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IMAX 3D, 2012)
믿음을 말하는 거대한 이야기
연초부터 정말 흥미로운 작품을 보았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는 복합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의 두 가지 스타일은 각각 정반대의 경우인데, 하나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 분명해서 이를 영화가 이끄는대로 끝까지 따라간 뒤 영화가 맺은 마지막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선택하면 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영화는 적게는 두 가지의 길을 많게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도록 설계 되어 있어서 영화 스스로는 답을 하지 않은 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경우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가 흥미로운 것은 보는 이에 따라 이 두 가지가 모든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꼭 보는 이에 따라서가 아니라 같은 사람에게서도, 곱씹어 보기에 따라서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정반대의 경우로도 생각해볼 수 있고, 반대로 열려있다고 여긴 지점이 너무도 분명한 주장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넓게 보았을 때 '믿음'에 관한 영화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 Fox 2000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이야기는 영화 후반부에 파이가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두 가지 이야기 중 무엇이 진실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진실인가 라는 것보다는 둘 중 하나 혹은 모두가 다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우리가 영화 내내 공감하고 따라왔던 파이가 들려준 리차드 파커와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일본 선박회사 사람들에게 들려준 참혹한 이야기 역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내 생각은 불분명 했었다. 파이가 영화 내내 들려준 이야기에 흠뻑 빠져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고, 마지막 파이가 일본 선박 회사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다시 이야기를 들려 줄 땐 '아!'하며 진실이 무엇인지 반대로 의심하지 않게 되었었다. 하지만 극장을 나오며 다시 곱씹어 본 영화는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가를 넘어서서, 내가 더 믿고 싶은 것은 어느 쪽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영화가 궁극적으로 묻고 싶었던 바로 그 부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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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단순하게 실제 참혹했던 일을 이런 판타지로 승화(?)시킨 파이의 이야기에 목적성이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이야기(편의상)에서 내가 파이였다면 이런 오인 혹은 회피의 과정 없이 남은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여기에 대입해 인간이란 무엇이든 믿는 바 대로 자신을 컨트롤 혹은 속일 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에 다다랐는데, 좀 더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이런 방식으로의 회피나 왜곡을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이르렀다. 만약 이 이야기를 근거로 파이에게 일어났던 실제의 일들을 유추해 본다면 (식인섬을 비롯) 파이가 처해던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 가에 대해 쉽게 답하기가 어려웠다. 즉, 리차드 파커는 사실상 파이의 또 다른 자아가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를 유체이탈 화법을 통해 3인칭 시점으로 본다면 리차드 파커를 탓하기는 커녕 안쓰러움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리차드 파커를 타자로 인정했을 때의 얘기지, 이것이 파이 본인의 이야기라면 답변은 달라질 수 밖에는 없다.
사실 여기서 리차드 파커의 이야기가 사실 파이 본인의 이야기였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파이가 스스로 리차드 파커로 타자화 하여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또 다른 진실의 가능성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파이 스스로가 작가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신의 존재를 믿게 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의도한 것 자체가 비판적인 측면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 Fox 2000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그렇다보니 '라이프 오브 파이'가 영화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게 되었다. 모든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얘기처럼 이 작품 역시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영화라는 것은 2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감독이 철저히 주도권을 쥐고 관객을 믿게 만들거나 오해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즉, 어떤 영화라도 '만들어 졌다'라는 태생적 요소를 부정할 수 없다는 얘기인데, 그런 측면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의 거의 대부분은 특히 더 가짜의 것들로 채워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믿음에 관한 영화임에도, 아니 그래서 인지 몰라도 이 영화의 대부분은 가짜로 '만들어 진' 것들이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물론 대부분 CG로 만들어졌고, 바다도, 하늘도, 대부분의 배경들도 CG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만들어진 것들이 겹겹으로 쌓여 복합적인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영화다. 이 허구로 쌓인 겹겹의 구성이 본래의 진실을 더 강하게 만들고자 함인지, 반대로 본래의 진실 혹은 거짓마저 강하게 부정하려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라기 보다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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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는 매우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믿겠습니까?'라고.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겠다 라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결론을 내려보자면 지금은 답할 수 없다 정도일 것 같다. 다시 말해 이 대답은 대답을 하는 시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그런데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내 마음 한 켠에서는 간절히 믿고 싶어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필요 없이 장황해질 것만 같은데, 어찌되었든 무언가를 아무 조건 없이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사실'인 것 같다. 그것이 맹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말이다.
1. 아이맥스 3D로 보았는데, 이 영화는 '이야기' 만큼이나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아이맥스 3D관람을 추천하고 싶어요. 이 영화가 믿음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방법 중에는 관객을 압도하려는 시각적 의도가 분명히 있거든요.
2. 이안 감독의 스펙트럼은 진짜 놀라운 것 같아요. 작품의 호불호를 떠나서 '헐크' '색,계' '라이프 오브 파이' '센스 앤 센서빌리티' '와호장룡'이 같은 감독의 필모그래피라고 믿기는 힘들죠. 이것도 믿음의 문제인가요 ㅎ
3. '라이프 오브 파이'는 좋아하는 영화인 동시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네요. 다시 보고 싶어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Fox 2000 Pictures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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