹왕 랄프'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결론마저 전통적인 디즈니의 가치와는 전혀 상반된다고 할 수 있는, 마치 '슈렉'의 엔딩이나 픽사 작품에서나 가능할 법한 결론을 낸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한 번 픽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예전에도 디즈니와 픽사가 계속 관계를 맺고 있기는 했었지만 디즈니가 완전히 픽사를 인수한 지금. 과연 디즈니와 픽사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 지를 또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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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이 작품을 보고 와서 주말에 집에서 본 블루레이가 바로 픽사의 '메리다와 마법의 숲 (Brave)' 였는데, 개봉 당시 워낙에 실망했다는 평들 탓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보기는 했으나 개인적으로 그 정도로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기존 픽사 팬들이 어떤 부분을 기대했었고, 어떤 부분이 기대에 못미처 실망스러웠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분명 기존 픽사 영화와는 조금 다른 영화였다. 얼핏 보면 또 다른 상황에 놓인 픽사 영화의 주인공 같기도 하지만, 메리다는 픽사가 그 동안 다루었던 주인공들의 특성 보다는 디즈니 주인공의 모습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는 캐릭터에 가깝다. 반대로 '주먹왕 랄프'의 주인공 랄프는 디즈니 영화의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픽사 영화의 주인공 성격을 더 띄고 있기도 하다.


이 현상은 어느 한 쪽이 단순히 어느 한 쪽을 닮으려고 한 시도라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서로 같은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것이 다운그레이드일지 업그레이드 일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 두 작품만 보자면 분명 '주먹왕 랄프' 입장에서는 업그레이드고 '메리다...' 측면에서는 다운그레이드의 성격이 짙지만, 두 작품 만으로 디즈니와 픽사의 앞으로를 예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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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디즈니의 유산 가운데 뮤지컬 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어린이들에게 오히려 잘못된 선입견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디즈니의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픽사와의 코옵을 통해 이런 보수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변화를 꾀하는 것에는 두손들어 환영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조금 고민이 된다. 기존 픽사 작품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이나 성격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했던 관객으로서, 그들이 디즈니와의 결합을 통해 디즈니적 색채를 얻게 되는 것은 별로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부분을 아주 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보자면 조금은 걱정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했 듯이 '메리다와...'가 아주 실망스러운 작품은 아니었지만, 픽사 작품이기에 아쉬운 점이 들 수 밖에는 없는 작품이었다. 픽사 작품 특유의 색채를 상당 부분 잃어버린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조금은 두 스튜디오가 한 지붕 아래에 본격적으로 놓이게 되며 겪는 과도기에 선보인 두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존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각각 보여준 것이 앞으로는 또 어떤 방향으로 각각 전개될지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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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주먹왕 랄프'의 충격적인(?) 만족도에 놀라 디즈니와 픽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어버렸는데, '주먹왕 랄프'는 여전히 아동영화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픽사 영화가 만족시켜주던 어른의 감성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일단 고전 게임의 캐릭터들을 등장시킨 것 만으로도 매력적이었는데, '팩맨'이나 '스트리트 파이터' '슈퍼 마리오' 등을 어린 시절 오락실과 가정용 게임기를 통해 신나게 즐겼던 세대로서 이 작품은 묘한 향수마저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야 오락실이 그렇게 생활과 가까운 곳에 있지 않지만, 만약 그 시절에 이런 영화를 보았다면 극장을 나오자마자 오락실로 달려가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게임기 안 캐릭터들에게 이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공감대 혹은 안스러움마저 들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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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 원래 이런 스타일의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바넬로피'는 정말 귀여웠어요. 정말.

2. 이 글은 어쩌다보니 '주먹왕 랄프' 보다는 픽사와 디즈니에 대한 글이 되어버렸는데, 기회가 된다면 이 영화를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로 한 번 써보고 싶네요. 충분히 그럴 만한 여지가 있는 영화에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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