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타카의 레드필]

그래도 또 몬타우크행 기차를 탈거야



찰리 카우프만이 쓰고,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이 개봉 10주년을 맞아 다시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인생의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은 그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었는데, 또 다시 보게 된 이 놀라운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 혹은 새로운 영화가 되어 있기 보다는 오히려 맨 처음 보았던 10년 전의 그 영화처럼 두근거림 가득한 영화가 되어 있었다.


한창 씨네필들 사이에서 이 영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 그랬던 것처럼 찰리 카우프만이 설계한 이 기억의 퍼즐 맞추기에 관한 것 때문이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인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결론적인 것에서부터, 그 타임라인의 순서 맞추기에 있어서 어떤 것이 더 먼저인지에 대한 담론은 이런 장르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연구하고픈 흥미요소가 충분했었다. 나도 한 때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따져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분명 정답에 대해서 까지 분명히 확인했음에도 그 기억은 시간이 갈 수록 흐려졌다. 보통 반복 관람을 하는 경우 이런 팩트에 관한 것은 더 깊이 각인되기 마련인데, '이터널 선샤인'은 정반대로 보면 볼 수록 그 기억만은 점점 지워져 가는 듯 했다.


그리고 또 다시 보게 된 '이터널 선샤인'은 이제는 무엇이 먼저 일어난 일인지, 엔딩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에만 빠져들고 말았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나누는 모든 대화들은 그 시간 순서와는 별개로 하나하나 움찔움찔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연애를 오래 한 커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텐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다투거나 혹은 한 마디만 더 하면 되었을 것을 하지 못해 후회할 일을 만들거나 하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에서는 그 열정과 냉정이 모두 느껴져 몹시 치명적이었다. 만약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열정과 냉정의 대화나 상황이 한 100가지 쯤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처음엔 한 2~30개 정도에 공감했었다면 지금은 한 7~80개 정도를 공감하게 되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이미 수 없이 반복하고 외우다시피 한 대사들이었는데, 그 변함 없는 대화들이 내가 그간 겪은 시간들과 내가 연인과 나눈 대화들로 인해 더 깊이 있는 대사들이 되어 있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얼핏보면 후회에 관해 인정하는 수동적인 이야기처럼 보인다. 어차피 또 그럴 꺼니까 그냥 인정하자 라는 약간의 자조적인 느낌이 드는데, 사실은 정반대로 또 후회할 걸 알면서도 그래도 또 사랑할 거라는 더 저극적이고 열정적인 이야기라는 걸 오늘 다시 보고 알 수 있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만나도 또 후회할 일이 발생할 거고, 어쩌면 또 다시 서로를 너무 힘겨워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길 바랄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느꼈던 감정은 '다시 반복된다해도 뭐 어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시 만나보고 싶어' 정도의 희망적 느낌이었다면, 이번에 본 '이터널 선샤인'은 그보다는 훨씬 더 강하게 '다시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난 너를 꼭 다시 만날거야'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즉, '다시 만나게 되면 이번엔 분명 다를 꺼야'가 아니라 '또 반복을 피할 수 없더라도 난 너를 선택할거야'에 가까운 더 큰 범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라는 이야기보다도 더 강력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난 후회할거야. 그래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아'

'난 그래도 또 몬타우크행 기차를 탈거야'





[아쉬타카의 레드필]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아쉬타카의 레드필]
인생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개봉 10주년을 맞아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이 국내 개봉 10주년을 기념하여 오는 11월 5일 재개봉을 한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면 자연스럽게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게 되는데, 내 대답은 그 때 그 때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항상 빠지지 않았던 영화 한 편이 바로 '이터널 선샤인' 이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셸 공드리라는 아티스트 때문이었는데, 영화 감독이기 이전에 bjork, massive attack, beck 등의 뮤지션의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워낙 유명했었고 특히나 당시 이 뮤지션들에 아주 깊게 빠져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드리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는데 그가 연출한 영화라고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건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10주년을 기념하여 재개봉하는 영화에 대한 것이다. 일단 이 영화가 벌써 10년이 되었다니 놀랍기만 했다. 요근래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자주 한국영화 10주년 기념 상영회 기획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때 마다 드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와, 벌써 10년이 되었다니...'


누군가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떤 영화를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보게 되면 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 비디오 테입으로 영화를 소장하던 시절에 비해 블루레이나 특히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예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기회가 잦아진 요즘은 이러한 경험을 더 자주하게 되곤 한다. 근 시일내에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경우, 극장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장면이나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보게 되는 영화 속에서는 분명히 여러 번 본 장면에서 전혀 새로운 감정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이러한 경험을 가장 크게 했던 작품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2000)'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였는데, 이 영화를 처음 볼 땐 주인공 빌리에 공감하며 영화를 따라갔었지만 한 참 뒤에 다시 보게 된 영화는 빌리가 아닌 빌리 아버지의 행동에 더 깊게 공감, 아니 공감까지는 못 되더라도 처음 볼 땐 전혀 보이지 않았던 빌리의 아버지의 현실과 가치관의 대립을 통한 갈등이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전까지는 블로그에 영화 글을 쓰면서 별점을 통해 나름의 평점을 주고 있었으나 이 이후 부터는 영화에 점수를 준다는 것이 예술 작품에 점수를 매길 수 없다는 의미 이전에, 지금의 점수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최종적 판단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의미 없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별점 주기를 지금까지 하지 않고 있고, 이 생각은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듯 하다.


이렇듯 영화라는 매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시간을 두고 보게 되거나, 그 시간 속에 개인이 어떤 삶을 겪었는 지에 따라 이미 본 영화를 통해서도 전혀 다른 감정과 순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어떤 영화의 몇 주년, 몇 10주년 기념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그저 '와, 이 영화가 벌써 이렇게 오래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면, 근래에는 '그렇다면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보면 또 어떤 영화일까?'라는 호기심이 더 발동한다. 거의 처음 영화를 보게 될 때의 버금가는 설레임이다.


내 방에는 이미 '이터널 선샤인' DVD와 블루레이가 모두 존재하지만 스크린에서 다시 볼 기회를 절대 놓칠 수는 없을 것이다.

찰리 카우프만이 설계하고 미셸 공드리가 표현한 '이터널 선샤인'은 또 어떤 영화가 되어 있을까.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는 또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아쉬타카의 레드필]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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