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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비 (Bandhobi, 2009)
제발 좀 마음을 열어


지난해 평단에서 최고의 한국영화로 꼽힌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연출했던 신동일 감독의 신작 <반두비>는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보지 못했음에도 분명 기대작이었다 (이 영화를 보았다면 좀 더 폭 넓은 리뷰를 해볼 수도 있었을텐데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다른 이들에게도 기대작이었는지, 이 영화는 개봉전 부터 영화 내적 외적인 이유들로 인해 화제가 되기도 했었는데, 영화가 갖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지 혹은 장면들 때문이기도 했고, 그로 인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당초 예상과는 다르게 청소년 관람불가로 등급 판정이 나게 된 것도 또 한번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논란에 대한 이야기들은 차차 하기로 하고 영화 자체에 대한 얘기만 풀어보자면, <반두비>는 상당히 진부하리만큼 평범하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가지고, 사회적인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은 자세로 가능한 객관적으로 그려내려고 노력한 의미있는 영화였다. 잘 생각해보면 <반두비>가 정치적이다 혹은 사회적이라고 평가 받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아직은 미성숙하다는 걸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하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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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나 알려진 시놉시스를 통해 대충 유추할 수 있는 영화의 줄거리는, 외국인 노동자와 소녀와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로, 아마도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사회에 잘못된 시선들에 대한 지적과 이를 뛰어넘어 순수하게 우정으로 대하는 소녀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겠구나 생각할 수 있는데, 일단 여기서 크게 벗어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다고 생각되지만, 신동일 감독은 여기에 본질적으로 우리가 흔히 잊고 있었던 중요한 메시지를 빼놓지 않는 동시에, 말그대로 사회적인 공기를 무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아내면서 양면적이면서도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카림은 우리가 TV나 뉴스를 통해 접해왔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일부러 부도를 내고 잠적한 사장 탓에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했고, 이 임금을 받기 위해 사장의 집을 수소문 하는 중이다.  한 편 여고생 민서는 또래 친구들이 다 다니는 영어 학원에 다니고 싶어하지만, 가정 사정이 그리 넉넉치는 않은 평범한 소녀다. 민서의 엄마는 무능력한 남자와 동거중이고 결혼할 예정이라지만 진희는 이 남자를 아버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민서라는 소녀의 상황이 조금 특별한 것은 있지만 또래 친구들에 비해 유별나다고 할 정도는 아닐텐데, 이런 민서가 우연한 기회에 카림을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조금씩 더 넓은 세계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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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과 민서가 아주 특별하다거나 깨어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영화 초반 이 둘의 첫 만남을 통해 알 수 있다. 민서는 카림이 버스에 흘리고간 지갑을 카림에게 찾았노라 알려주지 않고 그냥 돈을 훔칠 셈이다. 민서가 지갑을 가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 카림 역시 다가가서 지갑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대신 바로 쫓아가 가방을 빼았아 지갑을 찾고나서는 경찰서로 가자고 한다. 이 첫 만남을 통해 알 수 있는건 민서는 본래부터 외국인에 대해 거리낌이 없거나 특별히 차별하지 않는 소녀도 아니었고, 카림 역시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에게는 역시 호의적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게 되면서 딱딱했던 첫 만남과는 달리 점점 마음을 열게 된다.

카림은 임금을 주지 않은 사장의 집을 함께 찾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민서는 불편한 집을 나와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 줄 친구가 없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는데 어찌보면 이 둘이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처음 가까워 지게 된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접근 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만약 애초부터 편견없던 사람들이 만나 순수하게 서로를 돕고 관계를 이어가는 이야기였다면 오히려 판타지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반두비>는 촛불소녀로 흔히들 상징되는 민서의 성장영화이며, 민서의 성장을 통해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가 잘 담겨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리뷰에서 민서를 촛불소녀로 지칭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진희에게서 '촛불'을 지워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촛불 소녀로 볼 수 있는 몇가지 요소들은 어쩌면 부가적인 것이며 주가 되는 것은 역시 카림과의 관계 속에서 발전하는 소녀의 올바른 성장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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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가 여고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민서의 행동에 거침이 없는 것은 다르게도 해석될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보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에 대한 반항에 근거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돈이 없어서 카림과,  엄마가 일하는 노래방에 놀러 간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엄마에게 보란 듯이 '나 외국인 친구랑 놀러왔어' 라고 얘기하고 싶은 투정도 있는 것이다. 친구들 다하는 원어민 영어학원비를 벌기 위해 주유소에서도 일하고, 가불이 안되자 주유소 사장 아들에게 기름을 뿌리는 한편,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윤락업소에 취직하는 것들을 분명 좋게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 단순히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다 설명되기에는 부족한 잘못된 행동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어쩌면 굳이 민서의 이런 행동들을 보여준다. 이런 행동들을 삽입한 감독의 의도는 마지막 장면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감독은 원칙적으로 민서라는 캐릭터의 성장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측면이 있기 때문에, 약간은 과장되어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민서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잠시 카림의 이야기로 넘어와서, 카림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힘든 한국생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는 특별히 표현하지 않지만(가끔 표현하기도 하지만), 자신들보다 후진국에서 온 피부색이 다른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며, 카림 자신도 한국인들에게 이런 부당함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냥 인정할 수 밖에는 없음을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이 영화는 아주 단적으로 한국인이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는데, 영어 강사와 카림이 대화하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다. 둘 다 똑같은 이방인이지만 미국인인 영어 강사는 한국 생활을 즐기기까지 하는 반면 카림의 한국 생활은 하루하루 힘든 나날일 뿐이다. 민서 역시 이 장면에서는 오류를 범하고 마는데 나중에 카림이 무슨 얘기였는지를 알려주고 난 다음에야 '마법의 손'을 사용해 이를 응징한다. 민서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외적인 조건들을 따지지 않고 부당한 것에는 부당하다고 응징할 수 있는 순수한 용기에서도 알 수 있다. 민서에게 영어 강사는 미국인이라서 혹은 그 이후에 겪게 될지도 모를 어려움들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어른들의 계산'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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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비>가 외국인 노동자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면 이들을 외국인이라는 조건 이전에 '인간'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에는 일반적으로 외국인이 등장하는 영화들에서는 굳이 등장하지 않았던 소소한 장면묘사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영화를 평가하면서 '그 장면에 의미는 무엇이냐?' 혹은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냐?'라고 묻게 되는 일도 발생하게 되었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장면들에 주인공이 한국인이었다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 장면들인 경우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단적인 예로 카림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민서는 윤락업소에서 배운대로 카림에게 위로(?)를 해주려고 하는데, 카림은 이 순수한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집에서 잠들기 전 자위를 하는 카림의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이 장면에 주인공이 카림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다면 크게 의도를 궁금해 하지 않았을 장면이었겠지만, 그가 우리와는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카림의 성욕에 대해 복잡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여기서 만약 감독의 의도가 있었다면 바로 이런 시선을 역으로 노린 것이라고 해야겠다. 


관객들은 무의식 적으로 이 둘의 관계를 볼 때, 민서와 카림으로 보지 않고, 여고생과 외국인으로 보게 되는데, 쉽게 말해 카림이 아니었다면 아름다운 로맨스로 기억될 장면들이 카림이어서 무언가 다른 시각으로(불편한 시각) 보게 된다는 점이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일부러 카림 역할의 배우에 미남을 캐스팅했다고 했는데, 보는 관객들이 이 둘의 로맨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대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도 의미가 있었지만, 불편하게 받아들인 관객들에게도 '내가 여기서 불편해 할 이유가 사실 없다'라는 점을 새삼 깨우치게 해주는 의미있는 장면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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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객관적으로 느껴졌던 것 가운데 중요한 포인트는 민서의 엄마와 그 애인에 대한 묘사였다. 더 뻔하게 몰고 갈려고 했다면 엄마의 애인은 폭력적이기까지 하고 그저 나쁘기만한 존재, 엄마 역시 민서에게는 무관심하고 집안은 돌보지 않는 존재로 그려졌을 테지만, <반두비>에 등장하는 이 두 인물의 묘사는 굉장히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엄마의 애인의 행동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쁘다라는 생각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과 정말 엄마를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어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무능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민서의 막말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취직을 하고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민서를 무시하거나 할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런 감독의 묘사는 영화의 마지막 카림을 불법체류자로 신고한 이들의 행동에 크게 화가나기 보다는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에서 행한 일이라고 이해하게 되기에 이른다. 만약 지금까지는 상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진행되던 영화가 막판에 가족이 모두 카림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넷이서 잘 살게 된다로 끝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쌩뚱맞은 판타지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이 성폭행 범죄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사회 현실을 돌이켜 보았을 때 부모의 이런 조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카림과 실제로 결혼하지 못한(않은) 민서의 현실도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민서가 고향에 가지 못하는 카림을 위해 고향과 풍경이 비슷한 바닷가로 데려가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무척이나 상징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닷가를 찾아 간 것이지만 '썰물인가?'하는 민서의 대사처럼 바닷물은 하나도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카림은 민서가 못 알아듣게 자신의 언어로 크게 소리친다. '이럴려고 한국에 온 건 아니잖아!'라며. 이 대사와 이 공간의 의미는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진다. 민서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바닷물이 빠져나간 곳이었던 것처럼, 카림에겐 한국이란 나라도 사실 기대와는 달랐던 허탈함 만이 남는 공간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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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비>에는 '마음을 열어'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줄거리를 비춰보았을 때 '마음을 열어'란 문구는 굉장히 진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나 역시 리뷰의 부제목으로 '제발' 까지 붙여가며 이 문구를 사용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진부하지만 마음을 여는 것이 더 필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단계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 기본 줄거리를 가지고 좀 더 복잡하거나 좀 더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냈을 수도 충분히 있었겠지만, 어쩌면 모범 정답 같은 메시지를 포인트로 삼은 이유는, 감독 역시 아직까지는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외국인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만큼 당연한 논재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피부색이나 그 나라의 경제사정이 아니라 인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또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서양인과 동남아시아인에 대한 차별 또한 존재하고 있다. 차라리 피부색이 다른 인종이라 좀 무서워서 꺼려진다면 그건 이해하겠다. 하지만 서양인은 선호하고 동남아시아인은 무시하는건 도대체 어떤 근거인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별로 정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화제가 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씁쓸한 뒷 맛이 느껴졌다. 감독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거의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이슈를 끄집어내서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인터넷이며 뉴스며 다들 얘기하는걸 영화에서 살짝 언급했을 뿐인데, 정치적이다라고 여겨지고 몰아가는 분위기는 분명 씁쓸한 것이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해서, 이렇게 영화에서 평소에 하는 얘기를 거리낌없이 시원하게 해줘서 통쾌한 점은 있었다. 너무 현실적이라 정치적이라는 것은 영화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를 한탄하며 술이 취한 아저씨가 나라를 욕하면서 '대통령님의 정책이 잘못 되신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라고 얘기할리 없지 않은가.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설치류를 언급해가며 욕을 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한우 장조림 먹고 싶어'라는 대사를 반복한 건 분명 의도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냥 장조림도 아니고 '한우' 장조림이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에 민서가 임금을 주지 않은 사장집에 쳐들어가 모 신문을 보고서는 '이딴 거나 보니까 그러고 살지'라는 식으로 얘기할 때는 나도 모르게 박수까지 칠뻔할 정도였다. '만수야~' 할 때도 그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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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비>가 더 오래 기억에 남게 될 이유는 아마도 마지막 장면 때문일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이 참 좋았다. 결국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카림은 결국 불법체류자가 되어 한국을 떠났고, 민서는 학교를 관두고 사회인이 되었으며(민서가 영화에 첫등장한 장면이 학생으로서 교문 앞을 내려오는 장면이었음을 떠올려 보자면, 학교를 자퇴하고나서 교문 앞을 내려오는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겠다), 티격태격하던 부모와는 그대로 잘 살고 있다. 결국 부당한 사회는 바뀌지 않았고 바뀐 것은 민서라는 존재 뿐이다. 이런 점은 민서가 혼자 방글라데시 음식점을 찾아가 그들의 방식대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 장면이 씁쓸했던 이유는 결국 밥을 먹고 있는 건 민서 혼자라는 점과 한참이나 계속되는 식사 장면처럼 한참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지도 모를 사회의 편견들이 떠올라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1. 마지막 장면에 신동일 감독님이 까메오로 등장하는데, 극장에서는 저만 혼자 알아보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알아보신 분들은 이해하실 거에요 ^^;

2. 크라잉 넛에 룩셈부르크 가사가 이렇게 잘 들렸던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전쟁을 많이하는 아메리카'

3. 15세 관람가였다면 감독의 의도대로 더 많은 청소년들이 편견없이 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4. <반두비>에 반대세력으로 외국인 노동자에게 성폭행 당했던 피해자 모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절대 성폭행범을 옹호하는 영화가 아니에요. 영화 속 등장하는 그들은 가해자도 아니구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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