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나이트폴 3부 : 기사들의 종언 (Batman Knightfall : Part Three - Knightsend)

배트맨으로 돌아오기까지



배트맨 나이트폴 1부가 배트맨과 베인의 대결구도, 2부가 부러진 배트맨의 부제로 인해 어둠의 기사를 대신하게 된 장 폴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3부는 다시 배트맨으로 돌아오기 위해 혹독한 시간을 보내는 브루스 웨인과 돌아온 그를 맞이하는 장 폴 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단 브루스 웨인이 다시 배트맨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 상세하게 담겨있는데, 나이트폴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부러진 허리를 수습하는 것보다는 (신체적인 회복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가에 더 주목한다. 일반적인 경우 같았으면 신체가 회복되는 시점에서 복귀를 당연하게 연결했을 텐데, 나이트폴에서는 사실상 신체 회복이 모두 끝난 뒤 부터 복귀에 대한 진정한 싸움이 시작된다.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무런 추가 설명이 없이 브루스 웨인이 고뇌만을 오랜 시간 묘사했다면 조금은 덜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수도 있는데 (뭐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특성상 이 고뇌자체만 가지고 이야기해도 부족함은 없을 듯 하지만), 나이트폴에서는 이미 실패가 진행중인 캐릭터가 있기 때문에 배트맨의 이 같은 고뇌가 좀 더 설득력을 얻게 된다. 바로 배트맨에게 고담의 기사 자리를 물려 받았지만 스스로 환영에 휩싸이며 이성을 잃어버린 장 폴 밸리 말이다. 나이트폴 3부의 전반부는 신체적 훈련을 모두 마친 (사실상 정신적 훈련이라고 해도 좋을) 브루스 웨인이 다시 금 배트맨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험대에 오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스로도 되었다 싶을 정도로 여러 차례 시도를 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그 어느 때 보다 신중하다. 혹자는 이 같은 브루스의 행동을 보며 답답하다거나 저럴 여유가 있나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이미 1부에서 지독한 시련을 겪고 2부에서는 장 폴 밸리의 실패를 보며 더더욱 신중을 기할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그렇게 한 참을 고뇌하다 드디어 배트 수트를 입고 장 폴 앞에 나타난 배트맨. 여기서부터는 배트맨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2부에서 비중있게 소개되었던 장 폴의 이야기의 마무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힘과 권력을 갖고는 너무 쉽게 두려움에 잠식되어 버린 장 폴은 배트맨과 대적하며 극한으로 치닫는데, 이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있는 배트맨은 끝까지 가면 속에 존재하는 장 폴을 끌어내려 애쓴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로빈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배트맨이 고담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겪은 배트맨은 다시 한 번 예전과 같은 고담의 어둠의 기사로 돌아온다.





'배트맨 : 나이트폴' 3부작은 1부 베인이 등장해 배트맨이 부러지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하지만, 배트맨의 부제를 겪는 2부의 이야기와 다시 복귀하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3부의 내용은, 1부에 비하면 조금은 심심한 구성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영화 속에서는 어쩌면 시간 상 어쩔 수 없이 간과되었던, 브루스 웨인이 다시 배트맨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신체적, 정신적 극복 과정을 좀 더 깊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과 배트맨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정의'라는 짐을 장 폴 밸리를 빗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글 / 사진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도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세미콜론 에 있습니다.






에식스 카운티 (Essex County, 제프 르미어 저)
여운과 여백의 놀라운 그래픽 노블


사실 내게 있어 '그래픽 노블'이란 장르는 단순히 프랭크 밀러나 앨런 무어 등의 작가로 대변되는, 주로 히어로 물을 다룬 것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아니, 한정되어 있었다기 보다는 그것이 전부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이 작품 '에식스 카운티'와 '아스테리오스 폴립'이란 두 권의 그래픽 노블을 알게 되었는데, 서점에서 책을 사서 돌아와 집에서 첫 장을 넘기기 전까지만 해도 '에식스 카운티' 역시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바로 그 '그래픽 노블'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접하게 된 제프 르미어의 거칠고 유난히 음영이 강조된 그림체는, 분명 프랭크 밀러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말로 설명해 놓은 것만 보면 거칠고 음영이 강조된 그림체라는 것이 유사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 보게 되면 프랭크 밀러와 제프 르미어의 그림체의 성격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렇게 시작한 '에식스 카운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술 읽혀나갔다. 조금은 묘한 것이, 대놓고 기승전결 방식으로 이야기를 강조한 구성도 아닌데, 이야기에 흐름에 쉽게 몸이 이끌려 다음을 궁금하게 만들고 다음 그리고 다음,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표면적으로 이야기를 완전히 마무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사실 결말 그 이상의 포용력으로 전체 이야기를 끌어 안고 있는 놀라운 구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에식스 카운티'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바로 여운과 여백의 미학이었다. 여기서 여백이란 직접적인 그림의 여백과 이야기의 여백 모두를 가리키는데, 고요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한 컷과 그것 만큼이나 느리고 반복에 가까운 컷의 진행은 직접적인 여백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는 가끔 서사의 구체적 묘사는 있지만 캐릭터의 감정선에 있어서는 많은 여백을 두고 있는 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감정들을 대부분 절제하고 있는데, 그것이 상대에게 하는 말일 때는 물론이고 혼자 속으로 하는 독백의 경우에도 절제의 여백을 남겨둔 점이 느껴진다. 이런 이 작품의 경향은 분명 답답함 보다는 미덕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한편으론 바로 이것이 '에식스 카운티'의 성격을 말해주는 포인트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여운. '에식스 카운티'는 제 1부 농장이야기, 제 2부 유령이야기 그리고 제 3부 시골 간호사로 이뤄져 있는데, 이 3부작의 짜임새와 연결 고리는 흔히 말하는 반전처럼 충격적이거나 반전을 위한 구성이라기 보다는, 각각의 캐릭터가 연결되어 있는 구성을 통해 결국 '인생'이라는 것과 존재에 대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에식스 카운티'가 놀라운 그래픽 노블 작품인 이유는 바로 이처럼, 인생이라는 깊이의 여운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만화와 소설, 그러니까 이미지와 이야기와 완벽하게 결합된 지점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사실 이 두 가지가 이 정도로 각각의 높은 수준에서 접점을 이루기가 쉽지 않은데, 제프 르미어는 두 가지 모두를 활용할 수 있는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에서 다운 그레이드 없이 최고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 (510p)이었음에도 단숨에 읽어내려간 이후의 느낌은, 사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감흥은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을 글로 정리해보려 다시 한번 책을 슬쩍 펼쳐 보았는데, 책의 어디를 펼쳐보아도 찡하고 짠한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제서야 앞서 이야기했던 이 작품의 장점을 비로소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제프 르미어의 '에식스 카운티'는 내게 있어서도 참 특별한 그래픽 노블로 기억될 것 같다. 분명 이야기가 핵심인 작품이고 볼거리로 승부하는 작품도 아닌데, 책을 한 번 정독한 이후 '에식스 카운티'의 한 장 한 장은 다 특별한 의미를 갖는 소중한 한 장이 되어버렸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배트맨 킬링조크 (Batman The Killing Joke)
거울 속 조커의 초상화



그래픽 노블에 조금씩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영화화 된 이야기보다 더 관심을 갖게 된 스토리가 있다면 '배트맨'과 관련된 시리즈 들을 들 수 있을텐데, 이번에 보게 된 '배트맨 킬링조크'는 그간 배트맨 시리즈가 배트맨의 심리에 포커스를 두었던 것과 달리, 조커에 대한 이야기를 짧지만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굳이 히스 레저 주연의 '다크 나이트'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배트맨 이야기에서 조커 라는 캐릭터가 갖는 인상이란, 다른 수많은 상대 캐릭터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을텐데 그것은 조커라는 캐릭터의 존재가 배트맨의 또 다른 모습, 거울, 또 다른 자아로 비유될 만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커의 의미는 대부분이 잘 알고 있지만 사실 이 핵심을 파고 든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비교적 이 부분을 잘 파고든 작품이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조커라는 캐릭터의 상대성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된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화의 영향력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래픽 노블을비롯한 수많은 작품에서 조커에게 이런 캐릭터를 부여하기는 했지만, 바로 이 작품 '킬링 조크'만큼 조커의 입장에서 쓰여진 작품은 드물 듯 하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조커라는 캐릭터의 탄생 비화를 담고 있는 동시에, 배트맨과의 접합점, 연결점 그리고 경계선에 대한 묘사를 그래픽 노블 특유의 필체로 담아내고 있다.




사실 많은 기대를 했던 터라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점이라면 역시 책의 분량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짧은 분량을 선택한 것은 분명 앨런 무어의 선택이었겠지만, 조커를 중심으로 한 배트맨과의 이야기라면 정말 그 존재와 경계 그리고 닮아있는 점에 관한 철학적 토론만으로도 깊이 있는 이야기가 충분히 가능한 주제였기에, 책을 읽으며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속으로 '조금 더, 더'를 외칠 수 밖에는 없었다. 이미 수많은 배트맨 관련 작품들을 통해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이 에피소드에 가까운 짧은 분량에서도 작품이 주려는 메시지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좀 더 여유있는 분량으로 어쩌면 배트맨 시리즈에서 가장 흥미로울 수 있는 조커와의 텍스트를 깊이 있게 써내려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킬링 조크' 만큼이나 마지막에 보너스로 수록된 '선량한 사람'의 임팩트도 적지 않았다. 오히려 이 작품은 짧아서 더 강한 인상을 주는 느낌도 있는데, 배트맨과 조커가 아닌 제 3자인 선량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배트맨 시리즈가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는 선과 악의 경계 그 판단의 모호함에 대해, 한번 더 쉽게 떠올려 볼 수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왓치맨 (Watchmen, 2009) (IMAX DMR 2D)
히어로에 빗댄 정치와 권력에 대한 담론



<300>을 연출했던 잭 스나이더 감독의 <왓치맨>은 일찌감치 부터 올해 가장 큰 기대작 중 하나였고, 그 이유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는 드물게 원작인 그래픽 노블을 이미 영화 감상 전에 읽게 되었던 흔치 않은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영화 감상 전에 원작이 된 텍스트를 먼저 접한다는 것은 일종의 선택일 것이다. 원작을 미리 본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 되겠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또한 원작이 존재할 경우, 원작을 미리 인지하고 영화를 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 있는 것도 물론일 것이다(물론 지론은 영화는 원작이 있을 경우라 하더라도 영화만을 통해 100%를 보여주어야 하지 원작을 읽어야만 100%가 완성되는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원작을 읽었을 경우 100%가 120% 200%되는 것이 되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왓치맨>은 그래픽 노블이 원작이라는 소식을 듣고 조금은 일부러 원작을 찾아 읽게 된 경우였다. 물론 <씬시티>때 반짝했다가 <다크 나이트>이후 본격적으로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그래픽 노블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간 그래픽 노블이나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의 경우, 영화 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은 그 세계관과 캐릭터, 비하인드 스토리 등이 많아 왠지 영화만으로는 100%를 얻지 못하는 것 같은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왓치맨>의 경우는 미리 그래픽 노블로 출판된 2권의 책을 미리 개봉전에 읽어보게 되었고, 더더욱 영화를 기대하게 되었었다.

개인적인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영화화는 원작과 비교하여 만족스러웠으며, 원작을 미리 읽었던 것은 약이 된 경우였다 하겠다.


(이후 부터는 영화와 그래픽 노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앨런 무어의 원작인 그래픽 노블 '왓치맨'은 현실과 픽션이 적절히 섞인 이른바 '팩션(Faction)'이었다. 베트남전과 닉슨 대통령, 케네디 암살, 소련과의 냉전 등 실제 미국 역사의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그 가운데 마치 진짜처럼 가상의 캐릭터들을 끼워넣는 스타일이었다. 이 같은 방법은 <스파이더 맨>처럼 누구나 우연한 기회에 히어로가 될 수 있다라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라 할 수 있겠는데, 실제 역사속에 히어로를 삽입함으로서 허무할 수도 있는 이야기에 좀 더 공감대를 불어넣는 동시에, 관객들에게 원초적으로는 '정말 그랬다면 어땠을까?' 혹은 '그런 일이 어디선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왓치맨'은 만약 미국이 배트남 전에서 패하지 않고 다양한 국가적 사건들에 알게 모르게 히어로들이 개입되어 있었다고 가정한 상태로 진행이 된다. 이 국가적 사건들에 가상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심은 것은 제법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특히 영화의 인트로 시퀀스는 인물들의 대략적 역사와 더불어 시대적 상황을 간략하지만 임팩트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확실히 실제 미국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있을 수록 흥미로운 인트로가 아닐 수 없다(더군다나 여기는 상당히 많은 패러디나 인용들이 담겨있어 더욱 흥미롭다. 그 유명한 종전 사진을 레즈비언의 키스로 묘사하는 센스라던가, 히어로의 은퇴장면을 예수의 최후의 만찬으로 표현한 장면 등만해도 그렇다).

사실 원작 코믹스는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이나 역사에 대해 상당히 불친절한 경우였는데, 영화는 이 부분을 비교적 잘 압축하여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미닛맨 (Minutemen)'으로 활동했던 1기 히어로들이 어떻게 활약했고 사회에서는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어떻게 사라져갔는지와 케네디 암살이나 인류의 달 착륙 같은 국가적 사건에 어떻게 개입이 되어있는지, 기본적으로는 어떤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었는지, 그리고 각 캐릭터들의 어린 시절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 보여주면서 영화 속 주인공들인 '왓치맨'이 구성되는 시기까지 이를 함축적으로 아주 잘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근래에 본 오프닝 시퀀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은 확실히 고심하고 노력한 기색이 역력히 보이는 작품이다. 아마 본인도 꼭 왓치맨은 아니었더라도 어느 코믹스나 그래픽 노블의 팬보이였을 잭 스나이더는, 원작의 수 많은 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의식은 전체적으로 큰 각색보다는 원작의 세계관과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겨오는데에 더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원작을 읽은 입장에서 봤을 때 영화는 전체적으로 그래픽 노블을 그대로 다시 한번 영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 정도로, 몇몇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들과 결말 부분만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신문 가판대 소년이 전하는 화물선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빠진 경우이며, 결말 부분도 원작과는 조금 다르게 변형이 된 경우라 하겠다). 예전 <씬시티>영화를 보고 나서 뒤늦게 원작인 그래픽 노블을 보고는 영화 속 장면이 얼마나 그래픽 노블을 그대로 옮겨오려 노력한 것인가를 확인하고는 놀란적이 있었는데, <왓치맨>의 경우는 원작을 먼저 읽은 경우라 영화를 보는 중에 너무도 똑같은 장면 구성에 놀라게 되는 장면이 몇몇 있기도 했다.

원작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면, 워낙에 원작의 세계관과 캐릭터의 깊이가 깊고 이야기가 다중적이기 때문에 단 한편으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영화에서(그것이 2시간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다 소화하고 설명하고 풀어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잭 스나이더는 몇몇 장면을 영화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함축적 장면들로 표현하고 몇몇 시퀀스들은 과감히 제외하면서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영화화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이 정도의 영화화라면 다른 어떤 감독이 만들어도 쉽게 구현해내기는 어려운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잭 스나이더가 좀 더 스타일리쉬한 부분에 치우쳐서 메시지보다는 보여지는 것에 더욱 치중한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그는 자신만의 장기는 살리되 메시지에 흠이 가는 부분은 최소화 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몇몇 액션 장면에서는 <300>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베리 슬로우 모션 액션을 엿볼 수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과하지는 않았으며(그래서 300 같은 액션영화를 떠올리며 극장을 찾은 많은 관객들이 허탈해하며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액션보다는 원작의 그 질감과 느낌을 스크린으로 옮겨오는데에 더 공을 쏟은 것이 만족스러웠다.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 원작을 읽은 이들 가운데서도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에 대해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편에 서고 싶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굉장히 정치적일 수 밖에는 없다. 그리고 철학적일 수 밖에 없는 텍스트이다. 실제 미국의 정치적 배경을 영화의 주된 배경과 소스로 사용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어찌보며 이 배경 속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존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어떻게 사회의 폭동과 범죄를 야기시키고, 이를 막기 위해 스스로 일어난 자경단과 같은 히어로들을 또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을 영화는 시종일관 보여준다. 이런 과정이 거듭되면서 코스츔을 입은 히어로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기에 이르고, 스스로 환멸과 후회, 덧없음을 느끼고는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반 사회적으로 그려지지만 어찌보면 본래 마스크를 쓰고 히어로가 되기로 했던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신념대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로어셰크 뿐이며, 나머지 히어로들은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 은퇴했다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스스로의 절망 때문이라 해야겠다. 각 히어로들에게는 자신 만의 고통과 이유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생각해볼만한 캐릭터는 역시 닥터 맨하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고로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존은 철저히 국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이용되고 사용되어 진다.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끌게 되고 소련과의 냉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 무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이 존재하고, 그는 미국인이다'라는 말처럼 대외선전용으로도 사용되게 된다.




영화 속 닥터 맨하튼이 겪는 고뇌는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고민과 같은 선상에 놓인다고 볼 수 있겠다. '신'으로 묘사된 것처럼 절대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닥터 맨하튼이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은, 결국 영화과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권력'에 대한 것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왓치맨>은 굉장히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묻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절대적에 가까운 힘을 갖고 있지만 닥터 맨하튼이 결코 절대선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는 극중 코미디언의 말처럼 막을 수도 있던 재앙들을 결국은 막지 '않'은 경우도 많았으며, 인간들에 대한 환멸로 치부하기는 했지만 그조차 인간적인 면에 휩쓸려 어느 한 편을 들고 편협함을 은연 중에 갖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절대자라기 보다는 '미군'에 가까운 행동을 벌여왔던 지난 날들에 뒤늦게 덧없을 느끼고 지구를 떠나지만, 화성에서 그가 갖게 되는 고민들 역시 이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있지는 못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이 엔딩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뒤늦게 이 모든 음모가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 로어 셰크와 댄(나이트 아울 II)은 오지맨디아스를 찾아가보지만 이미 이들이 막기에는 늦어버린 때였다. 나중에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알게 된 닥터 맨하튼 역시 오지맨디아스를 막기 위해 나타나지만 결국 막지 못한다. 아니 막지 못했다기보다는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에 결국 수긍하게 되어버린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 평화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식의 논리. 엄청난 큰 재앙이 닥치게 되자 오랫동안 핵전쟁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를 유지하던 미국과 소련은 더 큰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연합하게 되고, 이른바 '평화'를 이루게 된다. 오지맨디아스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결국 다수가 행복한 평화만 이루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 그런데 나댄과 닥터 맨하튼은 이 같은 오지맨디아스의 논리에 반박을 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계획 시전이 아니라 이미 시행된 이후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핵전쟁 바로 직전까지 갔던 세계의 정세를 평화의 무드로 만든 것이 거대한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 '만들어진 평화'를 굳이 깨는 방식을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거대한 재앙 앞에 다툼과 혼란이 하나로 융합되고 평화를 이루는 과정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여럿 있어왔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9.1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음모설 따위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여러가지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부시 정부에게 단 한 방에 국민의 힘을 실어준 것은 다름 아닌 9.11 참사였으며, 결국 기름전쟁이었던 빈 라덴 잡기 전쟁의 명분을 준 것도 9.11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 같이 큰 재앙이 닥치면 미국의 침공이 부당하고 믿고 있던 사람들의 신념마저 약해져서 '그래,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이젠 충분한 명분이 있잖아?'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왓치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이 잘못된 것은 댄도 닥터 맨하튼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일이 벌어진 바에야 이를 깨고 싶지 않은 것이다. 거짓으로 만들어진 평화지만, 이 거짓을 알게 된다면 겪게 될 혼란과 핵전쟁 위기를 굳이 초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래 이미 일은 벌어졌잖아, 이 평화를 잘 지켜내기만 하면 돼'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끝까지 여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자신의 본래 신념대로 가겠다던 로어 셰크를 닥터 맨하튼이 손수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며, 댄 역시 좀 더 강하게 로어 셰크를 설득하거나 맨하튼을 막아볼 수도 있었지만(물리적으로는 못하겠지만), 그러지 않고 로어 셰크가 죽은 다음에야 '안돼~!'하며 역시 자기 합리화를 하고야 만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곧이 곧대로 융통성 마저 없어보였던 로어 셰크의 길이 옳은 것인지(죽음을 뻔히 알고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 아니면 이미 일이 벌어진 뒤라면 그리고 진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더 큰 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면 이 평화를 지켜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대답이 결코 쉽지 만은 않다. 솔직히 대답은 로어 셰크를 응원하다고 쉽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저런 상황에 닥쳤을 때 과연 로어 셰크처럼 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 것이다.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쓸쓸한 것은 비단 어두운 스타일과 고어한 장면들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관객에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와 현실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채 노출시켜 자기 합리화와 신념 가운데서 고민하도록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 인상적인 건 오지맨디아스가 정말 '평화'만을 위해 이런 계획을 세웠다고 보기엔 후에 상황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폐허를 제건하는 회사는 다름아닌 '바이트'사이고 하늘에도 '바이트'사의 비행선이 떠있고, 결국 이 재건될 세계에서 주도권과 권력을 쥐게 될 것은 오지맨디아스의 '바이트'사가 될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결국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국제 사회에서 주인 노릇을 하려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일 것이며, 더나아가 이를 자기합리화하며 신경쓰지 않으려 하거나 남의 탓으로만 돌리려 하는 전 세계인들에게 보내는 비판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왓치맨>에 현실감을 불어넣어 준 것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영화 속에 삽입된 곡들은 <포레스트 검프>처럼 당시를 느낄 수 있는 곡들이어서, 마치 실존했던 비화를 듣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살짝 들게도 했다. 오프닝에 사용된 밥 딜런의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을 비롯해,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 제니스 조플린의 'Me And Bobby McGee' 등은 당시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곡들이었다. 아, 그리고 코미디언이 살해를 당하는 장면에 사용된 냇 킹 콜의 'Unforgettable'도 기가 막힌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의 'All Along The Watchtower'도 인상적이었는데, 밥 딜런의 곡이나 지미 헨드릭스의 곡 등 당시 히피정신으로 자유와 반전을 부르짖었던 정서를 담고 있는 곡들이 사용된 것도 단순히 시대적 상황만을 고려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대부분 다 인상적이고 적제적소에 음악들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나 단 하나 댄과 로리의 베드씬에서 흘러나오던(그것도 크게!) 'Hallelujah'는 조금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것이 레너드 코헨 버전이라 조금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제프 버클리나 루퍼스 웨인와잇이 부른 버전이었다면 좀 더 쓸쓸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으나, 레너드 코헨의 버전은 '할렐루야'라는 가사와 맞물려 자칫 웃음이 지어지는 시츄에이션을 자아내기도 했다;; (잭 스나이더가 의도한 것이 어쩌면 이것일지도 ㅎ).




일단 잭 스나이더의 영화답게 영화 속 캐릭터들의 모습이라던가 그 스타일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역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로어 셰크였다. 계속 변형하는 가면의 표현도 인상적이었고 그 거친 나레이션과 건조함은 엄청난 포스를 뿜어냈다. 특히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을 때도 인상적이었는데, 잭키 얼 헤일리는 원작이 로어 셰크와 거의 흡사한 느낌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잭키 얼 헤일리는 어디서 본듯 했으나 잘 기억이 나질 않았었는데, 찾아보니 바로 케이트 윈슬렛이 출연했던 <리틀 칠드런>에서 주변에서 소외받고 의심받는 인물을 연기했던 그 였다. 재미있는건 이 <리틀 칠드런>에 등장했던 또 한 명의 배우가 <왓치맨>에 출연하고 있다는 점인데 그는 다름 아닌 나이트 아울 II 역할을 맡은 패트릭 윌슨이다. 원작과의 조금 차이점이라면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원작에서 댄은 좀 더 나이가 많은 인물로(그래서 로리와 나이차이가 좀 있는) 생각되었는데, 극 중에서는 조금 젊은 듯했다. 그래서 로리와도 약간 안어울린다기 보다는 남녀관계로서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도 있었고. 큰 뿔테 안경을 고쳐쓰는 모습이 마치 <슈퍼맨>에서 클락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여러 배우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역시 인상적인 다른 배우를 꼽으라면 빌리 크루덥이었다. 사실 단 번에 얼굴을 알아본 배우는 그 뿐이었다(생긴건 제일 외곡되었는데도 말이다 ㅎ). <미션 임파서블 3>와 <빅 피쉬>를 통해 눈에 익었던 그는 <왓치맨>에서 닥터 맨하튼 역을 맡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빨리 DVD나 블루레이가 출시되어 그의 출연분이 어떻게 촬영되었는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왓치맨>은 분명 원작 코믹스와 더불어 그리 친절한 작품은 아니다. 더군다나 만약 이 영화를 전형적인 액션 히어로 블록버스터로 인식하게 된다면 더더욱 그럴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상당히 매니아적인 요소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며, 우울하고 씁쓸한 사회의 뒷맛 역시 숨기지 않고 내놓고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단순히 주말 시간을 즐기기 위한 영화로는 절대 비추이며 (그래서 오히려 긴 러닝타임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시간 여유가 된다면 원작인 그래픽 노블을 먼저 읽는 편이 조금 더 도움이 되는 듯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나서 원작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원작을 읽었을 때 100%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아마도 영화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면 또 한 번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튼 나는 좋아! 왓치맨!


1. 왕십리 CGV에서 아이맥스 DMR 2D로 감상하였는데, 일산 아이맥스를 안본 입장에서는 엄청난 스크린 크기에 일단 압도. 많은 분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소리가 조금 과하게 큰 듯한 느낌도 분명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영화도 영화지만 영화 상영전 작게 뿌려지던 일반 광고와 예고편들 ;;

2. 마지막 시퀀스에서 오지맨디아스가 보는 많은 영상들 가운데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람보 2>와 <매드맥스>를 들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나름 이유를 가지고 삽입되어 있는데 하나하나 연관성을 따져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되겠다.

3. 나이트 아울 II과 로리가 아키를 타고 불난 건물의 사람들을 구출하는 시퀀스에서 커피를 나눠 마시는 장면이 추가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웠다. 이 장면은 원작을 읽을 때 왠지 인상적으로 느껴졌었는데, 영화에서는 종이 커피잔을 정리하는 것 정도로만 묘사되었다.

4. 원작을 보면 극중 인물들이 보는 신문들이나 길가에 현수막 혹은 TV속 내용들에 대해 자막이 지원되었는데, 영화 속에서는 여기까지는 지원이 되지 않아 살짝 아쉬웠다. 물론이것이 조금은 과한 요구일 수도 있겠지만 원작을 읽은 분들은 아시다시피 이것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전달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 부분이 지원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5. 사실 영화가 영화인지라 하고 싶은 말들이 더 많았는데 한번에 정리하기는 좀 어려웠던 것 같다. 추가로 생각이 떠오르거나 한번 더 보게 된다면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워너브라더스에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