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새 해가 실감나지 않아 써보는 글
업무의 특성상 스케쥴을 짜야하는 일이 많아서 2014라는 숫자를 쓴 것이 이미 11월 부터 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언제부턴가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해가 바뀔 때마다 설레임보다는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일이 더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2014년의 시작은 참으로 실감이 나질 않는다. 보통 실감이 나질 않는다는 표현은 감격스러울 때 나오곤 하는데, 이번은 정말 문자 그대로 실감이 나질 않는 현실에 대한 표현이다. 그래서 뭘해볼까 하다가 2013년을 글로나마 간단하게 정리하고 2014년의 근 미래 정도만이라도 예상해보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2013년은 아마도 내가 직장인으로 데뷔한 이래 가장 바쁜 한 해였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그랬고, 물리적인 일의 양으로도 그랬다. 말이 나온 김에, TV에서 가수나 배우들이 데뷔 10주년 혹은 20주년을 기념하는 것을 보고는 나도 문득 직장인으로 데뷔한지 얼마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다가 10주년을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10주년을 놓쳤다기보다 데뷔라는 개념자체를 적용할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더 맞겠으나, 어쨋든 그래서 머지 않아 맞게 될 15주년에는 잊지 않고 기념하길 (기념할 일인지는 모르겠다만은) 무작정 바라기로 했다.
일단 직장인으로서의 2013년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참 힘들었다. 새롭게 구성을 달리 한 회사는 중요한 역할로서 시작부터 다시 해야했기에 부담도 일도 많았으며, 여기에 집중한 탓에 내가 본래 더 소중하게 생각한 다른 개인적인 것들을 상상 이상으로 많이 잃어야 했다. 그리고 이 중 대부분은 아직도 다 되찾기 못하기도 했다. 2013년을 시작할 땐 참 본격적인 마음으로 여러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길 예정이었고, 몇몇은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급변하는 회사의 사정 속에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 밖에는 없었다. 실제로 지난 해에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책 한 권을 내보려고 계획도 세웠고, 몇 몇 출판사와 얘기도 시작하는 단계였으나 중간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포기해야만 했고, 블로그를 통해 야심차게 연재하려고 했던 몇가지 프로젝트 들도 전혀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사실 2013년 연초에 세웠던 야심찬 연간 계획은 '글 쓰는 이'로서의 진일보였다. 하지만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직장인으로서의 진일보를 이룬 한 해가 되었다. 뭐 잃는 것도 얻는 것도 있었으니 다행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 쓰는 이로서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기회들도 있었다. 2012년에 이어 정말 좋아하는 영화들의 국내 블루레이 타이틀 다섯 작품에 내 글을 실을 수 있었다 (트리 오브 라이프, 러브레터, 늑대아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멜랑콜리아). 이건 나에게는 책을 낸 것 만큼이나 뿌듯하고 영광스러운 일 중 하나라서 이 것만으로도 참 의미있는 한 해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늑대아이' 같은 경우 수록된 글 외에도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서 더 의미있는 작품이었다.
블루레이 글 수록 외에 또 다른 의미있는 일이라면 역시 국내 발매 된 사운드트랙 앨범에 해설지를 쓸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2006년인가 7년 쯤에 bjork 앨범에 해설지를 거의 쓸 뻔 했다가 못 쓴 이후로 정말 오랜 만의 기회였는데, 고맙게도 워너뮤직을 통해 두 편의 OST앨범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나는 '늑대아이' 사운드트랙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포 미드나잇' 이었다. 두 편 모두 그 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을 만큼 절대적 선호도를 갖고 있던 영화라 음반 해설지 참여가 영광일 수 밖에는 없었는데, 내게는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영광되고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참고로 올 1월에 발매될 또 다른 사운드트랙 앨범의 해설지 원고도 지난 달 이미 넘긴 상태. 이 작품 역시 올 해의 영화 중 한 편으로 꼽았던 코엔 형제의 작품이라, 너무 참여 자체가 기쁘고 흥분되었던 사운드트랙이었다.
아, 그리고 하나 빼놓을 수 없었던 일은 박찬욱 감독님과 통화했던 일과 류승완 감독님과 가까워지게 된 그야말로 사건. 박감독님과 처음 통화할 때 두근 거려서 한 참이나 할말을 연습했던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잘하면 올해에도 뵐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그 때는 좀 덜 떨면서 준비한 얘기들을 해봐야겠다. 류승완 감독님과는 몇 해 전 인터뷰를 한 인연도 있었고, 올 해는 '베를린' 개봉 때와 이후 다른 일로 몇 번 뵙거나 연락드릴 일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단순히 일이나 인터뷰 만을 위한 만남이 아니라, 앞으로는 좀 더 친숙하게 가끔 연락드릴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 무척이나 행복한 사건이었다. 좋은 거 별로 티안내려고 했지만 정말 좋았던, 근데 티를 잘 안내려고 해서 그런지 실감도 잘 안 났던, 그런 사건이었다.
다시 직장인의 이야기로 돌아와, 작년 한 해 우리 회사는 참 롤러코스터를,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롤러코스터라기 보다는 일정한 상승곡선만을 그린 한 해를 보냈다. 난 참 많은 직원들을 부사수 혹은 팀원으로 맞이 했었으며, 중반 부터는 회사의 반이라고 할 수 있는 한 팀을 본격적으로 맡아 운영하게 되었는데, 내 마음대로 완전히 주도권을 가지고 팀을 이끌 수 있었던 기회와 미션이 주어졌던 터라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런 면에선 더 수월한 점도 많았다. 진짜 공개된 장소인 이 글에 다 쓸 수는 없지만,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만 했던 극도의 불안함 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 할 때에는 역대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던 수치의 초과 성과를 거두기까지 우여곡절도, 어려움도 참 많았다. 예전 회사 동료에게 이런 비슷한 얘기를 하며 했던 얘긴데, 이런 얘기는 마지막에 성공해야 결국 할 수 있는 얘기다. 즉, 어떤 회사나 어려움을 겪지 않는 회사는 없다. 하지만 그런 힘든 시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회사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한 회사들 뿐이다. 그래서 아직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며 안주하기엔 시기상조다.
이 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요 근래 몇 년간의 내 인생은 어쩌면 전혀 상반되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모두 다 정력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한 편으론 이중인격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직장인으로서의 내 삶은 그 누구보다 냉정하고 계산적이어야 하지만, 회사를 나서는 순간 내 삶은 그 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마인드로 돌아와 순진하리만큼 이상적인 생각과 프로젝트들을 꿈꾼다. 이렇게 두 가지를 모두 다 100% 이상으로 병행하는 삶은 2014년에도 계속될 듯 한데, 언제까지 가능할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점점 더 회사를 다니면서 그 외에 글 쓰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것이 힘이 든다. 잠을 덜자는 것 만으로는 버텨내기 힘든 순간들이 더 많아졌다. 더군다나 2014년에는 결혼도 해야하고 더 큰 대소사가 이를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2014년은 정반대로 하나씩 내려놓는 한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들은, 그것들을 내려놓고 나면 무엇이 남나 싶을 정도의 것들이기는 하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려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2014년의 이 블로그의 색깔이 아주 조금 달라질 지도 모르겠다. 이 글만 봐도 달라짐을 눈치챘을 수도 있는데,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고 주로 영화 이야기만 했던 것과는 달리,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나 생각들을 글로 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한 편으론 이젠 블로거로서 영향력에 대해 정말 신경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꼭 정리해서 써야하는 글 외에 그냥 해소차원에서의 글 쓰기가 더 필요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마 이 글처럼 두서없는 글이 더 잦아질 것 같다.
이렇게나 썼는데도 실감은 안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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