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멈추는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2008)
인간은 극한에 몰려야만 말을 듣는다

키에누 리브스 주연의 <지구가 멈추는 날>은 애초부터 기대반 걱정반이 동반되었던 영화였습니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1951년 동명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라는 것, 키에누 리브스와 제니퍼 코넬리 그리고 윌 스미스의 아들로 더 유명한
제이든 스미스가 출연한다는 것 정도가 이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였죠. 아무리 사전 정보를 피해다니더라도 이 영화가
이른바 'SF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홍보된 것만은 피할 수 없었는데, 일단은 관객들의 기대를 한참이나 부풀려 놓은
홍보자체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결국 관객들은 낚였지만, 많은 관객들이 어쨋든 보게 되었으니 성공한 홍보라고
해야할까요;). <매트릭스>이후 국내 관객들은 키에누 리브스가 출연한다고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트릭스>를
동일선상에 두고 비교하곤 했는데, 더군다나 SF 블록버스터라고 광고했으니 이 같은 기대가 더 커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기 이전에 워낙에 악평(최악이다 정도의)들을 많이 접하고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한 터라,
기대치를 본래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낮추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악까지는 아니다 라는 느낌이었는데,
만약 이 영화가 12월 꼭 봐야할 블록버스터로 홍보되지 않고, 몇몇 소수가 입소문을 내게 된 영화였다면 지금같은
최악의 평가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오히려 돈을 제법 많이 쓴 B무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매우' 관대한
생각도 해보게 되구요. 하지만 어쨋든 전체적으로 영화가 아쉬운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 합니다.



(아래 단락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으신 분들께서는 맨 아래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인간들이 망쳐놓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외계인이 직접 지구를 방문하여 인간들을
멸종시키는 것으로 지구를 지키려하는데, 이 미션을 수행하러온 외계인 '클라투'(키에누 리브스)가 인간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그들의 선한 본성을 엿보고 결국에는 한 번더 인간들을 믿어보기로 마음먹고 떠난다는 이야기죠.

사실 이거 자체가 그리 나쁜 시놉시스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키고 어떻게 마무리하고,
그 결말을 관객들에게 러닝 타임 내내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지구가 멈추는 날>은 밋밋하고
갑작스런 전개 구조와 더불어 결국 아무것도 설득하지 못하고 허무하게만 느껴지는 결말 탓에 아쉬운 영화가 되어버린 듯
합니다. 이 영화가 기존에 외계인의 습격이나 공격들로 인해 인류 최후의 위기를 맞는 영화들에 비해 조금 더 아쉬운 점은,
기본적으로는 이런 영화의 클리셰들을 답습하고 있지만, 답습하려면 다 했어야 했는데 그 중간중간 과정들을 상당히 빼먹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중간중간 과정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외계인을 비롯한 공포요소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까지의 공포, 즉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 인간들이 느끼는 긴장감과 공포를 제대로 표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며,
마지막으로 치닫는 순간에 대한 상실감이나 허탈함, 슬픔 등을 표현할 생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뭐 이런 영화들에선 흔히 등장하는 장면들인데,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숭고한 마지막 장면이라던가, 거대한 힘이나
재앙들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다 사라져버리는 인파의 모습, 그리고 결국 그 마지막 순간에 달했을 때 극적으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게끔 하는 극적 감동 요소가 이 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더군요. 물론 이런 장면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면 쉽게 말해 '전형적'인 영화가 되었겠지만, 이런 장면들이 결국 하나도 없었던 이 영화는 '전형적'인
영화보다도 심심한 영화로 남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게 전형적인 영화 한 편 만드는 것도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라니깐요.
물론 가장 좋은 건 전형적인 이야기를 가지고도 진한 감동을 절로 일으키는 영화일거구요.




처음 인류의 위험을 감지한 정부에서는 이 위험에 핵을 쥐고 있는 '클라투'에게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접근하는데,
1951년 작인 원작을 보진 않았지만, 그 때나 가능할 법한 무대포식(혹은 너무 순수한) 대화방식이라 적잖이 놀라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육체는 인간의 것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별다른 안전장치나 보호장치도 없이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한다는 자가 대놓고 심문하는 장면이나, 그를 지킨다는 것이 겨우 예닐곱명의 경호원이 문 밖에 서 있는 것
정도라는 점들은, 이 영화가 과연 2008년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만약 이 영화가 완전한
판타지 영화였다거나 아니면 원작처럼 1951년에 만들어진 영화였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일 수 있겠지만,
이미 최첨단 시스템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관객들에 눈에는 너무도 허술하고 안이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더군요.

정부 관료들의 모습도 초반에는 매우 전형적이었는데, 케시 베이츠가 연기한 이 정부 요인 캐릭터는 후반부에 가서는
갑자기 헬렌(제니퍼 코넬리)의 말을 새겨듣고는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서는 공격하지 말것을 요청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도 너무 갑작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으나 한발 물러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주제가 결국에는 '인간은 극한에 몰려야만
말을 듣는다'임을 감안했을 때, 극한에 몰린 케시 베이츠가 그제서야 말을 듣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케시 베이츠가 맡은 국방부 장관과 클라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한 가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케시 베이츠가 '나에게 얘기하면 된다' '내가 대표다'라고 얘기했을 때 클라투가 '네가 전 인류를 대표 하는가?'라는 식으로
캐묻는 장면이었습니다. 헐리웃 블록버스터에서는 대부분 모든 인류의 짐과 해결을 미군 혹은 미정부가 지는 것이 보통인데,
너무 당연하지만 이 한마디로 미정부 관료를 당황시키는 장면이 나쁘지 않더군요.




결국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지구에 온 클라투가 헬렌과 아들에게서 선한 모습을 깨닫고 이를 막기로 하는데,
아무리 그가 인간이 아니고 터미네이터에 가까운 외계인이라지만, 과연 러닝 타임 내내 이 두 모자가 보여준 모습들이
그 엄청난 계획을 포기하고 인류를 구원할 만한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남습니다. 특히 제이든 스미스가 연기한
제이콥 캐릭터는 <우주전쟁>의 톰 크루즈 아들 역할 만큼이나 짜증나는 캐릭터로 남기에 충분한 역량을 펼쳤는데,
<우주전쟁>의 경우는 그나마 아들 캐릭터가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갔지만, 제이콥의 경우는 막판에 갑자기 착해지는데
아무리 애라지만 설득력이 부족한 전개였습니다. 이를 보고 '그래, 인간들을 더 믿어보자'라고 클라투가 생각하게
되었다는 설정 때문에 이 전개가 전체적으로 아쉬운 것이지요.

그리고 제작진이 생각하기에도 <지구가 멈추는 날>이라는 제목에 어울릴 만한 장면이 없다고 생각되었는지,
막판에 가서 갑자기 멈춘 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건 '지구가 멈추는 날'이라기 보다는 '시계가 멈추는 날'로
보였습니다. 아무리 뻔하고 권선징악 적인 줄거리라도 러닝 타임 내내 관객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그 만한 좋은 영화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지구가 멈추는 날>은 이 설득 과정에 실패했기 때문에 많은 일반 관객들에게 '낚였다'라는
느낌만 전해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키에누 리브스와 클라투 캐릭터의 싱크로율이었습니다. 스티븐 시걸에 버금갈 만한
모두 비슷비슷한 표정 연기로 유명한 키에누 리브스는 이 영화에서 작정하고 무표정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번 영화 만큼은 그의 이런 표정연기가 득이 되지 않았나 싶군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양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멋지기도
하지만 왜 이렇게 '상조회사'분위기가 나던지, 끝끝내 집중이 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ㅎ (더군다나 내용이 내용인지라
상조회사 직원으로 지구를 찾은 외계인이라는 설정과 딱 맞아 떨어지기도 했구요).

제니퍼 코넬리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캐릭터도 그렇고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키에누 리브스랑 제니퍼 코넬리 나온다고 해서 보게 된 영화였는데, 두 배우 모두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이든 스미스는 <행복을 찾아서>같은 경우는 아빠랑 같이 출연해서인지 정말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주었으나,
이 영화에서는 약간 갸우뚱해지네요. 갸우뚱해지는 이유는 캐릭터에 대한 짜증으로 인해 별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제이든 스미스의 연기가 짜증이라 별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가 저 조차도 불분명 하거든요 ---;;
연기는 정말 잘했는데 캐릭터 때문에 짜증났던 경우는 <미스트>에 마샤 게이 하든을 들 수 있겠네요 ^^;



1. 본문에도 있지만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키에누 리브스의 모습에서 자꾸 상조회사 직원이 떠올랐습니다.

2. 거대 로봇(?)인 '고트'가 정부 시설에 잡혀있던 장면에서는 '에반게리온'이 연상되더군요. 잡혀 있는 모습이나
    이를 반대편에 앉아 인간들이 보고 있는 구도나.

3. <프리즌 브레이크>의 '티백', 로버트 네퍼가 제법 비중있는 캐릭터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트랜스포터 3>에도
   출연하고 있는데 그의 스크린속 활약이 아직은 어색하기만 하군요;

4. 용산 CGV에서 아이맥스로 관람하였는데, 아이맥스 만의 장점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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