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 동 (Re-encounter, 2010)
상처를 인정하는 방식


민용근 감독의 영화 '혜화, 동'은 스물 셋 혜화 (유다인)의 지난 겨울 이야기 그리고 아직 겨울인 혜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등학생이었던 혜화와 한수는 서로 사랑했고 혜화는 아이를 갖게 된다. 하지만 아이를 낳을무렵 한수는 말도 없이 외국으로 떠나버리고, 혜화는 아이를 잃은 채 홀로 남겨지게 된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뒤 혜화는 동물병원에서 버려진 동물들을 구조하고 보살피는 일을 하던 중, 다시 나타난 한수에게 아이가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다시 한번 혜화의 삶은 크게 요동친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는 데에도 '다시 (Re-encounter)'를 여러 번 사용하게 된 것처럼, '혜화, 동'은 다시 겪게 되는 아니 겪어야만 하는 풀지 못한 미완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5년이 흐른 뒤 혜화의 모습은 다시 금 평온을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그냥 터지지 않은 상처일 뿐, 치료 후 아물지 않은 상처와는 다르다. 그냥 시간 속에 꾹꾹 눌러담아 두었던 과거의 일들은 5년이 지난 뒤 다시 나타난 한수로 인해 다시 쓰려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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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앉고 있는 혜화의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특별한 구분 없이 넘나드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과거의 장면과 현재의 장면이 영화적으로 별다른 장벽이나 구분없이 섞여 놓여있는데, 이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혜화의 과거의 상처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시간은 흘러갔지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혜화의 시간은 그대로임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전지적인 시점에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를 동일선상에서 두고 풀어가지만, 영화 속 혜화와 한수는 현재를 위해 과거로 계속 돌아가려고 한다. 혹은 치유되지 않은 과거는 무시한 채 미래로 나아가려고 한다. 한수는 혜화에게 미안한 마음과 혜화가 앉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해결하는 방식을 꺼내온다 (이 방식은 영화의 마지막 일종의 반전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 반전이 극적인 요소를 주기는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려는 정서와 반전의 연관선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혜화는 한수가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 자신의 상처를 다른 것들을 통해 잊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기 보다는 다른 것들로 그 빈자리를 채워가는 것이 치유된다고 믿었다. 자신의 아이의 빈자리는 일하는 동물병원 원장의 아이에게서 채우고, 한수의 빈자리는 동물병원 원장과의 관계에서 채워가고 있었고, 어린 시절 키웠던 개 '혜수'와 새끼들을 보내야만 했던 것과 더 나아가서는 이 모든 것을 보내야만 했던 빈자리를, 집을 잃고 상처받고 버려진 개들을 구조해 보살피는 것에서 채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혜화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는 듯 했던 존재들은 모두 혜화가 아닌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고, 이와 맞물려 한수가 나타나면서 혜화는 결국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대해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니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와 직면하려고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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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처음으로 잠시나마 직면하고서야 혜화는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혜화가 갖고 있는 상처는 치유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그 앞에 서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혜화는 고민 끝에 이 모든 것을 그냥 인정하는 것을 택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가능한 선택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에 있다. 혜화의 선택을 통해 그녀의 상처가 치유되거나 길었던 겨울이 끝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혜화는 그걸 알고서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한다. 사실 고민은 했지만 선택지가 없었던 선택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상처를 인정하는 방식'은 참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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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중 삽입되고 엔딩 크래딧에도 흐르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는 처음 들었을 때는 잘 어울리지 않는 선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보니 영화가 혜화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과 곡의 가사가 잘 맞아 떨어지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이 곡의 가사도 잘 보면 희망적이거나 하기보다는 안되는 것,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렇다고 담담히 인정하는 것에 가까우니까요.

2. 유다인 씨의 연기는 역시 참 좋았습니다. 처음 영화가 시작할 때 그녀의 얼굴은 그저 평범하게만 느껴졌는데, 시간이 흐를 수록 그 백지에 점점 무언가가 써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여러 클로즈업 장면에서 그 눈망울의 깊이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3. '혜화, 동'은 반려동물에 관한 생각도 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혜수의 딸로 여겨지는 그 강아지가 철거된 집에 홀연히 나타나는 그 장면의 컷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마치 '모노노케 히메'에서 시시가미가 등장할 때처럼 정적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확실히 동물의 눈빛이 주는 특별함이 잘 드러난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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