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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콜 (A Monster Calls, 2016)

누구도 해주지 못했던 위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을 넘나들며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여러 가지의 은유를 통해 전달되곤 한다. 그것은 직접적인 방식을 택할 때도, 간접적인 방식을 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장르적으로 보았을 때 현실에 더 가까운 드라마도 그렇고, 비현실적인 것들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도 그 이야기 속에는 많은 숨겨진 의미와 목적들이 있기 마련이다. '오퍼나지 - 비밀의 계단 (The Orphanage, 2007)'과 '더 임파서블 (The Impossible, 2012)'을 연출했던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신작 '몬스터 콜 (A Monster Calls, 2016)'은 바로 그 '이야기 (storytelling)'관한 영화다. 병으로 고통받는 엄마를 지켜봐야만 하는 어린 소년 코너에게, 어느 날 밤 나타난 몬스터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말한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를 다 전하고 나면 네 번째에는 코너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는 말도 반복한다. 코너가 처한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것만 같았던 이 세 가지 이야기는 결국 네 번째 코너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위한 설득과 배려의 과정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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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이혼, 가정의 불화, 가난으로 인한 고통, 친구들로부터의 따돌림과 폭력 등 어린 주인공이 어떤 결핍이나 상실로 인해 고통받고 혼란을 겪는 과정 속에서 꿈이나 환상을 통해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는 경험을 그린 이야기들은 많다. 대부분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앞서 언급했던 그 결핍의 대상들이 환상 속에서 겪는 모험을 통해 극적으로 해결되거나 극복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으로 연결되곤 한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특히 그 대상이 아직 어린 나이의 소년이라 했을 때는 더욱,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앞으로의 삶을 위해 그것이 설령 영화적이고 판타지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최대한의 설득력 있는 내러티브를 통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도 그 의도의 선함은 의심하지 않지만 과연 더 나은 방식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을까 하는 조금의 아쉬움이 남곤 했는데, 이 영화 '몬스터 콜'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 성숙한 어른의 배려와 고민, 노력이 엿보이는 이야기였다. 한바탕의 모험을 통해 순간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에 못내 죄책감을 느낀 어른이 진심으로 고민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놓은 결론이랄까. 설령 이 영화의 방식이 와 닿지 않았을지언정 그 고민의 깊이 만은 공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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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찰리 카우프만의 야심작 '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 2008)'을 보고 나서 그 심연의 심연을 거듭하는 카우프만의 욕심을 넘어선 도전적 고민의 결과물에 평소 알고는 있지만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던 마음속을 들켜버린 듯한 부끄러움과 공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몬스터 콜' 역시 그랬다. 솔직히 코너가 벼랑 끝에서 뱉어버린 속마음은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님 잠깐의 감정이나 고민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고민이나 경험을 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아무도 모르고 상관도 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그 고민의 지점이, 영화의 대사로 상황으로 꺼내진 순간 느꼈던 정적은 다른 작품들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경지였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그 생각을 말하거나 심지어 혼잣말로도 내뱉어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든 사실 만으로도 혼자 죄의식을 느끼고 괴롭게 만드는 일들 말이다. 흔히 '양심의 가책'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정확히 양심의 가책과는 조금 다른 괴로움이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나 생각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방향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데, 이에 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을 때 느끼게 되는 나 혼자만의 괴로움은 결코 별 것 아닌 걸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고민은 특히 결핍이나 상실에서 오는 고통의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거나 또는 너무 오래 지속되어 역시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까지 이르렀을 때 더 심해지게 되는데, 여기까지 버텨냈다는 건 다시 말해 그만큼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미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고민은 원인이 된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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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누군가에겐 아무 일도 아닌 순간의 포기 혹은 그냥 스쳐가는 생각이, 어떤 이에겐 마음속에서 일지라도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아 괴로운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냥 어떤 식으로든 끝나 버렸으면. 내 잘못도 아닌데 더는 못할 것 같아, 그냥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끝나버리면 차라리 좋겠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더 괴롭히고 자책하는 이에게, '그건 네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그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에 누구도 섣불리 위로하려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깊은 고민 없는 위로는 말 그대로 말뿐인 위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몬스터 콜'의 클라이맥스에서 터져 나온 코너의 진심과 그 진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더 큰 배려로 감싸 안은 가족과 몬스터 (몬스터를 가족과 별개로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의 위로는, 지금까지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진심 어린 위로였다. 


살다 보면 수많은 위로와 충고를 겪게 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누구나 다 좋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야'라는 말은 결론적으로 그렇다는 걸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말 그대로의 의미가 진심으로 느껴져 위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다시 말해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도 어떤 과정과 배려를 담아 전했는가에 따라 이전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내게 있어 이 영화 '몬스터 콜'은 그동안 내게 누구도 쉽게 해주지 못했던 위로를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다. 주절이 글이 길어졌지만 이 영화는 단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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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는 영화' 

'몬스터 콜'은 그렇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내 안에 들어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고민을 나 스스로 꺼내 놓게 만들고 그것만으로도 위로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영화였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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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A Taxi Driver, 2017)
목격자로서 정의롭게 기록하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항상 위험함이 존재한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흥미를 자극하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까운 과거의 경우, 또 그 역사적 사실의 피해자가 존재하는 경우는 섣불리 접근해서는 안될 정도로 앞서 언급한 장점에 비해 위험성의 부담이 더 큰 장르가 바로 과거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측면에서 장훈 감독의 신작 '택시운전사'는 아직 그리 오래되지 않은 80년 광주 5.18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아주 위험한 영화다. 


5.18 광주를 다룬 영화는 상업영화 가운데도 이미 여러 편이 있었는데 '화려한 휴가'처럼 제대로 된 방향성을 잡지 못해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영화도 있었고, '26년'처럼 많은 기대를 모은 것에 비해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아쉬운 평가를 받았던 영화도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고 가장 효과적인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김현석 감독의 '스카우트 (Scout, 2007)'를 주저 없이 꼽을 수 있겠다. 


당시 한창 코미디 영화로 주가를 올리던 임창정 주연의 영화로 코믹한 느낌을 강조한 포스터와 홍보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 영화는 놀랍게도 1980년 광주의 공기를 가장 잘 표현해 낸, 특히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간접적인 방식을 택하면서도 5.18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가장 올바름을 보여준 영화였다.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섣불리 피해 당사자의 입장으로 참혹한 역사의 중심에 서서 어설픈 공감대를 자랑하듯 전시하지 않고, 스스로 최대한 한 발 물러섬으로써 광주를 바라보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스카우트는 광주 얘기가 나올 때마다 추천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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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는 '스카우트'에서 조심스럽게 한 발 더 접근한 영화다. 영화는 이번에도 제삼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좀 더 당시의 현실을 전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한 발 내딛는 것을 선택한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잘 알려졌다시피 실제 존재했던 인물들에게 아주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당시 완전히 통제되었던 언론 탓에 광주의 참혹한 현실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토마스 크레취만 분)는 한 택시운전사의 도움으로 광주에서 취재를 할 수 있었고, 영화 '택시운전사'는 이 과정을 중심으로 1980년 5월 광주를 바라본다. 즉, 서울 택시를 몰던 소시민으로 우연히 광주에 오게 된 김만섭 (송강호 분)과 독일 기자 피터의 목격자적 입장이 이 영화의 시선이자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많은 재난 영화 혹은 특수 상황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이 이런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커다란 재난 혹은 사건과는 전혀 무관했던 평범한 인물이 우연히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관객들에게도 공감대를 유도하는 방식 말이다. 이런 구조는 또한 대부분 평범했던 인물이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면서 문제의 중심에 도달, 해결하는 이야기로 귀결되곤 하는데, 일반적인 액션, 재난 영화에서는 오락적인 측면으로 쉽게 수용되는 부분이지만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주저해야만 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택시운전사'는 분명히 '스카우트'와 비교해서는 물론이고 이 한 편만 두고 보아도 제삼자가 역사의 중심에 더 많이 접근해 있는 영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이런 실수를 범했던 다른 역사 배경 영화들에 비해 좋았던 건 접근에 주저함이 보일 정도로 조심스럽고, 최대한 제삼자이자 목격자임을 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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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섭이 피터의 탈출을 위해 벌이는 자동차 추격 장면이나 그 이전에 금남로 현장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은 자칫 타자의 영웅적 면모로 비칠 수 있는 (그저 장르적 장치로 소비될 수 있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만섭과 피터는 목격자임을 잊지 않고 목격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고민하는 것에 집중한다. 만섭은 집에 홀로 남겨진 어린 딸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만 직접 목격한 참혹한 현실 앞에 보통의 인간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만섭이 느끼는 죄책감이나 양심의 갈등은 거대한 정의나 영웅적 면모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느껴야 할 것들로 인한 지극히 현실적인 갈등이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만섭이 광주로 다시 돌아갈 것이냐 말 것이냐를 깊이 갈등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만약 만섭이 다른 재난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사태의 중심으로 들어가 해결하려고 했다면, 설령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현재의 관객들에게는 더 큰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할 바를 다했고, 누구 하나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욕하는 이도 없을 것이고, 더군다나 홀로 남겨진 어린 딸을 위해서라도 서울로 가야 할 이유가 충분한 상황을 알기에 눈물로 결심하는 이 장면은 정의롭지 못한 일을 맞닥들이게 되었을 때 목격자로서, 제삼자로서 그럼에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하는 것에서 한 발만 더 나아가 행동할 수 있다면 어떤 세상이 또 어떤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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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택시운전사'를 보며 또 하나 생각해 보게 된 건 직업인으로서의 윤리랄까, 역할에 관한 점이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도 이와 비슷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거대한 음모와 부정의가 판치는 가운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힘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직업인으로서 각각의 개인이 각자의 맡은 바를 제대로 하기만 해도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메시지를 이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독일 기자 피터는 실제 인터뷰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엄청난 사명감으로 당시 광주로 향했던 것이 아니라 기자이기 때문에, 기자로서 알려야 할 일이 있다면 취재를 해야 한다는 직업윤리에 기반해 행동했던 것이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광주 택시운전사들의 대사에서도 '택시운전사가 손님을 가려 받으면 되나'처럼 기본적으로 택시운전사로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바를 충실히 했다는 것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직접 데모에 나서지 않는 이들도 데모에 참여한 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내주고, 쉴 곳을 내주며 응원의 힘을 불어넣었던 것처럼, 당시 광주는 광주 시민 모두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행동으로 옮겼던 현장이었다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이 역시 최대한 있는 그대로, 하지만 목격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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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는 역사적 비극을 당사자가 아닌 목격자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자 호소가 담긴 질문의 결과물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아직도 많은 이들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영화는 당시를 기억하고 5.18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보다는 아직 제대로 광주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이들을 위한 영화다. 그래서 철저하게 목격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반대로 목격자만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다.




1. 이 영화에서 가장 판타지스럽다고 생각되었던 후반부 검문 장면은 사실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라고 하더군요.
2. 자동차 추격 장면은 확실히 조금 이질적인 시퀀스였어요. 이 부분이 조금만 더 세련되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듯.

3. 초반부 만섭이 광주로 향하기 이전 장면들에 여러 복선들이 있더군요.

4. 이렇게 5.18 광주를 다룬 영화들은 조금씩 한 발씩 나아갔으면.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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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The Battleship Island, 2017)

영화와 영화 외적인 것들의 필연적 충돌



류승완 감독의 신작 '군함도'는 처음 제작 사실이 알려졌을 때부터 기대와 걱정, 바꿔 말하면 반가움과 못마땅함이 존재했었던 논란의 영화였다. 흥미로운 건 기대하고 못마땅해하는 이유가 각각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점이었다는 거다. 화려한 캐스팅은 더 많은 대중들에게 기대를 갖게 하는 동시에 영화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천만 영화라는 타이틀이 제작 단계에서부터 얘기된 점은, 더 많은 곱지 않은 시선을 이 영화에 갖도록 만들었다. 영화가 관객을 만나게 된 지금도 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군함도'는 현재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영화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담으려 했던 메시지나 내용적인 것에 대한 담론보다는 영화 외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아, 물론 내용에 대한 이야기들도 논란이 되고 있긴 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군함도'는 큰 규모의 제작비가 말해주듯, 처음부터 대중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즉, 더 많은 관객을 대상으로 한 영화임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던 영화였다. 혹자들은 이런 경우 작가로서의 감독이 상업적인 것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라며 평가 절하하곤 하는데, 내가 봤을 때 '군함도'의 경우 이건 포기라기보다는 선택에 가깝다. 작은 규모로도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대규모의 투자가 꼭 필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물론 '군함도'를 주제로도 충분히 훨씬 적은 규모의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류승완 감독이 만들고자 했던 건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였고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한 영화였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세트 촬영과 이를 기반으로 한 스펙터클한 화면과 액션의 동선을 가능하게 해 확실히 진일보한 수준을 보여준다 (다른 얘기로 최근 논란이 되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리고 이 영화가 애초부터 작은 기획으로 시작했다고 가정한다면 '군함도'는 지금과 같은 액션 영화가 아니라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 (Son of Saul, 2015)'처럼 만들었어야 지금의 논란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없었을 거고, 배급사가 무리한 독과점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리 많지 않은 관객 만이 영화를 관람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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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구성 측면에서 '군함도'는 장르 영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황정민과 김수안이 연기한 이강옥과 소희의 이야기는 쉽게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연상시킨다. 참혹함 속에서도 현실적인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서로가 서로에게 반드시 탈출해야만 하는 (특히 이강옥에게) 이유가 되는 이야기는 가장 전형적인 구조이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보편적 정서로 많은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소지섭이 연기한 최칠성의 이야기는 '군함도'의 또 다른 줄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등장하는 박무영(송중기)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하나의 이야기에 잘 묻어나지 못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박무영의 이야기는 전개상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최칠성의 이야기는 필요보다는 선택 측면으로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박무영이 개입되는 시점부터 영화는 빠르게 탈출(재난) 영화로서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개연성을 위해 몇 가지 장치들을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급작스럽게 장르 영화로서 탈바꿈되어 달려 나간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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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군함도'는 장르 영화로서만 보았을 때 그리 나쁘지 않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대규모의 촬영 현장에서 만들어낸 (CG가 아님을 확인시켜주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압도되는 측면이 있고, 그만큼 볼거리 측면에서도 러닝 타임 내내 지루하지 않게 몰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쉬움을 남기는 측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배경이 '군함도'라는 점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면 '군함도'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대규모 장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들까지 더해서) 참 어려운 도전이었구나 싶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군함도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과 이를 통해 전달하려던 메시지에 대한 부분은 물론, 탈출 영화로서의 스펙터클 모두 최대한으로 뻗지 못하고 아쉬운 지점에서 그치고만 느낌이 강했다.


특히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아픔을 제3 국의 시선이 아닌 당사국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는 만큼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묘사에 (그것이 허구라 해도) 더 신중을 기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장르적 전개를 위해 총, 칼과 폭발에 스러져 가는 모습을 전쟁영화의 방식으로 잔인하게 묘사한 것은 그 참혹함을 부각하기 이전에 상처를 더 짓누르는 효과가 크지 않았나 싶다. 보통의 전쟁 영화에서 우리 편 혹은 우리 군이 죽음을 맞을 때의 묘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관객의 심리에서는 일본에게 강제 징용된 피해자들의 죽음을 맞는 장면이 훨씬 더 감정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받아들여진 측면이 분명 존재했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인들 간에 갈등 전개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반대가 더 컸을 텐데, 그런 측면이 더해지면서 이 대탈출의 서사는 완전히 살아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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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기적인 정서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비극적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경우 관객들이 그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적지 않은 평가 요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군함도에서 벌어진 강제 징용 역사의 경우 최근 '무한도전'을 비롯해 몇몇 강의 프로그램이나 언론을 통해 이슈가 된 만큼, 관객들의 뇌리 속에는 깊은 상처와 슬픔이 최근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기에 이를 장르 영화로 소화해낸 (물론 영화가 담으려던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영화 '군함도'가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또 정서적 거부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만 영화. 천만 관객을 목표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논란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군함도'의 경우는 좀 더 양상이 복잡한 경우다. 일단 개봉일 기준으로 전체 스크린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숫자의 스크린을 점유한 것 자체는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참혹하고 끔찍한 심정이 들 정도로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설령 그것이 합법적일지라도 말이다. 


더 많이 보고 싶어 해서 더 많은 상영관을 가져갔다는 말은 얼핏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이 문화 산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건 불공정 거래에 가까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점차 시일이 지나면서 '군함도'의 스크린 점유율은 줄어 가고 있지만 이후 개봉될 예정이라는 확장판의 소식까지 더해 만들어진 (만들어 내야만 하는) 천만 영화가 되어 간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아도 충분히 목표로 했던 것들을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실패를 몹시 두려워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뭔가 억지로 무리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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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별개로 이 독과점의 문제의 탓을 감독에게 돌리는 것도 정상적이지 못하다고 본다. 물론 관객이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에 그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은 감독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일부에서 실망하는 것처럼 류승완 감독이 평소 진보적인 태도로 스크린쿼터나 대기업, 자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주었었기 때문에 더 그럴 수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마치 이 모든 것이 감독의 의도인 양 또는 심한 말로 돈 맛을 알아 버린 감독이 투자/배급사인 CJ와 손잡고 변절 아닌 변절했다느니 하는 (사실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한 수위의 표현들이 많다) 의견들은 수용하기 어려울뿐더러 다른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물론 이런 의견을 갖는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스크린 독과점과 관련해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류승완 감독 본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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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스크린 독과점과 관련한 부정적 의견들은 일부 의견들의 발언 수위가 너무 수준 낮다는 (욕설 수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수위의 대한 정도만 걸러 낸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선의 논의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내용을 두고 벌이는 논쟁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저의가 의심되는 움직임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군함도'를 두고 일본군에 대한 참상을 고발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찬양하는 가운데 조선인들끼리 다투는 내용을 담은 친일 영화라는 의견들이 있는데,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팩트부터 말하자면 '군함도'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짙게 깔린 동시에 단 한 명의 일본군도 미화하거나 그들도 피해자라는 식의 묘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친일파가 영화의 주된 갈등으로 등장한다.


묘한 공격 지점이 되고 있는 이 부분은 오히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본, 가장 좋아하는 지점이다. '군함도'는 단순히 제국주의 일본 군의 참상을 평면적으로 그려내는 구도가 아니라 시대를 살아 남기 위해 스스로도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에게 기생해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친일파들에 대한 적대심과 비판적 태도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예전 ‘지슬’에 대한 글을 쓰면서 가해자인 군인들도 사실 피해자라는 영화의 시선에 대해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비판적 의견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지슬'의 경우는 말했다시피 가해자를 일정 부분 미화하는 (군함도의 경우로 보자면 일본군을 미화하는) 경우고, '군함도'의 경우는 피해자 가운데 자신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어쩌면 가해자들 보다도 더한 악행을 저지른 또 다른 가해자인 친일파를 묘사하고 있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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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가 묘사하는 친일파 인물들의 비중은 오히려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전에, 내부에 숨어 있거나 오히려 큰소리치고 기득권으로서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친일파 세력의 청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즉 아직도 이러한 전후 청산의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만큼 선행되어야 할 역사적 심판에 대한 감독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소 신파적이라고 지적받는 마지막 장면 (김수안 배우의 응시) 같은 경우도 나는 이러한 심판과 감시의 눈빛이라고 생각된다. 


친일파들이야 말로 일본의 여러 가지 악행들이 점점 잊히거나, 친일파에 대한 존재는 지워버린 채 오로지 일본군의 악행 만이 강조되고 기록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텐데, '군함도'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그들에 대한 강한 심판과 감시, 다시 말해 그들의 악행을 반드시 역사에 기록해 미래로 전달해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었음에도 많은 기득권 세력을 불편하게 만든 (더군다나 천만 관객을 목표로 한 대자본의 영화가) 메시지를 담은 영화라는 점에서 '군함도'를 응원한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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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화된 환경에서 다시 본 <옥자>

(Okja, Dolby Atmos, 2017)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를 다시 보았다. 이미 리뷰 글을 통해 '옥자'에 대해 한 번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처럼 집에서 즐겨볼 수도 있었으나 동시에 극장 상영을 한다면야 이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개봉일에 맞춰 다른 개봉 영화들처럼 극장을 찾아 관람을 했었다. 오히려 극장에서 한 번 보고 나서 글을 쓸 때 명확히 기억이 나질 않거나 다시 보고 싶은 장면들을 집에 와서 바로 넷플릭스로 다시 볼 수 있어서 편리한 점도 있던 옥자의 동시 상영에 대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미 두 번 아닌 두 번의 감상을 했음에도 또 한 번 극장에서 '옥자'를 보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과 소스의 환경 때문이었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길 즐기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경험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감상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는 영화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극장이라 하더라도 일부러 힘들게 찾아가 관람을 하곤 하는데, 그건 모두 첫 번째 관람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환경에서 하고 싶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의 경우 비록 첫 번째 관람 시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최적의 선택이었던 '극장 상영' 자체를 선택하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는 없었으나, 더 좋은 환경에서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니 이 기회를 뿌리치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블루레이 타이틀 리뷰를 오랜 기간 해온 리뷰어로서 돌비 애트모스 (Dolby Atmos) 사운드 시스템은 아주 익숙한 편인데, '옥자'를 바로 이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파주에 위치한 명필름 아트센터를 지난 주말 찾게 되었다. 참고로 파주 명필름 아트센터는 지인의 사무실이 근처에 있어서 몇 번 방문해 본 적이 있었는데, 카페를 즐기거나 다른 구경을 해 본 것과는 달리 정작 영화를 관람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나 소문대로 영화 감상에 아주 쾌적한 환경이었고, 이번에 감상한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를 비롯해 상영 시스템도 깔끔해서 영화 감상에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환경이었다. 파주라는 거리를 감안할 때 자주 방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나, 이번 '옥자'의 경우처럼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로 상영되는 작품을 관람하고자 할 때는 먼 거리를 달려 방문한 보람이 충분히 느껴질 만한 극장 환경이었다.





영화 상영에 앞서 간단히 돌비 관계자 분이 나와서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 시스템에 대한 설명과 상영될 영화 '옥자'의 사운드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가 다른 사운드 포맷들과 가장 차별되는 점이라면 스피커를 활용함에 있어 단순한 채널의 개념이 아니라, 객체 기반의 개념으로 활용 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5.1 채널, 7.1 채널 등과 같이 리어와 서라운드, 우퍼 등으로 이뤄져 각각의 채널에 위치에 맞는 사운드를 분리해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천장을 비롯해 좌우 후면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많은 수의 스피커들 하나하나를 독립적으로 활용하여 각각의 원하는 위치에 감독이 원하는 사운드를 담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아주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화면에서 소리의 움직임이 전후 좌우로 이동할 때 다른 사운드 시스템에 비해 훨씬 더 여백 없이 자연스럽게 공간을 휘감을 수 있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영화를 만든 감독의 본래 의도를 현재로서는 가장 제대로, 디테일하게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봉준호 감독 역시 명필름 아트센터를 찾아 '옥자'를 관람하고는 자신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사운드를 들려주었다며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그렇게 돌비 애트모스로 다시 보게 된 '옥자'는 조금의 과장을 더해 처음 보았을 때와는 조금 달라진 영화였다. 확실히 사운드의 장악력이 압도적이다 보니 장면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 감정이 더 짙게 느껴졌으며, 특히 영화의 여러 추격과 액션 시퀀스를 좀 더 효과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초반 미자가 산을 내려와 미란도 본사에서 트럭을 쫓는 시퀀스는 좌우보다는 상하의 움직임이 많은 장면인데, 스크린을 기준으로 전후로 이동하는 사운드가 확실히 더 귀에 느껴졌으며, 인트로 장면에서 흐르던 수록곡 역시 전체적으로 하나의 사운드로 섞여 들린다기보다는 독립적으로 들리는 동시에 공간감 있게 펼쳐지고 있어서 오히려 더 장면에 잘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보통의 사운드로 감상할 때보다는 공간감과 거리감이 탁월해서 인물들이 거리를 두고 대화를 나누거나 또는 인물을 중심으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사운드들의 거리감이 좀 더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지적하지 않는 부분인데, 오히려 이렇게 전체적인 사운드의 공간감이 느껴지는 것에 비례해 센터에서 전달되는 대사 전달이 훨씬 더 선명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상영에서는 감상할 수 없었지만 '옥자'는 돌비 애트모스로 제작된 것은 물론, 돌비의 새로운 이미지 기술인 돌비 비전 (Dolby Vision)으로도 제작되었다. 2017년 출시된 LG OLED TV 모든 모델, 마찬가지로 올해 출시한 LG의 스마트폰인 LG G6이 돌비 비전을 지원하고 있으며 넷플릭스 프리미엄 요금제를 이용하고 있다면 돌비 비전으로 스트리밍이 가능하다. 참고로 돌비 비전은 HDR 기술을 통해 더 선명한 색상과 명암, 밝기 그리고 깊은 블랙과 입체감을 제공하는 포맷으로 마치 돌비 애트모스가 그러했듯이 돌비 비전까지 더해진 '옥자'를 경험해 본다면 또 어떤 감흥을 선사할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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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돌비 코리아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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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Dunkirk, 2017)

무엇이 그들을 생존하게 만들었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덩케르크'는 1940년 덩케르크 해변을 배경으로 벌어졌던 영국군의 대규모 탈출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놀란의 전쟁 영화라는 점에서 어떤 영화일까 몹시 궁금했었는데, 아이맥스 카메라를 최대한 활용한 기술적 시도는 놀라울 만큼 압도적이지만 보통의 전쟁 영화 혹은 대탈출 영화가 보여주는 극적인 요소와 전쟁의 참혹함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덩케르크'는 조금 다른 방향성을 가진 전쟁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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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탈출을 돕는 구축선과 해변의 병사들을 공격하는 적기들을 막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전투기 조종사의 시점, 포위된 상황을 벗어나 본국으로 탈출하려는 병사들의 시점 그리고 이 병사들을 돕기 위해 덩케르크 해변으로 향하는 어선에 올라 탄 평범한 이들의 시점으로 각각 나누어진다. 놀란의 영화가 자주 그런 형태를 취하듯이 이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른 시점의 이야기들은 이번에도 절묘한 편집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서 완성도를 갖는다.


커다란 사건을 배경으로 한 세 가지의 다른 이야기를 하나로 풀어내는 방식은 독립적인 동시에 유기적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예전 영화들처럼 흩어져 있던 인물들이 한 지점에서 반드시 만나기 위해 존재하는 필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시공간을 통해 주고받는 느슨한 동시에 매우 끈끈한 관계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이 세 가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결되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왜 그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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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크리스토퍼 놀란이 대중들에게는 기술적인 부분과 디테일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치들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감정과 드라마를 풀어내는 것에 재능 혹은 애정이 있다고 했었는데, '덩케르크'를 보면서 재차 이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결국 크리스토퍼 놀란이 덩케르크 구출 작전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전쟁이라는 비 인륜적이고 비이성적인 상황 속에서도 순수한 선의를 갖고 있던 인물들로 인해 승리보다도 값진 생존을 얻어낼 수 있었다는 것일 텐데, 그런 측면에서 한 편으론 영화 자체가 담고 있는 시선이 순수하기보단 순진한 것으로 그려질 수 있지만 놀란은 이번에도 자신이 믿는 순수한 선의를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영화적 장치들로 이를 설득해 낸다. 


만약 이 영화가 끝내 러닝 타임 동안 이 상황과 인물들의 선의를 전달하는 것에 실패했더라면,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민간 어선의 구출 장면이나 몇몇 의미 심장한 대사들이 그저 간지러운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일일이 인물들의 동기를 다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관객을 설득해 내는 데 성공한다. 그것이 '덩케르크'가 성취한 가장 값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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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맥스 레이저 상영과 한스 짐머의 음악에 대해


'덩케르크'를 이야기하면서 아이맥스 촬영과 음악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 두 가지를 빼면  이 영화는 성립 자체가 불가한 정도이기 때문이다. 일단 '덩케르크'가 선택한 아이맥스 촬영의 경우 일반적인 아이맥스 화면비보다도 더 상하의 화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1.43:1의 화면비로 약 75% 이상이 촬영되었는데, 이는 일반 디지털 아이맥스 관에서도 상하 레터박스가 생기는 화면비로서 국내에서는 최근 용산 CGV에 도입된 아이맥스 레이저 상영을 통해서만 손실 없이 관람할 수가 있다. 


이렇듯 보통의 아이맥스 화면비보다도 아래 위로 더 많은 정보량이 담긴 영상을 영화는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그만큼 상하의 움직임이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고 일부 전투기 장면에서는 흡사 파노라마 방식을 좌우가 아닌 상하로 구현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인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최초의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즉, 단순히 1.43:1의 화면비로 대부분 촬영되었으니 아이맥스 레이저 상영을 가능하면 관람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 화면비로 감상해야만 제대로 된 장면의 의도가 파악되는 장면들이 다수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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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장면들은 2.2:1의 화면비로 촬영되어 아이맥스 레이저 상영관에서 관람할 경우 레터박스가 생기게 되는데, 레터박스가 감상을 방해해서가 아니라 2.2:1로 촬영된 장면들을 굳이 1.43:1로 찍지 않아야만 했던 이유가 부족해 보였던 터라, 좀 더 편안한 감상을 위해 하나의 포맷으로 촬영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1.43:1의 화면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 사실상 국내에 하나밖에 없다는 환경적인 이유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한스 짐머와 놀란의 작업은 이제 별개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데, '덩케르크'의 영화 음악은 '다크 나이트' 이후 가장 인상적인 한스 짐머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덩케르크'에서 영화 음악은 거의 러닝 타임 내내 강약을 조절해 가며 깔리고 있는데, 마치 러닝 타임과 같은 길이의 긴 한 곡을 연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영화의 내용과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소리들이 영화 음악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모든 실제의 사운드를 이질감 없이 음악으로 소화해 내는 점이 이번 한스 짐머의 음악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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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란 다운 전쟁 영화가 나왔다


대규모 제작비가 투여된 전쟁 영화로서 기존의 박진감 넘치는 대규모 전투 장면이나 카타르시스가 극적으로 치닫는 탈출 영화로서의 묘미를 기대했다면 이 영화는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기존의'다. 즉, '덩케르크'는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이나 극적인 탈출 영화로서의 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느낌과 방식으로 전하는 영화다. 리얼리티를 고집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답게 과연 이런 장면들을 CG 없이 어떻게 완성해 냈는가 궁금한 장면들도 많고, 전쟁을 다루는 과정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을 결국 그려내고자 했던 순수함과 인간에 대한 굳은 믿음을 이번에도 발견할 수 있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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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Anarchist from Colony, 2017)

박열, 아니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


'이 영화는 고증에 충실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실존인물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박열’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굉장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일종의 선언이자 이 영화가 실화를 어떤 마음 가짐으로 다루고자 했는지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최대한 고증에 신경을 쓴 영화들 조차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정도로 언급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영화는 고증에 ‘충실’했음을 영화의 무엇보다 가장 먼저 알리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실화 속 이야기나 인물에게 깊은 감동이나 인상을 받고 그 감동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영화로 제작하게 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들은 그 가운데서 그 메시지를 좀 더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또는 좀 더 대중적인 언어로 관객들에게 극적 요소를 더하기 위해서 허구의 장치를 정도에 따라 가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박열’은 그런 여지를 영화 스스로가 배제하고 있다. 꼭 실화를 있는 그대로 만드는 것만이 미덕은 아닐 것이나, 영화가 고증에 충실했음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이유에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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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 이유를 통해 이 영화가 갖는 가치관과 태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마치 가네코 후미코가 자신의 자서전의 원고를 동료에게 전하면서 절대 화려하고 포장하는 말들로 꾸미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우직할지언정 외적 요소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 영화다. 바로 그것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제대로 알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놀랐던 건 ‘아니, 겨우 몇십 년 밖에 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왜 전혀 몰랐던 거지?’하는 무지로 인한 것이었다. 실제로 일제 시대 독립운동 과정 중에 민족을 위해 자신을 바쳤던 인물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잘못되거나 숨겨져 온 경우들이 적지 않은데, 대부분은 그들이 해방 이후 납북되거나 북으로 전향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들의 삶을 가리고자 했던 경우들이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찾아본 결과 박열의 경우도 해방 이후 납북되었는데, 다른 이들 (예를 들면 김원봉 같은)과는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참고로 박열은 이후 건국훈장을 받고 북에서의 죽음이 알려지자 남한에서도 사회장 수준의 추도식을 치르기도 했었다) 어찌 되었든 다른 독립 운동가들에 비해 후세에 덜 알려진 경향이 있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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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제목은 ‘박열’이지만 영화의 내용이나 실존 인물들의 삶을 비춰보자면 가네코 후미코의 비중이 절반, 혹은 절반 이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페미니즘 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도 다른 보통의 영화들에 비해 훨씬 진일보한 시각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물론 여기에는 실존 인물의 삶 자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야겠지만) 만약 성별이나 국적이 반대의 경우였다면 이 영화의 제목과 비중은 당연히 지금의 가네코 후미코가 우선되었을 정도로 후미코의 삶은 한 인간으로서, 제국주의 시대를 살던 아나키스트로서 압도적인 삶이었다.


영화 ‘박열’은 박열과 후미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일종의 로맨스로 그리고자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삶에 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보통의 로맨스가 아닌 그들 만이 가능했을 방식의 로맨스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대역죄인으로 억울하게 몰려 심문과 재판 과정에 놓이기 되는데, 둘을 심문하는 검사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서로의 (동지로서의) 진심을 확인하는 시퀀스는 영화적으로도 몹시 매력적이다. 또한 그저 돌아이처럼 묘사되는 과정 속에서도 그들의 자신의 논리를 정색하며 펼칠 때 순간적으로 다시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이 영화 만이 갖는 독특한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통 같으면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을 어떻게 돌아이처럼 묘사할 수가 있냐고 되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고증에 충실한 영화다. 그들은 20살, 22살의 청춘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던지는 또 다른 메시지는 청춘에 관한 것이다. 조금, 아니 많이 쓰라리지만 비켜나갈 수 없는 송곳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나의 스무 살은 그만큼 뜨거웠는가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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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짧은 시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 대해 찾아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정보를 찾아보고 난 뒤 더 분명해진 점이라면 박열보다는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해방 이후 박열의 행보를 보면 아쉬운 행보가 없지 않은 것, 즉 좀 더 가치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 것에 비해, 가네코 후미코의 삶이 주는 메시지는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싶을 정도로로 인상적인 것을 넘어 경의로운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뒤 가네코 후미코의 삶이 더 궁금해졌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아나키스트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 영화 ‘박열’이 주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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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최희서 배우는 ‘동주’에도 출연했고 ‘옥자’에도 잠깐 출연하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발견이네요. 다음 작품이 정말 기다려집니다. 


2. 이 영화에서 가장 잘못된 홍보 포인트라면 이제훈 배우의 얼굴과 함께 '나는 조선의 개새끼로소이다'라고 써있는 메인 포스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만 보면 일제 시대 일본에서 살았었던 좀 특이한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 보이거든요. 제국주의에 맞선 아나키스트들의 이야기로는 보이지 않아요. 실제로 그래서 못 볼뻔 했던 영화이기도 했구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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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Okja, 2017)

부조화의 조화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


넷플릭스를 통해 제작되어 더 큰 화제, 아니 영화 외적인 요소로 더 많은 말들이 먼저 오갔던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하는 성격이 강한 동시에, 전작 ‘설국열차’가 그러했듯이 근본적으로 해외 시장을 기반으로 만든 한국영화라 할 수 있겠다. 어떤 감독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성격의 작품들의 경우 아주 분명하게 장단점이 드러나곤 하는데 ‘옥자’ 역시 그러하다. 전체적으로 스토리와 구성 측면에서 ‘괴물’, ‘플란다스의 개’와 겹쳐지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아무래도 장점들만 (꼭 장점들만 가져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뽑아 하나로 다시 합쳐지는 과정을 겪다 보니 각각의 깊이는 떨어질 수 밖에는 없고, 순간순간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때 헐거워지는 측면이 발생한다. 재료가 너무 다양한 탓에. 그리고 그 재료들이 너무 매력적이었던 탓일까. 그 재료 하나하나는 다른 완제품의 맛과 대등할 정도로 매혹적이었지만, 모두를 버무린 ‘옥자’라는 요리의 맛은 오히려 조금 싱거운 맛이었다. 차라리 섞어 먹지 말고 따로 하나 씩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봉테일’이라는 그의 별명은 그의 팬들과 관객들로 하여금 그의 영화를 볼 때 무의식적으로 디테일을 찾는 것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이점 역시 초반에는 봉준호라는 감독의 세계관에 매력을 느끼게 하고 더 관심을 갖게 하는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듯하다. ‘옥자’라는 제목과 슈퍼돼지 그리고 글로벌한 세계관은 그 자체로 이질감을 주는데, 이건 봉준호 영화가 항상 선호하는 방식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의 조화를 억지로 만들어 내기보다는 부조화 그 자체를 아슬아슬하게 버무려내는 기술, 그리고 크기로만 따지자면 비교가 되지 않는 거대한 음모 혹은 이야기 속에 원치 않게 놓여 버린 소시민 주인공. 마지막으로 그 주인공이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선택 혹은 마주하게 되는 극도로 현실적인 결말. 이러한 봉준호 세계관의 익숙함은 ‘옥자’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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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봉준호의 영화적 구조가 반복되었음에도 매번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했던 것은 그 커다란 구조적 세계관과 디테일한 설정들의 유기적인 연결 고리와 조화 때문이었다. 봉준호의 이야기들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될까?’를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라기보다는 순간순간에 흥미를 느끼는 중에 나도 모르게 결론에 달해 있을 정도로 그 과정의 리듬과 긴장감을 즐길 수 있었다. 관객의 대부분이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살인의 추억’과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사건을 주제로 했지만 관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거 혹시 범인이 잡혔었나?’라고 착각을 하게 될 정도로 과정의 치밀함과 영화 만의 스토리텔링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옥자’ 역시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어렵지 않게 전개 과정을 예상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옥자’는 가축이 아닌 가족으로서 등장하는 ‘옥자’라는 슈퍼돼지 캐릭터를 통해 아주 직접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과 이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숨은 메시지를 어렵게 찾아낼 여지도 많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봉준호의 영화들이 매번 그래 왔던 것처럼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다 알고 있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관객들을, 알지만 사실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끌어당겨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 유혹의 강도가 솔직히 그리 강하지 못하다. 익숙한 이야기들은 익숙한 대로 마무리되고 그 과정의 리듬 감도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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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크레디트를 보며 유명한 배우들의 이름과 스텝들의 이름들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더 주목했던 이름은 음악을 맡은 정재일이었는데, 본래 그의 팬이었기에 그가 맡은 영화 음악에 대해서도 기대가 컸다 (크레디트 상으로는 정재일 외에 젬마 번즈가 함께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옥자’의 음악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해 보였으나, 그래서 너무 직접적이고 오히려 장면 자체를 설명하려 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흔히 장면의 감성과 정반대 되는 음악을 선곡해 그 감정을 더 극대화시키곤 하는데, ‘옥자’의 음악 역시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으나 결과는 ‘그런 시도를 하려 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앞서 봉준호의 영화들이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 세계관들을 동시에 가져와 균열에 가까운 부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매력이라고 했는데, ‘옥자’의 몇몇 장면들과 음악은 아쉽지만 그저 균열과 이질감에서 멈춰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건 아마도 더 많은 관객, 그러니까 더 다양한 나라의 관객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걸 감독은 물론 모든 스텝들이 인지한 상태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 일종의 부담감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부담감(기대감)이 없을 땐 오히려 본인이 원하는 100%의 색깔을 내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되는데, 좀 더 대중적인 색깔, 더 많은 색깔을 포용해야 된다는 의도가 오히려 한 두 가지 색을 분명히 낼 때보다 여러 측면에서 흐려진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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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에는 몇 번의 빠른 전개 시퀀스가 등장한다. 수평으로 수직으로 인물들이 추격의 형태로 이동하는 장면들은 이 장면 이전까지 끌고 오던 이야기의 긴장감을 배가 시키며 그대로 속도감을 더해 단 번에 다음 단계로 이동시키는 기능을 해야 하는데, ‘옥자’의 경우는 그 이전에도 확실한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 탓도 컸지만 결정적으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추격의 장면들이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그 사이사이에 들어 있는 빛나는 유머들이 오히려 안타까울 정도로, 그 시퀀스가 끝나고 난장판이 된 채 남겨진 배경을 보면 ‘휴~’하며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돌리기보다는 조금 허무한 감정이 들뿐이었다. 캐릭터들의 경우도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상될 정도로 전형적으로 과장된 인물들이 많았는데, 본래 좋아하던 배우들이어서 더 아쉬움이 느껴졌다. 배우들의 연기가 아쉬웠던 것도 아니고, 그 과장됨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이해되었지만,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 의도가 영화 전체와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째 느끼는 것보다 더 별로라고 하는 것 같은 글이 되어버렸지만, 그건 진심으로 별로여서라기보다는 더 좋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옥자’에서도 여전히 장면의 디테일, 설정의 디테일 하나하나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봉준호가 이 이야기를 통해 영화에서 결론을 낸 방식 역시 여전히 의미 심장하고 앞으로의 고민과 옅은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모두를 계몽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현실적인 (그것이 절반 이상의 실패 혹은 극소수의 승리라 할지라도)한 걸음 걷는 것을 택하는 봉준호 세계관의 결말은 이번에도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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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영화를 봤던 이 날, 삼겹살을 저녁으로 먹자는 말에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옥자’ 때문이었다. 적어도 한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먹지 못하지 않을까. 바로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한동안은 고기를 먹지 않는(못하는) 것이,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 것 같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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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 커버넌트 (Alien: Covenant, 2017)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에이리언으로의 귀환


리들리 스콧의 전작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는 에이리언의 세계관을 가져와 좀 더 근원적인 질문과 답을 꺼낸 몹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에이리언'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떡밥만 뿌리 고만 아쉬운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내게 있어 '프로메테우스'는 이 세계관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아주 애정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게 1979년작 '에이리언 (Alien)'의 프리퀄이자 전작 '프로메테우스'의 속편 격인 이 영화 '에이리언 : 커버넌트 (Alien: Covenant, 2017)'는 앞서 말한 관객들의 아쉬운 평가가 신경 쓰인 탓인지, 프로메테우스 보다는 79년작 '에이리언'과 더 맞닿아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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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쉬운 점부터 말해보자면 그 이유는 아마 다 '프로메테우스'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를 너무 재미있고 흥미롭게 즐긴 입장에서 '커버넌트'는 그 연장선에 있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전작에서 언급했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통한 철학적 화두는 희미한 배경 정도로만 존재할 뿐이다. 쇼 박사와 데이빗이 엔지니어의 행성으로 떠났을 때의 마음 가짐을 떠올려 보자면, 아마도 그들이 관심을 갖고 탐구했던 바에 대한 내용은 '커버넌트'의 시점까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커버넌트'는 그저 데이빗의 대사 한 마디로 이 10년의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할 뿐이다. 


데이빗의 회상 장면으로 미뤄볼 때 그들이 처음 이 행성에 도착하고 수많은 엔지니어들을 마주하게 되고, 또 쇼 박사가 어떻게 죽음을 맞고 그 이후 데이빗은 어떤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프로메테우스'의 관점에서 볼 때 이십 년 간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전작에서 던졌던 근원에 대한 물음과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 서로 얽히게 되는, 한편으론 어리석은 굴레의 과정을 더 깊이 있게 다뤄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세월을 완전히 건너뛴 점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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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모호함을 버리고 '에이리언' 본래의 공포와 긴장감의 장르 영화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커버넌트'는 더 심플하고 오락적인 영화가 되었다. 기존 1979년작 '에이리언'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긴장감을 떠올려 본다면 쉽게 예상할 수 있을 텐데, 그때의 충격과 떨림을 넘어서지는 못하지만, 혹여나 79년작을 못 본 이들이라면 비슷한 첫 경험을 이 영화를 통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에이리언 : 커버넌트'는 '에이리언 (1979)'과 장르적으로나 구성면에서 매우 닮아 있고, 더 나아가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했던 '에이리언 2 (Aliens, 1986)'과도 상당 부분 닮아있다. 미지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서 하나둘씩 죽음을 맞는 대원들, 그리고 에이리언과 사투를 벌이는 여주인공의 모습까지, 전작들을 본 이들이라면 반복적인 요소가 다분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긴장감 넘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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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넘게 충분히 재미있게 즐겼으나 전작의 매력적인 세계관과 연장선에 있을 수 있었던 구조와 재료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 리들리 스콧은 '프로메테우스'와 관련해 여러 가지 인터뷰들을 한 것으로 아는데, 시리즈의 정통성이나 '에이리언'과의 연관성 등과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완전하게 심플해진 새로운 '에이리언' 영화는 아쉬움을 남긴다. 



1. 영화를 보고 든 잡생각 중 하나는, 이 탐사대원은 무슨 부부동반 우대 조건이라도 있었나 싶었던 ㅋㅋ

2. 전작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리뷰는 여기로. (프로메테우스 _ 근원에 대한 선문답)

3. 근래 본 15세 관람가 영화 중에 가장 수위가 높은 듯하네요. 

4. 사실 여기 등장한 배우들이 에이리언한테 호락호락당할 캐릭터들이 아닌데 말이죠. 마법사(캐서린 워터스톤, 카르멘 에조고)도 있고, 매그니토 (패스벤더)도 있고, 무엇보다 닥터 맨해튼 (빌리 크루덥)도 있잖아요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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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Guardians of the Galaxy Vol. 2, 2017)

I am Groot!


전작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1'은 정말 끝내줬다. 어벤져스 멤버들이 중심이 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어쩌면 변방의 녀석들 정도였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선전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이 세계관의 중요한 일원으로 흡수시키는 동시에 좀 더 큰 덩어리의 세계관 흡수를 통한 확장성을 갖게 되었다. 마치 '데드풀'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성격의 영화는 8,90년대에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의 정서를 끌어안으며 관객층 역시 더 넓게 확장시키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점에서도 기존 시리즈들과는 다른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하며, 마블의 새로운 가능성이자 기대주로 떠오르게 되었다. 


아마도 전편을 만족스럽게 본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갖게 된 호기심이라면, 과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과 어벤져스 멤버들이 하나의 스크린에 등장하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하는 점일 것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작품들을 보게 되면 가끔 독립적으로는 완성도가 떨어지면서 이 세계관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커다란 퍼즐의 조각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해 내는(수행하는 것만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이 있는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는 과연 이들이 어떻게 기존 세계관에 녹아들게 될까 라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내기보다는, 아직은 더 자신들의 독립적인 이야기, 즉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 이 선택은 길게 봤을 때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되지만, 역시 아쉬운 점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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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대했던 팬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겠지만 이번 작품에는 기존 어벤져스 캐릭터들의 깜짝 등장이나 콜라보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전편에서 그들이 어떻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되었는지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과정을 소개했다고 본다면, 이번 속편은 좀 더 그들 각자의 이야기, 그 가운데서도 주인공 스타로드의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아간다. 사실 피터 퀼의 아버지에 관한 떡밥은 전편에서 그럴싸하게 풀어놓았던 터라 속편에서 풀어낼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된 바였는데, 이번 작품은 사실상 이 이야기가 메인 테마라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하자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는 그렇게 궁금하던 피터 퀼의 아버지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면서 가족이라는 메인 테마를 아주 강한 메시지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피를 나눈 가족이지만 거의 유대를 갖지 못한 가족이라는 테마에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유사 가족의 이야기 역시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전개는 유사 가족의 형태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동일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로 인해 (그럼에도)한 번 더 감동을 받는 것이 가능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가 아주 강하게 전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메시지는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또) 감동적인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 건 다름이 아니라 이 영화가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이기 때문이다. 쿨함이라는 성격이 강조된 캐릭터들에게 갑작스레 전형적인 감동의 메시지가 개입할 땐 상당히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는데, 전편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조화로움이 완벽에 가까웠다면 속편에서는 조금은 과하고 가끔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섞여 버렸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실제로 몇몇 장면은 아마도 전편 같았다면 분명 유머러스한 뉘앙스나 반어법의 형태로 연출되었을 장면인데, 너무나 진지하게 (그래서 어색하게) 연출된 터라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물론 이런 쿨한 캐릭터들일 수록 감정의 폭발력이 더 세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 반전을 꺼내 들고 싶은 유혹이 작가나 연출자 입장에서는 매력적일 수 밖에는 없을 텐데, 조금은 빠르게, 아니 속도보다는 그 강도가 조금 지나친 듯한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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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럼에도 이 영화를 끝까지 재미있게, 즉 뻔하고 다소 진부한 전개에도 여전히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건 바로 캐릭터 때문이다. 캐릭터로만 놓고 보자면 기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아이언맨을 제외하고 가장 (앞으로도) 인기를 끌게 될 캐릭터가 바로 그루트가 아닐까 싶다. 그 정도로 전편의 마지막에 다시 베이비 그루트로 시작하게 된 그루트는 (아, 이 설정이 정말 환상적이다) 이번 속편에서 거의 주인공에 가깝게 자신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욘두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저 '나뭇가지'인 그루트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갈 정도의 매력을 보여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더 흥미로운 건 바로 그루트가 계속 성장한다는 점이다. 어른으로 시작해 베이비가 되고 사춘기를 거쳐 다시 어른의 모습이 될 그루트는 그 단계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그 성장에 맞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도 시리즈 전체의 분위기를 달리 가져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해졌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전작에서 그루트가 활약했을 땐 아주 큰 감동이나 공감대는 없었지만, 만약 앞으로 속편이나 그다음 속편에서 어른이 된 그루트가 또 다른 활약을 하게 될 땐 전혀 다른 감동과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이유에서 이번 영화는 전작에서 한 발 뒤에 물러나 있던 그루트라는 캐릭터가 완전하게 전면에 나선 것만으로도, 전편의 쿨한 재미 못지않은 재미를 선사하는 나쁘지 않은 속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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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전체적인 완성도나 깊이에 있어서는 조금 옅어진 감이 있지만, 한 번 더 반복해도 (아직은)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로서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었던 속편이었다. 수면 위로 완전히 부상한 그루트라는 캐릭터의 매력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다른 작품들과의 콜라보 이전에 자신만의 확장성을 더 기대하게 만드는 전개도 아직은 충분히 유효한 선택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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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이비드 하셀호프와 관련된 대사들을 모두 다 찰떡같이 흡수한 저는 역시 아제 세대일까요 

2. 쿠키는 총 5가지가 나오는데 직접적으로 다른 영화들과 연관되는 얘기들은 없지만, 속편에 대한 암시와 원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대해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3. 실버스타 스탤론의 출연한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양자경과 빙 레임스도 나오는 줄은 몰랐네요. 속편에서 이들의 조합을 다시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4. 하워드 덕도 전편에 이어 다시 등장합니다 ㅎ

5. 어썸 믹스 vol.2도 좋지만 역시 vol.1에 임팩트에는 조금 못 미치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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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정한다 (Denial, 2016)

진실은 왜 승리해야 하는가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 데보라 립스타드 (레이첼 와이즈)와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빗 어빙 (티모시 스폴)간의 소송과 재판 과정을 다룬 영화 '나는 부정한다 (Denial, 2016)'는 동명의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미 홀로코스트 연구자와 부인론자의 소송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부정한다'의 이야기는 치열하게 진실 공방을 벌일 만한 미지의 무엇의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이미 역사적으로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 이를 부정하는 이를 대상으로 입증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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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흔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억지 주장을 펼치는 이들과 맞닥들이게 되었을 때 'x가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라는 식의 말을 하며 상대를 하지 않는 것으로 상대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일들은 상대를 하는 것 자체로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내게는 득이 될 것이 전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더럽다는 이유로 피하는 것이 더 상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에 관한 진실 혹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인권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그것이 단지 억지 주장이거나 상대하는 자체로 손해를 보는 것일지언정 그저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여기까지가 상식적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일 텐데, 이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바로 그렇게 피하지 않고 맞서게 되는 어떤 이의 실제 사례를 들어 간접 경험을 하게 되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 과정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고통스럽고 또 냉정을 유지해야만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역시 냉정하고 담담한 말투로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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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보라 립스타드가 처한 상황을 한 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로서 이 참상과 진실을 더 널리 알리는 데에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는 인물로 볼 수 있을 텐데, 그런 그녀에게 이를 완전히 부정하는 데이빗 어빙의 명예훼손 소송은 쉽게 무시하기 어려운 도발이었을 동시에, 무죄추정 원칙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어빙의 잘못된 주장을 입증하는 데에 (이 정도의)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홀로코스트를 인식하고 있는 것 보다도 더 전문가인 그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어빙의 주장은 완전히 터무니없고 말을 섞을 가치 조차 없다고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판에 들어가 진실 공방이 아닌 철저한 법적 공방에 놓이게 되면서 그녀는 더 큰 부담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유태인이자 이 문제에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모든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을 뿐더러, 자칫 자신이 이 재판에서 지게 될 경우 모든 홀로코스트 피해자들과 역사적 진실이 훼손될 수 있다는 부담은,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무게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필사적으로 이 재판에 임하게 되는데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는 없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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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감정적으로 공감되는 데보라에 비해 영화를 보다 보면 중반에 이를 때까지도 그녀를 변호하는 변호인단의 진심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한다. 즉, 변호인단이 쉽게 말해 너무 비즈니스 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 실제 진실이 밝혀지는 것 그 자체에는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은 듯 한 뉘앙스를 남긴다. 이후 영화는 톰 윌킨슨이 연기한 변호인 리처드 램튼의 캐릭터를 통해 이들도 정서적으로 충분히 공감을 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냉정을 잃지 않고 전략적으로 대한 것이라는 전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또 다른 변호인인 앤드류 스콧이 연기한 줄리어스의 경우 그 진심이 어느 정도 입증된 이후에도 드라마틱하게 이 부분이 표현되는 장면이나 전개는 등장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 재판의 판결이 나는 장면의 경우도 보통의 법정 영화였다면 과연 판결이 어떻게 될지 긴장감과 극적 요소를 최대로 끌어올려 클라이맥스를 연출했을 텐데, 이 영화의 판결 부분은 얼핏 연출력의 부제로까지 느껴질 정도로 아주 덤덤하게 묘사되고 있다. 변호인단의 캐릭터 묘사나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다루는 방식으로 미뤄봤을 때, '나는 부정한다'의 메시지는 승리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승리를 위해 어떤 과정을 감내해야만 하는 가에 더 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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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예하게 진실을 다투는 공방이 아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거나 억지에 가까운 극단적인 주장과 진실을 다투어야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얻는 방법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나는 부정한다'는, 아주 가깝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연스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친일 역사와 또 일제 시대 벌어진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참혹한 인권 문제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독도 영유권 관련해서도 그렇고 우리는 당연히 우리 땅이고, 당연히 침략과 지배 과정 중에 사실로 벌어진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저 '당연하다'라고 쉽게 생각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일본과 일부 친일파 세력의 경우 이 역사를 본인들이 원하는 역사로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다시 한번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진실을 실제 하고 더 확고한 진실로서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또한 최근 가장 뜨거운 대선 판에서도 그저 웃어 넘기기엔 너무나 저급하고 모욕적이며 진실을 왜곡하는 상대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같은 땅에 살고 있는 이런 세력들을 그저 말이 안 통하는 이들이라 칭하며 무시하는 것으로 해결이 될 것인지, 또 그것이 진정 옳은 방법인지 새삼 떠올려 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진실은 왜 승리해야 할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진실은 꼭 승리해야만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거짓들로부터 꼭 지켜내야만 할 진실들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 사회와 내가 되길 바라고 또 경종을 울리게 만드는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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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怒り, 2016)

누군가를 완전히 믿는다는 것


2010년작 '악인'에 이어 다시 한번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을 영화화 한 이상일 감독의 신작 '분노 (怒り)'는 믿음에 관한 영화다. 분노라는 제목은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 분노의 대상이 누구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 물론 그 질문 역시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더 큰 메시지는 믿음이라는 아주 진부하고 원초적인 감정 혹은 행동에 있다.


영화는 도쿄에서 벌어진 한 부부의 잔혹한 살인사건을 던져두고 이 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치바와 도쿄, 오키나와를 각각 배경으로 하는 전혀 다른 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이 구성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쫓는 방식처럼 보이지만 영화 '분노'는 범인을 찾는 스릴러가 아닌 이 하나의 살인사건이 각기 다른 세 명의 인물과 그 주변의 인물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앞서 언급했던 의심과 믿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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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명의 인물들이 하나의 스크린에 등장하지만 이 세 개의 이야기는 결코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 즉,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존재가 가능하되 단지 전제가 되는 사건만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셋 중 어떤 이야기 하나 만을 골라서 영화화를 했어도 충분히 힘 있는 드라마가 가능했었을 텐데, 왜 세 개의 이야기를 같은 시공간에 겹쳐 놓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건 아마도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 인물들이 동일한 사건을 두고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지, 즉 비슷해 의심과 신뢰의 과정 속에서 어떤 잘못이나 상처를 겪게 되는지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의 네 번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나만의 분노, 아니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려 보게 만든다.


이상일의 '분노'를 보며 새삼스럽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믿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믿는다 는 말을 자주, 또 쉽게 하곤 하는데 그 믿는다는 말속에 과연 영화 속에서 등장했던 것과 같은 각오나 확신이 내포되어 있었는가 싶다. 이 영화가 끝까지 힘을 받게 되는 건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예상되는 세 명의 인물에 대한 그 주변 인물들의 의심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합리적이고 수긍이 되는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의심을 보고는 '어떻게 저들을 의심할 수 있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세 명이 다 범인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합리적인 의심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이 더 쓰라린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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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를 보고 들었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누군가를 완전히 믿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영화 속 인물들의 의심이 합리적이라는 이유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의 의심이 확신에 가깝게 발전하게 된 이유다. 이들이 의심을 갖게 된 과정을 보면 그 대상의 말과 행동이나 과거 등으로 미뤄봤을 때 충분히 의심이 갈 정도의 합리적 추론은 결정적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들은 별 다른 의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상태에서 자신이 아끼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 수단으로써 경계 차원으로 의심을 갖게 되고, 또 확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앞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들의 의심을 두고 뭐라 탓할 수 없을 정도로 이 과정에 대한 묘사는 현실적이고 또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분노'가 그저 어쩔 수 없음의 비관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작품인가 라고 묻는 다면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상일 감독의 '분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영화다.  그 과정의 상처를 잔인하리만큼 냉혹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걸 관객이 이전처럼 쉽게 내뱉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자 끼치고자 했던 영향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 혹은 완전히 믿어야만 하는 존재를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는 것. 이건 인생의 커다란 고통이자 또 희망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그럼에도 믿고자 했었던 아이코 (미야자키 아오이)가 타시로 (마츠야마 켄이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 눈빛은 그래서 더 처연하고 또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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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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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질주 : 더 익스트림 (The Fast and The Furious 8, 2017)

뭘 해도 되는 장기근속 시리즈의 위엄


새삼 놀랍다. 자동차 액션을 중심으로 한, 어쩌면 이색 혹은 콘셉트 액션 영화라 할 수 있는 영화가 단순한 시리즈를 넘어 무려 8편의 속편을 이어오게 되다니 말이다. 이미 5편 정도를 넘어섰을 때 느끼기 시작했던 점이기도 하지만, '분노의 질주 (The Fast and The Furious)' 시리즈가 이렇게 롱런할 줄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일들과 평가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살아남았고 8번째 신작을 맞았다. 8번째 '분노의 질주'에 (참고로 '더 익스트림'이란 부제는 본래는 없다)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시리즈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한 번 꺼낸 이유는, 오랜 기간을 버텨 온 시리즈 만의 여유와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작품이 이번 신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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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 도미닉 토레토 (빈 디젤)의 능력과 성격을 재차 한 번 소개하는 짧은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이걸 보며 살짝 웃음이 났다. 왜냐하면 이 인트로에 가까운 에피소드는 마치 시즌제 시트콤의 한 회차에서, 그것도 초반에 등장할 법한 아주 단순하고 또 너무 노골적이라 살짝 어설프기까지 한 에피소드였기 때문인데, 그래도 별로 실망스럽지 않았던 건 바로 시즌제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구성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이제 거대한 시즌제 드라마처럼 한 편 한 편을 완전히 에피소드의 형태로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가 가능해진 이 시리즈만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미 캐릭터 소개와 세계관 소개 등이 완전히 끝난 것은 물론 그 캐릭터 들에 대한 애정까지 얻게 된 드라마의 경우 각각의 에피소드의 퀄리티와는 별개로 중간 이상의 흥미와 공감대를 얻게 되는 것처럼, '분노의 질주' 시리즈 역시 한 편 한 편을 마치 드라마의 에피소드인 것처럼 접근하는 방식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그간 에피소드처럼 등장한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들은 전부 아주 새롭고 신선한 독립적인 것들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전형적이고 또 클리셰로 물든 아주 일반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텐데, 오랜 시간을 지속해 온 시즌제 드라마 들이 그런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이미 획득한 캐릭터와 세계관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그 어떤 에피소드들도 중간 이상의 재미는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딱 잘라 말해 어느 시점을 지나며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뭘 해도 중간 이상의 재미는 보장하는 시리즈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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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질주 8'은 자신 만이 가질 수 있는 자동차 액션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존의 장르 영화들이 보여준 익숙한 구조 위에 펼쳐 놓는다. 주인공이 가장 강력한 적으로 등장하거나, 예전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중요한 복선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또 팀을 이루는 여러 캐릭터 가운데 잠시 이별을 예고하거나 반대로 적에서 동료로 합류하는 등,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는 전개이지만 오랜 시리즈여서 뻔하지 않게, 아니 뻔해도 괜찮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실 이번 작품은 어떤 면에서 너무 뻔하고 익숙한 전개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한 번쯤은 이 시리즈에서 만났으면 했던 설정이라 오히려 재미있었달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무런 새로운 요소 없이 그동안 익숙하고 검증받은 클리셰 들을 골라 앞으로의 시리즈 스토리 라인에 하나씩 적용한다고 해도 충분히 앞으로도 생존 가능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이미 궤도에 안정적으로 올라 있는 상태다. 


한 편으론 조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맞이 해야 할 이 시리즈와의 이별이 벌써부터 걱정되기도 한다. 후반부에 들 수록 더 강하고 견고해진 가족이라는 테마와 이를 든든히 뒷받침하는 한 명 한 명 캐릭터들은 이미 앞선 시리즈에서 영화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이별을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앞으로의 이별 과정이 예상되기도 하는데, 그 시점들을 언제로 선택할지 또 어떻게 그려낼지가 앞으로 이 시리즈의 남은 과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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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드웨인 존슨이 합류하면서부터 계속 드는 생각이지만, 그의 합류는 정말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이디어가 기반이 되는 자동차 액션 만으로 버거워질 때쯤 근래에는 보기 드물게 몸으로 하는 육중한 액션을 선보이는 그의 합류는, 이 영화의 완전히 다른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이번 작품 역시 제이슨 스테덤과 더불어 (참고로 이 시리즈에선 스테덤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더 날렵하고 가벼워(?) 보이기까지 한다) 무게감 넘치는 격투 액션 장면을 연출해 내는데, 이 액션의 쾌감이 한 편으론 자동차 액션의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그리고 더 락 시절을 기억하는 그의 팬들이라면 마치 링 위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그의 현란한 마이크웍을 연상시키는 대사나 은연중에 등장하는 레슬링 기술 (락 바텀 같은)들이 반갑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짜로 10편 쯤에서는 토레토가 우주에서 싸우는 모습 (아, 그건 리딕인가? ㅎ)을 보는 건 아닐지 기대(?)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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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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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 (Ghost In The Shell, 2017)

내면은 전혀 달라진 헐리우드 리메이크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었다.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에 흠뻑 빠져있었던 나는 주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을 먼저 접하게 되었었는데, 이후 보게 된 '공각기동대'의 세계관과 철학은 그 당시의 어린 나이와 맞물려 한참을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 만큼 질문과 고민을 갖게 만들었던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이 헐리우드에서 스칼렛 요한슨 주연으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다른 리메이크 소식들과는 다르게 사실 전혀 기대가 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오시이 마모루가 담아낸 철학적 깊이 (혹은 난해함)를 제대로 구현 할리가 만무했고, 혹여 그러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 들 내면적인 화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오락적이고 액션이 중심이 된 영화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헐리우드의 접근 방식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선택 방식은 더 많은 대중들에게 관심을 이끌어 원작보다 더 나은 흥행을 거두기도 하고, 단순해진 대신 더 분명한 방향성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루퍼트 샌더스의 헐리우드 버전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은 이러한 장단점이 모두 존재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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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장점부터 이야기해보자면 원작의 난해함은 훨씬 덜해져 일반 대중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스토리라인이 단순해졌고 (명확해졌고), 미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액션과 디자인은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영화는 많은 면에서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보다는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를 더 연상케 하는데, 여기에 액션이 좀 더 가미가 된 버전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생각보다 스칼렛 요한슨을 비롯해 섹션 9 요원들의 캐릭터는 그리 어색하지 만은 않았다. 물론 이건 원작의 쿠사나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절대 평가이긴 하지만. 


앞서 이번 '공각기동대'는 이야기가 훨씬 단순해졌다고 말했었는데, 오락영화로서는 분명한 장점이다. 메이저 (스칼렛 요한슨)가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주를 이루게 되면서 원작의 복잡, 난해한 세계관은 전혀 필요가 없어져 버린 동시에 기시감이 느껴지는 조금은 평범한 이야기가 되긴 했지만, 그만큼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스토리라인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원작을 전혀 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는 제법 흥미로운 SF/액션 영화로서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속편의 가능성까지 열어 둔 것도 좋았는데 과연 가능할는지는 미지수다 (북미의 흥행 성적이 그리 좋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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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가장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갖는 대중적 장점과 정확히 겹친다. 사이버 펑크 세계관을 배경으로 자아를 찾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명확성을 얻었지만,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이 갖는 매력이 바로 그 난해함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건 원작 팬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장 큰 단점이 될 수 밖에는 없다. 나는 원래 누구였는가, 나는 도대체 어떤 과거를 갖고 있는가 라는 질문과 이를 찾는 여정은 만약 다른 작품이었다면 제법 흥미로운 테마가 될 수 있겠지만, 이것이 '공각기동대'라면 전혀 얘기가 달라질 수 밖에는 없다. 딱 잘라 말해 루퍼트 샌더스의 '공각기동대'에는 '네트는 광대해'의 정서가 없다.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이 가졌던 수많은 매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을 꼽으라면 바로 쿠사나기 소령의 저 대사, '네트는 광대해'라는 한 마디가 남긴 끝에서부터 시작되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감동과 기대를 들 수 있을 텐데, 이 영화엔 아예 그 부분을 배제해 버렸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빠져있는데도 이 영화를 비교적 재미있게 본 이유라면 차라리 핵심 부분을 교체한 것이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만약 이 영화가 오시이 마모루의 철학을 그대로 계승해 복잡, 난해한 고민을 정공법으로 파고들었다면 과연 만족할 만한 수준의 이야기가 가능했을까? 그리고 그렇다 한들 2017년의 시점에서 과연 그 당시 정서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가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 비춰보자면, 차라리 10점 만점짜리 기술을 시도해 6점을 거두는 것보다 8점 만점짜리 기술을 시도해 7점을 얻는 전략이 대중적 영화로서 더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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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예고편이 공개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메이저'라는 번역에 대한 논란으로 끊이질 않는데, 나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조금 애매한 점이 없지 않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쪽에 가깝지만, 따지고 들자면 충분히 문제 삼을 만한 여지가 넘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작에 있어서 소령이라는 계급의 상징성이 워낙 컸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메이저라는 것이 과연 이름으로서 등장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계급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등장한 것인지 100% 명확하지 않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초 중반까지는 스칼렛 요한슨이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꼭 '메이저'라고 붙이길래 정말 계급의 표현이 아닌 이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건가 싶었었는데, 후반부의 '이제 더 이상 메이저가 아니야'라는 대사를 보면 이건 조직을 배신했기 때문에 더 이상 메이저 계급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되는 부분이라 불분명함이 더 커졌다. 


오역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간혹 작품 전체의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는 아닌 경우도 있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그 이름, 그 이름을 찾는 이야기가 핵심이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과 관련된 오역 논란은 분명히 감상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로 볼 수 밖에는 없겠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냥 한 두 번 정도 언급되는 수준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대사가 바로 '메이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 오역 논란은 어지간히 감상에 영향을 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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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쨋든 영화를 보고 오니 너무x100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이 보고 싶어졌어요. 곧 국내에도 블루레이가 출시될 예정인데, 그 전까진 소장하고 있는 DVD라도 한 번 다시 봐야겠어요.


2. 크래딧을 보니 마이클 피트가 Michael Carmen Pitt로 미들 네임까지 표기되던데 원래 그랬던 건지 아니면 몇 년 사이에 바뀐 건지 모르겠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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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이덴티티 (Split, 2016)

안방에서 즐기는 샤말란의 미스터리 슈퍼 히어로 영화


M. 나이트 샤말란의 신작 '23 아이덴티티 (원제 - Split)'는 그의 두 번째 히어로 영화이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브레이커블 (Unbreakable, 2000)'의 속편이다. '언브레이커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샤말란의 영화이자 가장 매력적인 히어로 영화 그리고 가장 속편을 기다려 왔던 작품이기도 한데, 이렇게 은근한 방식으로 (사실상의) 속편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 그 반가움과 쾌감이 더 컸다. '23 아이덴티티'라는 국내 개봉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23개의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벌이는 사건을 통해 샤말란은 다시 한번 히어로 영화라는 장르를 자신 만의 방식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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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 납치극? 아니 슈퍼 히어로 영화


제임스 맥어보이가 여러 명의 인격을 한 번에 연기하는 장면들과 소녀들을 납치해 벌이는 사건으로 예상했을 때 '23 아이덴티티'는 쉽게 사이코패스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공포/납치극을 떠올려 볼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런 겉모양을 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슈퍼 히어로 영화의 플롯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물론 가슴을 조여 오는 공포와 긴장감은 납치와 탈출의 구조에서 발생하지만, 넓게 보았을 때 샤말란은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한 캐릭터를 다중 인격의 사이코 패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개의 인격을 갖고 있는 만큼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슈퍼 히어로 (혹은 안티 히어로)로 묘사하며, 그가 천천히 각성하는 과정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여기에 납치된 소녀 중 한 명인 케이시 (안야 테일러-조이) 역시 단순히 납치 사건에 휘말린 연약한 주인공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각성하는 또 다른 인물로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23 아이덴티티'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다.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는 것만 같았던 두 인물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 어떻게 접점을 이루게 되는지 풀어가는 과정은, 영화가 끝난 뒤 복기하듯 다시 곱씹어 볼수록 더 흥미로운 부분이다.


# 그래서 '언브레이커블'의 속편이라 부른다


마치 '언브레이커블'이 전혀 다른 시작점에서 시작한 두 인물 데이빗 던 (브루스 윌리스)과 일라이저 (사무엘 L.잭슨)의 이야기가 한 곳에서 만나게 되면서 (정확히 말하자면 이 경우는 우연히 만났다기보다는 의도적이고 간절했던 만남이었지만) 더 큰 깊이를 갖게 된 것과 같이, 이 영화 '23 아이덴티티' 역시 크게 보면 두 명의 전혀 다른 인물이 각자의 트라우마와 하나의 사건에서 싸우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언브레이커블'이 데이빗 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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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부분의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개인적 트라우마 혹은 결핍 등이 존재하고 그것이 일종의 도화선이 되거나 영웅이 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아주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언브레이커블'이 더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일라이저라는 캐릭터가 그토록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돌연변이라고 소외되고 버려져야 했던 이들이 주인공인 '엑스맨'의 영웅들도 유사한 매력 혹은 공감대가 있었다.


영화 말미의 깜짝 등장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23 아이덴티티'는 정서적으로 완벽한 '언브레이커블'의 속편이라 부를 만하다. '언브레이커블'이 지금까지도 많은 마니아 층에게 사랑받는 건 히어로 영화라는 전형적인 장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동시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장르적 정수에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인데, '23 아이덴티티' 역시 전형적인 속편의 구조를 벗어난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편의 핵심 정서와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발전시키고 있는 영화로서 그야말로 '언브레이커블'에 딱 걸맞은 속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M. 나이트 샤말란은 '언브레이커블'의 속편을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고 싶어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23 아이덴티티'의 좋은 평가로 인해 이 프로젝트가 더 큰 그림의 속편으로 연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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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몸, 23명의 인격 그리고 제임스 맥어보이


'23 아이덴티티'를 소개하면서 제임스 맥어보이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무려 23명의 인격을 연기하는 것 그 자체는 대단하고 연기력 측면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볼 수 있을 텐데, 한 번 더 생각해 본다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일반적인 사이코패스 연기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으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임스 맥어보이는 단순한 볼거리 이상의 감정을 담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남자에서 여자로, 어른에서 아이로, 또 소심한 자아에서 거친 성격의 자아로. 의상의 변화도 있지만 그저 표정 변화와 대사 전달 만으로 전혀 다른 인격을 소환해 내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흥미롭고 신기하다 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여러 명의 자아가 하나의 몸 안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해 논쟁하고 갈등하는 복잡한 관계를 설득력 있게 연기해 냈다. 사실 여기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면 이 영화는 단순히 '다중 인격'의 공포와 충격과 같은 볼거리에 그쳤을 텐데,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는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각각의 인격들은 다중 인격이라기보다는 더 나아가 여러 명의 캐릭터로 확실히 느껴지는 효과가 있었고, 이러한 공감대는 이 캐릭터가 겪는 후반부의 갈등과 각성을 좀 더 감정적으로 전달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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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에서 아쉽게 놓쳤다면 VOD 서비스로!


만약 극장에서 아쉽게 놓쳤다면 오늘 (23일)부터 N스토어를 통해 서비스되는 VOD를 통해 '23 아이덴티티'를 만나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이 영화를 못 본 관객들에게도 권하고 싶지만, 이미 극장에서 본 관객들이라도 '언브레이커블'을 다시 보거나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재차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속편이라는 연장선에서 보았을 때 좀 더 특별해지는 지점들을 발견해 내는 것도 '23 아이덴티티'를 다시 보는 좋은 감상 방법 중 하나가 될 테니.


'23 아이덴티티' N스토어 VOD 보러 가기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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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고질라 (シン・ゴジラ, 2016)

현 일본 정치/사회에 대한 메시지의 한계


에반게리온의 후속 편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안노 히데아키는 고질라가 등장하는 실사 영화를 먼저 선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노는 '신 고질라'를 마치 야시마 작전의 실사 버전처럼 그려냈다. 실제 에바에 등장했던 배경음악까지 그대로 삽입되었기에 이러한 싱크로율은 더했는데, 고질라의 활약상(?)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안노의 '신 고질라'는 상당히 정치적이고 또 현재의 일본 사회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조금 의외의 영화였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의 시각은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동시에 상당히 우려할 만한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기도 해 실망스러움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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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 고질라'는 미지의 존재인 고질라가 일본 대륙에 상륙하면서 벌어지는 그 자체의 사건보다는 이 일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 사회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훨씬 더 비중 있게 그려낸 영화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자면 고질라는 그저 몇 걸음 걷는 것을 반복할 뿐이고 대부분의 시간은 정부의 각 부처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하고 또 회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일본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과 국제 사회 속에서 일본이 처한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치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의 시선은 꼭 일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에 좀 더 보편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물론 여기도 더 깊게 일본에 한정 지어 따져볼 만한 부분은 존재한다), 국제 사회 속 일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영화의 시선은 제3자의 입장 (굳이 침략당했던 당사국으로서의 입장을 꺼내기 전에도)에서 보았을 때 분명 불편하고, 시기상조의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핵공격을 두고 여전히 피해자의 입장에만 서고자 하는 그들의 시선과 자위대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현실을 최대한 고립과 무능으로 밀어 넣는 방식은, 결국 이제는 미국이나 국제 사회의 허용 없이도 스스로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위권 발동의 논리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일본 내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받고 지지받을 수 있는 주장일지는 몰라도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분명 시기상조와 편협한 논리일 수 밖에는 없었다. 


영화는 고질라가 도쿄 한 복판에 등장해 도시를 잠식해 나가는 상황과 이 가운데 정부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을 보여주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결국 아무것도 없잖아'라는 식의 한탄과 불만을 터뜨리는데, 처한 현실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이전에 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원인을 감안했을 때 어떤 부분들을 감수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동반되지 않은 점이 바로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자국 내에서만 머물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결국 '신 고질라'는 괴수 영화로서도 많은 것들을 시도해 보지 못한 채, 메시지의 문제와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아쉬운 영화였다. 


안노, 이제 에반게리온을 내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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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 마지막으로. 매번 마스킹을 잘해주던 극장에서 마스킹이 되지 않아 나중에 알아보니, 수입된 원본 소스 자체에 레터박스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정말 문제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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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이덴티티 (Split, 2016)

샤말란의 히어로 영화, 그 속편


M. 나이트 샤말란의 신작 '23 아이덴티티 (원제 - Split)'는 그의 두 번째 히어로 영화이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브레이커블 (Unbreakable, 2000)'의 속편이다. '언브레이커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샤말란의 영화이자 가장 매력적인 히어로 영화 그리고 가장 속편을 기다려 왔던 작품이기도 한데, 이렇게 은근한 방식으로 (사실상의) 속편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 그 반가움과 쾌감이 더 컸다. '23 아이덴티티'라는 국내 개봉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23개의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벌이는 사건을 통해 샤말란은 다시 한번 히어로 영화라는 장르를 자신 만의 방식으로 그려낸다.


참고 글 : 언브레이커블 - 코믹스 세계 속 선과 악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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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언브레이커블'이 전혀 다른 시작점에서 시작한 두 인물 데이빗 던 (브루스 윌리스)과 일라이저 (사무엘 L.잭슨)의 이야기가 한 곳에서 만나게 되면서 (정확히 말하자면 이 경우는 우연히 만났다기보다는 의도적이고 간절했던 만남이었지만) 더 큰 깊이를 갖게 된 것과 같이, 이 영화 '23 아이덴티티' 역시 크게 보면 두 명의 전혀 다른 인물이 각자의 트라우마와 하나의 사건에서 싸우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흔히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한 다중인격의 인물에 관한 것으로 한정 짓기 쉽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안야 테일러- 조이 (Anya Taylor-Joy)가 연기한 케이시 역시 절반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언브레이커블'이 데이빗 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23개나 되는 다중 인격이 하나의 인물에게서 표현되는 외부적인 요소가 드러나있지만, 이를 그저 일반적인 시선을 통해 비정상의 범주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병이나 흥미요소 정도로 즐긴다면 이 영화는 오히려 심심한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가장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은 마치 영화 속 플레처 박사와 같은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23개의 자아가 하나의 몸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동시에 더 나아가 진짜 이 자아들을 각기 다른 인물들로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 각자의 이야기와 갈등 요소에 좀 더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좀 더 외적 요소에 휘둘리지 않고 그 (여러 자아를 통칭)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이런 얘기를 일부러 하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의 신체에 여러 자아가 존재해 수시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한다는 흥미로운 사실 보다도, 이 여러 자아들이 하나의 신체에 존재하기 때문에 겪는 갈등과 문제들이 더 중요하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또한 이 부분은 결국 이 영화가 히어로 영화라는 점에서 히어로 혹은 빌런의 탄생 과정에 핵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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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부분의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개인적 트라우마 혹은 결핍 등이 존재하고 그것이 일종의 도화선이 되거나 영웅이 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아주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언브레이커블'이 더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일라이저라는 캐릭터가 그토록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돌연변이라고 소외되고 버려져야 했던 이들이 주인공인 '엑스맨'의 영웅들도 유사한 매력 혹은 공감대가 있었다.


 '23 아이덴티티'에 등장하는 그 (아까 말한 다중 자아를 통칭)와 케이시라는 캐릭터 역시 본인들은 원하지 않았던 이유로 인해 능력(사회에서는 병이라 일컬어지는)을 갖게 되었거나, 그것이 목숨을 구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는 점은 샤말란이 '언브레이커블'에 이어 다시 한번 말하고 싶었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샤말란이 이 인물들에게 보내는 시선과 이들에게 부여한 이야기의 가장 깊은 곳에는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아무 문제도 없어'라는 위로가 담겨 있다. 그 위로가 느껴져서인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는 그 어떤 드라마 못지않은 감정적 울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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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자연스럽게 예전에 썼던 '언브레이커블'에 관한 글을 찾아봤더니, 그 글 맨 끝에는 속편에 대한 바람이 있었다. 아, 이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언브레이커블'의 속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엇? 설마... 이 둘이 만나는 3편도 가능하지 않을까?


1. 샤말란은 '더 비지트'로 재능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더니 오래 기다렸던 '언브레이커블'의 속편으로 이렇게 또 한 번 팬심을 자극하네요. 

2. 베티 버클리는 볼 때마다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생각 남 ㅎ

3. 안야 테일러-조이는 출연작들을 보니 제대로 본 영화들이 없더군요. 이번 작품으로 완전 매력에 빠짐

4. 엔딩 크레딧을 자세히 보면 총 24개의 엔딩 크레딧이 나온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즉, 그의 새로운 자아가 탄생했다는 말?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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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Logan, 2017)

한 시대의 장엄한 퇴장


브라이언 싱어가 처음 '엑스맨'을 발표하고 난 뒤 수많은 엑스맨 영화들이 줄을 이뤘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울버린이 있었다. '퍼스트 클래스'를 거치며 찰스와 에릭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항상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는 휴 잭맨이 연기한 울버린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게 있어 울버린은 조금은 심심한 주인공 같은 존재였다. 물론 여기에는 독립된 울버린 영화 두 편의 실망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많은 뮤턴트들 가운데서도 중심에 있는 주인공답게 독립된 시리즈 영화를 가졌던 울버린이었지만, 두 편의 '울버린' 영화는 사실상 별다른 재미도 감동도 주지 못했었다. 오히려 '퍼스트 클래스'와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거치며 울버린, 아니 울버린으로 대표되는 그 세대의 대한 감정이 더 끓어 올라 분명히 별로라고 여겼었던 울버린 1,2편 마저 다시금 돌아보고 싶게 만들기도 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 울버린 영화 '로건'은 그 정점을 찍는 작품이었다. 시리즈의 마지막에 와서야 최고의 영화가 나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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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오랜 시간 꾸준히 사랑을 받으면서 탄생과 성장, 활약상의 일반적인 흐름 외에 노쇠하고 피로감에 지친 영웅들의 모습들도 만나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겼는데, '로건' 역시 그러한 시점으로 쓰인 이야기다. 더 이상 돌연변이가 태어나지 않는 시대에 죽어가는 마지막 돌연변이인 울버린의 현실은, 코믹북 속 주인공이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쓸쓸하고 고독하고, 또 늙고 지친 상태다. 그렇게 세상에서 완전히 멀어져 조용한 퇴장을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던 로건에게 우연히 휘말리게 된 어린 소녀 로라와의 만남은 자의든 타의든 그의 현실을 다시금 복잡한 모래 먼지 속으로 끌어들인다.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은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기 위한 그 이전 시대의 장엄한 퇴장의 관한 영화다. 찰스 자비에가 처음 로건과 스캇, 진 등을 가르쳐 자긍심을 일깨우고 한 시대를 이끌었던 것처럼, 로건은 한 편으론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찰스와도 이별해야 하고 다른 한 편으론 로라의 세계를 열어주어야 하는 어른으로서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찰스와 로건, 그리고 로라로 이루어진 이 유사 가족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아주 많은 의미를 담아낸다. 이 셋의 관계는 사실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흔한 관계와 구조이지만, 다른 엑스맨 영화들이 그러하듯 이들 각자가 돌연변이라는 정체성 즉,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었던 그들만의 사연으로 인해 가족이라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관계를 아주 특별한 가치로 승화시킨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그리고 가질 수 없었던 이들이 처음 갖게 된 가족이라는 존재, 그리고 가족 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평범한 순간들의 행복은 로건의 마지막 이야기를 더 쓸쓸하고 처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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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은 아주 직접적으로 '셰인 (Shane, 1953)'을 언급하며 서부영화 자체가 갖는 시대적인 의미와 서부영화 세계의 인물들이 가진 고독함과 쓸쓸한 정서에 빗대어, 엄청난 회복 능력을 가진 히어로 울버린이 아닌 노쇠하고 죽어가는 인간 로건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로건'은 울버린의 마지막 영화이자 그를 연기한 휴 잭맨의 마지막 엑스맨 영화이기도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가 영화 속 이야기 이상의 감동을 주었던 것은 주인공 코왈스키에게서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생이 그대로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울버린이라는 캐릭터를 떠올릴 때 휴 잭맨이라는 배우를 따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무려 17년간 울버린이었고 마지막까지 로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휴 잭맨이 연기하는 로건의 한 장면 한 장면은 어떤 캐릭터의 단순한 퇴장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로건과 휴 잭맨의 퇴장은 단순히 어떤 캐릭터의 마지막이 아니라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엑스맨 세계에서 중심에 있었던 한 세대의 퇴장을 의미한다. 물론 이후 또 어떤 리부트, 또 어떤 타임슬립 아이디어로 인해 이들은 언제든지 소환될지도 모를 불안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로건'이 선사하는 마지막은 그와 함께 한 수많은 관객들에겐 분명한 인사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렇듯 '로건'은 한 시대의 장엄한 퇴장을 고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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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과 이별하는 순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 이런 느낌이었구나.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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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소 고지 (Hacksaw Ridge, 2016)

신념을 갖는다는 것, 그 고통의 의미


멜 깁슨이 '아포칼립토 (Apocalypto, 2006)' 이후 10년 만에 연출을 맡은 영화 '핵소 고지 (Hacksaw Ridge, 2016)'는 2차 세계대전 중 양심적 병역거부자임에도 참전하여 많은 생명들을 구해냈던 실존 인물 데스몬드 도스의 실화를 담고 있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인해 총을 드는 것(살인을 하는 것)을 거부했던 데스몬드가 지옥같이 참혹한 전장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을 구해낸 이야기는 멜 깁슨이 평소 증오하던 히어로물의 대한 반증이자 대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핵소 고지'가 전쟁 영웅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면 물론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영웅적일 수 밖에는 없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최대한 영웅적 면모를 걷어 내고자 하는 동시에 그의 내면의 신념에 관한 갈등을 전쟁의 포화 속 보다도 더 큰 전장으로 그려낸다. 바로 그것이 멜 깁슨이 말하고 싶었던 진짜 히어로물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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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트라우마이자 종교적 이유로 인해 총기를 드는 것을 거부한 데스몬드는, 그럼에도 자신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참전하고 목숨을 바치는 현실에 홀로 참전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으로, 참전을 결심하게 된다. 물론 총기를 들고 일본 군을 향해 공격하는 것 대신 동료들을 구하는 의무병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훈련소에서부터 그의 이러한 신념은 지휘관과 동료들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사실 군에서 데스몬드에게 강조하는 논리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합리적이다. 일본군이 너에게 총을 겨눌 때, 더 나아가 자신의 가족을 해치려 할 때에도 총기를 들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에 공격을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을 것이냐 라는 질문에, 데스몬드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데스몬드의 신념은 합리적 계산이나 논리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양심에 따른 믿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저 살인을 할 수는 없다는, 설령 그것이 모두가 죽고 죽이는 것이 암묵적으로 동의되는 지옥의 전쟁터라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다는 그의 신념은, 결국 우여곡절 끝에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로까지 이어진다. 


데스몬드가 핵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이후부터는 좀 더 전형적이고 그야말로 영웅적인 전쟁 영화의 전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가 참전을 허락받기까지의 과정이 있었기에 이 참혹한 전장 속에서의 그의 영웅적 면모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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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라는 지휘 체계의 예외가 되는 순간부터 데스몬드는 모든 이와 자신의 신념을 두고 싸워야 했는데, 영화는 이 과정을 어쩌면 후반 부의 전쟁 보다도 더 큰 전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스몬드의 반대편에서 그를 내몰고자 했던 이들을 그저 신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나쁜 이들 정도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는 데스몬드를 그저 정신 나간 놈 정도로 여겼던 지휘관과 동료들은 그의 영웅적 활약이 있기 전에도, 그의 신념을 이해는 하지 못해도 인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선에서 모두가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그의 제대를 권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데스몬드도 정확한 답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관객 역시 쉽게 답할 수 없는, 더 나아가 데스몬드의 신념을 과연 현실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가 하는 선뜻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너의 신념 때문에 네 동료와 가족의 목숨을 지킬 수 없다고 해도 끝까지 신념을 지키겠는가 혹은 고집하겠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실화로 존재해 세상에 알려지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거의 다 그러한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 일종의 증명을 해낸 인물들일 것이다. 그들 역시 대부분은 스스로 자신의 신념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증명해 내기 전에는 (대부분은 죽음으로 증명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다)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고통받고 본인 스스로도 내적으로 엄청난 갈등으로 더 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핵소 고지'의 주인공인 데스몬드의 이야기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전장에서 보여준 기적 같은 활약상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의 동료들은 물론 후세에 이들이 그가 가졌던 신념에 대해 지금처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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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말해 모든 억압하는 것들을 이겨내 기적 같은 일을 해내는 것으로 스스로 증명해야만 자신의 신념을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참담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마치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예수조차 증명이 필요했던 신념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갖기 어려운 것인지 또 지켜내기 어려운 것인지를, 반대로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 세상에 증명해 낸 데스몬드의 이야기를 보며 곱씹어 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멜 깁슨의 '핵소 고지'는 전쟁 영화로서의 미덕도 충분히 갖고 있는 영화다. 핵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벌어지는 전장의 묘사는 그 어떤 전쟁 영화에도 뒤처지지 않는 공포감과 현실감 그리고 참혹함을 전달한다. 고지 위에서 쉴세 없이 빗발치는 적군의 총알들이 주인공과 동료 사이를 관통하고 또 빗겨 나가는 장면들의 몰입감은 적당한 핸드 헬드와 압도적인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완성된다. 새삼스럽지만 '핵소 고지'는 극장에서 꼭 봐야만 하는 영화다. 그것도 사운드 환경이 우수한 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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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핵소 고지의 높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보다는 3분의 1 정도의 높이더군요. 영화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3배 정도 높이를 높였다고. 그리고 실제 데스몬드 도스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더군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히려 영화 속 데스몬드가 극적 현실감을 위해 더 덜어낸 느낌.


2. 메가박스 M2관을 일부러 찾아가서 본 보람이 있었어요. 전장의 표현에 있어서 사운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꼭 사운드가 좋은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작품입니다.


3.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 곳곳에서 젊은 멜 깁슨이 보이더군요. 특히 그가 바보처럼 환하게 웃을 땐 멜 깁슨의 그 환한 미소가 겹쳐지더군요. 사실 이 캐릭터에 앤드류 가필드가 과연 어울릴까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는 좋은 연기였어요.


4. 아, 그리고 간혹 2차 세계대전을 그린 미국 영화들이 범하는 실수에는 일본군을 그저 짐승이나 악마로 그려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신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영화로서, 일본군 역시 그들이 믿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이들이라는 점을 말미에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우려를 잘 피해 가고 있어요. 너무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이 정도로 신념의 개념으로 각각 묘사해 내는 것이 더 좋은 방향이었다고 생각되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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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 (Moonlight, 2016)

나 스스로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우린 이런 영화를 평생 기다렸다' '판을 바꾼 최고의 걸작' '지금껏 본 적 없었던 영화' 등의 수식어와 수많은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으로 엄청난 기대를 갖게 했던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 (Moonlight, 2016)'. 어떤 영화나 거장 감독의 작품이든 간에 그 영화가 제대로 평가받는 데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자 부담은 아마 기대감 그 자체일 것이다. 이 기대감이라는 것은 양날의 검과도 같은데,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것에 성공한 영화는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높은 기대감을 안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더 높은 장애물과도 직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는 이미 영화를 본 언론들과 평론가들의 평가 그리고 수많은 수상 경력들로 인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엄청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던 일종의 불리한 영화였다. 특히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영화에 내려진 평가 수식어들은 절로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부 최고 수준의 문장들이어서 더욱 그랬고 (그것이 영화 홍보에 의례 사용되는 방식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라이트'는 정말로 그런 과하다고 여겨졌던 수식어들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영화였다. 가장 특별하면서도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결국 모두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낸, 놀라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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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샤이론, 블랙의 세 챕터로 이뤄진 영화는 각각 아이와 소년, 그리고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한 사람이 겪는 가족과 사랑, 성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 흘러가는 바람처럼 그려낸다. 흘러가는 바람과 같다는 건 이 영화가 샤이론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마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혹은 무언가와 부딪혔을 때야 비로소 간접적으로 나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바람처럼, 영화는 리틀이 샤이론으로 또 블랙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 속에서 겪는 아주 중요하지만 섬세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인생의 핵심적인 순간들과 감정들을 표현해 낸다. 


샤이론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그가 동성애자로서 겪는 성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그로 인해 흑인 남성 사회에서 겪어야만 하는 또 다른 갈등이다. 다른 세계 보다도 더 남성성이 강조되곤 하는 흑인 남성 사회 속에서 동성애자로서 성장해야 했던 샤이론의 내적 갈등과 외적 상처들을 영화는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맨 처음 이 영화가 화려한 수식어들로 표현되는 것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영화가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대다수의 동성애나 성 소수자를 다룬 영화들이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강조하거나 아주 일반적이지 않은 누군가의 삶을 사건처럼 그려내는 방식으로 묘사하면서 '이런 이들도 우리 사회의 일원이다' 혹은 '이런 삶도 존재한다'는 식의 애매한 시선으로 보편성과 공감대를 얻어내고자 하는 반면, '문라이트'는 이들과는 확실히 시선과 방식에 있어서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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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성장이라는 과정 속에서 동성애자로서 겪어야 하는 내적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하면서도 이것이 단순히 이성애자들이 겪는 성장 과정의 내적 갈등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쉬운 보편론을 취하지 않았고, 자극적인 섹슈얼리티의 측면을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거하다시피 하면서도 주인공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절실함과 확신을 표현해 내는 것에 더 집중했고, 그토록 아름답게 표현해 냈다. 


다시 말해 '문라이트'가 성취해 낸 보편성은 단순히 '동성애도 이성애와 다르지 않아'의 쉬운 선택도 아니고 반대로 '동성애는 동성애만의 특별함이 있어'도 아닌, 동성애자로 성장해 가는 한 인물의 감정선을 가장 개인적인 시선으로 그려내면서 결국 그 진실됨으로 편견의 경계를 허물고 보편성을 얻어낸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뭐랄까, '문라이트'는 아직 성소수자들에 대해 편견이 존재하는 현재 사회의 시선으로 보았을 땐 마치 미래에서 온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건강한 미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어떤 영화 같다는 생각. 머지않은 미래엔 분명히 그렇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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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이 샤이론으로, 샤이론이 블랙으로 성장하면서 결국 자신의 가족과 현실,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선택하게 되는 것처럼, '문라이트'는 결국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는 한 인간의 가장 개인적이고 또 보편적인 이야기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 무엇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의외로 나 스스로가 된다는 것에 중요성을 잊거나 되는 방법 조차 잊어버린 이들이 많다. 나 자신이 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일인지를 이 영화는 깨닫게 해준다. 그것이 가장 큰 메시지가 아닐까.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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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 2016)

부유하는 고독한 영혼에 대해


모린 (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유명인의 퍼스널 쇼퍼로 일하는 동시에 영혼과 이야기할 수 있는 영매이기도 하다. 역시 영매였던 그녀의 쌍둥이 오빠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와 대화하고자 노력하고 기다리던 모린에게, 어느 날 알 수 없는 자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누구의 장난인지 아니면 쌍둥이 오빠로 부터의 메시지인지 모를 문자가 계속되며 모린은 점점 자신의 숨겨졌던 욕망을 솔직하게 고백하게 된다.


올리비에 아싸야스와 크리스틴 스튜어트 외에는 아무런 정보 없이 보게 된 영화 '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 2016)'는 흔히 고스트 스릴러, 그러니까 유령이 등장하는 스릴러 영화로 소개되곤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흥미를 자극하는 장르적 재미 이상의 많은 영감을 제공하는 독특한 영화다. 69회 칸영화제에서 올리비에 아싸야스에게 감독상을 쥐어주며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이 영화는, 불친절하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주거나 혹은 불완전한 연결고리를 그냥 방치하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 모호하고 불완전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확실히 이 영화는 호불호가 분명하게 나뉘기 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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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쇼퍼>는 모호한 이야기의 구성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 고독에 관한 영화다. 모린이 세상을 떠난 쌍둥이 오빠와 대화하기 위해 기다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와 약속을 했기 때문 만은 아니다. 오히려 죽은 자의 영혼과 대화하려는 노력은 현실에서의 고독함을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탈출구처럼 여겨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모린이라는 캐릭터가 속한 세계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녀는 현실에선 아주 유명한 셀러브리티의 옷과 액세서리를 대신 고르고 구매해주는 퍼스널 쇼퍼다. 즉, 가장 화려한 세계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지만 실제로 그 세계에는 속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괴리감으로 인해 더 큰 고독감과 욕망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영매라는 존재는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자로서 한 편으론 퍼스널 쇼퍼라는 세계와 정반대에 놓인 존재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영매라는 존재 역시 고독함과 동떨어져 있지 않은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어쩌면 그녀가 처한 세계 (상황이라고 하지 않은 건, 오빠의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가 모린의 영화 속 행동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이미 그 이전부터 모린이라는 인물에게 있어서는 고독함과 고립이라는 정서가 짙게 깔려있었다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는 애초부터 불안하고 그래서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이런 모린에게 결정적으로 오빠의 죽음과 이어지는 정체불명의 문자 메시지가 도화선이 되면서 모린의 자아에 금기시되어 있던 욕망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다음 단락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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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보내오던 인물이 누구인지 드디어 존재가 드러나고 퍼즐이 어느 정도 맞춰져 마무리될 때, 영화는 또 한 번의 불확실함을 제공한다. 마지막 장면이 없었더라면 당연히 문자를 보내오던 인물은 키라과 내연 관계에 있던 잉고였고, 그렇게 한 바탕 자신의 욕망과 갈등을 겪던 모린이 모든 사건이 끝난 뒤 개리를 만나러 간 타국에서 드디어 오빠의 영혼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을 텐데, 마지막 그 대화가 오빠나 다른 영혼과의 대화가 아닌 모린 자신과의 대화라는 것으로 마무리되면서, 그렇다면 과연 모린은 언제부터 죽은 자였는지, 그 간 문자 메시지로 오간 대화 역시 잉고와의 대화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영혼과 나눈 대화인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영혼과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니 그녀의 영혼이 인식하지 못한 채 벌인 일종의 환상인지, 여러 가지 모호함이 그대로 남게 된다.


가장 설득력이 높은 이야기라면 호텔에서 잉고가 나오기 전 마치 영혼이 호텔을 나오는 것과 같은 시퀀스로 미뤄 보았을 때, 잉고가 그 호텔에서 모린을 살해한 것으로 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 해도 완벽히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기에 이것 역시 확언할 수는 없다. 


맨 처음 <퍼스널 쇼퍼>가 많은 이들에게 호불호가 나뉘는 영화라는 점을 이야기했는데, 그 호불호의 원인은 내러티브의 완성도 혹은 설득력에 있을 것이다. 반대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퍼스널 쇼퍼> 같은 영화는 일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나 내러티브 자체가 핵심이 되는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즉,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이 영화는 흩어진 퍼즐 조각을 완성하는 것에 목적이나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 퍼즐이 조각 조각 흩어진 채 남겨져야 했는지를 주목하고 퍼즐을 맞춰 가는 과정 자체에 더 큰 목적이 있는 (설령 애초부터 맞지 않는 조각들로 완성해 나가야 했던 퍼즐일지라도)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완전한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위한 영화다. 올리비에 아싸야스는 크리스틴 스튜어트라는 배우의 매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설령 이 영화의 결말이나 방식에는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크리스틴 스튜어트라는 배우의 매력에는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측면이 모호한 영화에서 이것 하나 만큼은 분명하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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