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1:4 독일


1. 이번 월드컵 16강 대진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기대를 했었던 경기가 바로 이 경기였다. 사실 조별 리그에서 보여준 경기력만 본다면 최악의 경기를 펼친 잉글랜드는 물론, 독일 역시 그리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마치 '결승전'과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반대로 부진했던 두 팀이 16강전에서 불꽃이 붙는 다면 예전 같은 멋진 경기를 펼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도 컸다.

2. 카펠로 감독은 지난 슬로베니아 전과 동일한 라인업, 제임스 밀너와 업슨 그리고 데포를 선발로 기용했다. 슬로베니아전 업슨과 밀너의 기용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더 확고한 대체선수가 없는 상황에서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업슨은 이날 수비 불안의 주된 요인이 되어버렸다.

3. 경기 초반 클로제의 슛팅은 분명한 업슨의 실책성 플레이였다. 어깨싸움에서 클로제에게 좋은 자리를 빼았기면서 너무 이른 시간에 골을 허용하고 말았는데, 이 이후 업슨의 플레이는 계속 위축되어 있었다. 잉글랜드는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았지만 그 기본에는 역시 수비 불안이 가장 큰 불안요소였다. 큰 무대 경험이 많지 않은 업슨은 이 실책으로 인해 더욱 위축되었고, 글렌 존슨은 수비보다는 오버래핑에 더 집중하는 듯 했으며, 수비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존 테리마저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이었다(이것이 컸다. 존 테리가 무너지면서 포백 라인은 너무 쉽게 계속 공간을 허용했다).

4. 조별 리그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클로제는 이 골과 더불어 완전히 살아났고, 화려한 발 기술까지 선보이며 왜 자신이 월드컵의 사나이인지 그 이유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클로제가 살아나면서 포돌스키 역시 살아났고, 예전 같은 힘의 축구가 아닌 기술 축구로 변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5. 이 날 차범근 해설위원도 여러번 지적했던 점이지만, 이런 독일의 변화는 사실 놀라웠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와 맞물려 발생한 긍정적인 시너지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독일 대표팀의 미래도 밝게 했는데, 특히 그 가운데 외질 선수의 활약은 정마라 이번 월드컵이 낳은 스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단했다. 잉글랜드의 수비진이 쉽게 붕괴된 탓도 있지만, 스피드나 기술 면에서 잉글랜드를 완전히 압도하며 독일에게 쉬운 찬스들을 만들어준 외질의 활약은, 그야말로 MOM 감이었다. 아마도 이번 월드컵이 끝나면 유럽 시장에서 가장 뜨거울 스타 중 한명이 아닐까 싶다.





6. 클로제와 포돌스키의 골, 그리고 업슨의 만회골로 2:1로 뒤지던 잉글랜드는 전반 38분경 램파드의 슛으로 동점을 만드는가 했다. 들어간 걸 보고 좋아하며 뒤돌아선 카펠로 감독처럼, 나 역시 이건 너무 확실한 골이라서 노골로 선언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이것은 결국 노골로 선언되었다. 크로스바를 맞고 아래로 바운드 되어 골라인을 넘었나 안넘었나 애매한 판정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램파드의 이번 경우는 너무도 확연하게 골라인을 한참 넘어간 터라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 본것을 심판만 보지 못했다. 주심이야 못볼 수 있다지만 골라인에 서있던 선심이 보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데, 잉글랜드가 이 골을 넣었더라면 경기 양상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7. 지난번 대한민국과 우루과이 전을 이야기하면서 '만약'은 없다 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누가 투입되었더라면, 그 자리에 다른 선수가 있었더라면 하는 만약은 분명 의미가 없지만, 명백한 오심으로 골로 선언되었어야 할 골이 골로 인정되었더라면 하는 만약은 분명 의미가 있다. 경기에 뒤지고 있을 때와 비기고 있을 때는 전술상 달라질 수 밖에는 없기 때문에, 만약 동점이 되었더라면 잉글랜드가 좀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는 없다.

8. 명백한 오심이 있긴 했지만 잉글랜드의 경기력은 그들의 네임밸류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웨인 루니는 리그에서 보여주었던 활동력 넘치는 모습을 거의 한번도 보여주질 못했고 (퍼거슨 감독이 걱정할 만하다), 부상선수가 많았다고는 하지만 수비진의 붕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수준이었으며, 한 때 세계 최고의 미들진이라 불렸던 미드필더 역시 중원에서 상대를 압박하거나 위협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9. 세계 최고의 리그를 가지고 있는 잉글랜드는 이로서 다시 한번 자국 선수 보호와 많은 경기수에 대해 고민을 갖게 되었다. 확실히 잉글랜드는 지난 대표팀들에 비해 임팩트가 많이 부족해진 것이 사실이며, 자국리그와 챔스리그 등 많은 경기수로 인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지 못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진정한 축구 종가라면 이제 심각하게 대표팀에 대한 개선을 해야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싶다.




10. 이로서 내가 심정적으로 가장 응원하던 첫 번째 팀의(대한민국 제외) 월드컵은 16강에서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응원할 팀은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뿐이다. 최근 본 마라도나의 다큐멘터리 때문에 더 끌리게 된 점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어쨋든 브라질이나 독일 등이 아닌 아르헨티나가 오랜만에 월드컵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잉글랜드 1:0 슬로베니아


1. 팀 내분 및 실력저하로 최악의 월드컵을 보낸 프랑스에 버금갈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탑 클래스 팀이라면 잉글랜드를 바로 꼽을 수 있을텐데, 사실상 승리해야만 16강에 오를 수 있었던 슬로베니아전, 카펠로 감독은 기존 조별 경기와는 조금 다른 조합을 들고 나왔다.

2. 루니의 파트너로 헤스키 대신 더메인 데포를 선발로 내세웠고, 무엇보다 측면 미드필더로 발 빠른 아론 레논이 아닌 제임스 밀너를 투입했으며, 중앙 수비 역시 부상으로 빠지게 된 레들리 킹 대신 매튜 업슨을 내세웠다. 확실히 네임 벨류나 전체적인 임팩트면에서는 무게가 떨어지는 라인업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이번 월드컵 카펠로 감독의 가장 좋은 선택이 되었다.

3. 전반 23분, 새롭게 선발에 들어온 제임스 밀너의 크로스를 역시 선발로 첫 투입된 데포가 골로 연결시켰고, 이 골은 결승골이 되었다. 제임스 밀너는 그래도 경기 막판까지 측면에서 괜찮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그나마 그 정도의 활약이 있어서 윙백인 글렌 존슨이 좀 더 수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

4. 사실 카펠로의 잉글랜드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윙백인 글렌 존슨의 전술적 중요도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강점이라면(강점이자 약점) 후덜덜한 네임벨류의 미드필더 진을 들 수 있을텐데, 그럼에도 윙백인 글렌 존슨이 거의 미드필더, 더나아가 측면 공격수 처럼 뛰는 전술은 수비 조직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잉글랜드의 전형에 있어서 그리 적합한 전술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도 초반에는 글렌 존슨이 계속 하프라인을 넘어와 공격수처럼 활약했었는데, 골을 넣고 나서는 좀 더 수비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5.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사실 잉글랜드는 부상 선수 없이 모두가 승선했다하더라도 팀 조직력에 있어서는 항상 의문 부호를 갖게 하는 팀이었다. 자국 리그내에서 치열한 라이벌 관계에 있는 선수들이 많고(이런 비슷한 이유로 스페인도 국대는 스펙에 비해 좋은 성적을 못내곤 했는데, 최근 스페인은 자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만큼이나 해외에서 뛰는 선수가 많아 스페인이 좀 더 나아보이는 편이다), 팀으로서 조직력을 맞춰 볼 만한 시간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은 대단하지만 잉글랜드라는 팀으로서는 그 스텟을 100%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6. 거기에다가 존 테리의 스캔들로 퍼디난드가 주장이 되었으나, 퍼디난드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제라드가 다시 주장을, 하지만 존 테리는 아직도 자신이 주장인냥 행동하려고 하고, 감독과의 묘한 갈등 관계 등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던 팀 분위기까지 겹쳐, 잉글랜드는 이번 조별 경기 내내 그리 좋은 경기를 하지 못했다. 1:0으로 승리한 이날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시종일관 답답한 경기였으며, 골찬스도 거의 없었고 깔끔하지도 못한 경기였다.

7. 여튼 경기 하루 전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카펠로 감독에게 사과를 하며 다시 한번 경기에 집중하기로 한 존 테리의 의지는 엿보이는 경기였다. 전반 슬로베니아의 거듭되는 골 찬스에서 몸을 던져가며 육탄 방어하는 (본문의 메인 이미지로 있는, '인간어뢰 존 테리'로 불리는 바로 저 장면!) 모습에서는 적어도, 팀에게 미안한 마음에 헌신하려하는구나 라는 진정성은 엿보였다. 하긴 존 테리는 그런 남자였다. 물론 '남자'여서 문제된 것이기도 했지만.

8. 웨인 루니의 부진은 맨유 팬으로서 아쉬운 부분이었다. 사실 몇 번 골로 연결될 만한 장면이 있었는데 정작 골로 연결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악제였다. 이런 분위기가 한 두 경기 이어질 수록 좋던 분위기마저 사라져버리기 마련인데, 이 날 교체해준 것이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풀 타임으로 뛰면서 골을 넣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못 넣었을 경우를 생각해봤을 땐 차라리 미리 빼준게 나았을 듯). 어쨋든 16강에 오르게 되었으니 (더군다나 숙적 독일을 만나게 되었으니) 좀 더 파이팅 넘치는 진짜 루니 (인민 루니 말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9. 아, 그리고 중앙 수비수로 나온 웨스트햄 소속의 매튜 업슨은 확실히 큰 경기 경험이 많지 않아서인지 불안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마이클 도슨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어쨋든 캐러거, 킹, 퍼디난드가 다 없는 상황에서 잉글랜드의 센터백은 불안불안 한 것이 사실이다.

10. 독일이 가나를 꺽고 16강에 오르면서 가장 기대되는 16강전 대진이 완성되었다. 잉글랜드 vs 아르헨티나를 능가하는 최고의 라이벌, 잉글랜드와 독일의 대진이 그것인데, 두 팀 모두 부진한 터라 소문난 잔치에 볼 것 없는 경기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두 팀 모두 이 라이벌 전을 계기로 오기로라도 예전의 경기력을 찾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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