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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스 플랜 (Maggie's Plan, 2015)

삶을 유쾌하게 다루는 고급 기술


뉴욕의 겨울을 배경으로 에단 호크와 그레타 거윅 그리고 줄리안 무어가 우디 앨런 영화처럼 얽히는 에피소드를 그려낼 것만 같았던 레베카 밀러의 '매기스 플랜 (Maggie's Plan, 2015)'은 예상보다 더 사랑스럽고 유쾌하며,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그런 영화였다. 


아이를 원하지만 결혼은 원치 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은 결혼할 수 없을 거라고 결론을 내린 경우라고 말해야겠지만)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로 낳기로 결심한 매기 (그레타 거윅)는 우연히 자신의 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존 (에단 호크)을 만나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의 매력에 빠져, 이 소설을 이유로 존과 가까워지게 된다. 존 역시 아내이자 업계에서 유명한 교수인 조젯 (줄리안 무어)과의 결혼 생활에서 힘겨워하던 중 우연히 만나 가까워지게 된 매기와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마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였다면 존이 조젯과 이혼하고 결국 매기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 결말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사실상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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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설명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진지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아주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도 아닌데, 이 복잡한 연애와 사랑의 감정들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보통의 로맨틱 코미디 혹은 소품 같은 에피소드 류의 로맨틱 드라마들에게서 느껴지는 달콤 씁쓸한 느낌이나 '그래서 영화지' 싶은 영화적인 느낌보다는, 현실적으로 깊이 공감되는 설득력과 더불어 유쾌함이 기분 나쁘지 않게 (깔끔하게) 전달되는 매력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 너무 현실적인 감정의 교류나 이야기 전개를 마법처럼 담아내는 영화들을 볼 땐 오히려 그래서 너무 영화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매기스 플랜'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혼을 경험해 본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극 중 존과 매기, 조젯이 나누는 감정들이 얼마나 솔직하고 현실적이기까지 한지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매기 그 자체인 그레타 거윅을 비롯해, 줄리안 무어와 에단 호크, 여기에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트래비스 핌멜과 빌 하더의 연기는 이 이야기를 (진부하지만) 살아 숨 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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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다 끝나고 감동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매기스 플랜'이 삶을 다루는 기술에 완전히 매료된 것만은 인정할 수 밖에는 없을 듯하다. 아, 진짜 다시 생각해봐도 이 영화엔 묘하게 삶의 정말 많은 조각과 감정들이 아주 현실적인 형태로 담겨 있다. 사랑에 관한 감정의 솔직한 표현과 행동이 극단적인 실패나 비난 혹은 삶의 성공이나 완성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또 허무 맹랑한 긍정이나 뒷 맛이 씁쓸한 풍자로 연결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공감되고 유쾌하면서 마냥 가볍지 만은 않은 삶의 면면을 그려낼 수 있다는 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이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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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올라잇 (The Kids Are All Right, 2010)
괜찮아, 우린 모두 괜찮아요


줄리안 무어와 마크 러팔로, 그리고 아네트 베닝이 출연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큰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었던 '에브리바디 올라잇 (The Kids Are All Right)'은, 어떤 기사의 제목처럼 '특별한 가족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결국 이 특별해 보이는 가족조차 '평범한'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소스라면 주인공인 닉 (아네트 베닝)과 쥴스 (줄리안 무어)가 레즈비언 부부로 등장한다는 점일텐데, 이런 점에 불편한 점만 없다면 아마도 '에브리바디 올라잇'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게이나 레즈비언을 그린 영화들 가운데서도 이 작품은 아주 부담없이 즐길 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확실히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타부시 될 때에는 좀 더 자극적이고, 이렇게 타부시하는 사회와 싸우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그래도 사회적으로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자연스러워진 지금에는, 이 작품처럼 레즈비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들 꼭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다시 말해 관객들이 더 이상 주인공의 성정체성에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된 것 같다. 그런면에서 '에브리바디 올라잇'은 특별한 듯 하지만, 참 평범해서 더 깊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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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부모를 둔 이복 남매인 조니와 레이저. 이들은 자신의 부모에게 정자를 기증한, 친부를 찾고 싶은 궁금증에 친부인 폴 (마크 러팔로)을 만나게 되고, 폴과 이 가족은 점점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를 이어간다. 이 가족과 폴이 만나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여러가지 삶의 다양한 의미들을 짚어 간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닉은 갑자기 나타난 폴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가족을 송두리채 흔들까 두려워 그를 심하게 경계하는 한편, 닉과의 관계에서 점점 권태기를 느껴가던 쥴스는 새롭게 등장한 폴과의 만남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폴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두 아이에게도 다르게 나타난다. 

조니는 폴과의 만남을 통해 그 동안 집에서는 억눌려 있었던 자아를 찾는 데에 속도를 내게 되지만, 레이저는 닉과 마찬가지로 궁금하긴 했지만 폴의 등장이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반응이다. 그렇게 이 네 명의 가족 구성원은 자신들 만의 방식으로 폴과의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화목한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복잡한 갈등을 겪고 있던 이 가족은, 폴이라는 또 다른 가족을 통해 다시금 자신들(가족)을 되돌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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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의 이야기만 보아도 이 이야기는 정말 평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각각이 겪는 갈등이 충분히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가부장적인 닉이 겪는 갈등, 사랑과 더 많은 관심을 필요로 했던 쥴스의 갈등, 이제 막 어른이 되는 과정 속에서 가족과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하는 조니의 갈등 그리고 아직은 자신이 속한 이 가족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 있는 레이저의 갈등까지. 영화는 별다른 큰 에피소드를 넣지 않았음에도 폴이라는 생물학적 아버지의 등장을 통해 이 모든 갈등을 부각시키고 치유하는 것까지 성공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부각이 아니라 치유다. '에브리바디 올라잇'은 그저 하나의 가족이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가족이 탄생'에 관한 이야기다. 가족은 마냥 좋은 것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관계 못지 않게 서로 견뎌야만 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상처받고 갈등하지만 결국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고 치유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집단이라는 점을 영화는 자연스럽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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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원제인 'The Kids Are All Right'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 혹은 잘 모르는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겉만 보고 판단하는 우려 섞인 일들이나 관계들이 사실은 그런 우려만큼 문제가 아니라는, 그래서 '우린 다 괜찮아요'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과연 레즈비언을 부모로 두고 있는 이복 남매인 아이들이 잘 성장해 나갈 수 있을까? 혹은 그들 스스로조차 내가 레즈비언인데 우리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잘 커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이들은 조금 다를 뿐이지 그렇게 특별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이런 것들이 편견이나 선입견이 대상이 될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이 영화는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다른 성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해 특별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을 가깝게 겪어보고 난 뒤에는 이러한 편견을 갖기 않게 되곤 하는데, 이런 영화의 순기능이라면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이런 잘못된 편견을 조금이나마 지워내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확실히 더 극적이고 간절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나가는 편이 오히려 더 효과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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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올라잇'을 보고 나면 확실히 내가 속한 가족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내 부모, 내 자식들을 떠올리게 되면서 다시 한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해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마치 극중 쥴스의 그 뜨거운 고백처럼 말이다.


1. 아네트 베닝의 가부장적인 캐릭터 연기는 정말 놀랍더군요. 한 때 '러브 어페어'등에 출연하며 아름다운 여배우 중에 하나로 꼽혔던 그녀가, 이렇게 남성적인 연기를 펼치는 것 만으로도 흥미롭더라구요.

2.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했던 미아 바쉬이코브스카는 확실히 이런 영화에서의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리는 편이더군요. 앨리스 이후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요.

3. 마크 러팔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본래도 그를 참 좋아하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그는 뭐랄까, 매력을 막 줄줄 흘리고 다닌달까. 여튼 그렇습니다. 그는 분명 섹시스타에요!

4. 영화를 보고나니, 극중 마크 러팔로처럼 유기농 농장을 하나 운영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과, 극중 아네트 베닝처럼 와인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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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2008)
눈뜬 자들의 삶은 과연 행복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개봉 전, 아니 영화화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부터 많은 영화팬들과 원작 소설 팬들이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은 베스트셀로로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읽혀져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고, 영화화에 참여하게 된 감독과 배우들의 면면이 충분히 기대해볼 만한 라인업이었기에
영화 팬들은 기대를, 소설을 읽었던 팬들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게 했었더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 가운데 소설을 먼저 읽었던 경우가 극히 드문
케이스였는데, 이번 <눈먼 자들의 도시>의 경우는 바로 그 '드문'케이스 중 하나였습니다.
우연히 오랜만에 심도이는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점에 들러 눈에 띄는 책을
고르게 되었고, 그 책이 바로 하얀 표지의 '눈먼 자들의 도시'였죠
(참고로 역시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뜬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이 있는데,
이는 '눈먼 자들의 도시' 이야기에서 시간 상 4년이 흐른 뒤의 시점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얘기라고 합니다. 서점에 갔었을 때 두 권을 다 사려다가, 일단 먼저 나온
'눈먼 자들의 도시'부터 사게 되었죠).

이 소설은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참 영화화 할 만한 소지가 다분한 작품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는데, 동시에 영화화 하기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주제 사라마구는 그래서 쉽게 소설의
영화화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소설 - 눈먼 자들의 도시)




영화화가 결정되고 나서 감독과 배우들의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콘스탄트 가드너> <시티 오브 갓>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은 물론, 무거운 이야기를 진중하게 이끌어
가는 재능을 가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 만으로도 일단 원작에 현저하게 못 미치는 영화는
나오지 않겠구나 하는 믿음을 갖을 수 있었죠. 또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인 줄리안 무어가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은 무엇보다 이 영화를 기대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재미있는건 누가 캐스팅 되었는지 모른 상태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여자 주인공인 의사 부인 역할로 줄리안 무어가 제일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었다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녀가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뭇 놀라기도 했었죠 ;;).

줄리안 무어 외에 캐스팅된 배우들 중에는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출연이 가장 반가웠고,
<이터널 선샤인>과 <조디악>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특히 조디악!) 마크 러팔로도 워낙에 좋아하는 배우라 그랬었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허니와 클로버>에서 만났었던 이세야 유스케의 출연도 반가웠습니다.
물론 대니 글로버의 든든한 출연과 최근 윌 스미스와 함께 출연했던 <나는 전설이다>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앨리스 브라가의 모습도 반가웠구요.

이런 기대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99%는 원작 소설보다 덜한 감동과 여운을 준다는
통계적 우려를 적잖이 물리치고(원작을 먼저 읽은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저 나머지 1%에 속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반지의 제왕' 정도만을 꼽을 수 있겠네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를 개봉일에 감상하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는 99% 법칙이 그대로 통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소설을 이미 읽어버린 나머지 영화를 원작과 비교하면서
볼 수 밖에는 없었는데, 소설과 비교해 많은 아쉬움이 남았던 영화였습니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과감히 이동해 주세요)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점은, '만약 내가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봤더라면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까?'하는
궁금함이었습니다. 소설을 이미 봐버린지라 비교할 수 밖에는 없었는데, 소설과 비교해 너무도 빠른 전개는 아쉬움을 넘어서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더군요. 특히 초반 주요인물들이 눈이 멀고 수용시설에 모이게 되는 부분도 너무 빨리 전개가
되었고, 수용소 안에서 대표나 배식을 타기 위해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급작스럽게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받게는
없더군요. 물론 그렇다고해서 단순히 시간을 늘려서 배분하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 보다는, 핵심만 짚 되 소설 속에서
잘 표현되었던 바로 그 공간의 지옥같은 느낌, 이 느낌이 제대로 우려나기도 전에 정리해 버렸다는 기분이었습니다.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주인공들이 처하게 된 상황이 단지 눈이 멀어서 라기 보다는 그로 인해
벌어지는 수용시설 안의 지옥 같은 환경 때문인데, 이 환경적인 요소를 오히려 더 영화적으로 오버해서 표현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은 건조하고 스피디하게 진행이 되더군요. 핵심적인 사건들은 영화에서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앞 뒤의 분위기를 한 두 장면 만으로 스치듯 표현하다보니 극적인 상황을 그릴 때 조차 그 몰입감이
조금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물론 배식을 타기 위해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바치게 되는
그 장면의 지옥 같음은 눈을 찌푸리고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불편하게 표현되었지만, 반대로 3병동의 남자들이
그런 권력을 갖게 되는 순간이 조금은 어이없게 그려진 것도 같고 아쉬움이 남더군요.




인물들 간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도 조금은 단편적으로 그려진 것 같습니다(뭐 이 모든것이 축약할 수 밖에 없는 영화화의
숙제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요). 소설 속에서는 수용시설 안에서 의사와 의사의 아내,
그리고 썬글라스를 낀 여자와 애꾸눈의 흑인노인과의 관계(이 부분에 대한 묘사는 사실상 마지막에 단 한 번 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쉽더군요. 영화만 보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진터라), 그리고 아이가 썬글라스를 낀 여자에게 얼마나 의지하는지에
대한 묘사도 조금 아쉬웠구요(뭐 관계를 새로 설정했다고 말하신다면 할말은 없습니다만, 영화를 보면 새로 설정까지는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원작자인 주제 사라마구는 영화화에 부탁하기를 '눈물 핥아주는 개'는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구체적 주문은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눈물 핥아주는 개'가 영화에서 등장하는 장면도 상당히 의외의 반응을 불러오는
결과를 만들더군요. 소설을 읽으면서는 이 개를 단 한 번도 공포의 존재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사람의 시체를 먹는 개들의 무리가 등장한 뒤 바로 이어서 이 개가 등장하기 때문에, 줄리안 무어의 뺨 쪽으로 이 개가
얼굴을 들이밀 때 '줄리안 무어를 깨무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들 때문에, 대부분의 관객들이 공포의 탄성을 내뱉게
되었거든요. 소설을 읽으면서는 생각해볼 수 없었던 구성과 반응이라 한 편으론 재밌기도 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었던 것은 물론 '눈이 멀게 되면 어떻게 될까'가 아니라,
'우린 지금 제대로 눈을 뜨고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것에 가깝겠지요.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중간중간 의사 아내의 독백들이 등장합니다. 혼자만 볼 수 있는 존재인 의사 아내는 눈먼 자들의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행동들을 모두 눈으로 목격하고 스스로도 처음에는 자신 만이 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이들을 도와야 겠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의 만류와 전개되는 상황들 속에 결국 그녀도 자신 만의 볼 수 있는 특권을 자신의 남편, 그리고 몇몇 동료들
즉 어떤 집단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것 이상으로는 발전시키지 않는, 안주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그녀는 한 편으로는 배식을 위해 여성들이 나서야 할 때 제일 먼저 나서기도 하고, 남편의 만류에도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바쁘게 노력하긴 하지만, 마지막에 다른 이들이 하나씩 시력을 회복하게 될 때 그녀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이제 해방이다' '다들 돌아와서 다행이다'라는 것 보다는, '홀로 눈뜬 자였던 내가 과연 역할을 다 했는가' 또는
'나는 눈뜬 자로서 과연 눈먼 자들에 비해 행복했는가'를 자문했을 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눈먼 자들의 우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반대로 눈뜬 자들은 과연 행복한가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주제 사라마구가
던진 화두이자, 이 답변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의사의 아내 역할을 맡은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역시 흠잡을데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
가는 원동력은 누가 뭐래도 그녀의 지친 얼굴과 힘겨운 걸음걸음 이니까요. 그녀는 참 여배우로서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부분을(뭐 쉽게 얘기하면 이뻐보이는 요소랄까요) 연기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포기해버리는 배우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영화였는데, 거의 화장기 없이 그녀의 주근깨 가득한 피부가 심할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그렇고,
피폐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배우가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훨씬 과감하고
높은 수준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썬글라스 쓴 여자나 일본 여자배우만 봐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나,
줄리안 무어처럼 이른바 '망가지지'는 않죠).

극중 줄리안 무어의 남편인 의사 역할로 출연하고 있는 마크 러팔로는 흠잡을 데는 없으나, 그렇다고 열연이라고 까지
얘기하기엔 부족한 평균적인 수준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연기에 수준 논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나, 딱 어울리는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부득이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사실 마크 러팔로도 그렇고 대니 글로버도 그렇고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연 캐릭터들이라
크게 튀지도 않지만 크게 인상적이지도 않은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던 건 가엘 베르시아 베르날이 연기한 캐릭터였는데, 소설 속에서 표현되었던 캐릭터와는 달리
이렇다할 포스가 느껴지지 않고 공포스러움도 덜한 '약한' 캐릭터였던 것 같습니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키가 작은 것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조금은 전체적으로 아쉬웠던 캐릭터와 연기였던 것 같습니다.

아, 음악에 대한 점을 빼놓은 거 같아 마지막으로 언급하자면, 후반 부의 음악은 그나마 조금 괜찮았으나,
초반 인물들이 눈이 멀게 되고, 수용소로 오게 되고, 거기서 일들을 겪게 되는 부분에서 흐르는 음악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더 우울하고 답답함을 강조한 음악이면 좋을 듯 한데, 조금은 장난스럽고 너무 리듬감을
주고 있는 음악이라 개인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소설을 먼저 읽은 입장에서는 좋은 점 보다는 아쉬운 점이 더 많았던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였습니다.
서두에도 남겼듯이 과연 소설을 읽지 않은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 느꼈던
생각과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1. 산드라오가 거의 까메오 수준으로 등장하더군요. 그녀가 맡은 직책이 직책인지라 좀 더 비중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까메오로 그쳤다는(물론 첨에 나오고, 조금 지나서 다시 나오긴 하지만요).

2. 눈먼 자들이 가득한 도시의 풍경은 CG보다는 실제 거리를 통제하고 촬영했다고 하는데, 분위기는 좋았으나
    좀 더 '눈먼 자들'을 거리에 많이 좀비처럼 배치하여서 피폐해진 도시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3. 이제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어봐야 겠습니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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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 2007)
밥 딜런의 몽타주

음악을 듣는 사람치고 밥 딜런 (Bob Dylan)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미 여러 뮤지션을 통해 리메이크 되었던 'Knocking on Heaven's Door' 같은 곡은 누구나 알 정도로,
밥 딜런은 단순히 뮤지션이라기 보다는, 당시 문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었으며,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관한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가장 흥분되었던 것은 이미 <벨벳 골드마인>이라는 작품으로,
음악과 문화를 대하는 깊은 태도를 보여주었던 토드 헤인즈가 감독을 맡았다는 점과, 케이트 블란쳇, 히스 레저,
크리스찬 베일, 벤 위쇼, 리처드 기어 등 여러 배우들이 함께 출연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 다음 알게 된 것은 이 영화가 일반의 전기영화와는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6명의 배우가
각기 다른 밥 딜런을 연기한다는 점은 '과연 어떻게 그려질까?'하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오랜만에 개봉날 관람하게 된 이 영화는,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전기 영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영화였으며,
어쩌면 밥 딜런이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그를 통해 당시 문화를 꿰뚫고 있는 하나의 시대영화이자,
음악 영화로도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이 영화에 대해 '밥 딜런의 몽타주'라고 얘기하고 싶다.
몽타주란 여러 사람이 추정하고 상상하고 예측한 것으로, 몽타주의 당사자가 되는 인물과 가장 가까운 것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우디 거스리 역(마커스 칼 프랭클린)' '아르튀르 랭보 역(벤 위쇼)' '쥬드 역(케이트 블란쳇)'
'로비 역(히스 레저)' '잭/존 역(크리스찬 베일)' '빌리 역(리처드 기어)')



역시 가장 눈여겨 볼 점은 각기 다른 6명의 배우가 밥 딜런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여섯 명은 밥 딜런의 각기 다른 자아를 표현하고 있는 동시에, 각기 다른 시대의 밥 딜런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 극 중 이름이 '밥 딜런'인 캐릭터는 하나도 없다. 극 중 어디에도 밥 딜런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지도 않는다.
다만 영화 시작전에 '밥 딜런의 음악과 영혼에서 인상을 받아 만들었음'이라는 문구가 등장할 뿐이다.
감독이 이 6명의 밥 딜런을 그리는 과정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캐릭터나 사건, 모습 등이
실제의 밥 딜런과 유사하면서도 완전히 허구의 모습 또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벤 위쇼가 연기한
'아르튀르 랭보'의 경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 출신의 유명한 시인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나는 타자이다 (Je est un autre / I is another)'라는 랭보의 유명한 시구와 이 영화의 제목이자 밥 딜런의
노래 제목이기도한 'I'm Not There'는 여러모로 이 영화의 제목으로 완벽한 것이 아닌가 싶다.
<향수>통해 독특하고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벤 위쇼가 연기하는 랭보는, 다른 캐릭터에 비해
아주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탁자 앞에 앉아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랭보의 시퀀스는,
1965,6년 기자회견 장에서의 밥 딜런의 모습을 토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정적인 캐릭터이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갖고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기자회견 장에서의 밥 딜런과 영화 속 벤 위쇼가 연기한 '랭보'의 모습)


흑인 소년 마커스 칼 프랭클린이 연기한 '우디 거스리' 역시, 실존 인물에서 이름을 빌려왔는데,
밥 딜런의 우상이기도 했던 포크 싱어 송 라이터 '우디 거스리'에게서 가져왔으며, 실제로 우디 거스리는
백인이었던 것에 비해 흑인 소년으로 설정한 것도 하나의 재미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극 중에서
실제 우디 거스리의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인데, 우디 거스리라는 이름의 소년이, 포크 싱어인 우디 거스리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가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밥 딜런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우디 거스리를
병문안차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여러가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면서 느낄 수 있었지만,
감독인 토드 헤인즈가 얼마나 철저하게 관련 인물들과 배경에 대해 조사를 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밥 딜런이 직접 출연도 하고 음악도 맡았던 영화 <관계의 종말>(근데 왜 관계의 종말이지? --;),
포스터 속 빌리로 출연했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은 <아임 낫 데어>에서 내레이션을 맡고 있다)

리처드 기어가 연기한 '빌리'역할은 밥 딜런이 직접 출연도 하고 음악을 맡기도 했던 샘 페킨파 감독의 영화
<관계의 종말 (Pat Garrett and Billy the Kid)>의 'Billy the Kid'에서 가져온 듯 하다. 이 에피소드에는
팻 가렛 역할로 브루스 그린우드가 등장하는데, '쥬드'가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도 쥬드를 괴롭혔던 언론인
미스터 존스로 등장했던 브루스 그린우드가, '빌리'의 에피소드에서도 빌리를 괴롭히는 팻 가렛 역할로 다시
등장하는 것은 영화적인 재미와 더불어, 이 각기 다른 밥 딜런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 <관계의 종말>에 빌리 역할로 출연했었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인데,
(아래 포스터의 포스터 속 인물), <아임 낫 데어>에서 내레이션을 맡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다. 이렇게 모든 관련 인물을 세세하게 배치한 토드 헤인즈의 역량이 놀랍기만 하다.



(리처드 기어가 연기한 '빌리'는 위의 영화에서 캐릭터를 빌려왔다고 볼 수 있다)


크리스찬 베일은 포크 가수인 '잭'과 목사 '존'을 함께 연기하고 있는데, 이 두 캐릭터 역시 밥 딜런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포크가수 '잭 롤린스'는 한참 저항음악의 대표주자로 활동하던 밥 딜런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특히나 잭을 추억하는 '앨리스' 캐릭터는 누가 봐도 '조앤 바에즈(Joan Baez)'임을 알 수 있는데,
그녀는 실제로 밥 딜런과 함께 공연을 수차례 가졌었으며,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도 스틸 컷 형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조앤 바에즈와 밥 딜런)


잭 롤린스 시퀀스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촬영 방식이었다. 이 부분은 아주 다큐멘터리 적인 촬영방법과
구성을 갖고 있는데, 실제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쓰는 스틸 사진과 인터뷰로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줄리안 무어가 연기한 앨리스의 인터뷰 장면의 카메라의 노이즈나 촬영 방식 등은 페이크 다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잭 롤린스라는 캐릭터를 실존 인물인냥 묘사하고 있다(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이렇게 허구와 사실을
계속 뒤섞고 있다). 또한 나중에 히스 레저가 연기한 '로비'의 시퀀스에도 '잭 롤린스'는 실존 인물인냥
추억되고 있다.



(크리스찬 베일이 맡은 잭과 존은 마치 실존 인물인냥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그려진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도 캐릭터를 표현함에 있어, 과도한 연기보다는 리얼리티에 중점을 두고 임하고 있는 듯 했다)

히스 레저(ㅠㅠ)가 연기한 '로비'는 극 중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허구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실제적인 사건들과는 거리가 있는 캐릭터 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뮤지션으로서의 밥 딜런 보다는,
연애와 가정 같은 사적인 면의 밥 딜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극 중
샬롯 갱스부르가 연기한 클레어는 밥 딜런의 연인이었던 수즈 로틀로와 첫 번째 부인이었던 사라 라운즈를
반반씩 섞은 인물로 보여진다.



(너무나도 유명한 밥 딜런의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의 커버. 이 커버를 인용한 <아임 낫 데어>의
한 장면. 이런 방식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제 우리 곁을 떠난 히스 레저의 연기가 남다르게 다가올 수 밖에는 없는데, 확실히 그에게서는 그 또래의
남자 배우들에게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15세 관람가인 이 영화에서 그는
18세 관람가에 가까운 노출을 보여주기도 해, 순간 움찔하게 했다. 참고로 연인으로 출연한 샬롯 갱스부르
역시 개인적으로는 충격으로 다가왔던 노출연기를 감행(?)하고 있다.



(이제 그의 모습을 더 볼 수 없다는 것이 또 다시 아쉬워지기만 한다)


샬롯 갱스부르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른 얘기를 좀 해보자면, 사실 개봉 전 포스터나 다른 소식들을 통해,
밥 딜런을 맡은 6명의 배우에 대한 이야기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외에 더 많은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줄리안 무어나 미셸 윌리엄스, 샬롯 갱스부르가 등장했을 때,
너무도 반가웠던 것이 사실이었다(놀랍게도 이 배우들 모두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여배우들이다).
줄리안 무어는 감독의 전작이었던 <파 프롬 헤븐>의 인연을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갔고, 샬롯 갱스부르는
다른 여배우들에게는 없는 그녀만의 아름다움을 은은히 보여주고 있다(그녀는 사운드트랙에도 참여하고 있다).
또 한 명의 놀라운 출연은 미셸 윌리엄스 였는데, 많이 살이 빠진 모습으로 까칠한 '코코'역할을 연기한 그녀는,
그 짙은 아이라이너 만큼이나 신비한 '코코'의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미리 알지 못했던 캐스팅이었기에 더욱 반가웠던 줄리안 무어와 미셸 윌리엄스!)


잘 아다시피 미셸 윌리엄스의 출연이 더욱 뜻깊게 다가왔던 것은 히스 레저 때문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나 예쁜 딸을 두고 있었던 둘 사이었으나, 촬영 당시에는 헤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번 히스 레저의 사망 소식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그의 죽음이 가장 안타깝고
슬펐던 사람은 다른 아님 미셸 윌리엄스였을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시사회 장에서의 히스 레저와 미셸 윌리엄스의 다정했던 모습)


여러 명의 배우가 각기 다른 밥 딜런을 연기했지만, 역시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쥬드'임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가장 실제 밥 딜런과 가까운 외모와 더불어 내용적으로도 그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이기도한 '쥬드'는, 의외로 여자배우인 케이트 블란쳇이 맡았는데, 깡마르고 독특한 모습의 밥 딜런을
표현하기에 여자배우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계획되었다고는 하지만,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쥬드'는 다른 쟁쟁한 배우들의 연기 가운데도 단연 으뜸이라 할 만큼,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내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여신 같던 그녀가, 부시시한 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밥 딜런의 모습이 이리도 잘 어울릴 줄
누가 알았을까)


사실 모습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거의 코스프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케이트 블란쳇이 분한 '쥬드'의 모습은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헤어스타일과 선글라스를
제외하더라도, 독특한 몸짓이나 손짓, 걸음거리나 목소리 연기, 특히 잠깐잠깐 밥 딜런으로 착각했을 만큼
완벽했던 표정연기는 정말 놀라움을 넘어서 소름이 돋기 까지 했다. 특히나 글을 쓰려고 사진을 찾던 중에
실제 밥 딜런과 그녀의 사진을 비교하면서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차 안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며 살짝 미소 짓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가장 멋진
장면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적어도 나에게는!).




(사실 이 사진을 보면, 케이트 블란쳇도 블란쳇이지만, 앨런 긴즈버그로 분한 데이비드 크로스의 싱크로율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처음엔 배우들의 연기에 놀랐지만, 영화가 계속 될 수록, 그리고 글을 쓰려는 지금 시점에 자료를 조사하면서
더욱 놀라게 된 것은 감독인 토드 헤인즈였다. 이미 데이빗 보위 없는 글램 락 영화 <벨벳 골드마인>을 통해,
뮤지션에 관련된 또 다른 음악영화에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파 프롬 헤븐>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읽는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그의 장점이 <아임 낫 데어>에서는 한 꺼번에 발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도 기대하지 않았던 밥 딜런에 대한 영화를 밥 딜런이 흔쾌히 허락한데에는 역시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조니 캐쉬의 전기 영화라 할 수 있는 <앙코르 (Walk the Line)>같은 방식도 좋았지만, 밥 딜런이라는 인물을
그리는데에는 토드 헤인즈가 선택한 이런 모험적인 방식이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마 일반적인 전기 영화로 만들려했다면 밥 딜런이 허락하지도 않았을 듯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것 외에, 알면 알수록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쓰고 이해하고 있는 토드 헤인즈의
통찰력과 연출력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다.



(토드 헤인즈라면 앞으로도 무조건 고민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같은 배경 지식을 모두 다 감상전에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화를 막상 볼 때에는
그 인과관계를 모두 파악하지 못해 조금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물론 이 같은 배경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기승전결 방식이 아니고, 그렇다고 에피소드 방식도 아니며,
무언가 이어져 있는 듯 하면서도 개별적으로도 느껴지는 구성 방식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전기영화나,
드라마를 생각하고 관람을 하게 된다면 감상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밥 딜런에 대해 큰 관심이나
배경 지식이 없으면 100%가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선이라고 보았을 때, 7~80% 정도만 함께 할 수 있는것도
수긍할 수 밖에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밥 딜런에 관해 관심이 있거나 그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 뉴스
등을 알고 있다면, 120~130% 즐기기에 완벽한 영화가 될 듯 하다.




(영화의 예고편에 쓰였던 이 형식도,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촬영되었던 밥 딜런의 영상물에서 가져온 것이다)


음악 얘기릏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아임 낫 데어>에서는 밥 딜런의 음성으로 불려지는 그의 곡이나, 배우들, 그리고 후배 뮤지션들이 부른
밥 딜런의 곡을 만나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운드트랙을 접하기 전에, 영화의 엔딩 크래딧을 먼저 보았기 때문에, 크래딧에 등장하는
인디 포크 뮤지션들의 이름을 보고는 미리 기대할 수 있었는데, Sonic Youth, Yo La Tengo, Cat Power,
Iron & Wine, Calexico, Jack Johnson, Charlotte Gainsbourg, Glen Hansard & Marketa Irglova,
Antony and the Johnsons, Sufjan Stevens 등 포크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른바 '환장할' 라인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나 소닉 유스의 'I'm Not There'와 Antony and the Johnsons가 부른
 'Knockin On Heaven's Door'는 엔딩 크래딧과 함께 깊은 울림을 가져왔으며, <원스>의 그와 그녀인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도 동참하고 있다. 위에 거론한 뮤지션들 모두 앨범이 나오면 무조건 구매할
만큼 좋아하는 뮤지션들이라, 이들 모두를 한 장의 음반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사운드트랙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들 모두를 하나의 자리에 모이게 한 '밥 딜런'이라는 이름의 대단함도 새삼 느끼게 된다.



(포크 음악의 팬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사운드 트랙이 될 것이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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