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뤼미에르 (珈琲時光 Cafe Lumiere. 2003)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듯해도, 나아간 세계



사실 허우샤오 시엔의 '카페 뤼미에르' DVD를 구입한 것은 아주 오래되었다. 이 DVD가 막 출시되었을 때 볼 것도 없이 프리오더를 통해 구입했으니 벌써 수년 전에 일이다. 그런데 가끔 그런 일이 생기지만, 이 타이틀 역시 그 동안 제대로 볼 여유가 아니 기회가 없었다. 항상 보고 싶은 영화로 DVD장에 진열되어 있었음에도 매번 다른 신작 타이틀에 밀려 기회를 잃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던 오늘, 주말 낮에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남은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매번 선택을 받지 못했던 '카페 뤼미에르'를 드디어 꺼내 보게 되었다. '드디어' 보게 된 연유를 제외하더라도, 허우샤오 시엔이 오즈 야스지로에게 바친 겸손한 존경의 오마주는 기대 이상으로 깊이 있는 여운을 남겼다. 이것은 정말 여운이다. 왜냐하면 볼 때나 보고 난 직후에는 정확히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 지날 수록 무언가 느껴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Shochiku. Imagica. All rights reserved

'카페 뤼미에르'를 얼핏보면 마치 이 영화가 일본이나 도쿄에 관한 영화로 느껴질 지도 모르겠으나, 이 작품을 만든 대만 출신의 허우샤오 시엔의 말처럼 자신이 모르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설명하려고 하기 보다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려낸 작품인 동시에 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교차'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항상 사건에 중심을 둔, 즉 기승전결에 얽매인 보기에 익숙해져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작품은 몹시 심심한 작품이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바로 그 측면을 가장 잘 뒤집는 동시에, 사건이 중심이 되는 극적인 영화들 보다도 더 큰 울림을 안기고 있다. '카페 뤼미에르'의 사건이라면 여주인공 요코의 임신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요코 (히토토 요우)'는 대만 남자친구와의 임신과 더불어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한 편으로 이 영화는 바로 이 요코의 임신사실이 그녀의 부모와 친구인 '하지메 (아사노 타다노부)'그리고 요코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가에 대한 영화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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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당황하고 무언가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결국 끝내 전하지 못한다. 영화는 바로 이 말로 하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게 되는 내면의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낸다. 화면의 구도 역시 말하는 이 보다는 듣는 이의 심정을 엿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보는 장면에는 이런 내면의 갈등과 가슴앓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딸의 임신사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마련된 이 자리에는 그저 말없이 정종을 마시는 아버지와 이런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는 아내, 그리고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알지만 역시 어쩔 수 없었던 요코의 마음만이 내면에 있을 뿐이다. 하지메와의 대화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요코의 이야기를 들은 하지메는 그간 전하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끝내 접어두기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그 갈등의 과정과 결과 모두다. 일단 영화는 겉으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혹은 본인은 원치 않는 일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 갈등의 과정을 러닝타임 내내 그리고 있다. 단지 다른 극적인 영화들처럼 소리내어 말하지 않을 뿐이지 이들의 마음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리고 결국 담담히 이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요코의 임신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으론 영화가 선택한 이 같은 방식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 극적이고 자극적인 것들에 익숙해져 무뎌졌을 뿐, 사실은 이 영화 속 인물들과 같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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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영화의 정서를 대변하는 직접적인 비유로는 전철이 있다. 처음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작품이 마치 일본이나 도쿄에 관한 영화로 느껴졌던 이유가 바로 전철을 중심으로 그 역과 역 사이, 그리고 장소에 대한 이미지들 때문이었는데, 영화는 이런 전철의 특성을 통해 '연결'의 정서를 전한다. '카페 뤼미에르' 속 인물들은 마치 복잡한 전철 노선들 처럼 하나인듯 만났다가도 각자의 길로 헤어지기도 하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한다. 이들에겐 시작점이 있고 가끔 만나고 갈아타는 환승역 같은 곳이 존재하지만 결국 자신 만의 길로 마무리 된다.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그 교차되는 전철의 이미지는 더 인상 깊을 수 밖에는 없었다. 매일 만나지만 서로 각자의 길을 향해 흘러가는 것. '카페 뤼미에르'에는 이런 성숙함과 동시에 쓸쓸함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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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즈의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나로서도 확실히 오즈의 대한 오마주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식사 장면.
2.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그리고 올해 두 차례 다녀왔던 도쿄의 익숙한 풍경 덕에 또 다른 인상을 받았던 작품이었어요.
3.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오즈 야스지로 DVD 컬렉션을 수년 전에 사두고도 제대로 감상을 못하고 있는데, 올 연말에는 더 늦기전에 차분하게 감상하고 싶네요. 이 영화로서 더 늦기전에 봐야할 동기를 얻었어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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