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타카의 레드필]

감상과 비평보다 설명과 정리가 더 중요한 시대



영화 비평의 시대가 죽다시피 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비평이 주를 이루던 영화 잡지나 매체들은 거의 다 사라졌고, 영화 평론은 그 존재 의미에 대해 토론할 때만 가끔씩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주류에서 아주 아주 멀어졌다는 것뿐. 영화 평론가 중심의 비평이 주를 이루던 시대 이후에 등장한 것은 개인 블로거들을 중심으로 한 감상평 혹은 리뷰 중심의 시장이었다. 여러 영화 커뮤니티와 카페를 중심으로 다양한 감상평과 리뷰 들이 한 때 관심도 받고 그 숫자도 상당했던 시기가 바로 몇 해 전까지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이는 감상평과 리뷰 자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도 있지만,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 중심의 플랫폼에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플랫폼으로의 주류 이동으로 인한 외부적인 요인도 적지 않았다. 


단문, 아니 짧은 이미지와 영상 위주의 플랫폼이 대세를 이루게 되면서 영화 관련 콘텐츠 역시 이에 맞게 변화했다. 아무래도 이 영상과 이미지 중심의 플랫폼 기반에서는 긴 호흡으로 어떠한 비평이나 감상을 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의 현실은 긴 호흡의 글을 소화할 흥미도 시간도 없는 듯했다. 그렇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에 눈에 띄게 성장한 콘텐츠가 바로 영화를 설명하고 알기 쉽게 정리한 콘텐츠들이다. 


사실 이런 설명과 소개, 정리 중심의 콘텐츠는 이전부터 계속 있어왔는데, 그 대상의 범위가 거의 전방위 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과 시장의 수요가 더 늘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이전에 있었던 이런 류의 콘텐츠들은 명확한 지향점이 있었다. 주로 어떤 영화의 팬들이라거나 장르의 팬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콘텐츠가 많았다. 이를 테면 007 시리즈 전체를 훑어가며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개봉 이후 흥행과 관련된 이야기까지, 007 영화의 팬이라면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콘텐츠였고, 콘텐츠의 질도 상당했다. 007 시리즈를 예로 들었던 것처럼 이런 종류의 콘텐츠들은 주로 역사가 오래되었거나 혹은 우여곡절이 많았다거나 하는 영화 혹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설명, 정리 중심의 콘텐츠들은 지향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콘텐츠의 소비자층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일 텐데, 영화를 감상하고자 하는 관객들보다는 지식의 측면에서 알고자 하는 관객들의 욕구를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편이다. 즉, 단순하게 말하자면 회식 자리에서 혹은 친구들과의 대화 과정 속에서 등장하는 하나의 이슈 요소 정도로 소비되는 경향이 매주 짙어졌다. 예를 들자면 '어제 뭐 봤어?'라며 TV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프로를 보지 않았으면 다음 날 대화에 끼기 어려운 것처럼, 인기가 있거나 화제가 되는 영화를 보지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면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음으로 요약정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두 시간 남짓의 영화를 단 몇 장의 이미지나 동영상으로 간략하게 정리해주는 콘텐츠들이 매우 인기가 많다. 이런 설명 콘텐츠들이 절대 일방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아닌데,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은 좀 든다. 영화가 재미있었는지 없었는지 하는 것보다 줄거리나 해설된 내용을 내가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거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실 관계의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배우다시피 하는 것에 더 흥미와 관심이 몰리는 것은 아무래도 본질과는 조금 멀어진 느낌이다. 


예를 들어 최근 개봉한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같은 경우, 레이가 누구의 딸인지 카일로 렌과 핀의 광선검 듀얼 설정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 등은 물론 흥미롭고 재미있는 얘기 거리이기는 하지만, 스타워즈라는 한 편의 영화가 어떠한 점이 재미있었는지 어떤 점은 별로였는지,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떠한 것들을 느꼈는지 하는 것보다 더 먼저 이야기되거나 혹은 이런 것들은 아예 이야기되지 조차 못하는 것은 조금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다.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는 적지 않은 많은 관객들이 보았지만, 각자의 스타워즈가 탄생되었다기보다는 정리된 몇 가지의 스타워즈만이 남게 된 듯하다. 예전엔 어떤 영화가 개봉하면 재미있는가 없는가가 주로 논의되었는데, 최근에는 그보다 영화 속 사실이나 어떤 설정 등이 맞느냐 틀리느냐에 대한 논의가 더 관심거리인 듯하다. 그렇다 보니 한 편의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어떠한 담론이나 감상이 남게 되는 것보다는 어떤 사실 혹은 지식 만이 남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수의 관객들 역시 영화를 느끼기보다는 '알았다'는 것에 더 만족하게 되는 것 같고.


틀린 것이 아닐 경우 다양성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경우도 그렇다. 비평 만이 고귀한 것이고 감상이나 리뷰는 하찮은 것은 물론 아닐 것이며, 영화 한 편을 두고 정리하고 설명하는 것 역시 잘못 소비하는 과정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까지 가게 되면 본질이 위축되고 심화되면 결국 성격 자체가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특히 영화 같은 예술 혹은 상업예술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미 잘 보고 잘못 보고의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영화 매체에서 모두가 '내가 맞게 보았나'에 대한 강박이나 설명 만으로 배부른 소화 경향은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다. 설령 감독의 의도와 정반대로 보았거나 내용을 잘못 이해해서 전혀 다른 영화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편이 더 영화를 의미 있게 소화한 경우가 아닐까. 천만 관객이 보았다면 천만 개의 각기 다른 영화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 영화나 음악 같은 예술 만의 장점일 텐데, 모두가 같은 방식과 같은 내용을 보기를 스스로 원하는 현실은 조금 씁쓸하다.



[아쉬타카의 레드필]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아쉬타카의 레드필]

국적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개봉 영화 제목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살아가는 이상 많은 영어권 영화를 즐기려면 누군가가 번역한 버전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영어가 유창하면 어느 정도 자막 없이도 즐길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막 없이 외국 영화를 즐기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늘 하고자 하는 얘기는 자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영화의 첫 번째 이미지이자 메시지인 제목에 관한 것이다. 국내 개봉하는 외국 영화 제목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성격을 달리 해왔는데, 예전에는 오역이 잦았을 정도로 너무 과한 해석이 들어간 제목이 많았다면,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영어 제목을 그대로 쓰되 발음나는대로 그대로 쓰는 형태가 거의 체감상 대부분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많아졌다. 예를 들어 리들리 스콧의 '마션 (The Martian)' 같은 작품의 경우 '화성인'이라는 형태로 쓰지 않고 소리나는 그대로 '마션'이라고 쓰는 형태가 거의 주를 이루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최근 개봉 외화들의 제목들을 보니 거의 번역 된 형태의 제목이 없을 정도로 대부분이 이런 형태였다. '마션' '하트 오브 씨' '스파이 브릿지' '몬스터 헌트' '사일런트 하트' '더 랍스터' '프리덤' '재키 앤 라이언' '세컨드 마더' '싱 오버 미' 등, 오히려 '이민자' '하늘을 걷는 남자' 등 번역한 제목을 찾아 보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방식의 제목 짓기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본래 감독이 의도한 제목의 의미를 전달 받을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이건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솔직히 얘기해서 그 영어 단어가 쉽고 어려움을 떠나 100% 의미가 전달된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예를 들어 '마션'이 '화성인'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확실히 받아 들이는 느낌상 '마션'과 '화성인'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의미인데 말이다. '하트 오브 씨' 같은 경우도 별로 어려운 단어들은 아니지만 이것을 과연 대부분의 관객들이 '바다의 심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랍스터' 같은 경우도 '바닷가재'라는 제목이었다면 아마 전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것도 분명 영어 제목의 뜻, 그러니까 영어 권의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바닷가재'일텐데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런 제목이 익숙해지면 질 수록 점점 더 본래 원제가 갖는 의미와 발음나는 대로 표기한 제목의 전달되는 느낌의 차이가 커지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도 이미 어느 정도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진행된 듯 하지만). '언브레이커블' 이라고 하면 뭔가 발음도 멋지고 느낌적인 느낌도 멋져 보이지만 실제로 이 제목을 보고 '깨지지 않는'을 연상하는 이들의 수가 많지 않고, 이런 현상은 추가적으로 'unbreakable'과 '언브레이커블'이 다른 느낌으로 사용되는 지경에 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발음대로 쓴 제목과 해석 된 제목을 나란히 놓았을 때 말그대로 발음이 주는 느낌 혹은 외형적, 디자인적인 표기상의 느낌의 차이만 있어야 하는데, 점점 더 의미상의 차이까지 가져오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라는 언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관객들이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언어라는 점도 그렇고, 이렇게 이미 흘러온 시장의 특성상 100% 우리말로 해석한 제목을 내어 놓았을 때 오히려 그 의미가 퇴색되거나 생경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를 홍보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땐 이런 위험을 감수하기가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아쉬운 제목들이 있다. 일단 첫 번째로 단순히 느낌만 강조해 아주 쉬운 영어도 발음대로 쓴 경우다. '파터 앤 도터'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그냥 '아버지와 딸'로 번역해도 충분했을 제목을 '파터 앤 도터'로 번역아닌 번역 한 것은 참 씁쓸함마저 든다. 기대작인 타란티노의 신작 'The Hateful Eight'도 마찬가지다. 그냥 '증오의 8인' 정도로 했으면 좋았을 것을 '헤이트풀 8'이 도대체 무슨 제목인가. 헤이트풀 1~7편까지 봤냐는 농담이 나오는 것도 그냥 웃을 일만이 아니다. 뭐 제목 얘기 나올 때마다 회자되곤 하는 우디 엘런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같은 말도 안되는 해석도 물론 큰 문제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불륜영화로 첨부터 예상하고 본 관객들은 아마 대한민국 관객 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또 다른 황당한 경우로는 발음대로 쓴 영어 제목인데 실제 원제목과는 다른 경우도 들 수 있겠다. 그런 제목의 영화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데 가짜 예를 들자면 본래 제목은 'Amy'인데 국내 개봉 제목은 '더 걸 오브 론리' 같은 식이다 (에이미는 다시 말하지만 가짜 예).


불만들을 가득 쏟아냈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실제로 현장에서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갑자기 중국식으로 모두 한국어화 하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본래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도를 퇴색시키지 않는 수준에서 최대한 우리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과 최소한의 성의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요새 외화 개봉 제목들을 보면 몇몇은 너무 성의 없고 그저 멋만 부리는 (그런데 웃기는 건 별로 멋지지도 않다는 점) 이상한 제목들이 너무 많아, 조금만 더 있으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이 될 것 같아 글을 썼다.


생각해봐라. 강동원을 좋아하는 해외의 팬이 '검은 사제들'을 자국에서 보게 되었는데 그 나라의 개봉 제목이 'The Priests'가 아닌 'Geomeun Sajaedel'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우리는 웃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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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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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또 몬타우크행 기차를 탈거야



찰리 카우프만이 쓰고,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이 개봉 10주년을 맞아 다시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인생의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은 그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었는데, 또 다시 보게 된 이 놀라운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 혹은 새로운 영화가 되어 있기 보다는 오히려 맨 처음 보았던 10년 전의 그 영화처럼 두근거림 가득한 영화가 되어 있었다.


한창 씨네필들 사이에서 이 영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 그랬던 것처럼 찰리 카우프만이 설계한 이 기억의 퍼즐 맞추기에 관한 것 때문이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인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결론적인 것에서부터, 그 타임라인의 순서 맞추기에 있어서 어떤 것이 더 먼저인지에 대한 담론은 이런 장르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연구하고픈 흥미요소가 충분했었다. 나도 한 때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따져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분명 정답에 대해서 까지 분명히 확인했음에도 그 기억은 시간이 갈 수록 흐려졌다. 보통 반복 관람을 하는 경우 이런 팩트에 관한 것은 더 깊이 각인되기 마련인데, '이터널 선샤인'은 정반대로 보면 볼 수록 그 기억만은 점점 지워져 가는 듯 했다.


그리고 또 다시 보게 된 '이터널 선샤인'은 이제는 무엇이 먼저 일어난 일인지, 엔딩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에만 빠져들고 말았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나누는 모든 대화들은 그 시간 순서와는 별개로 하나하나 움찔움찔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연애를 오래 한 커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텐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다투거나 혹은 한 마디만 더 하면 되었을 것을 하지 못해 후회할 일을 만들거나 하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에서는 그 열정과 냉정이 모두 느껴져 몹시 치명적이었다. 만약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열정과 냉정의 대화나 상황이 한 100가지 쯤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처음엔 한 2~30개 정도에 공감했었다면 지금은 한 7~80개 정도를 공감하게 되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이미 수 없이 반복하고 외우다시피 한 대사들이었는데, 그 변함 없는 대화들이 내가 그간 겪은 시간들과 내가 연인과 나눈 대화들로 인해 더 깊이 있는 대사들이 되어 있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얼핏보면 후회에 관해 인정하는 수동적인 이야기처럼 보인다. 어차피 또 그럴 꺼니까 그냥 인정하자 라는 약간의 자조적인 느낌이 드는데, 사실은 정반대로 또 후회할 걸 알면서도 그래도 또 사랑할 거라는 더 저극적이고 열정적인 이야기라는 걸 오늘 다시 보고 알 수 있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만나도 또 후회할 일이 발생할 거고, 어쩌면 또 다시 서로를 너무 힘겨워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길 바랄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느꼈던 감정은 '다시 반복된다해도 뭐 어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시 만나보고 싶어' 정도의 희망적 느낌이었다면, 이번에 본 '이터널 선샤인'은 그보다는 훨씬 더 강하게 '다시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난 너를 꼭 다시 만날거야'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즉, '다시 만나게 되면 이번엔 분명 다를 꺼야'가 아니라 '또 반복을 피할 수 없더라도 난 너를 선택할거야'에 가까운 더 큰 범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라는 이야기보다도 더 강력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난 후회할거야. 그래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아'

'난 그래도 또 몬타우크행 기차를 탈거야'





[아쉬타카의 레드필]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새로운 영화 제작 환경, 어디까지가 영화라는 것의 경계선일까?


아주 예전에 사이버 가수 아담이 등장했을 때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엔 사이버 가수들끼리 TV에 나와 차트 1위를 다투고, 드라마 주인공들도 전부 사이버 캐릭터들이 맡게 되는 것 아닐까?"


이러한 궁금증 혹은 예상은 이 후 1999년 당시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파이널 판타지 8'의 주제곡 'Eyes on me' 뮤비를 보고 난 뒤 점점 더 가능성에 힘을 싣게 되었고, 이 후 역시 2001년 개봉한 극장 판 'Final Fantasy : The Spirits Within'을 보고 난 뒤 구체적으로 '아, 그런 세상이 곧 오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번 더 해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수 년 후 그린 스크린 촬영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과 모션 픽쳐 기술이 활용된 영화들을 통해 이 같은 우려 혹은 기대는 점점 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화 되었고,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누가 뭐래도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였으며 그 중에서도 '골룸'이라는 CG 캐릭터가 있었다.




▲ 앤디 서키스가 연기한 골룸은 모션 픽쳐 역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한참 '반지의 제왕'이 성공을 거두고 '골룸'이라는 모션 캡쳐 CG캐릭터가 주목 받을 무렵,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골룸을 연기한 앤디 서키스(그는 잘 알려졌다시피 '킹콩' 역시 같은 방식으로 연기했다)라는 특별한 배우의 면면까지 주목 받고 인정 받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이버가수 아담이 등장했을 때와 비슷한 질문들이 터져나왔다.


사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골룸'의 경우는 아담이나 '파이널 판타지'의 경우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골룸'은 CG를 통해 탄생한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그 내면에는 앤디 서키스라는 배우의 '연기력'이 뒷 받침 되어 있는, 일종의 인간미가 직접적으로 투영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 혹은 '킹콩'의 DVD나 블루레이의 수록된 부가 영상을 감상한 이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앤디 서키스는 이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 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그래서 언젠가는 기술상이 아닌 연기상을 받아도 수긍이 될 정도로 놀라운 연기를 선보였고 그 연기는 단순할 수 있었던 CG캐릭터에 혼을 불어 넣는 결과를 낳았기에, 이를 인간미 없는 CG캐릭터들만의 세상에 관한 논의에 논제로 포함 시키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사이버 가수 아담이나 골룸에 관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연기라는 것, 더 나아가 영화라는 것에 대한 경계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그 골룸을 탄생 시켰던 피터 잭슨의 '호빗'을 보며 - 정확히는 '호빗' 블루레이의 제작 과정을 담은 부가 영상를 보며 - 또 한 번 발생하였기 때문에 더 많은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는 생각에 글을 쓰게 되었다.




▲ "음...그 땐 정말 너무 막막해서 울기까지 했을 정도였어요"


워낙 긴 시간 탓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보기 시작한 '호빗 : 뜻밖의 여정'의 블루레이 부가 영상을 보던 중, 뭔가 복잡한 이유로 주목할 수 밖에는 없었던 영상이 있었다. 바로 간달프 역할을 맡았던 이언 맥켈런 경이 골목쟁이네 빌보의 집 세트 촬영을 하던 중에 벌어진 에피소드였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호빗'이 이뤄낸 기술적 성과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인 줄로만 알았으나, 보면 볼수록 이 부가 영상은 기술에 관한 이야기 보다는 사람의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부가 영상에서는 골목쟁이집에서 드워프들과 간달프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의 촬영 현장을 소개하고 있는데, 문제는 바로 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실제로는 각각 촬영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반지의 제왕' 부가 영상을 본 이들이라면 알 수 있듯이, '반지의 제왕'에서는 실제로 배우들 간의 키 차이는 크지 않지만 캐릭터 상으로는 서로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호빗과 다른 캐릭터들 간의 차이를 구현을 위해, 키가 작은 대역 배우들과의 더블 캐스팅과 카메라 웍을 통한 일종의 속임수를 통해 이를 감쪽같이 표현해 냈었다. 즉, 영화 속에서는 프로도와 간달프가 바로 옆에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간달프는 카메라 가까이에 있고 프로도는 상대적으로 멀리 있어 화면에서 보기엔 간달프를 연기한 이언 맥켈런의 몸집이 훨씬 커 보이는 효과가 착시 현상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 이렇듯 카메라와 캐릭터 간의 거리에 따른 착시 현상을 통해, 캐릭터 간의 키 차이를 표현했었던 '반지의 제왕' 시리즈. 하지만 호빗은 달랐다.


하지만 이번 '호빗 : 뜻밖의 여정'의 경우는 이와는 조금 달랐다. 일단 간달프는 한 명 (혹은 네 명)의 호빗이 아닌 13명의 드워프들과 좁은 공간을 배경으로 함께 등장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메라 속임수를 통해 관객을 일종의 착시 효과에 빠지게 할 수 있었던 '반지의 제왕' 과는 달리 처음부터 3D 영상을 기반으로 제작된 '호빗'은 더 이상 이런 착시 현상에 기댈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3D 영상에서는 이러한 거리감이 정확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3D를 비롯한 기술의 발전은 한편으론 이전보다 더 쉽고 편리하게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장면을 촬영할 수 있게 되었고 더 현실 감 넘치는 입체 감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정반대로 미치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야기시켰으니, 그것은 바로 기술이 아닌 연기를 하는 배우 때문이었다.




▲ 제작진이 개발한 슬레이브 모션 컨트롤 시스템은 다른 비율의 두 세트를 실시간으로 하나의 영상으로 촬영하는 것이 가능한 놀라운 기술이었다


일단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번 '호빗' 촬영을 위해 제작진이 개발한 슬레이브 모션 컨트롤 시스템은 정말 놀라운 기술이었다. 각각의 세트에서 각각 촬영을 하지만, 두 카메라가 연결이 되어 있어 똑같은 앵글과 움직임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서로 다른 비율의 두 세트를 완전한 하나의 공간으로 합치는 것이 가능해, 3D 영상에서도 실제는 같은 비율의 배우들을 간달프와 드워프의 비율 차이가 드러나도록 구현해 냈기 때문이었다. 피터 잭슨 스스로도 이 기술을 일컬어 괴상한 시스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영화 촬영의 기술적 측면에서는 또 한 번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 왼 편에선 드워프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서로 대화하고 호흡을 맞춰가며 연기하는 반면, 이언 맥켈런은 이어폰을 통해 전달되는 옆 세트의 대화를 들으며 그린 스크린을 향해 홀로 연기해야 했다


'호빗 : 뜻밖의 여정'의 초반 시퀀스인 골목쟁이네 촬영 분은, 간달프의 사이즈에 맞춰서 그린 스크린을 카메라 앞으로 당겨서 만들어진 세트와 드워프와 호빗의 사이즈에 맞춰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세트로 각각 나뉘어 촬영되었다. 기존에도 이러한 방식의 촬영은 있었으나 여기서 간달프 역의 이언 맥켈런을 힘들게 만든 건 혼자 연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미 '반지의 제왕'이나 '엑스맨' 시리즈 등을 통해 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허공에 연기하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한 그이기는 하지만, 이번 '호빗' 촬영은 허공에 대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연기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과 직면하게 되었으니,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것 없이 모든 것을 가정하고 혼자 대화 시퀀스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번 '호빗'은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한층 더 발전하여 각각의 세트에서 정확한 동선으로 촬영한 장면들을 실시간으로 합성하여 하나의 영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해졌는데, 그로 인해 한 세트에선 드워프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간달프가 함께 있다고 가정하며 연기하고, 다른 세트에서는 간달프가 텅빈 세트에 드워프들이 잔뜩 앉아 있다고 가정하고 연기해야 했던 것이다!




▲ 이렇게 다 함께 촬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 이언 맥켈런 혼자 이렇게 덩그러니 초록색에 뒤 덮인 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언 맥켈런의 말 못할 고통


하지만 아무리 판타지 영화에 익숙해진 이언 맥켈런이라 하더라도 연극 무대를 기반으로 한 정통 연기에 더 많은 시간과 호흡을 맞춰 온 그에게 이 같은 방식은 쉽게 받아들이기, 아니 수긍하기 힘든 방식이었다. 실제로 힘겨워 하는 이언 맥켈런의 모습을 보고 난 뒤 촬영 현장을 다시 보니, 아무도 없는 초록색 방에 각각 배우를 대신하는 카메라와 그 카메라 앞에 붙어 있는 각 배우들의 얼굴 사진들은 마치 테리 길리엄의 예전 작품을 연상시키며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쩌면 올드 한 방식일지도 모르나 직접 상대 배우의 눈을 바라보고 대화하며 호흡을 주고 받는 연기에 익숙했고 그렇게 수 십 년을 연기해 왔던 이언 맥켈런에게는 상대의 반응을 알 수 없고 대화를 나눌 수 없는 현장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 어려움 정도가 아닌 영화를 그만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고민까지 할 정도의 고통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 간달프와의 키 차이를 고려해 간달프의 시점에 맞춰 각 카메라의 붙여진 배우들의 사진들은 무언가 그로테스크함마저 느껴진다


그를 이해해서 과장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가 영상에 수록된 그의 촬영장 모습과 인터뷰를 보면, 너무 막막하고 힘들어서 울기도 했을 정도였으며 이를 바라 만 봐야 했던 스텝들도, 옆에서 보기에 이언 맥켈런의 입장에서는 배우로서 감각을 박탈 당하는 것을 넘어 고문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촬영 현장이 너무 힘들었던 이언 맥켈런은 피터 잭슨에게 '이렇게 계속 해야 한다면 이 영화를 그만 두겠다' '이건 영화가 아니다'라고까지 이야기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언 맥켈런에게는 그가 수긍할 수 있는 연기와 영화의 경계를 넘어선 경우였던 것이다. 울고, 그만두겠다고 하고, 힘들어 하는 그를 보고 혹자는 프로답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할런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과연 배우로서 프로페셔널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인지 아니면 정반대로 프로페셔널이기에 쉽게 수긍할 수 없었던 상황의 지나침 이었는지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간달프와 빌보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장면의 뒤에는...



▲ 이런 이언 맥켈런의 말 못할 고통이 있었다


최근 들어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급변하면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경우가 더 잦아졌다. 감정을 전하는 영상 매체로서 여겨지기 보다는 점점 정보와 지식의 소비 데이터로서 분류되는 현상이나, 영화와 절대 별개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었던 극장이라는 존재가 점점 필수 조건이 아닌 것으로 변해가는 과정들도, 이것들을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영화라는 것의 존재 성립 자체를 흔드는 위기로 봐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졌다.


이것은 아마 영화라는 것의 경계를 어디 까지로 확장 혹은 한정 짓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어차피 영화라는 것 자체도 현실과는 다르게 연출 되고 만들어진 가상의 이야기이자 부산물이라는 시점에서 본다면, 그 매개체가 반드시 사람이거나 사람들 간이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지만, 반대로 영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연기하는 배우가 존재 성립에 필수 조건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배우를 기술로서 대체할 수 있다 거나 앙상블이 필요한 장면 조차 각자 홀로 연기한 조각을 모아 편집 과정에서 하나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 이언 맥켈런 왈 "이건 영화가 아니잖아요, 이렇게 해야 한다면 더 이상 못하겠어요"


'호빗 : 뜻밖의 여정'의 촬영 현장을 통해 엿 본 이언 맥켈런의 에피소드는 정말 작은 부분이기는 했지만 - 참고로 피터 잭슨은 이 어려운 상황을 기술이 아닌 동료들 간의 정(情)을 통해 해결해 냈다 - 앞으로 영화 산업의 미래에 비춰 생각해 보았을 때 이렇듯 작게는 '연기'라는 것에 대한 것에서 부터, 넓게는 '영화'라는 것 전체의 개념에 대해 재고를 필요로 하는 일이 더 잦아질 듯 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하지 싶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New Line Cinema 에 있습니다.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백이면 아흔 아홉번은 엔딩 크래딧이 완전히 끝나서 극장에 불이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관람을 하는 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리를 지킨다'가 아니라 '관람을 한다'라는 것이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한 번에 해당하는 경우는, 밤늦은 시간 관람이어서 막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득이하게 나설 때와 영화가 정말 재미없을 때 뿐인데, 이를 제외하면 정말로 거의 모든 영화를 '완전히 끝날 때까지' 관람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정말 대부분의 영화를 '재미있게' 본다). 극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거론했던 주제이기는 한데, 오늘은 아예 이 '엔딩 크래딧을 볼 권리'에 대해서만 따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꼭 최근 찾았던 극장에서 엔딩 크래딧이 나오는 동안 한 두명의 직원이 끊임없이 나를 노려보고, 다 끝나고 자리를 일어나자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내 곁을 바람처럼 스쳐가서 이 주제를 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서두에 밝혀둔다. (끙;)


여기서 오해를 살만한 부분부터 밝히고 시작하자면, 모든 관객들이 엔딩 크래딧을 꼭 다 관람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앞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개인적 사정이 없을 경우에도 일찍 자리를 일어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며, 엔딩 크래딧을 끝까지 다 보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보고자 하는 관객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말아야하지 않는 가에 대한 얘기다.


개인적으로 엔딩 크래딧을 끝까지 다 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첫 째로 쉽사리 가시지 않는 영화의 여운을 최대한 가슴 속에 담아두기 위함이다. 많은 영화의 여운들은 극장을 나서서 현실 세계를 맞닥들이는 순간 상당 부분 손실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몇 년이 지나도 여운이 남는 작품처럼 그 여운이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영화가 막 끝난 뒤 극장 안에 남아 있는 여운과는 비교하기 그 세기를 비교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인상 깊게 본 영화라면 최대한 이 여운을 있는 그대로 오래 간직하고 싶어 엔딩 크래딧을 끝까지 즐기는 편이다.


둘 째는 첫 째로 든 여운과 연결이 되는 이야기인데, 영화의 사운드 트랙을 최고 시설의 환경에서 즐기기 위함이다. 영화 만큼이나 영화음악을 좋아하는 이로서 영화음악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시간 중 하나는 바로 엔딩 크래딧이 흐를 때 일 것이다. 각자 집에 어떤 사운드 환경을 갖추고 있는 지를 모르겠지만, 누구나 집에 THX 인증관 쯤은 하나씩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제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췄다고 할지라도 극장의 시스템보다야 좋겠는가. 이런 최적의 시스템에서, 아직 영화의 여운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영화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영화음악을 감상하는 최적의 환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칠 이유가 없다.


세 번째 이유는 엔딩 크래딧에 담긴 깨알 같은 정보들 때문이다. 출연한 배우들의 이름들을 확인하는 기본적인 것에서 부터, 수록된 곡들의 정보를 한 곡 한 곡 확인할 수도 있고 주요 스텝에는 어떤 인물들이 참여했는지도 관심을 갖고 보다보면 눈에 익은 인물들을 한 두 명씩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인의 참여 여부로 시작한 이름으로 국가 맞추기는, 어떤 국적의 스텝들이 어떤 비중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로케이션의 경우 현지 스텝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와 CG 같은 기술파트의 경우 어느 회사가 참여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에 더해, 어떤 국적의 팀들이 참여했는 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스페셜 땡스를 통해 감독과 제작자의 평소 인맥도 확인할 수 있고, 이 영화가 실제로 촬영된 장소들의 지명과 상호 등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정보들은 영화를 좀 더 깊게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냥 넘기기엔 너무 소중한 정보들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엔딩 크래딧을 온전히 즐기기에 현재 대부분의 극장 환경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리고 그 잘못의 대부분은 극장에게 있다. 빨리 청소를 끝내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맘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내가 엔딩 크래딧을 보고 있을 때 들어와서 청소를 하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관객이 있을 땐 청소를 하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는지 계속 불이 켜져있는 문 앞에 서서 고개를 내밀었다 말았다를 반복하며 내가 언제 나가는 가를 감시하신다. 그게 내 앞 줄에서 청소를 하시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물론 세상의 여러 일들 가운데는 다수가 옳은 일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많은데, 관객의 다수가 영화가 끝나자마자 (정확히 얘기하자면 본편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뜬다고 해서, 엔딩 크래딧이 완전히 다 끝날 때까지 자리에 남아 있는 관객이 과연 유난히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가 라면 그렇지 않다. 극장은 영화 시작 시간이 10분이라고 했을 때 광고를 한 15~20분 쯤 틀어주고 나서 실제 영화는 30분쯤이 되서야 상영을 해서인지 몰라도, 러닝 타임이라는 것의 개념이 부족한 것 같다. 즉, 본편이 끝나는 시간을 러닝타임 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은 엔딩 크래딧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를 포함한 것이 영화의 러닝타임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논리를 따져봐도, 대부분의 소비자가 빵을 사서 90%먹고 나머지 10%는 안먹고 버린다고 해서, 100% 빵을 다 먹는 사람에게 '왜 남들은 안먹는걸 혼자 굳이 다 먹어야 속이 시원하냐!'라고 반문할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엔딩 크래딧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극장에 매번 마지막까지 남아있다보니 겪게 되는 다양한 일들도 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직원들의 눈치야 말할 것도 없고(언제부턴가는 오히려 오기가 생겨서 눈을 일부러 맞춘 적도 있다), 막 나가려던 다른 관객이 나보고 '저 혹시 끝나고 뭐 있어요?'라고 물어보거나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뭐가 있어서 남았겠지....하고 생각했다가 아무 것도 없자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라며 마치 나 들으라는 듯이 얘기하며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극장이 엔딩 크래딧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불을 켜지 말아달라는 요구는 꺼낼 수 조차 없는 수준이다. 실제로 내가 자주 가는 좋은 극장들 가운데는 영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불을 켜지 않아 엔딩 크래딧까지 온전히 즐기며 영화의 여운을 최대한 끝까지 머금을 수 있는 곳들도 많다. 실제로 예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극장이 영화가 끝나고 불을 켜고 안켜고는 관객들의 행동에 생각보다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불을 켠다는 것은 곧 나가라는 신호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불을 켜지 않을 경우 실제로 나갈 사람이 훨씬 덜 나가는 것도 목격한 적이 있다. 더 많은 극장들이 이런 시스템을 지향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영화 시작 5분 전까지 앞선 타임의 영화가 끝나지 않았을 정도로 스케쥴을 빡빡히 짜고, 그 짧은 여유 시간에는 광고하기 바쁜 극장에게 이런 바램을 갖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니 그냥 엔딩 크래딧을 보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적어도 방해는 받지 않고 끝까지 여운을 즐길 수 있었으면, 그리고 이를 이상한 사람마냥 취급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열심히 엔딩 크래딧을 볼 자유는 꼭꼭 챙겨 누릴테지만.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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