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섭은낭 (刺客聶隱娘 The Assassin, 2015)

내면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파도



코엔 형제가 포크 뮤지션을 주인공으로 한 음악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처럼, 허우 샤오시엔이 무협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영화일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신작 '자객 섭은낭 (刺客聶隱娘 The Assassin, 2015)'은 액션 중심의 무협 영화가 아닌 정서적으로 완벽한 무협 영화다. 당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암살자로 길러 진 섭은낭 (서기)은 더이상 배울 것이 없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자 스승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정혼자였던 전계안 (장첸)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은낭은 자객으로서는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췄지만 정반대로 누군가를 암살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갖는다. 허우 샤오시엔은 이 같이 자객으로서의 임무와 한 사람으로서의 양심 혹은 가치관 사이에서 흔들리는 섭은낭의 심리를 정제되고 고요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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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 섭은낭'은 기존 고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액션 위주의 액션 영화들과는 물론, 전체적인 영화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조금은 다른 영화다. 서사는 구구절절 설명하기 보다는 단편적인 장면들과 이미지를 통해 진행하고 있으며, 그 서사의 중심 역시 이야기보다는 은낭의 심리에 근거한다. 실제 촬영 시에도 배우들이 더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도록 일정 수준의 거리를 두고 촬영을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 인물들의 심리 역시 샅샅이 파헤치거나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다보니 조금은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조금만 집중한다면 겉으로 모두 드러나지 않는 인물들의 감정이 영화 곳곳에 묻어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객 섭은낭'은 무협 영화이지만 그 어떤 드라마 장르 보다도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인물들의 표정, 이를 만들어 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들을 단숨에 몰입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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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연의 풍광과 전계안이 머물고 있는 곳 내부의 화려한 이미지 등은 앞서 이야기한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겹쳐져 더 아름다운 미장센을 완성해 낸다. 반투명한 천과 천 사이로 보일 듯 말듯 존재하는 섭은낭의 모습은 자객으로서의 임무와 자신의 가치관 사이에서 내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은낭의 상태를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완벽하게 그려낸다. 내면의 소용돌이 치는 파도를 표현해 내는 방식에 있어서 허우 샤오시엔은 내적으로 폭발하는 이미지를 외부로 표현함에 있어서 더 정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 섭은낭의 이야기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파도가 휩쓸고 간 여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신라도 길을 떠나는 섭은낭의 뒷모습에서는 이런 심리를 대변하는 대사도 그 어떤 표정도 없지만, 그 내면의 파도가 잦아들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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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에 집중하다보면 어느 샌가 모든 장면에서 어딘가 섭은낭이 숨어 있지 않을까 찾게 되더군요 ㅎ

2. 소용돌이라는 제목을 쓰고나서 혹시나해서 찾아보니, 이전 이병헌, 전도연 주연의 '협녀, 칼의 기억'에 대해 내면의 소용돌이는 표현 못한 반쪽자리 무협영화라는 제목을 썼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자객 섭은낭'은 완벽한 영화가 아닐까 싶네요.

3. 영화가 끝나고 진행된 GV에서 감독님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는데, (아마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속편이 나올 수도 있겠더군요 ㅎ 츠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한 인물과 은낭이 신라를 거쳐 일본으로 떠나는 여정을 다룬.

4. 마지막은 씨네큐브에서 있었던 GV사진 몇 장.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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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니즈 조디악 (十二生肖 12, Chinese Zodiac Heads, 2012)

여전하면서도 애잔한 용형호제 3



개봉하면 무조건 보는 영화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팬심으로만 이야기하자면 단연 성룡 영화를 꼽을 수 있겠다. 즉, 반대로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영화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아도 무조건 보게 되는 영화라는 얘긴데, 최근 성룡 영화가 (아쉽지만) 그래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 '차이니즈 조디악'도 사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차이니즈 조디악'이라는 영어 제목으로 개봉한 이 작품은 '용형호제'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텐데, '용형호제' 시절에 보여주던 스펙터클과 아기자기한 액션 구성, 코미디까지 여전하다면 다른 한 편으로는 점점 약해져가는 성룡을 영화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기도 한 애잔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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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성룡 영화의 팬들이라면 다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겠지만 '차이니즈 조디악'은 최대한 그 예전의 느낌, '용형호제' 시리즈로서의 명맥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플롯과 배경 역시 거의 동일한데, 대 부분은 바로 그 동일함 혹은 그리움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일 터이니 이러한 점에 아쉬움은 없는 편이다. 그런데 '차이니즈 조디악'이 '용형호제'와 크게 달라진 점들이 있는데 바로 성룡 이라는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의 변화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예전에 '취권'같이 술먹고 싸우는 영화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보고 배울 텐데 말이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인터뷰 말고도 성룡은 전 세계의 형님으로 불릴 만큼 자선사업과 기부 등 좋은 일에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고 있다. 즉, 배우로서의 마인드 자체도 이러한 마인드를 기반으로 조금씩 변화해 왔다는 얘기다. 그런 마인드의 변화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이 작품 '차이니즈 조디악'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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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았으면 대형 범죄조직 등에 맞서서 유물을 얻기 위해 싸우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그리는 것에만 매진했을 테지만, 현재의 성룡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런 전 세계의 유물들이 암거래 시장, 경매 시장의 영향 때문에 본국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영화의 중반까지는 예전 '용형호제' 시리즈와 거의 동일하게 진행되지만 후반부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성룡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자 다를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적어도 '차이니즈 조디악'은 이러한 메시지와 재미의 측면을 분리하고 있어서 차라리 괜찮은 작품이었던 것 같다. 만약 메시지가 전반부 부터 강렬한 작품이었다면 아마 예전의 '용형호제'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은 팬들에게는 너무 무거운 작품이 되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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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차이니즈 조디악'으로 느껴지는 성룡의 변화라면, 세간에서 얘기하는 '늙었다' '이젠 성룡도...' 등등의 평가가 아닌 본인 스스로가 어느 정도 '성룡 영화'를 계속 한 편 한 편 이어간다는 것에 쉽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는 듯한 점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 기존처럼 NG장면들이 이어지는데 이 장면들이 지나가고 난 뒤 삽입곡의 내레이션 형태로 성룡의 음성이 들려온다. 액션, 스턴트 장면들을 촬영할 때 마다 두렵다. 체력적으로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성룡 영화를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힘을 낸다. 라는 식의 내레이션이 두 번에 나뉘어 흐르는데, 이 장면에서 팬으로서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룡 영화'라는 장르를 이어가기 위한 고통이 그대로 묻어나는 동시에, 스스로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 팬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함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애잔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더 찡했던 다른 이유, 다른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등장한 그의 실제 부인의 출연 장면이었다. 정말 잠깐 출연하지만 마치 이 장면은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실제 성룡의 인생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찡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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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많았고 예전 홍콩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썰렁한 유머나 과도한 몸짓, 캐릭터 등도 여전했지만 그래도 '성룡 영화'의 신작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 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앞으로도 또 다른 '성룡 영화'로 만나뵙길 바라며.



1. 일반 관객들에게 추천하기는 애매하지만 성룡 형님의 팬이라면 꼭 봐야 할 작품일 것 같네요.

2. 유승준의 출연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더 안습인건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가 선글라스를 벗기 전까지 아무도 몰라봤다는 거죠. 여튼 이 작품에서는 카리스마도 없이 완전히 코믹 캐릭터로 등장하는 터라 더 아쉽더군요.

3. 서기도 깜짝 까메오로 등장합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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