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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步いても 步いても, Still Walking, 2008)
진리를 다루는 방법


고레에다 히로카즈. 한 때는 일본 영화 감독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이를 꼽으라면 볼 것도 없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 등을 연출한 이누도 잇신을 꼽곤 했었는데, 어느 새 부턴가 마치 그의 작품들처럼 조금씩 조금씩 깊은 울림으로 다가와 가장 좋아하는 일본 감독 대열에 은근히 자리하고 있는 감독이 바로 그가 아닐까 싶다. <원더풀 라이프>나 <환상의 빛> 같은 작품들은 나중에야 챙겨본 경우고 리얼타임으로 본 영화라면 <아무도 모른다> <하나> 등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참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무언가 형용하기 어려운 공기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을텐데, 이번 작품 <걸어도 걸어도>는 이미 영화제를 통해 접한 지인들의 극찬들을 재쳐두더라도 꼭 극장에서 보고 싶었던 기대작이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감독이나 출연 배우 정도의 정보 이상은 얻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기 때문에 포스터를 보고 미뤄 짐작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걸어도 걸어도'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메시지와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포스터는, 가족 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만의 방식으로 또 조용히 풀어가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영화는 훨씬 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훨씬 더 깊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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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박 2일 이라는 짧은 시간을 통해 같은 공간에 모이게 된 (넓은 의미의) 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래전 소년을 구하려다가 먼저 목숨을 잃게 된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요코하마에 위치한 부모님 집에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이게 되는데, 집을 떠난 료타(아베 히로시)는 남편과 사별하여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여자와 결혼하였고, 출가했던 딸은 다시금 친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모이게 된 이들의 모습에서는 조금 특수한 상황은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새롭거나 한 설정들이라기 보다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만나볼 수 있는 가족들 간의 미묘한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료타는 형인 준페이에게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는데, 집안의 모든 관심과 기대를 받던 형과는 달리 지금은 사별한 경험이 있는 여자와 함께 살고 있고 변변한 직업도 없는터라 가족들과의 만남이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 딸인 지나미(유) 역시 여러가지 일들 때문에 다시금 친정집으로 가족이 들어와 살려고 하지만 이를 두고 어머니와의 미묘한 갈등 때문에 역시 그리 편하기만한 만남은 아니다. 부모 역시 자식들에게 못 마땅한 점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1박 2일은 분명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모두들 불편함을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그리 짧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어머니(키키 키린)는 시종일관 푸근하게 웃는 얼굴로 자식들을 대하지만 툭툭 던지는 유머 섞인 말들엔 자식들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담겨져있으며, 비교적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아버지(하라다 요시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겠다. 료타는 자신이 어린 시절 저지른 사소한 일들마저 아버지가 형 준페이가 저지른 일들로 생각하고 있는 것에 다시 한번 컴플렉스를 실감하게 되고, 그저 성격 좋게만 보였던 료타의 안내 역시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결국 무의식적으로 가족 외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속상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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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족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료타와 결혼한 아내의 아들인 아츠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아츠시는 따지고보면 이 가족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료타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 있다. 친척 관계인 다른 두 아이들과도 어느 정도 거리가 느껴지고, 시종일관 이 가족에게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츠시의 엄마는 성인으로서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 가족에 물들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순수한 아이인 아츠시에게는 이 거리가 있는 그대로 느껴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영화적 공간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거의 모든 영화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소비하고 있고 집 밖을 나서서 진행되는 장면 역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한정적 공간일 뿐이다. 공간을 한정적으로 제한한 것은 아무래도 다른 부가적 요소가 아니라 가족 본연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었음은 물론, 부모가 오래 살아왔고 가족들이 예전에 다 함께 살았었던 공간이라는 특수한 측면에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설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집 곳곳에는 끊어져 있는 가족들을 이어줄 추억들과 이야기 거리들이 녹아있는 장소들이 여기저기 있으며, 이런 소소한 거리들로 인해 이 '가족'은 자신들의 가족으로서의 고리를 새삼 깨우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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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은 바다가 멀리 보이는 찻길까지 산책을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영화 중반 이후에 이 길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자가 함께 하는 길로 다시 등장한다. 료타의 가족이 오르던 가파른 계단 길은 3부자가 바닷가로 가는 길에도 등장하며 마지막에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부모의 여정에도 다시 등장한다. 또한 한정된 공간은 같은 인물들이 다른 상황에서 혹은 다른 인물들이 같은 공간에서 겪게 되는 것으로 자주 반복된다. 이 영화에서 반복과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설정은 바로 일종의 '타이밍'이다.

반복되는 설정이 조금은 은유적이라면 이 타이밍적인 설정은 매우 직접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옥수수 튀김은 바로 먹어야만 맛이 있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쓰이고 있고, 어머니가 계속 생각해내려던 스모 선수의 이름이 어머니와 헤어지고 나서야 떠오른 것 역시 이런 엇갈림을 의미하고 있으며, 고치겠다고 한 타일을 결국 고치지 않은 것도 태워주겠다던 차를 한 번도 못 태워 준 것도 결국 이 '타이밍'과 '엇갈림'인데 이 것은 곧 이 영화에 가장 큰 정서인 '후회'와도 결부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은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특히 어머니의 대사 중 절반 가까이는 실제 감독의 어머니가 했던 말들이라고 한다. 극 중 등장하는 엔카 '걸어도 걸어도' 역시 감독의 어머니가 자주 불렀던 곡이었다고), 그래서인지 이 작품엔 감독 자신이 부모에게 다 하지 못한 '후회'에 대한 측면이 아주 강하게 녹아있다.

여기서 후회란 단순히 '아쉽다'가 아니라 '자책'의 의미가 더 깊다 하겠는데, 아들차를 타고 쇼핑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언제든 하면 되지 라고 했던 것과는 달리 결국 단 한번도 그러지 못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바로 연결하여 보여주고, 그와는 정반대로 SUV를 권하던 매부의 제안에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묘지를 내려오며 떡하니 SUV에 승차하는 료타 가족의 모습은 이 후회를 더 자책에 가까운 것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 내내 별로 직접적인 묘사를 하지 않다가 료타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자 부모는 '올해 설에나 보겠군' 하고 말하는 반면 아들은 '올해 설에는 안와도 되겠네'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면서 다시 한 번 이 '후회'와 '자책'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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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세트 적인 측면이나 영화 적인 장치들에 대한 것들도 매우 흥미로운 영화가 아닐 수 없겠다. 한정된 공간 내에서 인물들의 동선을 살펴보는 재미나 여러 명이 한 공간에서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것으로 접근 하는 것도 물론 흥미롭지만, 의미적으로 보았을 때 결국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부모님 계실 때 잘해라' 라는 너무 진부한 명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매우 인상적인 텍스트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항상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해 이야기해왔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이런 연장선에서 볼 수 있겠지만 어찌보면 죽음 이후를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후회'라는 정서가 내면 깊이 깔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걸어도 걸어도>는 굉장히 직접적이기도 한 작품으로 볼 수 있겠다.

<걸어도 걸어도>를 보면서 앞선 여러가지 다른 이유들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후회할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결심만 하게 되어도 이 영화는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의 여운이 오래 남는 것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의 나의 역할에 대한 반성은 물론, 무엇보다 '나중에 하면 되겠지'가 결국 실현될 수 없음을 가슴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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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ontiti의 음악은 이번에도 정말 좋네요. 정말 좋습니다.

2. 전 오프닝에 할아버지가 산책하는 장면이 왠지 울컥했어요. 그 거리거리, 골목골목과 음악이 왜 이리 울컥한지 ㅠ

3. 키키 키린의 연기는 정말 훌륭하더군요.

4. 흔히 장르를 분류할 때 '드라마'라고 많이들 쓰는데, 이 영화야 말로 진정한 '드라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5. 형인 준페이의 물건들 가운데 'Joy Division'의 커다란 판넬이 있는걸 보고 혼자 속으로 '형이 음악 좀 들었는데?'하고
    생각하기도 ㅎㅎ

6. 이 영화 역시 무언가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작품입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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