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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타카의 레드필]

파수꾼의 추억


윤성현 감독의 빛나는 데뷔작 '파수꾼 (Bleak Night, 2012)'는 그 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 중 한 편이었다. 오늘 하고자 하는 얘기는 영화 '파수꾼'이 개인적으로 조금 다르게 느낄 수 밖에는 없었던 이유 때문이다.


* 참고로 영화에 대한 리뷰는 여기로 (파수꾼 _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애처로운 간극) 이 때도 살짝 오늘 할 얘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속으로 '어? 설마?'라는 말을 내뱉게 되었는데, 바로 극 중 배경이 된 장소가 몹시 낯이 익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주인공 삼인방이 함께 야구도 하고 또 걸터앉아 담배도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나오는 기차역이 아주 익숙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있었던 탓에 확신까지는 하지 못했었으나, 영화 말미 크래딧을 보고 나서야 내 기억 속의 원릉역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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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때만 해도 철로 옆에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전이었다)


이 장소가 내게 특별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 실제로 원릉역은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 자주 오가던 혹은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던 아주 익숙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원릉역을 사이에 두고 아래쪽은 성사동으로 주공아파트 단지가 위치하고 있었고 위 쪽은 주교동으로 버스 종점 정류장과 함께 주택단지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바로 이 원릉역에서 약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바로 약이 내다 보이는 주공아파트 단지에 당시 살고 있었다. 풀이 우거진 계단을 올라 원릉역 철로를 지나서 나오는 버스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고등학교를 다녔더랬다. 그리고 영화 속과 비슷하게 원릉역에서 친구들과 자주 만나기도 했다.


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내가 살 때만 해도 이 곳은 많지는 않아도 가끔 기차가 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에 영화 속처럼 학생들이 죽치고 담배를 피거나 철로 위에서 놀거나 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또,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원릉역은 꼭 기차를 타지 않더라도 이동 통로로 활용이 잦은 위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 비슷한 점이라면 실제 원릉역은 (그럼에도) 밤이 되면 불빛이 어둡고 으슥한 느낌이 있어서 무서운 형님들이 돈을 뺏거나, 혹은 구석에서 술을 마시는 일들도 가끔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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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을 처음 보고 긴가민가 했던 이유는 철로 옆에 높게 솟은 고층 아파트 풍경 때문이었다. 나는 이 동네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기를 모두 보냈지만, 20살이 넘어서 얼마 되지 않아 서울로 독립을 하게 되어 한 동안 가보지 못했던 터라 주공아파트가 재개발되고 신도시가 생겼다는 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말로만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철로 뒤로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지만 내가 살던 당시, 그리고 열차가 다니던 당시의 풍경은 5층짜리 주공 아파트가 늘어선 풍경이었다. 만약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에 이 영화가 촬영되었더라면 영화 속에서 내가 살던 주공아파트 107동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파수꾼'이 내게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내가 살았던 곳이 영화 속에 등장해서가 아니다. 잠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동네는 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공 아파트 단지 전체가 재개발되면서 동네 자체가 전혀 달라져 버렸다. 즉, 내가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작은 단지들의 모습을 이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한 원릉역은 비록 그 경계에 있었던 중간 지점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예전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에 추억이 남다를 수 밖에는 없었다. 여기서 참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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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보이는 교회 건물 바로 옆 빌라 반지하 집에서도 수년을 살았던 기억이...)



그렇게 항상 마음속에 남아 있던 영화 '파수꾼'을 어제 오랜만에 케이블 티비를 통해 다시 보게 되니, 나도 교복 입고 원릉역을 넘나들던 그때가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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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아쉬타카의 레드필]

감상과 비평보다 설명과 정리가 더 중요한 시대



영화 비평의 시대가 죽다시피 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비평이 주를 이루던 영화 잡지나 매체들은 거의 다 사라졌고, 영화 평론은 그 존재 의미에 대해 토론할 때만 가끔씩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주류에서 아주 아주 멀어졌다는 것뿐. 영화 평론가 중심의 비평이 주를 이루던 시대 이후에 등장한 것은 개인 블로거들을 중심으로 한 감상평 혹은 리뷰 중심의 시장이었다. 여러 영화 커뮤니티와 카페를 중심으로 다양한 감상평과 리뷰 들이 한 때 관심도 받고 그 숫자도 상당했던 시기가 바로 몇 해 전까지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이는 감상평과 리뷰 자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도 있지만,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 중심의 플랫폼에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플랫폼으로의 주류 이동으로 인한 외부적인 요인도 적지 않았다. 


단문, 아니 짧은 이미지와 영상 위주의 플랫폼이 대세를 이루게 되면서 영화 관련 콘텐츠 역시 이에 맞게 변화했다. 아무래도 이 영상과 이미지 중심의 플랫폼 기반에서는 긴 호흡으로 어떠한 비평이나 감상을 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의 현실은 긴 호흡의 글을 소화할 흥미도 시간도 없는 듯했다. 그렇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에 눈에 띄게 성장한 콘텐츠가 바로 영화를 설명하고 알기 쉽게 정리한 콘텐츠들이다. 


사실 이런 설명과 소개, 정리 중심의 콘텐츠는 이전부터 계속 있어왔는데, 그 대상의 범위가 거의 전방위 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과 시장의 수요가 더 늘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이전에 있었던 이런 류의 콘텐츠들은 명확한 지향점이 있었다. 주로 어떤 영화의 팬들이라거나 장르의 팬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콘텐츠가 많았다. 이를 테면 007 시리즈 전체를 훑어가며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개봉 이후 흥행과 관련된 이야기까지, 007 영화의 팬이라면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콘텐츠였고, 콘텐츠의 질도 상당했다. 007 시리즈를 예로 들었던 것처럼 이런 종류의 콘텐츠들은 주로 역사가 오래되었거나 혹은 우여곡절이 많았다거나 하는 영화 혹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설명, 정리 중심의 콘텐츠들은 지향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콘텐츠의 소비자층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일 텐데, 영화를 감상하고자 하는 관객들보다는 지식의 측면에서 알고자 하는 관객들의 욕구를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편이다. 즉, 단순하게 말하자면 회식 자리에서 혹은 친구들과의 대화 과정 속에서 등장하는 하나의 이슈 요소 정도로 소비되는 경향이 매주 짙어졌다. 예를 들자면 '어제 뭐 봤어?'라며 TV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프로를 보지 않았으면 다음 날 대화에 끼기 어려운 것처럼, 인기가 있거나 화제가 되는 영화를 보지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면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음으로 요약정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두 시간 남짓의 영화를 단 몇 장의 이미지나 동영상으로 간략하게 정리해주는 콘텐츠들이 매우 인기가 많다. 이런 설명 콘텐츠들이 절대 일방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아닌데,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은 좀 든다. 영화가 재미있었는지 없었는지 하는 것보다 줄거리나 해설된 내용을 내가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거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실 관계의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배우다시피 하는 것에 더 흥미와 관심이 몰리는 것은 아무래도 본질과는 조금 멀어진 느낌이다. 


예를 들어 최근 개봉한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같은 경우, 레이가 누구의 딸인지 카일로 렌과 핀의 광선검 듀얼 설정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 등은 물론 흥미롭고 재미있는 얘기 거리이기는 하지만, 스타워즈라는 한 편의 영화가 어떠한 점이 재미있었는지 어떤 점은 별로였는지,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떠한 것들을 느꼈는지 하는 것보다 더 먼저 이야기되거나 혹은 이런 것들은 아예 이야기되지 조차 못하는 것은 조금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다.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는 적지 않은 많은 관객들이 보았지만, 각자의 스타워즈가 탄생되었다기보다는 정리된 몇 가지의 스타워즈만이 남게 된 듯하다. 예전엔 어떤 영화가 개봉하면 재미있는가 없는가가 주로 논의되었는데, 최근에는 그보다 영화 속 사실이나 어떤 설정 등이 맞느냐 틀리느냐에 대한 논의가 더 관심거리인 듯하다. 그렇다 보니 한 편의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어떠한 담론이나 감상이 남게 되는 것보다는 어떤 사실 혹은 지식 만이 남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수의 관객들 역시 영화를 느끼기보다는 '알았다'는 것에 더 만족하게 되는 것 같고.


틀린 것이 아닐 경우 다양성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경우도 그렇다. 비평 만이 고귀한 것이고 감상이나 리뷰는 하찮은 것은 물론 아닐 것이며, 영화 한 편을 두고 정리하고 설명하는 것 역시 잘못 소비하는 과정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까지 가게 되면 본질이 위축되고 심화되면 결국 성격 자체가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특히 영화 같은 예술 혹은 상업예술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미 잘 보고 잘못 보고의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영화 매체에서 모두가 '내가 맞게 보았나'에 대한 강박이나 설명 만으로 배부른 소화 경향은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다. 설령 감독의 의도와 정반대로 보았거나 내용을 잘못 이해해서 전혀 다른 영화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편이 더 영화를 의미 있게 소화한 경우가 아닐까. 천만 관객이 보았다면 천만 개의 각기 다른 영화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 영화나 음악 같은 예술 만의 장점일 텐데, 모두가 같은 방식과 같은 내용을 보기를 스스로 원하는 현실은 조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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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아쉬타카의 레드필]

국적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개봉 영화 제목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살아가는 이상 많은 영어권 영화를 즐기려면 누군가가 번역한 버전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영어가 유창하면 어느 정도 자막 없이도 즐길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막 없이 외국 영화를 즐기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늘 하고자 하는 얘기는 자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영화의 첫 번째 이미지이자 메시지인 제목에 관한 것이다. 국내 개봉하는 외국 영화 제목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성격을 달리 해왔는데, 예전에는 오역이 잦았을 정도로 너무 과한 해석이 들어간 제목이 많았다면,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영어 제목을 그대로 쓰되 발음나는대로 그대로 쓰는 형태가 거의 체감상 대부분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많아졌다. 예를 들어 리들리 스콧의 '마션 (The Martian)' 같은 작품의 경우 '화성인'이라는 형태로 쓰지 않고 소리나는 그대로 '마션'이라고 쓰는 형태가 거의 주를 이루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최근 개봉 외화들의 제목들을 보니 거의 번역 된 형태의 제목이 없을 정도로 대부분이 이런 형태였다. '마션' '하트 오브 씨' '스파이 브릿지' '몬스터 헌트' '사일런트 하트' '더 랍스터' '프리덤' '재키 앤 라이언' '세컨드 마더' '싱 오버 미' 등, 오히려 '이민자' '하늘을 걷는 남자' 등 번역한 제목을 찾아 보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방식의 제목 짓기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본래 감독이 의도한 제목의 의미를 전달 받을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이건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솔직히 얘기해서 그 영어 단어가 쉽고 어려움을 떠나 100% 의미가 전달된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예를 들어 '마션'이 '화성인'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확실히 받아 들이는 느낌상 '마션'과 '화성인'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의미인데 말이다. '하트 오브 씨' 같은 경우도 별로 어려운 단어들은 아니지만 이것을 과연 대부분의 관객들이 '바다의 심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랍스터' 같은 경우도 '바닷가재'라는 제목이었다면 아마 전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것도 분명 영어 제목의 뜻, 그러니까 영어 권의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바닷가재'일텐데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런 제목이 익숙해지면 질 수록 점점 더 본래 원제가 갖는 의미와 발음나는 대로 표기한 제목의 전달되는 느낌의 차이가 커지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도 이미 어느 정도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진행된 듯 하지만). '언브레이커블' 이라고 하면 뭔가 발음도 멋지고 느낌적인 느낌도 멋져 보이지만 실제로 이 제목을 보고 '깨지지 않는'을 연상하는 이들의 수가 많지 않고, 이런 현상은 추가적으로 'unbreakable'과 '언브레이커블'이 다른 느낌으로 사용되는 지경에 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발음대로 쓴 제목과 해석 된 제목을 나란히 놓았을 때 말그대로 발음이 주는 느낌 혹은 외형적, 디자인적인 표기상의 느낌의 차이만 있어야 하는데, 점점 더 의미상의 차이까지 가져오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라는 언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관객들이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언어라는 점도 그렇고, 이렇게 이미 흘러온 시장의 특성상 100% 우리말로 해석한 제목을 내어 놓았을 때 오히려 그 의미가 퇴색되거나 생경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를 홍보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땐 이런 위험을 감수하기가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아쉬운 제목들이 있다. 일단 첫 번째로 단순히 느낌만 강조해 아주 쉬운 영어도 발음대로 쓴 경우다. '파터 앤 도터'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그냥 '아버지와 딸'로 번역해도 충분했을 제목을 '파터 앤 도터'로 번역아닌 번역 한 것은 참 씁쓸함마저 든다. 기대작인 타란티노의 신작 'The Hateful Eight'도 마찬가지다. 그냥 '증오의 8인' 정도로 했으면 좋았을 것을 '헤이트풀 8'이 도대체 무슨 제목인가. 헤이트풀 1~7편까지 봤냐는 농담이 나오는 것도 그냥 웃을 일만이 아니다. 뭐 제목 얘기 나올 때마다 회자되곤 하는 우디 엘런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같은 말도 안되는 해석도 물론 큰 문제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불륜영화로 첨부터 예상하고 본 관객들은 아마 대한민국 관객 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또 다른 황당한 경우로는 발음대로 쓴 영어 제목인데 실제 원제목과는 다른 경우도 들 수 있겠다. 그런 제목의 영화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데 가짜 예를 들자면 본래 제목은 'Amy'인데 국내 개봉 제목은 '더 걸 오브 론리' 같은 식이다 (에이미는 다시 말하지만 가짜 예).


불만들을 가득 쏟아냈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실제로 현장에서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갑자기 중국식으로 모두 한국어화 하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본래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도를 퇴색시키지 않는 수준에서 최대한 우리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과 최소한의 성의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요새 외화 개봉 제목들을 보면 몇몇은 너무 성의 없고 그저 멋만 부리는 (그런데 웃기는 건 별로 멋지지도 않다는 점) 이상한 제목들이 너무 많아, 조금만 더 있으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이 될 것 같아 글을 썼다.


생각해봐라. 강동원을 좋아하는 해외의 팬이 '검은 사제들'을 자국에서 보게 되었는데 그 나라의 개봉 제목이 'The Priests'가 아닌 'Geomeun Sajaedel'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우리는 웃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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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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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또 몬타우크행 기차를 탈거야



찰리 카우프만이 쓰고,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이 개봉 10주년을 맞아 다시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인생의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은 그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었는데, 또 다시 보게 된 이 놀라운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 혹은 새로운 영화가 되어 있기 보다는 오히려 맨 처음 보았던 10년 전의 그 영화처럼 두근거림 가득한 영화가 되어 있었다.


한창 씨네필들 사이에서 이 영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 그랬던 것처럼 찰리 카우프만이 설계한 이 기억의 퍼즐 맞추기에 관한 것 때문이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인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결론적인 것에서부터, 그 타임라인의 순서 맞추기에 있어서 어떤 것이 더 먼저인지에 대한 담론은 이런 장르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연구하고픈 흥미요소가 충분했었다. 나도 한 때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따져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분명 정답에 대해서 까지 분명히 확인했음에도 그 기억은 시간이 갈 수록 흐려졌다. 보통 반복 관람을 하는 경우 이런 팩트에 관한 것은 더 깊이 각인되기 마련인데, '이터널 선샤인'은 정반대로 보면 볼 수록 그 기억만은 점점 지워져 가는 듯 했다.


그리고 또 다시 보게 된 '이터널 선샤인'은 이제는 무엇이 먼저 일어난 일인지, 엔딩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에만 빠져들고 말았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나누는 모든 대화들은 그 시간 순서와는 별개로 하나하나 움찔움찔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연애를 오래 한 커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텐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다투거나 혹은 한 마디만 더 하면 되었을 것을 하지 못해 후회할 일을 만들거나 하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에서는 그 열정과 냉정이 모두 느껴져 몹시 치명적이었다. 만약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열정과 냉정의 대화나 상황이 한 100가지 쯤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처음엔 한 2~30개 정도에 공감했었다면 지금은 한 7~80개 정도를 공감하게 되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이미 수 없이 반복하고 외우다시피 한 대사들이었는데, 그 변함 없는 대화들이 내가 그간 겪은 시간들과 내가 연인과 나눈 대화들로 인해 더 깊이 있는 대사들이 되어 있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얼핏보면 후회에 관해 인정하는 수동적인 이야기처럼 보인다. 어차피 또 그럴 꺼니까 그냥 인정하자 라는 약간의 자조적인 느낌이 드는데, 사실은 정반대로 또 후회할 걸 알면서도 그래도 또 사랑할 거라는 더 저극적이고 열정적인 이야기라는 걸 오늘 다시 보고 알 수 있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만나도 또 후회할 일이 발생할 거고, 어쩌면 또 다시 서로를 너무 힘겨워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길 바랄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느꼈던 감정은 '다시 반복된다해도 뭐 어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시 만나보고 싶어' 정도의 희망적 느낌이었다면, 이번에 본 '이터널 선샤인'은 그보다는 훨씬 더 강하게 '다시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난 너를 꼭 다시 만날거야'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즉, '다시 만나게 되면 이번엔 분명 다를 꺼야'가 아니라 '또 반복을 피할 수 없더라도 난 너를 선택할거야'에 가까운 더 큰 범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라는 이야기보다도 더 강력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난 후회할거야. 그래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아'

'난 그래도 또 몬타우크행 기차를 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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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미래에서 온 사나이



이제 현재도 아닌 과거가 되어 버린 2015년 10월 21일. 이 날을 맞춰 특별 상영을 했던 '빽투더 퓨처 2'를 극장에서 관람하였다. 이미 화제가 된 것과 같이 이 날은 바로 '빽투더 퓨처 2'의 배경이 된 미래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날 영화를 예매할 때만 해도 한 편으론 단순한 이벤트적인 느낌이 더 강했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날 바로 그 영화를 보게 된다는 것 만으로도 이 영화의 팬으로서 흥분되는 동시에 또 다른 값진 추억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고 마티와 브라운 박사의 입을 통해 미래로 묘사되는 2015년 10월 21일을 만나게 되니 기분이 예상보다 훨씬 더 이상했다.


그 짧은 순간 스쳐간 여러 감정들 가운데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 적어보자면, 대부분 아쉬움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아련함이랄까. 2015년 10월 21일처럼 정해진 구체적인 미래라는 시점은 당연히 언젠가는 맞닥들이게 되는 순간일텐데, 막상 그 순간을 겪게 되었을 때 오만가지 감정이 스쳐지나갔던 것은 아마도 언제까지나 미래로만 남을 것 같았던 시간이 더 이상 미래가 아니게 된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뭐 하나를 또 잃어가는 듯한 느낌. 마치 '서른 즈음에'의 가사처럼 영원히 미래일 것만 같았던 시간과 이별하는 것만 같아 묘한 슬픔 감정이 들었다.


실제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80년대 당시 예상했던 2015년의 모습과 실제 2015년의 모습과의 차이를 비교하며, 어떤 것들은 이뤄졌고 어떤 것들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는지 같이 흥미 위주의 내용에 나도 더 관심이 갔었는데, 막상 접하게 된 이 '미래의 현실'은 전혀 다른 감흥이었다.


그렇게 컵스는 영화 속 미래를 실현하는 듯 했으나 월드시리즈에 오르지 못했고, 자동차를 타고 날아가다가 길이 막혀서 약속에 늦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은 영화 속 80년대 카페처럼 마이클 잭슨을 추억하게 된 것은 같았다. 아마 영화도 마이클 잭슨이 존재하지 않는 2015년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또 웃을 수 만은 없었던 장면이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이제 미래에서 온 사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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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개봉 10주년을 맞아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이 국내 개봉 10주년을 기념하여 오는 11월 5일 재개봉을 한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면 자연스럽게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게 되는데, 내 대답은 그 때 그 때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항상 빠지지 않았던 영화 한 편이 바로 '이터널 선샤인' 이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셸 공드리라는 아티스트 때문이었는데, 영화 감독이기 이전에 bjork, massive attack, beck 등의 뮤지션의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워낙 유명했었고 특히나 당시 이 뮤지션들에 아주 깊게 빠져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드리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는데 그가 연출한 영화라고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건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10주년을 기념하여 재개봉하는 영화에 대한 것이다. 일단 이 영화가 벌써 10년이 되었다니 놀랍기만 했다. 요근래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자주 한국영화 10주년 기념 상영회 기획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때 마다 드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와, 벌써 10년이 되었다니...'


누군가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떤 영화를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보게 되면 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 비디오 테입으로 영화를 소장하던 시절에 비해 블루레이나 특히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예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기회가 잦아진 요즘은 이러한 경험을 더 자주하게 되곤 한다. 근 시일내에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경우, 극장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장면이나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보게 되는 영화 속에서는 분명히 여러 번 본 장면에서 전혀 새로운 감정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이러한 경험을 가장 크게 했던 작품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2000)'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였는데, 이 영화를 처음 볼 땐 주인공 빌리에 공감하며 영화를 따라갔었지만 한 참 뒤에 다시 보게 된 영화는 빌리가 아닌 빌리 아버지의 행동에 더 깊게 공감, 아니 공감까지는 못 되더라도 처음 볼 땐 전혀 보이지 않았던 빌리의 아버지의 현실과 가치관의 대립을 통한 갈등이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전까지는 블로그에 영화 글을 쓰면서 별점을 통해 나름의 평점을 주고 있었으나 이 이후 부터는 영화에 점수를 준다는 것이 예술 작품에 점수를 매길 수 없다는 의미 이전에, 지금의 점수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최종적 판단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의미 없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별점 주기를 지금까지 하지 않고 있고, 이 생각은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듯 하다.


이렇듯 영화라는 매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시간을 두고 보게 되거나, 그 시간 속에 개인이 어떤 삶을 겪었는 지에 따라 이미 본 영화를 통해서도 전혀 다른 감정과 순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어떤 영화의 몇 주년, 몇 10주년 기념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그저 '와, 이 영화가 벌써 이렇게 오래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면, 근래에는 '그렇다면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보면 또 어떤 영화일까?'라는 호기심이 더 발동한다. 거의 처음 영화를 보게 될 때의 버금가는 설레임이다.


내 방에는 이미 '이터널 선샤인' DVD와 블루레이가 모두 존재하지만 스크린에서 다시 볼 기회를 절대 놓칠 수는 없을 것이다.

찰리 카우프만이 설계하고 미셸 공드리가 표현한 '이터널 선샤인'은 또 어떤 영화가 되어 있을까.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는 또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아쉬타카의 레드필]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아쉬타카의 레드필]

알고도 당하는 케이블 영화의 묘한 매력



처음 몇 개의 케이블 채널로 시작한 지상파 외 케이블 채널의 영화 채널들은 이제 대표적인 CGV, OCN 등 말고도 슈퍼액션, 스크린, 선댄스 등 요금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정말 많은 수여서 맘만 먹으면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주말의 명화, 토요 명화 시절과는 다르게 언제든지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은 영화를 대부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케이블 채널의 영화가 갖는 장점은 이전보다 덜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나는 소장하고픈 영화들은 대부분 블루레이나 DVD를 꼭 구입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보고 싶을 때 꺼내 보는 일이 어느 정도는 가능한 편이다. 여기에다가 최근 자주 애용하는 IPTV 같은 VOD 서비스까지 더해지면 사실상 무료라는 것 외에 케이블 채널의 영화는 별다른 장점을 갖기 힘들다고 봐야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렇게 상대적으로 다른 매체에 비해 장점이 떨어짐에도 케이블 영화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쉽게 끊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미 수십번 씩 본 영화들이고, 특히 케이블로만 수십번 씩 본 영화임에도 그 영화가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또 보게 되고, 심지어 블루레이를 소장하고 있어서 보다가 나중에 다시 더 나은 화질과 사운드로 관람할 수 있음에도 굳이 그 시간에 맞춰보느라 약속 시간에 늦었던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건 정말 논리적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 점인데,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 대체 가능한 방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케이블에서 방영한다는 건 거의 90% 이상 VOD 서비스를 하는 경우고, 관심을 갖고 보게 된다는 건 그 영화를 이미 다른 매체로 소장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까지 더하면, 꼭 그 시간에 그 영화를 TV 앞에 앉아 봐야 할 이유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예전 주말의 명화, 토요 명화 아니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케이블TV 가 대중화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극장에서 못 본 영화이거나 극장 이후 처음 그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는 공중파에서 추석, 설 연휴 특선 영화 등으로 방영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경우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날을 꼭 기억해 두거나 녹화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최근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희귀한 영화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보고 싶을 때 대부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케이블 영화를 계속 보게 되는 건 매번 느끼지만 아이러니다.


더 재미있는 건 그렇게 보게 되는 케이블 영화들이 대부분 같은 작품이라는 점. 그러니까 매번 새로운 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 하는 것보다는 매번 같은 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일이 더 잦다는 것이다. 손으로 꼽아보지는 않았지만 케이블TV의 단골 손님인 제이슨 본 시리즈의 경우 거의 모든 동선을 외울 정도로 많이 보았는데, 그래도 또 이런 저런 이유 등으로 다시 방영하게 되면 꼼짝없이 그 앞에 발이 묶여 버리는 경우가 많다. 예전 부모님과 같이 살 땐 부모님이 '분명 본 영화인데 어떻게 되는지 기억이 안난다'라고 해서 끝까지 보는 경우도 많았었는데, 그렇지 않은 지금은 어떻게 되는 지도 다 알지만 그래도 계속 보게 된다.


이 알고도 당하는 케이블 영화의 유일한 탈출구는 1부와 2부의 텀이다. '1분 뒤에 계속'은 자리를 뜨지도 않거나 잠깐 화장실 다녀오는 것으로 긴장하게 하지만, 거의 10분 이상 공백이 생기는 1부와 2부 사이의 시간은 다시 재정신을 차리고 '왜 수십번 본 영화를 이 시간에 묶여서 또 보고 있는거지?'라는 생각을 들게 해 일상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처음엔 1부가 끝나고도 곧 2부를 할 것처럼 페이크를 쓰는 채널의 꼼수에 넘어가 꼼짝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잡혀 있었지만, 곧 할 것 같아도 그건 2부를 곧 한다는 예고를 다시 한 번 보여준 뒤 다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쉽게 포기하는 포인트가 되었다.


그래도 케이블 영화의 묘한 매력, 아니 영화의 매력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왜 본 영화를 몇 번 씩 또 보고, 사로 잡혀 버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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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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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진짜 이야기는 배기사와 최상무에게 있다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이 연일 화제다. 류승완 감독의 첫 여름 시즌 작품이자 한층 성숙한 오락 영화였던 '베테랑'은 이미 수 많은 매체에서 평가하고 언급했던 것처럼 일종의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대한 대리 만족으로서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많은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미 '베테랑'에 대한 리뷰는 마쳤으나 (베테랑 _ 울분에 가득찬 현실 세계의 활극) 조금 더 하고 싶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또 한 번 글을 쓰게 되었다. '베테랑'이 화제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의 주된 갈등 관계에 있는 두 주인공인 서도철 (황정민)과 조태오 (유아인)의 캐릭터와 관계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는데, 내가 또 한 번의 글을 통해 꼭 한 번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정웅인이 연기한 배기사와 유해진이 연기한 최상무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두 명의 캐릭터는 그 간 다른 영화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캐릭터들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거나, 하기 힘들었던 행동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베테랑'의 메시지를 전면에서 소리 내어 외치고 있는 캐릭터가 서도철과 조태오라면, 배기사와 최상무의 캐릭터는 더 현실적이거나 더 판타지적인 면모로 진정한 이 작품의 메시지를 담아 내고 있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태오라는 캐릭터가 워낙 괴물 같은 인물이라 여러가지 뜯어보고 연구하는 맛이 있기는 하지만, 더 다각적으로 흥미롭고 뜯어볼 필요가 있는 캐릭터는 바로 최상무다. 최상무는 조태오로 대표되는 재벌가, 즉 권력자들 가운데서도 조금 미묘한 위치에 놓이는데, 어쩌면 배기사와 정반대에 놓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최상무에 대해 얘기할 때 권력욕 혹은 야망 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조금은 달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상무는 권력욕은 있으나 현재 사실상의 권력은 없고, 어찌보면 그가 진짜 부나 권력을 쥐게 될 시기는 결국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스스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망나니처럼 행동하는 조태오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캐릭터들과는 달리 그는 조태오의 범위를 벗어났을 때에도 그를 나무라거나 못 마땅해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난 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가 최상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도 언제부터 잘못되었고, 무엇이 잘 못 되어가고 있는지 이제는 더 이상 분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마 보통의 2인자 혹은 나쁜 주인을 모시는 이들의 성향을 보았을 때, 막나가는 주인의 행동이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어'라는 식으로 뒤치닥거리는 해내거나 혹은 자신 만의 야망을 위해 그 시간들을 견뎌낸 뒤 기회가 왔을 때 상황을 전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상무의 경우는 이 둘 다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의 충성은 100% 진심에서 우러난 것인가 하면 또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최상무도 처음엔 '태오야'하며 적어도 업무 시간이 아닐 땐 편한 관계 였을지 모르고 조태오가 너무 심한 행동들을 저지를 땐 어른답게 충고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길어지면서 최상무는 조태오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점점 괴물이 되어 갔고, 나중엔 (영화 속 시점) 조태오가 괜찮다고 해도 이젠 그래도 아니야 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여기에 정점을 찍는 것이 바로 조태오의 잘못을 최상무가 뒤집어 쓰도록 권유 받게 되는 장면이다. 사실 이 장면을 볼 때 '아, 이쯤에서 최상무가 큰 결심을 하겠구나' 싶었었다. 왜냐하면 영화 초반부터 보여주었던 최상무의 모습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시종일관 불안하고 무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지만 그 강도는 더 강해져만 가는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강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하지 않을까 했었던 것인데, 최상무는 그러지 못했다. 이 과정 속에서 잠시 고민을 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서도철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최상무의 모습은 자기 최면에 빠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뭐랄까, 잡혀와서 억울하게 노예가 된 경우가 아니라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다 보니 나중엔 나기 자신조차 본래 자신이 노예였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 현실에 사로잡혀 버린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최상무와 배기사는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정확히 반대에 놓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둘 모두 자의든 타의든 이 정의롭지 못한 현실 속에 놓여버린 상황에서, 한 명은 목숨을 위협하는 더 큰 시련이 왔을 때 조차 용기를 잃지 않았지만 다른 한 명은 오히려 탈출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스스로 그 상황에 갖혀 버리기를 선택하였으니 말이다. 영화 속 최상무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배기사의 캐릭터보다 더 씁쓸함이 느껴졌다. 누구나 그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부나 명예 혹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해 가치관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결정의 유혹을 받고, 더 나아가 작은 크기일 수록 그 유혹을 스스로 정당화 하며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최상무는 그렇게 단 한 번의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스스로 가해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 이제 정웅인이 연기한 배기사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전 글에도 썼지만 나는 왜인지 배기사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불안불안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의도 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다른 많은 영화들에서 얻은 경험으로 인한 선입견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배기사가 등장하는 모든 씬은 운전을 하거나 어두운 밤에 홀로 있거나 등 마치 곧 무언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직전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교통 사고는 나지 않고, 밤 장면에서도 폭력이 있기는 했지만 불안하게 했던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것이 의도된 연출이라면 하루하루 살얼음 판을 걷는 듯 불안 불안한 인물의 심리를 캐릭터의 대사나 상황이 아니라 간접적인 연출로서 그려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여기서 무슨 일이 차라리 일어 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기사가 등장하는 모든 씬은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긴장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떨리는 순간이었다.


어떤 권력이나 물리적 힘으로 인해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들은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배기사의 경우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보통 같았으면 일을 하고 제대로 된 돈을 받지 못하고 영화 속 장면으로 유추해 보았을 때 대부분의 기사들이 결국 전소장 (정만식)에게 이야기해 보았자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몇 번 따지고 항의하는 것에서 그 불만을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 항의하는 과정을 보아도 배기사는 강렬하게 항의하는 쪽이기는 커녕 오히려 뒷 쪽에서 그냥 지켜보는 성격이었다는 점도 그가 여기까지는 그다지 큰 차이점이 없는 캐릭터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배기사는 홀로 늦게 까지 남아 전소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전소장에게 작지만 용감하게 끝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소장이 폭력을 행사할 때도 배기사는 전혀 맞대응하지 않으며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에만 신경쓴다.


그리고 그 다음 조태오의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것 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은 행동이라 하겠으나, 그 이후 조태오의 사무실로 불려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전소장과 결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는 분명 달랐다. 이미 이 상황은 여러가지 상식이 무너진 상황으로 그가 여기서 전소장과 힘껏 결투를 벌이더라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라 하겠는데, 배기사는 이 미친 상황에 끝까지 빨려들어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준다. 전소장도 이 상황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는 것은 잘 안다. 그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권력의 기에 눌리지 않은 이는 오로지 배기사 한 명 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놀라웠다. 난 처음 배기사의 추락에 대한 반전 아닌 반전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자신의 현실을 비관해 스스로 뛰어내린 것이 훨씬 설득력 있다고 여겼었다. 무엇이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는 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같지만, 무엇이 더 의미 있는 가에 대한 답은 분명 영화 속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기사는 그렇게 아들이 보는 앞에서 두드려 맞고 그 값으로 보상 이상의 돈을 받았지만 현실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다시 건물로 향한 것이 아니라 조태오에게 다시 따지려고 건물을 찾는다. 난 배기사의 이 행동이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영화 속 캐릭터들의 여러 상황 속에 나를 대입해 보았을 때 가장 하기 힘든 행동을 꼽으라면 바로 배기사의 이 행동일 것이다. 가깝게는 서도철, 멀게는 다른 액션 영웅들처럼 이런 악당들을 제대로 응징해 주어야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올라간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굴욕적인 일을 당할 것이라는 것도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기사는 다시 건물을 올라 조태오를 만났다.


이것은 '베테랑'의 여러 판타지 가운데 가장 큰 판타지에 가깝다. 현실에서 이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베테랑'이 인상적인 건 이미 많이 논의 되었지만 판타지를 그리 되 허무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적이자 용기를 북돋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용기를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가져야 하지 않겠냐고. 거기서 부터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냐고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더 의미가 크다. 아마 이 역시 다른 영화였다면 말그대로 건물에서 떨어져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것으로 전개했을 텐데, '베테랑'은 배기사가 절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영화였기에 그가 살아있고, 앞으로 다시 일할 수 있다는 암시를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그래서 이 마지막 장면은 너무 의도적일지언정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장면이라 하겠다.


자신이 처한 각자의 험한 현실 속에서도 배기사 처럼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래도 용기를 낼 수 있기를 응원하는 영화가 바로 '베테랑'이다.



[아쉬타카의 레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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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23 매거진에 대한 몹쓸 꿈


글을 좀 쓴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긴 글을 읽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일종의 매거진 말이다. 웹진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오프라인에서 만져볼 수 있는 매거진 형태일 수도 있고, 더 포괄하는 개념으로는 책자 정도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쨋든 자신이 관심 있고 좋아하는 분야나 장르의 글들을 한 곳에 모아 소개하는 정기적인 잡지를 직접 만들어 보고 픈 꿈. 나도 어쩌다 보니 이래저래 돈을 받고 글을 쓴지 10년이 조금 넘었는데, 그렇다 보니 인생의 고비를 겪을 때 마다, 아니 그냥 문득 문득 내가 한 번 편집장이 되어 하나의 콘텐츠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곤 했다.


하지만 이 글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난 이 꿈이 아주 몹쓸 꿈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오히려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20대 시절에 저질러 버렸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가끔 생각한다. 직접적인 관련 업계는 아니지만 주변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제법 존재했다보니, 나와 같은 생각으로 스스로 잡지를 만들 거나, 웹진을 만들어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사례를 엿볼 수 있었는데, 결과는 대부분 그리 좋지 않았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곳들도 처음 꿈꿨던 것에 비해서는 실망스러운 반응을 얻거나, 생존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곤 했다.


한 번의 시대가 가고, 다시 콘텐츠가 집중되는 시대가 왔지만 그래도 이 매거진에 대한 꿈은 그리 희망적이진 않다. 그 어느 때보다 콘텐츠의 대한 소비 수요가 많아졌지만, 내가 하고 싶은 영화, 음악, 서브 컬쳐 등에 관한 이야기나 이를 모바일에 최적화 된 카드 형 콘텐츠가 아닌 '글'을 읽는 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비교적 긴 글 위주로 구성된 매체는 여전히 시장성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아무래도 최근의 트랜드는 어떡하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더 축약하고 시각적 이미지 혹은 동영상으로 단 시간에 표현해 내는 가가 중요 포인트이기 때문에, 이 트랜드를 역 주행하는 긴 호흡의 매체는 시장에서 선택 받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이 몹쓸 꿈을 변호하자면, 어차피 트랜드와 큰 시장을 노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수가 대중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수는 아니겠지만, 마니아 혹은 오타쿠라고 불리기도 하는 더 깊이 있는 장르의 이해와 호기심이 있는 이들이 만족하고 흥미로워 할 만한 작은 규모의, 하지만 지속적으로 생존 가능한 글과 매체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또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 보니, 작지만 각자가 관심 있는 분야의 매체나 잡지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이들이 제법 적지 않다. 그들은 모두들 지속 가능한 꿈을 꿀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 꿈을 계속 꿀 수 있을까.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21 폭력적인 글 쓰지 않기



우리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달 받는 표현들 가운데는 상당히 폭력적인 내용들이 많다. 글의 의도 자체가 누군 가에게 폭력을 가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이미 너무 익숙해 버려서 쓰는 이조차 이 표현이 폭력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게 된 경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쟁이나 재난과 관련된 폭력적인 단어들을 우리는 은연중에 너무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언론은 물론 개인이 글을 쓸 때에도 더 더 자극적인 표현을 우선시하다 보니 이런 풍조가 자연스럽게 생겨버렸다고 할 수 있을 텐데, 한 발 물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전쟁과 폭력에 물든 표현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주 경미한 것부터 이야기하자면 무슨 무슨 사단, 무슨 무슨 군단 같은 군사 용어로 시작하여, 핵폭탄, 융단 폭격, 포화를 퍼붓다, 확인 사살 등 직접적인 전쟁과 관련된 용어들은 물론, 쓰나미 같은 재난 용어 역시 일상 속에서 자주 목격된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전 국민이 거대한 군사 작전 중에 있는 것 마냥,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폭력적인 표현들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흔한 것 같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표현들을 별다른 생각 없이 자주 사용했었고, 특히 무언가 헤드라인을 뽑아 낸다 거나, 더 자극적인 표현을 필요로 할 때는 자연스럽게 이런 폭력적인 표현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별 의미 없이 그냥 재미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이렇게 글을 쓰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이유로는 실제 전쟁이나 폭력에 피해를 받았던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이들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작은 표현과 단어 하나 때문에도 그 끔찍했던 순간을 고통스럽게 떠올리게 된다는 이유였다. 특히 '쓰나미'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아주 쉽게 무언가 대규모를 표현해야 할 때 쓰나미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쓰나미라는 단어에는 단순히 규모의 의미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앗아간 고통과 피해를 고스란히 담고 있지 않은가. 과연 쓰나미를 겪은 이들이 '아, 진짜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네'라는 표현에 '하하하'라고 웃을 수 있을까.


이건 단순한 예다. 그리고 매우 구체적인 예다. 모든 표현을 쓸 때 마다 이 단어가 누군 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고민해 보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글 쓰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에게 폭력에 가까운 행위가 될지도 모르니).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나 알 만한 전쟁, 재난, 폭력과 관련된 표현을, 굳이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은 글에 사용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언급한 것처럼 그런 의도를 가졌을 때는 예외의 경우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굳이 더 자극적으로 쓰려고 혹은 그냥 그 표현이 마음에 들어서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글을 쓸 때 이 부분을 최대한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쓰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글 쓰는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좀 더 염두에 두면 좋겠다. 대단한 글 쓰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글을 쓰는 한 사람 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의 글과 말이 얼마나 많은 폭력성을 담고 있는 지를 돌아보는 것도 한 번쯤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나부터 더 노력해야지.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이 글에는 문경은 선수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스포일러 홍수의 시대다. 아주 예전에 스포일러라는 말 자체가 흔하게 사용되지 않던 시절에는 단순히 반전이 있는 영화에만 국한되어 그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것으로만 인식되었으나, 요즘 같아서는 그날 그날 방영하는 드라마는 물론 각종 스포츠 경기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관심사가 많을 수록 스포일러를 피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먼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스포일러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스포일러라는 것의 범위가 사실상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 밖에는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어제 방영한 드라마의 줄거리를 얘기하는 것은 제법 많은 이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스포일러 하면 반드시 얘기되는 작품인 '식스 센스'의 반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미한 수준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확률적인 것일 뿐 아직 '식스 센스'를 보지 않은 이에게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스포일러로 느껴질 수 밖에는 없을 것이란 얘기도 된다. 특히 예전 작품 같은 경우 동시대를 살았던 이가 아니라면 그 다음 세대의 경우 일부러 찾아봐야 하는데 이럴 때 '누구나 다 아는 얘기'는 이들에게 큰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스포일러의 범주를 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인정 정도만 하는 것으로 그치자는 얘기.


개인적으로는 이 글에서 '식스 센스'의 반전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처럼 가능하다면 핵심이 되는 내용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지켜주고 싶은 편이지만(아예 쓰지 말자는게 아니라 스포 표시 정도를 해둘 수도 있다는 얘기), 이런 성향을 재쳐두더라도 최근의 경향은 실시간이 아니면 사실상 스포를 피하기 어려운 시대라 점점 따라가기 벅찬 것에 대해 살짝 푸념을 늘어놓고 싶어서랄까. 물론 여기에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다양한 관심사 때문일 것이다. 슈퍼스타 K도 안보고 위대한 탄생은 조용필의 밴드로 알고 있고, 농구는 문경은이 뛰던 시절 보고 안보는 이라면 이들의 결과를 주변에서 보게 되더라도 스포이기는 커녕 소소한 정보가 되는 경우가 더욱 잦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SK농구단의 경기 결과 뉴스를 보며 '엇, 문경은이 벌써 감독이 되었어?'라고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수이기는 하겠지만 관심사가 어느 정도 다양한 입장에서는 정말 완벽하게 스포를 피하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에는 일단 정보 유통 채널이 너무 다양해져서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막기란 어려운 일인데, 주로 관심사 별로 팔로잉을 하고 있는 트위터나 지인들로만 이루어진 페이스북만 해도 근 시일 내에 걱정되는 스포거리가 있다면 아예 타임라인을 보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실시간으로 즐기지 못한 것들에 대해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다면 SNS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포털 메인 등에 아주 깨알 같이 기사 형태로 등장하는 스포를 피하기란 정말 힘든 일인 듯 하다. 예전에는 꼭 봐야할 일이 있어서 포털에 접속은 했으나 고개는 다른 곳으로 돌리고 로그인 하여 피한 웃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특히 요즘 드라마 같은 경우는 그냥 포털 메인만 하루에 한 두 번씩 방문해도 대충의 줄거리는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드라마 속 이야기를 마치 실제 이야기인냥 포장하는 것에 처음에는 조금 놀라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러려니 할 정도로 무뎌져버렸다.


가장 무방비로 당할 때는 SNS는 물론 포털 및 인터넷 서비스를 거의 대부분 피했음에도 발생하는 경우인데, 무심코 TV 뉴스를 보다가 아래 지나가는 자막으로 스포츠 결과가 슬쩍 지나가는 걸 보게 된다거나, 극장 상영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미 내가 보려는 영화를 본 이들에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듣게 된다거나 (ㅠㅠ), 역시 술집이나 지하철 등에서 크게 얘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듣게 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이럴 때는 아주 신속하게 반응하여 예를 들어 맨유 경기의 결과를 알고 싶지 않을 경우, 지하철에서 누가 맨유...라는 얘기만 귀에 들리면 바로 귀를 막아버리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당할 때는 사실상 무방비나 다름 없다. 피할 곳도 없고 내가 더 큰 소리로 떠들 정도로 진상도 아니고, 이건 그냥 운명에 맡길 수 밖에는 없는 경우라 하겠다.


어쨋든 결론이 날 수 없는 이야기지만, 관심사에 대해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다면 가능한한 본방 사수, 빠른 관람 등으로 미연에 방지하는 것 밖에는 답이 없으며, 불가항력으로 당할 시에는 조용히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쓸쓸히 알아버린 내용을 복습할 수 밖에는 없을 듯 하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포인트는 불가항력이다. 스포하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전제는 결코 없다. 잘못일 수도 없고. 이미 본방사수로 본 것에 대해 못 본 사람이 있을까봐 꽁꽁 입을 막고 사는 것도 말이 안되니까 ㅎ)


아, 왜 이렇게 눈물나지 ㅠ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오늘은 무슨 얘기를 꺼내볼까 하다가 평소 영화 예매를 할 때 극장 좌석 선택하는 방법 등에 대해 한 번 얘기를 해보면 좋겠다 싶었다. 사실 진정한 노하우라던지 알짜배기 정보를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각 극장마다 고유의 정보와 더불어 최적의 좌석까지 안내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럴러면 이건 정말 큰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은 비교적 이 같이 깨알같은 정보 없이도 범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한 번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 관람의 99%는, 아니 100%를 예매를 통해 보는 것 같다. 99%로 쓰고나서 따져보니 근 몇 년간 단 한번도 현매로 티켓을 구입한 적이 없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그 만큼 예매시스템에도 익숙해졌으며, 각종 빠른 손과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콘서트, 공연 등의 예매에도 절로 익숙해지게 되었다. 영화 예매는 대부분 각 극장의 홈페이지에서 하는 편이다.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상상마당, 아트하우스 모모 등은 주로 홈페이지에서 예매를 하곤 하는데, 멀티플렉스 3사의 경우는 최근들어 웹이 아닌 스마트폰을 통한 모바일로 예매하는 일이 굉장히 많아졌다. 계속 된 업데이트를 통해 앱을 통해서도 예매 과정이 간단하게 진행되는 편이라, 특히 컴퓨터 앞에 있지 않을 때는 이 방법을 자주 활용하곤 한다. 그 외에 아트시네마나 다른 극장들을 예매할 때는 맥스무비를 아주 가끔씩 이용하기도 하고, 가끔 시간과 작품에 따라 신촌에 있는 아트레온도 홈페이지를 통해 예매를 하는 편이다.

일단 멀티플렉스 극장의 경우 아주 인기작인 아닌 경우에는 그 주의 개봉작 예매가 수요일날 오픈되는 편이다. 정확한 시간까지는 모르겠는데 그 주에 볼만한 영화를 예매하려고 할 때는 수요일날 자주 들락거리다보면 시간표가 업데이트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기작이나 3D, IMAX 등의 경우는 2~3주 전에 미리 예매가 가능하도록 오픈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는 약간의 경쟁을 해야한다. 3D IMAX는 명당이라는 좌석이 사실상 정해져있기 때문에, 더군다나 인기작이라 많은 관객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힘겨운 편은 아니지만 작은 예매전쟁이 진행되기도 한다.



아이맥스 이야기가 나온 김에 3D 아이맥스 영화의 명당 자리를 꼽아보자면, 일반 영화와는 달리 중간쯤에서 1열이나 2열 정도 앞 좌석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아주 약간 올려다보는 시각에서 3D를 체험하면 훨씬 더 효과적인 감상이 되곤 한다. 그래서 3D 아이맥스 영화의 시간표가 오픈되고 나면 아주 재빠르게 중간 가운데 살짝 앞좌석 들은 금새 예매가 완료되곤 한다 (왕십리 아이맥스를 기준으로 한다면 중간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 6좌석 정도). 사실 아이맥스 예매야 일찍이 오픈하여 작은 경쟁을 할 만큼 중요하게 선택하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명당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데, 일반 영화는 몰라도 3D 아이맥스 영화를 사이드에서 본다면 비싼 티켓가격이 조금 아까울 듯 하다. 어차피 명당이라 더 비싸고 사이드라 더 저렴한 것이 아니라면, 기왕이면 같은 값으로 부지런히 예매해서 좋은 자리에서 보는 편이 훨씬 좋지 않을까?

깨알 같은 극장별 명당자리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아이맥스 얘기를 하다보니 살짝 얘기가 나왔는데, 나온 김에 한 군데만 더 이야기하자면 집 근처라 자주 찾고 좋아하는 영화들을 주로 상영해 완소 극장 중 하나인 홍대 상상마당을 들 수 있겠다. 흔히 멀티플렉스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작품들을 비롯해, 작은 영화들을 여럿 만날 수 있어 자주 찾는 곳인데 상상마당은 좌석 수가 그리 많지 않아 오히려 더 좋은 곳이다. 극장에서 영화 관람시 가장 민감하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면 아무래도 뒷좌석에 앉은 사람의 발길질 성향일 텐데, 상상마당은 극장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고민없이 매번 맨 뒷좌석을 선택하는 편이다. 맨 뒤에서도 시야가 좋고 뒤에서 누가 찰 걱정도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좌석은 없을 듯 하다.

자, 이제야 나온 본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극장에 상관없이 그냥 보편적으로 내가 예매할 때 고려하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앞서 잠깐 이야기했던 것처럼 극장에서 영화 관람시 가장 신경 쓰는 것들은 아무래도 뒷 좌석에 누가 앉는가 (롱다리, 비매너, 어린아이, 진상)에 대한 것과 역시 앞 좌석과 옆 좌석에 누가 앉는가에 대한 것일거다. 사실 이 점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완벽하게 통제하려면 둘이서 영화 볼 때 앞, 뒤, 옆까지 최소 8자리를 예매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텐데, 이 정도로 럭셔리한 영화관람을 즐기는 경제사정은 아니니 이 방법을 쓰기는 사실상 불가능. 아, 물론 사람 없는 시간대를 골라, 그것도 대중들이 별로 안좋아하는 작품들 만을 골라서 본다면 단 한 자리나 두 자리만 예매했음에도 근 방 수십자리가 여유롭게 남는, 혹은 극장을 통으로 대관해 여자친구에게 '널 위해 빌렸어'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생기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거의 상영관을 독차지 하거나 5명 이하만 관람한 적이 의외로 많았다는 점에서,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 방법도 추천할 만하다.




처음에 좌석을 예매할 때는 무조건 좋은 자리만을 선택했었다. 지금도 여기에는 변함이 없지만 몇 년 전부터는 한 가지 변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미 예매완료된 좌석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늘 이 말 벌써 몇번째 ㅋ) 대부분의 영화를 시간표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매하는 습성상, 거의 예매되어 있지 않거나 적은 좌석만 예매되어 있는 시점에서 예매창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 시점에서 나보다 먼저 예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영화에 대한 사랑이 깊을 확률이 높다. 즉, 극장에 와서 시간에 맞춰 영화를 고르는 사람은 물론 아닐 뿐더러, 평소 좋아하는 영화의 예매가 열리자마자 예매완료한 사람이라면, 진상일 확률보다는 조용히 영화에만 집중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확률이고 검증된 바는 없지만 분명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이유라고 생각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매를 할 때 내가 가장 선호하는 명당 자리에서 앞뒤옆으로 한 두 좌석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 주변으로 예매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 사람에 앞을 선호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 방법은 제법 괜찮은 효과를 거두고 있으며, 적어도 최근에는 뒤에서 누가 발로 차는 경험을 거의 겪지 않았던 것 같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방법으로는 짝수가 아닌 홀수로 계산하여 두 자리를 예매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ABCDEF의 좌석이 있고 내가 원하는 좌석이 가운데인 CD라고 했을 때, CD가 아닌 BC를 예매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 커플 사이에 한 좌석이 남게 되는데 평균적으로 혼자 오는 사람은 조용히 영화에만 집중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이 방법도 적극 고려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커다란 리스크가 하나 있는데, 3명 이상의 단체가 앉을 확률도 제법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커플로 왔을 때 보다 오히려 더 떠들고 부산할 확률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얼핏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이 모든 꼼수는 극장에서 오로지 영화에만 집중하기 위함이다. 관람을 방해하는 타 관객들의 간섭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예방조치로서 이 같은 방법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그래도 상상을 초월하는 극장 진상들을 만나는 일도 다반사다 (영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카톡으로 친구와 대화하던 아이, 아예 내 좌석에 발을 턱 걸치고 영화보던 여자, 무슨 음식이었는지 이상한 냄새나는 음식을 계속 먹던 커플, 역시 요상한 자세로 옆에 앉은 이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높이 솟아 있던 관객 등). 주절주절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결론은 앞으로도 좋은 영화를 더 쾌적한 극장 상황에서 만나기를 고대하는 한 관객에게 작은 노하우 아닌 바램이었다고나 할까 ㅋ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글 제목에 '새삼스런' 이 빠졌다. 영화가 앞으로는 모두 데이터로 대체 될 것이고, 극장이란 곳이 희귀한 장소가 될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합법이든 불법이든 영화를 보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처음 했던 것도 벌써 수년이 흘렀다. 그 때는 단순히 씁쓸한 미래에 대한 예측 정도였는데 '새삼스럽지만' 이것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이것은 합법이냐 불법이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불법 다운로드의 수준은 '불법'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문화로 확산되었으며, 내가 그렇게 간절히 바랬던 최소 마지노선인 '죄책감'도 이제는 더 이상 말할 여력 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만 더 이야기하자면 불법 다운로드가 합법 다운로드보다 쉽고, 불법으로 다운로드 받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지언정 이것이 불법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최소한의 죄책감을 갖고 부끄러운 일인 줄만이라도 잊지 말자 라는 것이었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금은 죄책감은 커녕, 내 하드에 얼마나 많은 영화파일을 갖고 있는지와 풀HD급 화질의 소스를 구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최신영화 파일을 얻었는지가 영화 본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영화 본다는 사람들'에 나는 없다) 자랑와 동경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 다했다.

어쨋든 오늘 갑자기 이 새삼스런 이야기에 대해 말을 꺼내게 된 것은 불법다운로드를 하지 말자 라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가 극장 예술에서 파일형태의 데이터로 변화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가끔 이런 얘기를 꺼내면 혹자들은 극장에서 보는 영화만 영화란 말이냐 라고 오해하곤 하는데, BD나 DVD 혹은 합법적인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를 통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다양성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후자의 경우가 영화라는 매체의 핵심 전달 방법이 되고 있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음반업계를 들 수 있을텐데, 최근 극소수만이 CD로 음악을 즐기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mp3나 스트리밍으로 음악 자체를 즐기게 된 현상을 보자면 이것은 분명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다운그레이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CD가 아닌 몇백원에 다운받는 파일 형태를 선호하고 즐기기 때문에 뮤지션들은 CD형태로 제작을 할 때는 항상 모험을 해야하고, 어차피 몇백 k정도의 좋지 않은 음질과 이어폰으로 즐기게 될 음악에 사운드적인 퀄리티의 비중을 줄일 수 밖에는 없게 되었다. 현재 국내가요 시장을 보면 앨범 형태로 음반을 내기보다는 디지털 싱글과 스트리밍 서비스에 일일 차트 혹은 주간 차트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게 되는 수준까지 왔는데, 이것이 주객이 전도된 대표적인 안타까운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최신 트렌드와 기술,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아있자는 얘기가 아니다. 어차피 모든 예술은 시대에 맞춰 변화해 왔으며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을 즐기는 소비자나 시장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가 본질을 해치는 수준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음반의 예를 계속 들어보자면 뮤지션들이 기본적으로 음반이나 앨범형태로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토양과 이런 형태로 즐기는 층이 유지되는 시장에서 mp3나 스트리밍 등 형태의 변화에도 유연하게 적응하는 모양새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텐데, 지금은 후자의 변화에 본질이 큰 영향을 받아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뒤틀림이 생겨버린 현실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몇몇 감독들은 이미 수년전부터 웹사이트를 통해 극장 개봉과 웹개봉을 동시에 진행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북미에서는 대여용 디스크 시장이 제법 활성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극장 상영을 걱정하고 영화가 자본에 완전히 잠식될 걱정을 할 정도까지는 아닌데, 국내의 현실은 이런 암울한 미래가 (누군가에겐 더 편리한 미래겠지만) 머지 않아 찾아올 것만 같다. 영화를 만들 때 스케일이나 극장 환경을 고려하여 영상과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장면을 연출해 내는 것이 보통일텐데 이런 작품이 휴대폰의 작은 화면에서 말그대로 '재생'되길 원하는 창작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 역시 음반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컴퓨터나 휴대폰 환경에서 영화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가까워져 버린 것이다.

오늘 아침 워너브라더스가 '다크 나이트'를 시작으로 페이스북을 통해 영화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최근 페이스북에 누구보다 재미를 느끼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아주 흥미로운 뉴스였지만, 이런 흥미와 기대보다는 점점 극장 시대가 막을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쓸쓸함이 더 느껴졌다. 시장과 문화의 변화에는 발맞춰 가야겠지만, 그것이 본질을 해칠 정도의 속도와 세기라면 조금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아마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는 더더욱 데이터가 될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통을 자랑하는 맛집의 음식들은 배달을 하지 않고 배달음식으로 먹게 된 들 식당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데이터화 된 영화 예술은 영화라는 매체가 담고 있는 참 맛을 과연 전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작품들에 있어서는 절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몇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부터 커피 맛이 쓰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영화평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꼭 기자가 아니더라도 나처럼 영화보고 쓰기를 즐겨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을 문제가 아닐까 싶다. 모든 일이 주객이 전도되고 초심을 잃게 되면 의미가 퇴색되는 것처럼, 영화 글 쓰기 역시 영화 보기를 넘어서는 수준이라면 고민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고민은 몇 해전에도 한 번 깊게 했던 적이 있었고, 어쩌다보니 슬럼프 아닌 슬럼프를 겪을 때마다 들곤 하는 화두이기도 한데, 완고했던 예전과는 달리 조금은 유해졌다고나 할까. 다시 한번 글로써 정리할 필요가 생겼다.

일단 여전히 영화 보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러니까 순수한 영화 보기가 더 중요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 때문에 얻는 것이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라면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즐거움에는 히노애락이 모두 포함되며, 괴로움은 재미없는 영화나 불편한 영화가 포함된다) 굳이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가며 매번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를 대하는 방식이 '보고 싶다'가 아닌 '무언가 쓰고 싶다'로 접근하기 시작하면 조금씩 관람 태도에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보고 나서 써야한다는 부담이 없다면, 영화를 오롯이 그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된다. 분석하려는 마음도 써야 할 때보다는 압박이 덜할 것이고, 그저 2시간 남짓을 맡기면 된다는 것에 그야말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이전에 보고 나서 써야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면, 아무리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려해도 분명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화를 보는 중간 이미 머릿 속은 글을 반 쯤 써내려가게 되는 경우도 있으며, 극장을 나오면서 나머지 반을, 실제로 글로 옮길 때 부족한 부분을 채우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전에는 이런 영화보기와 글 쓰기에 있어서 상당히 완곡한 입장이었다. 이렇듯 영화 글 쓰기가 영화 보기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친다면 과감하게 글 쓰기를 포기할 지언정, 순수한 영화보기가 방해 받아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생각이 원론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영화 보기 만큼이나 영화 글 쓰기의 독립적인 의미를 새삼 찾게 되었달까. 영화 글 쓰기가 단순히 영화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글을 쓰면 쓸 수록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영화 글 쓰기에는 여러가지 스타일들이 있지만, 나의 영화 글 쓰기는 결국 영화를 빌려 나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설명하기 보다는,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고 이 말하려는 것이 내 생각과 어떻게 접점을 이루는지 혹은 공감과 반대 되는 의견을 담고 있는지를 글로써 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영화 글 쓰기는 영화 보기 만큼이나 의미있는 작업으로 계속 성장해 왔다. 예전에 써둔 글들을 보면 그 영화가 어떤 영화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그 당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는 재미가 더 크다는 것을 요새 새삼 느끼고 있다. 

그리고 글 쓰기는 궁극적으로 '글'자체가 의미있기도 하지만 '쓰는' 과정에서 오는 재미와 의미가 분명 존재한다. 특히 나에게 있어 글쓰기는 머릿 속에 있는 생각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도구이자, 영화 만큼이나 재미있는 또 다른 유희 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본 영화들은 머릿 속에 가득하고, 이것들을 글로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가득하고, 점점 이런 것들이 압박으로 느껴질 때는, '내가 왜 이렇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에 부담을 느끼는 거지?'라며 반문해 보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것은 분명 한 발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점점 옭아매는 안좋은 습관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보기 만큼이나 영화 글 쓰기의 재미를 이제야 새삼 깨닫게 된 점으로 미뤄봤을 때, 이것을 더 이상 짐이 아닌 즐거움으로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아 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10.09.02. pm. 01:42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영화를 삶의 낙으로 삼고 있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극장이란 곳은 그냥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공간적인 측면 외에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극장의 가장 큰 기능이라면 역시 좋아하는 영화를 대형 스크린과 음향 시설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만, 이 것 외에도 극장은 그 자체로 (그러니까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별한 공간이 되곤 한다. 가깝게는 친구와의 약속 장소가 될 수도 있으며, 내 인생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추억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내 추억 중 많은 조각들은 영화 혹은 극장과 연결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볼 때 첫 경험을 몹시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사람은 약은 존재라 아무리 선입견을 지우려고 의식적으로 거부해도 이미 이 의식 속에는 또 다른 선입견이 생기는 것처럼, 아무런 선입견도 없이 볼 수 있는 첫 관람의 조건을 가능하면 최적의 조건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나의 영화보기에 가장 큰 준비작업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본래 의도한 바를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극장의 조건을 찾아 첫 경험을 치루곤 하는데, 필름 상영인지 디지털 상영인지, 혹은 3D상영인지 아이맥스 상영인지 등은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어찌보면 영화를 보는 대에 가장 직접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극장의 분위기는 쉽게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영화를 예매할 때는 다른 요소보다 바로 이 분위기를 가장 1순위로 고려하게 되었으며, 이 선택의 폭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실 일반 멀티플렉스 극장의 에티켓에 대한 기대는 이미 저버린지 오래다. 왜냐하면 멀티 플렉스에는 '영화'를 보러 온 사람보다는 그저 '시간'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영화를 보려는 사람만 극장에 와야 하는 것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제발 그래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이 영화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차이일 뿐이니, 내 인생에서 영화보기의 중요성을 남에게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예전 재상영된 '영웅본색'을 보러 갔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언제부턴가 '시네마테크' 역시 완전한 안전지대는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인식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시네마테크'는 좀 더 영화에 애정이 있는 이들 혹은 영화 보기에 대한 인식이 높은 이들이 주로 보러 오는 곳이기 때문에 (반대로 얘기하자면 '시간'을 즐기러 오는 이들이 보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은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기 때문에) 무개념에 가까운 관람 태도는 피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언제부턴가 점점 시네마테크에도 멀티플렉스에서나 볼 법한 관람 태도의 관객들을 만나게 되어 매우 우울해졌던 기억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시네마테크에서나 볼 법한 영화들을 일반 멀티플렉스 상영관들이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판권 및 상영권을 가져가는 바람에, 이런 영화들을 보려면 할 수 없이라도 멀티플렉스를 가야만 하는 경우가 생긴 이유도 들 수 있겠다 (멀티플렉스의 예술 영화 끌어 안기는 분명히 양날의 칼이다). 여기까지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 부분이라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는데, 앞으로 이야기할 관람 에티켓에 대해서는 사실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다.




일단 극장에서 전화 받는 사람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기껏해야 2시간 정도 핸드폰과 이별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냐고 말하고 싶지만, '중요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라는 이유라면 공감은 안되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런 연락이 온 다음부터다. 적어도 양심이 있다면 바로 옆에 앉은 이들에게 눈치가 보여서라도 작게 이야기하거나 바로 끊고 이따 통화하자 라고 이야기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요새는 끊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이 오히려 절대 작지 않은 목소리로 계속 통화하는 이들도 여럿있는데, 이 분들은 '극장에서는 통화를 삼가해주세요'라는 기본 개념이 전혀 자리잡지 못한 탓일 것이다. 나는 누가 돈을 줄테니 한 2분만이라도 평소처럼 상영시 통화해주세요 라고 부탁을 해도 아마 주변 눈치와 내 스스로 민망해서 못할텐데, 이렇게 너무나 평온한 상태에서 오랜시간 통화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확실히 이들과 나는 절대 섞일 수 없는 부류이리라. 문자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다. 거의 영화 상영내내 핸드폰의 환한 불빛을 드러내며 문자를 주고 받는 이들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럴려면 왜 아까운 돈을 내가며 극장에 들어와서 문자를 주고 받는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앞좌석을 발로 차는 것도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극장 의자와 의자와의 간격은 열악한 시설이 아니라면 다 성인을 기준으로 제작이 되어 있어서 정상적으로 앉았을 때 크게 무리가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떤 신체구조를 지닌 것인지 앞사람을 차지 않고는 영화를 볼 수 없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평소에 잘 교육을 받지 못해서인데, 이런 이들의 평소 습관을 보면 앞좌석에 아예 발을 대고 보는 것으로 익숙한 이들도 상당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앞좌석에 사람이 없으면 아예 두발을 앞좌석에 높게 걸치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여럿이 함께 왔을 때 더 대담해진다. 그래서 나는 아예 이런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가능하다면 뒷좌석이 없는 중간 통로좌석을 택하는 편이다. 이런 이들과 상대하는 것보다는 이 방법이 훨씬 나은 편.




그리고 또 하나 불편한 관람태도라면, 사사건건 장면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이들이다. 마치 이 곳이 자신들의 안방인냥 영화를 보는 내내 작지 않은 소리로 '저건 왜저래?' '저 사람 죽은거야?' '뭐야 유치하게' 등등 보통 사람들은 나 혼자 머릿 속에서 하곤 하는 생각들을 별도의 여과장치 없이 입밖으로 내는 관객들이 상당히 많다. 영화를 보면서 사람에 따라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니 그걸 궁금해하는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나, 이걸 굳이 그 자리에서 옆사람에게 '큰소리로' 확인하는 걸 보면 과연 내가 옆에 있는 것이 보이질 않는 것인지를 '정말로'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는 정말 잡담이 멈추질 않길래 정말정말 참다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저, 혹시요. 저 안보이세요?' 

말이 나온 김에 관객들 외에 극장 측의 에티켓도 이야기하고 싶다. 멀티 플렉스에서는 상영시간이 정시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이미 일반화 되었다. 그래서인지 멀티플렉스를 주로 다니던 관객들은 시네마테크에 왔을 때 영화가 정시에 시작하면 오히려 당황하기까지 하더라. 이것은 분명히 극장이 관객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경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럴 거면 차라리 영화의 정시를 뒤로 늦출 것이지 정시는 그대로 표기하되 그 이후까지 한참이나 광고를 상영하는 것은 분명 '불법'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보러 간 것이지 광고를 보러 간 것이 아닌데, 이 수준이 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상영시간 이후에 10분 가까이 광고를 하는 것은 진짜 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엔딩 크래딧에 대한 것은 누누히 지적했지만 분명 극장의 100% 잘못에 가깝다. 요새도 간혹 끝까지 틀지 않고 관객이 있음에도 꺼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건 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극장의 잘못이지만 실제로 크래딧을 중간에 끊지 않더라도 남아있는 관객을 극장 직원들이 계속 눈치주는 것에 불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어떤 청소 아주머니는 매우 친절하게 '이거 끝나고 아무것도 안나오니 빨리 나가요'라고 가르쳐주기시도 하시던데, 다른 사람들은 뭐 추가 장면이 있나 해서 남아있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추가 장면이 있건 없건 크래딧을 끝까지 감상하며 스탭들 이름도 확인하고 영화에 삽입된 수록곡들도 보고 무엇보다 스코어를 만끽하기 때문에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는 순간은  아직 영화 감상의 연장선에 있단 말이다. 그런데 극장의 직원들은 '쟤가 도대체 왜 안나가고 있나' 엄청나게 눈치를 준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직원들과 이런 밀고 당기기를 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내가 내 돈 주고 영화를 보면서 왜 이런 억울한 대우를 당해야하는지 아직까지도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냥 내가 유독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슬픈 뿐이다.




어쨌든 극장은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인데, 언제부턴가 영화를 보기 위해 고려해야할 영화 외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졌다. '내 뒷 사람은 왜 이렇게 계속 찰까', '쟤는 왜 저렇게 전화통화를 하는 걸까', '저 사람은 계속 말이 많던데 이 장면에서 또 한 마디 하겠네', '직원이 나를 계속 노려보고 있군' 등등 직간접적으로 영화 한 편 보는데 너무 고려해야할 것들이 많아진 탓에 정작 영화 자체에 집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지금의 티켓값에 2~3배를 지불할 용이가 있으니 이런 프리미엄 상영관(현재 멀티플렉스에서 운영하는 프리미엄 상영관과는 다른 개념의)이 있다면 아마도 굳이 사람들이 비싼 돈 주고 들어오진 않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왜 비싼 돈 주고 영화를 봐야할까 하는 억울한 마음도 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정말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관람환경이 주어진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영화를 보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냥 '제발' 극장에서는 오롯이 영화에만 집중하고 싶다. 왜 이런 당연한 사실을 '제발'을 붙여가며 바래야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쨋든 극장에서는 오롯이 영화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영화 팬으로서의 정말 최소한의 바람이다.


2010.08.30. pm. 03:25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사실 영화 별점주기를 하면서 매번 고민스러웠던 일은, '점수주기'의 의미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포츠도 아니고 (하물며 스포츠도 결과보단 과정의 중요성을 더 보고 있는데!) 영화 같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작품을 가지고 점수를 준다는 것 자체에 모순이 있다고 항상 생각했었다. 만약 이 이유만으로 별점 주기를 포기한다고 치자면, '그렇담 어차피 개인적인 것인데, 개인적으로 점수를 주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이유보다는 바로 그 '개인적'인 감상이 볼 때마다는 아니더라도 분명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좋아하는 영화는 극장에서 여러번 보기를 주저하지 않고, 나중에 DVD나 블루레이로 출시되면 구매해 시간 날 때마다 보는 것을 삶의 낙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게 되는 일이, 같은 영화를 여러 다른 시간대 (나이)에 보게 되는 경우가 잦은데, 이렇게 되면 바로 이 '개인적' 감상이 변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영화가 어른이 되어, 혹은 세월을 갖은 뒤에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전혀 다른 영화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로 당시의 추억만으로 공유하게 되는 (그러니까 영화적인 재미보다는 그 외적인 내용으로 간직하게 되는) 작품도 생겨나게 되며, 인생의 어떤 일들을 겪고 겪지 않음에 따라 그 작품이 갖고 있는 이야기를 공감하기도 그렇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영화들을 여럿 겪었었다. 어떤 사건을 겪기 전에는 그냥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일 뿐이던 어떤 영화는, 비슷한 일을 겪게 된 뒤엔 더이상 주인공이 주인공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영화가 되었으며, 쓰기 위해 봐야만 했던 어떤 영화를 아무런 부담없이 그냥 보게 되었을 땐 또 다른 영화가 된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별점이란 그 순간의 기록일 수 밖에는 없다. 그런데 이 기억은 당시의 내 심정을 반영하는 '기억'으로 존재하기보단 오히려 이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선입견'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즉, 예전에 만점을 주었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무의식적으로 '이건 만점짜리 영화야'가 인셉션 되기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운 백지 상태는 아니더라도 이미 어떤 확실한 평가 기준으로 가지고 보기 때문에, 당시의 선택이 맞았나, 틀렸나에 오히려 집중하게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별점을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뇌리에 남아있기 때문에 선입견이 전혀 없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분명 별점은 이런 것에 있어 확실한 잣대로 남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전에도 한 번 별점주기를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말을 매번 그렇게 했으면서 리뷰 말미에는 계속 점수를 표기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던 차에 주저없이 포기했었다. 하지만 그리고나서 내 글을 자주 읽어주시던 분들이 '글도 좋지만 별점이 어떤 기준점이 되었었는데 아쉽다'라는 의견이 제법 있었던 터라, 당시에는 독자를 위해 다시금 별점주기를 곧 부활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에 대한 무시는 절대 아니다) 결국 글은 개인적인 것이고, 영화 역시 개인적인 것이며, 내가 내키는 글을 그나마 써내려가야 오히려 읽게 될 누군가에게 더욱 떳떳한 글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정성일 평론가처럼 '점수주기는 전혀 의미없다'라고 확언할 만큼의 절대적 기준은 갖고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기준점이 될 것이며, 자신의 글을 마무리 하는 좋은 재료임은 물론, 오히려 긴 글보다 더 확실한 표현방법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다시금 이 영화나 음악에 대한 별점 주기를 그만 두기로 했다 (글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음악 역시 영화와 다를 바 없이 같은 이유다). 예전에 작성한 글들의 별점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오늘부터 새롭게 쓰게 되는 글들에 대해서는 점수 주기의 평가는 하지 않으려 한다. 또 한 번의 번복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써본 글.



2010.08.19. pm. 01:07
글 / 아쉬타카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저서 '김태훈의 랜덤 워크'를 읽던 중 한 문장이 하나의 글감을 제공했다. 그는 1960년대를 두고 '지미 헨드릭스와 제니스 조플린이 신보를 발표하고, 고다르와 트뤼포의 신작을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시대'라
고 이야기했는데, 개인적으로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한적이 많았던 터라 공감이 많이 되는 구절이었다. 나도 가끔,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홍콩 느와르의 전성기를 이끌던 그 당시 개봉관에서 이 주윤발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비틀즈라는 밴드의 시작부터 마지막을 지켜볼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무하마드 알리의 경기를 TV라이브로 즐겼다면 어땠을까, '스타워즈 - 에피소드 5'의 그 유명한 대사를 개봉 당시 실제로 들었더라면 과연 그 충격이 어땠을까 등 비디오나 후일담으로 전해들은 전설의 이야기들을 리얼타임으로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생각해보곤 했었다.

매번 이런 생각은 이렇듯 부러움에서 그치곤 했는데 오늘은 무슨일인지, 그간 내가 살아온 시대를 돌아보게 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살아온 길지 않은 이 시대도 충분히 아름다운, 아니 후세에 누군가는 지금의 나처럼 반드시 부러워할 만한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영화를 되돌아본다면,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과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3부작을 모두 극장에서 즐길 수 있었으며, 앞서 부러워했던 '스타워즈' 시리즈의 프리퀄 3부작 역시 전야제라는 행사를 통해 팬들이 모여 그 유명한 오프닝롤이 등장할 때 극장에서 환호를 보내며 즐길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축복인가!). 그 뿐인가 '메멘토'부터 시작해 '인썸니아' '프레스티지' 그리고 '다크나이트'로 이어지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시작과 성장을 아직도 지켜보는 중이며, 코엔 형제라는 세기의 천재 감독의 영화를 개봉관에서 만나볼 수 있는 동시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소년에서 남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이소룡의 영화를 비록 극장에서 즐기지 못했지만, 우리에겐 성룡이라는 형님을 모실 수 있었으며,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같은 우리 감독들의 세계적인 작품도 안방에서 즐길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장국영이라는 별을 갖을 수 있었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 픽사라는 영민한 스튜디오, 에반게리온이라는 걸작을 무려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사실 이걸 하나하나 말하자면 절대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현재에 많은 행복을 누리고 있다. 영화 팬들이라면 누구나 예전 영화들을 극장에서 볼 수 있었으면, 지금은 지긋한 나이의 배우들의 한창 때를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기 마련인데, 아마 이 다음 세대는 분명 '스타워즈의 그 유명한 테마 음악을 극장에서 들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히스 레저의 연기를 매번 극장에서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라는 부러움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는 분명 다음 세대가 충분히 부러워할만한 시대다.




음악은 또 어떤가. 개인적으로 존 레논과 동시대에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매우 자주 하곤 하지만, 아마도 이 다음 세대는 마이클 잭슨의 문워커를 TV를 통해 볼 수 있었다면, 그의 신보를 몇년마다 들어볼 수 있었다면, 내한 공연을 볼 수 있었더라면 하는 부러움, 아니 마치 꿈과도 같은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내겐 그리고 우리에겐 마이클 잭슨이라는 세기의 아티스트가 있었다. 아마도 이건 우리 세대에 가장 큰 축복일런지 모른다. 또한 U2, 라디오헤드, 뮤즈, 레드 핫 칠리 페퍼스, R.A.T.M 등 수 많은 밴드들은 물론 bjork, beck, sigur ros, 프린스 등 개성있고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뮤지션들의 신보를 흔치 않게 음반샾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멀리 해외로 나가지 않더라도 다음 세대가 부러워할 만한 자산들이 많은 세대였다. 한 앨범이 100만장 넘게 팔리던 상황을 목격한 마지막 세대였으며,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반을 사기 위해 동네 음반샾에 미리 가서 예약표를 발권받거나 발매일 음반샾 앞에 아침부터 길게 줄을 서본 마지막 세대였다. 또한 우리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레전드 아티스트의 결성부터 해체까지를 모두 확인했으며,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발하지 않는 댄스 음악을 만들었던 듀스를 TV음악 프로에서 만나볼 수 있었음은 물론, 윤종신이라는 사람을 '예능 늦둥이'가 아니라 애절한 발라드를 부르던 '가수'로서 갖을 수 있었다.  




그냥 우연히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내가 누린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의 시대와 현재 누리고 있는 시대 역시 누군가는 반드시 부러워할 만한 시대라는 것. 내가 과거의 시간들을 부러워 하는 것처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시절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시절을 더 치열하게 즐겨야 한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얼마전 홍상수 감독의 작품 '하하하'를 보았다. 이 영화는 보기 전 부터 예고편을 보고서는 확 끌리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극중 조문경(김상경)이 왕성옥(문소리)에게 건내었던 '전 좋은 것만 봅니다 (보려 합니다)' 라는 한 마디였다. 이 대사는 예고편에 등장한 또 하나의 명대사, '십니다'와 더불어 볼 때 절로 웃게 되는 한 마디 였는데, 영화를 볼 때부터 무언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이 대사는 결국, '우리 사람되기는 어려워도 괴물이 되진 말자' 라는 '생활의 발견'의 대사처럼, 보고나서 한참이나 뇌리를 맴도는 대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과연 '좋은 것만 봅니다'라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홍상수의 '하하하' 속 인물들을 보면 허무맹랑할 정도로 순수하고 정직한 편이다. 리뷰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홍상수 월드의 인물들은 마치 내가 너고, 너가 내가 된양 자신의 속 마음을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한다. 그 중 핵심의 대사는 역시 '좋은 것만 봅니다' 다. 누구는 좋은 것만 보고 싶지 않겠느냐만, 이걸 대놓고 서슴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리 흔한 일, 흔한 관계에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좋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쁜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영화를 보고 난 가르침에 따르자면, 이것조차 좋은 것만 보지 못한 부족함의 산물이다), 일반적인 경우는 이 나쁜 것 때문에 좋은 것에 대해 그 어떠한 자신도, 확신도 갖기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내가 '나는 앞으로 좋은 것만 보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고 해도, 이 말을 뱉기전에는 '과연 이 사람이 이 말을 곡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줄까' 혹은 '좋은 것만 보는 것은 좋지만, 굳이 내가 앞서서 주창하고 나서서 상처투성이가 되어야 할까'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극중 김상경이 저 대사를 읊었을 때 겉으로는 웃을 지언정, 속으로는 '저럴 수 있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새삼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현실은 어떤가 하니, 누군가가 '난 앞으로 좋은 것만 볼꺼에요'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래 너는 그래라'라고 믿지 못한다던지, 이런 걸 나쁜 쪽으로 이용하려 드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왠만한 용기없이는 이런 순수한 주장을 펼치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전 좋은 것만 봅니다'라는 주장에 조건으로는 반드시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홍상수 월드의 인물들에게서는 이런 조건이 성립한다. 그래서 모두들 주저 없이 나와 너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뒤끝을 남기지 않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하하하'를 보고 있으면 마냥 'hahaha' 웃기는 어렵다. 저럴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현실한탄만 하고 있다면 '하하하'를 보고 난 보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런 세계와 인물, 인물들의 관계는 그저 웃으라고 재미있으라고만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터. 그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다시 '좋은 것만 봅니다'로 돌아온다. 잘 생각해보자. 좋은 것만 보겠다던 극중 조문경에게는 '좋은 것만 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거의 없어보인다. 여기서 가능성을 엿보자면 누군가가 저렇게 두려움 없이 확신에 서서 이야기한다면 그 이야기에 한번 쯤은 귀를 기울여보게 된다. 그리고 '나도 한번 용기를 내어볼까?'하는 결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저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저도 좋은 것만 봅니다!'라고 확신에 차 바로 이야기할 수는 없어도, '저도 좋은 것만 보려구요'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정도는 형성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메시지 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겁에 질려 좋은 것만 보려는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면 결국 홍상수 월드와 같은 현실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두려움을 버리고 용기있게 '나는 좋은 것만 보려고 합니다. 당신도 함께 해요' 라고 얘기를 시작해야, 맘 속으론 그러고 싶었던 사람들도 하나씩 말을 꺼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홍상수의 '하하하'는 이런 세상에 던지는 용기의 북돋음인 것이다.

'자, 한번 봐봐. 이렇게 다들 천역덕스럽게 이야기해도 아무렇지 않잖아.'
'다 같이 좋은 것만 보는 거야. 이런 세상이 결코 판타지만은 아니라고'

라고 말이다.


2010.05.13 pm 6:37




영화 관련 글을 쓰고 읽다보면 드는 당연한 생각은, 영화는 어차피 받아들이는 각자의 몫이라는 점이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는 없는, 정말 당연한 일인데 가끔 영화평들을 읽고 있으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맞다, 틀리다'로 접근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평론가의 글들에서 이런 점을 많이 살펴볼 수 있는데 (일반 관객들의 평은 어차피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고, 스스로 확신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 평들을 보면 '이건 영화도 아니다' 수준으로 혹평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물론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자신의 소신대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후자의 경우 여지를 둘 필요는 있다고 생각된다. 만약 어떤 영화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A라는 사람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다. 그런데 B라는 사람은 돈이 아깝다, 시간을 버렸다 싶을 정도로 재미 없게 본 경우다. B는 이런 감정을 실어 여지를 전혀 두지 않는 퍽퍽한 글을 남겼다. A가 이 글을 보았다. A는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밖에는 없다. 몇몇은 자신의 영화를 과연 '제대로' 본 것인가에 대해 의문마저 갖게 된다.

그런데 과연 '제대로' 본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 '제대로' 보는 것이 존재는 할까?
영화에서 얻는 재미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감독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나름의 재미가 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또 다른 영화로 소화하는 방식도 재미있는 보기의 방식이다.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맞고 틀리는 것은 없다. 예전 류승완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나눴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영화는 프린트(필름)는 하나지만, 다 다른 영화를 본다는 것이 흥미로운 것 같다'라는 말. 비단 영화 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그것이 혼자의 힘으로 만들었을지언정 일방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텐데, 감독의 의도를 모두 알아채고 감독이 주려는 재미를 100% 즐긴다면 그것 만큼 좋은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 만의 이야기를 전개해도 즐겼으면 그걸로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본 이들에 대해서 '넌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영화는 정답이 없는 예술,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다 라는 것과 이런 영화를 가지고 누군가에게 옳고 그름을 강요하지 말자 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자신의 의견과 대비되는 의견을 접했을 때, '그럴 수도 있군요' '저는 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라는 정도로 그쳐도 좋을 것을, '영화를 도대체 제대로 본겁니까?' '이건 논할 가치도 없네요' 등의 숨막히는 말들로 받아칠 이유는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식으로 여지를 두고 글을 쓰면서 매번 작은 딜레마에 놓이곤 하는데, 이렇게 여지를 둔 글은 여지를 두지 않은 글보다 설득력이나 힘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이렇다'와 '이럴 수도 있다'의 차이인데, 가끔은 그냥 '이렇다'라고 죄다 바꿔도 되지 않을까 싶은 경우도 있다. 확실히 여지를 둔 글에게서는 글쓴이의 확신이 부족하게 느낄 수도 있으니, 이 정도를 잘 조절하는 것이 어쩌면 글 쓰기의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일 듯 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첨언하고 싶은건, 나는 영화를 보는데에 있어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영화로 만난 사람들과 비교를 해보아도 나는 대부분의 영화에 있어 무척이나 몰입을 잘하는 편이다. 영화는 일단 몰입하면 크게 실망할 일은 없다. 간혹 드라마를 평할 때 보면 오랫동안 정을 쌓았던 작품을 마지막 회 하나, 장면 하나 때문에 망쳤다며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오랜 기간 그 작품에 애정을 갖고 함께 했다면 '아쉽다' 정도이지 '보상해라'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 여튼 몰입 잘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나는 참 행복한 영화 관객이다.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지 못하고 실망하는 작품에게서도 주인공의 심리에 잘 빠져드니 말이다. 간혹 그래서 남들이 다 유치하다고 하는 작품에도 공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어떠랴. 영화는 어차피 개인이 즐기는 예술인데.


2010.03.31 pm 1:10





사실 극장 내 에티켓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아실테고, 수도 없이 반복되긴 했지만 마치 불법다운로드는 범죄라고 여기저기서 얘기해도 사그라들기는 커녕 오히려 불법이 더 조장되는 것처럼, 극장 내 에티켓 역시 알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영역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영화 팬들은 불편을 무릎쓰고라도 비교적 테러를 당할 확률이 낮은 조조 상영을(제 주변 분들 가운데는 가격 때문이 아니라 이 같은 이유로 조조를 관람하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찾는다던가 분위기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전용관을 찾는 것으로 우회하여 영화를 즐기게 되었던 것 같네요. 저는 워낙에 누구랑 시비걸고 싶어하지 않고 가능하면 참아보자라는 주의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그냥 참고 넘어가는 부류에 속하지만(그리고 위 같은 방법들도 자주 사용하구요), 어제는 오랜 만에 제대로 테러를(전 우리말 속에 숨어있는 전쟁 관련 단어들 사용을 정말 싫어하는 편인데, 이건 정말 테러라 아니 부를 수 없네요) 당했더니 도저히 어디든지 글로라도 풀지 않으면 병 날 것 같아서, 그냥 넋두리 해봅니다. 어제 제 옆에 앉았던 여성분들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듣고 고칠 사람들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말했겠죠 -_-;;


1. 일단 어제 본 영화는 박찬옥 감독의 <파주>였습니다. 영화는 참 좋았습니다. <질투는 나의 힘>보다 제 취향은 이쪽에 더 가깝더군요. 자세한 리뷰는 곧 포스팅 할 예정이구요.

2. <파주>는 분명 그리 친절한 영화는 아닙니다. 스토리의 진행 방식도 그렇고 그 안에 숨쉬는 캐릭터들의 이야기도 그렇구요.

3. 그런데 마치 홍보는 형부와 처제의 불륜을 다룬 '격정 멜로' 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이 설명 가운데는 맞는 말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그 '의미'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저 홍보방법이 낚았든지, 아니면 이선균, 서우라는 배우들이 낚은 것인지, 아니면 영등포 CGV라는 극장 자체가 낚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별로 본 적이 없는 분들이) 어제 극장에는 대부분이었습니다.

4. 영화 시작시간으로 알려진 정시보다 거의 10분 넘게 광고를 했음에도 5분 정도 늦게 들어오신 여자 두 분이 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미 앉으면서부터 걸걸한 입에서는 X가 포함되지 않은 말이 없을 정도로 술술 말들이 흘러 나옵니다. 얼핏 봐서는 이제 막 20살에 접어드신 분들 같았는데...왜 있잖아요, 욕을 하려는게 아니더라도 그냥 모든 말에 'X나'가 붙은 분들.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5. 앉자마자 영화의 모든 상황을 입밖으로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극중 이선균의 상대역 여자배우가 조금 이상한 행동을 하자 '미친x 왜 저래?' '헐' '재수없어' 등 극중 이선균 캐릭터에 순식간에 동화되었는지 영화 속에 주인공이 된냥 여자역에게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6.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저는 어려운 영화를 이해할 수 없으면 극장에 오지 마라 라는게 아니에요. 영화야 다 개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정답이 없는 예술이니 감독조차도 이것에 대해 뭐라 할 수는 없죠. 다만 그 태도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재미 없고 이해안될 수 있죠. 왜 그걸 재미있는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어가면서 불만을 겉으로 표시해야만 성에 차느냐 말입니다. 그렇게 꼭 '뭐야 이거, 스토리 완전 x같잖아' 라고 몇번씩 말씀해주셔야 하는지 말입니다. 영화가 끝나고나서 나가는 길에 같이 본 분과 '이선균 엉덩이 말곤 볼게 없네'라고 영화를 폄하해 주셔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하다보니 말투가 무슨 '여성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말투네요 -_-;;).

7. 두 분은 그렇게 계속 서로 간의 대화와 극중 인물과의 대화를 번갈아 나누시는 와중에도 한 손으론 열심히 핸드폰 문자를 주고 받으시더군요. 무슨 재미있는 문자가 왔는지 서로에게 보여주고 웃기도 합니다.

8.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제 옆자리에 앉은 분의 생각이 제게 들리는 초능력이 생긴 것 같았어요. 분명 속마음으로나 할 얘기들인데 제 귀에 다 들리더라구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런 초능력이 등장했던 영화들처럼 이 능력은 정말 없는게 훨 낫네요.

9. 사실 이 두 분만으로도 벅찬데, 이곳 저곳에서 여러 분들이 '나도 좀 주목해 달라'며 여기저기서 활약을 해주십니다. 어떤 아저씨는 중요한 업무를 통화로 해결하셨구요.

10. 좀 이해가 안갔던게 용산참사가 없었다면 모르지만, 근래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철거민들이 용역깡패들과 대치하면서 싸우는 장면 중에 용역이 고무줄 새총으로 돌을 쏘아대는 장면에서 몇몇 분들이 웃음을 터트리시 더라구요. 어디가 우스운 건지. 돌이 우습게 생겼던가요? 철거민이 몸개그라도 한걸 제가 놓친걸까요? (물론 이 와중에도 제 옆자리 분들은 '왜 그래?' '짜증나'를 연발하고 계십니다)

11. 영화가 끝나자 역시나 '뭐야 이거 스토리 x같잖아' '에이 xx, 집에가서 네이버 줄거리 봐야겠네'라고 하시며 커다란 팝콘통은 어지럽게 바닥에 둔채 그냥 쿨하게 자리를 떠나십니다. 저는 원래 어떤 영화든 엔딩 크래딧이 모두 끝날 때까지 관람하는데(보너스 장면이 있고 없고는 전혀 상관없이요), 어제는 몇몇 분들이 나가시면서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시더군요. 아마도 '왜 끝났는데 계속 앉아있지?' 였던거 같아요. 이상했겠죠. 이 장면에선 왠지 잘못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12. 자, 제발 영화를 보면서 속마음 좀 겉으로 말하지 맙시다. 속마음은 그냥 속으로만 담아두세요. 그리고 입에 욕을 붙이고 사는 분들은 욕하는 것이 챙피한 줄 좀 알았으면 좋겠구요(그걸 알면 미안해라도 했겠지만..에휴). 그리고 재미없으면 차라리 중간에 나가주세요. 왜 비싼 돈 주고 재미도 없고 불편한 영화를 욕을 해가며 앉아있는지 모르겠네요. 진짜 돈주고 내보내고 싶은 심정이더군요.

13. 어제의 마지막 분위기는 어땠냐면, 다들 '이 영화 뭐야, 완전 최악이잖아' (여기서 최악은 저만의 순화된 표현입니다) 하는 중간에 저만 혼자, '야, 이거 멋진데'하는 분위기였어요.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최고일 수도 있고, 또 최악일 수도 있죠. 이걸 굳이 말해야 되는 이유도 모르겠지만, 공공장소라는 것에 의미를 한 번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 외에 다른 사람도 있다는 사실말이죠.

14. 이거 넋두리를 하다보니 리뷰 쓸 때보다 글이 술술 써지는군요. 빛의 속도로 써내려오다보니 어느덧 14번. 확실히 요즘은 안전지대가 없는 것 같아요. 예술영화 전용관도 더이상 100%를 장담할 수 없구요. 여튼 영화 팬으로서 살아가기 점점 힘들어집니다. 좀 있으면 불법다운로드가 '공식적으로' 문제 없는 일이 될 것도 같고, 엔딩 크래딧 다보고 앉아있으면 바보 소리 들어도 싼 날들이 올 것만 같고, 극장 간다고 하면 '왜 불편하게 극장엘 가?'하는 날이 그리 머지 않은 때에 올 것만 같아 피곤함이 느껴집니다.

15. 그냥 넋두리 들어주신 분들 감사드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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