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에 국내 발매된 책을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으니 많이 늦은 편이네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 가운데서도 <에반게리온>을 특히 좋아하는데(몇달 전 회사에서 TV판 전편을 매우 하루 한편씩 DVD로 감상하기도 했었죠),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다보니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에 대해서도 관련 검색을 해보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 가운데 바로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얻고서는 언젠가 한번 사봐야 하던 중, 얼마전에야 드디어 질러서 보게 되었습니다(가격도 저렴해요, 5000원!).

이 책은 안노 히데아키의 부인이자 만화가인 안노 모요코의 작품인데, 내용만 보자면 138p 짜리 단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노 모요코가 남편인 안노 히데아키와 만나고 결혼하고 살아가면서 겪은, 그러니까 오타쿠의 부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재미있는 그림과 이야기들로 가득 담아내고 있는 책입니다.

오타쿠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헨타이'와 결합하여 좀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남한테 해끼치는 것도 없고,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보통 사람들보다 좀 더 애착을 갖고 집중한다는 것 정도죠. 물론 우리가 흔히 오타쿠라고 부르는 이들은 그 분야가 '애니메이션'이나 '망가'로 주로 집중되어 있는 편이긴 하지만, 어쨋든 개인적인 생각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쏟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오타쿠'라는 단어에 전혀 부정적인 느낌은 없는 편이에요.

오타쿠 하니까 하나 에피소드가 떠오르는데, 지난해 초였던가 어느 영화 잡지사 면접자리였던 것 같은데 제 블로그와 제가 쓴 글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한 직원분이 이렇게 여쭤보시더군요. '혹시 오타쿠세요?'
그러길래, 약 1초 당황한 다음에(정확히 1초였음) 전혀 흔들림 없는 말투로 얘기했죠. '리얼 오타쿠들 사이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소소한 팬이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간혹 오타쿠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이 말은 왜했지 -_-;;)'
확실히 요즘은 문화 컨텐츠를 돈주고 즐기는 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적다보니, CD나 DVD를 사는 것만으로도 조금 별난 사람이 되어버린 세상이죠. 그런데 좋아하는 애니의 피규어를 해외 경매사이트에서 구매하거나, 치히로가 울면서 먹었던 주먹밥 모양의 피규어를 구매했다며 좋아하거나, 뉴타입 잡지에 아스카 티셔츠가 부록으로 나온 걸 보고 입을 수 있을까 와는 별개로 살까 말까를 고민하는 이라면 오타쿠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 여튼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안노 히데아키가 어느 정도 매니악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이 정도로 오타쿠인줄은 몰랐네요 ㅎ 정말 에바가 그냥 나온게 아니구나 할 정도로(오히려 이 책을 보고나면 에바가 너무 얌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폭주하는 초호기처럼 몰려옵니다!) 엄청난 베스트 오브 더 오타쿠더군요. 이 책이 재미있는건 단순히 안노 감독의 오타쿠 적인 삶을 조명한 것 뿐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화자가 그의 아내라는 점, 그리고 오타쿠가 아닌 사람이 오타쿠와 살아가면서 겪는 변화랄까? 그런 부분이 아주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타쿠가 주인공인 만화라 그런지, 관련 지식이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웃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도 일반인 보다는 한 걸음 앞서있는 미약한 오타쿠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 만화에 등장하는 관련 작품들 가운데 약 20% 정도 밖에는 소화하지 못하겠더라구요. 역시 본토의 오타쿠는 그 스케일이 다르더군요. 아, 하지만 이 작품들을 100% 모른다고 해도 크게 감상에 지장은 없는 편입니다. 그 작품 속 캐릭터를 알고 있다면 더 재밌긴 하겠지만 모른다고 하더라도 분위기로 짐작하며 넘어갈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 내용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장담하건데 이 책은 300%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만화가 아닐 수 없을 듯 합니다. 왜냐면 저도 그 20%만을 공감했음에도 그 순간에 무언가 짜릿한 희열이 있었거든요 ㅎㅎ 아, 그리고 도서 뒷 편에 본편에서 언급된 작품들의 간단한 설명을 추가로 해주고 있어서 나중에라도 한 번 찾아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의외의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결혼하고 싶다'랄까?
오타쿠인 안노 히데아키를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안노 모요코의 존재는, 히데아키를 에바 감독으로서 부러운게 아니라 모요코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더 부럽도록 만듭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제 마음대로 완전 오타쿠 같은 전문 분야의 말들을 하루 종일 미친듯이 쏟아내도 다 알아들을 이가 있다면 그것도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구요. 여튼 애니메이션에 설사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이 부부의 이야기를 제3자 입장에서 보는 재미도 참 흐뭇한 일입니다. 책 말미에는 안노 히데아키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도 실려있어요. 실제 만화속 캐릭터의 동작을 손수 시연해 주시는 히데아키의 사진들도 인상적이구요 ㅎㅎ

그래도 나도 나름 오타쿠지 하는 분들이 이 책을 보게 된다면 아마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겸손의 미덕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한편 '그래 나는 아직 덜 미쳤어' 라고 다행(?)스럽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래 좀 더 수련에 정진해야겠다!'라고 각오를 다지게 될지도 모르겠구요. 여튼 안노 모요코의 '감독 不적격' 적극 추천입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는 본인이 직접 촬영하였으며 인용을 위해서만 사용되었고, 그의 대한 권리는 대원씨아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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