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The Book of Eli, 2010)
세상을 구하는 서부극


언제나처럼 아무런 정보 없이 보게 된 영화 <일라이 (The Book of Eli)>는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종말 후의 지구(혹은 대재앙 뒤의 지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종의 서부극이었다. <프롬 헬>을 연출했던 휴즈 형제가 연출한 이 작품은 묵시록적이고 종교적인 색체와 서부극의 분위기, 그리고 액션의 요소까지 다루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볼 만한 작품이긴 하지만 이 세가지 중에 어떤 한 가지에 조금 더 비중을 실었다면 더 좋은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반전이 있지만 (사실 후반에 드러나는 반전 외에 영화의 주된 소재인 '그 책'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은 반전이라고까지 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나로서도, 대재앙 이후의 지구와 주인공과 이 책을 갖으려는 카네기(게리 올드만)로 미뤄보았을 때 너무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는 명확하지만, 거기까지 끌고 가는 과정의 맛은 조금 덜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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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를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대재앙으로 인해 야외에서 활동할 때는 선그라스를 써야만 하는 그러니까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버린 지구를 배경으로 수십년간을 떠도는 주인공 (덴젤 워싱턴)이 등장하는데, 이 주인공은 무언가 임무가 있는 듯하고 무술에도 초고수다. 그러다 만난 어떤 작은 마을의 지배자 카네기는 자신이 갖은 권력을 어떤 한 권의 책을 갖기 위해 모두 쏟고 있는데, 주인공을 만나게 되면서 이 책의 비밀에 좀 더 가까워 진다.

<일라이>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역시 최근 보았던 <더 로드>를 들 수 있겠다. 이 작품 속 지구의 풍광은 <더 로드>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으며, 몇몇 장면은 그대로 가져온 듯한 느낌이 날 정도다. 하지만 <더 로드>의 풍광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듯한 매마름의 황폐함이라면, <일라이>의 풍광은 전체적으로 황폐하지만 서부극의 그것과도 같은 황폐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영화의 대부분은 서부극의 구성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일라이>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서부극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마을의 묘사는 물론, 주인공과 악당들이 대결하는 구도 역시 서부극에서 거의 다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심지어 캐릭터 중 한명은 모리꼬네의 유명한 스코어를 휘파람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또한 한 세대가 끝나고 다른 세대가 시작되는 것 역시 서부극에서 종종 만나볼 수 있었던 모티브로서, <일라이>는 전체적으로 서부극을 깔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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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살펴볼 만한 요소는 역시 '포스트 묵시록'적인 종교적 색체다. 이 작품은 너무 표면적으로 종교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어 오히려 종교적이지 않게 느껴질 정도인데, 덴젤 워싱턴이 맡은 캐릭터는 처음부터 무언가 '임무'에 충실한 것이 너무 역력히 드러나고(혼자 반복하는 대사들도 그렇고), 나중에 악당들과 대치했을 때의 장면 구성에서는 더더욱 그를 메시아 혹은 메신저로 여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종교적 색체가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종교적인 작품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은 분위기를 위한 트릭일 뿐 본연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종교적인 것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다. 마지막 결말과 결부지어 이것저것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도 있고, 성경의 내용들과 결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점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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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라이>의 아쉬운 점이라면 서두에 이야기 했던 것처럼, 종교적인 색체는 트릭으로 분위기만 흘리고, 액션과 스타일은 과하고 본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이들에 가려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언가 이 셋 중의 하나만 집중했더라면 영화의 호불호는 더 갈렸을지언정 적어도 지지하는 편의 힘은 더 강해졌을 터인데, 중간의 모호한 지점에 남게 된 경우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과 거의 비슷한 표현을 이미 한 평론가가 있어 말을 빌려오자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오웬 글라이버맨은 “이 무거운 실패작은, 카 체이스가 없는 <매드 맥스 2: 로드 워리어>이자, 휴머니티가 없는 <더 로드>이다"라고 평했는데, 정확히 맞지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이 많은 편이었다. 어쩌면 치열했던 <더 로드>보다 더 깊은 철학은 물론 더 깊은 세계관을 품어낼 수도 있었던 그릇이었고, <매드 맥스>보다 더 세련되고 묵시록적인 액션과 분위기를 낼 수도 있었던 작품이었지만, 두 가지 모두 이들에게 한참 못 미치는 작품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보니 맨 마지막에 본래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반전으로 풀어내었을 때, 그 반전의 충격 정도를 떠나서 크게 공감대를 얻기 어려운 부분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쓰다보니 스포일러 없이 써보자는 글이 되어버려 반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만약 영화 내내 주인공의 여정에 좀 더 공감할 수 있었더라면 마지막 반전에 당연히 더욱 빠져들 수 있었을텐데, 반전은 반전대로 여정은 여정대로 심심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떤 장면이 등장했을 때, 왜 저런지 머리로는 알면서도 심정으로는 '왜 저러는 거지?'라고 묻고 싶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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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큰 기대 없이 본다면 제법 볼만한 작품인 것은 틀림 없다. <더 로드>같은 깊이를 기대한다면 너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그래서 계속 그냥 '그 책'이라고만 숨기는 주인공들이 안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책의 비밀과, 크게 놀라게 되지는 않는 반전 (고로 메시지)에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관객에게 믿을 주는 덴젤 워싱턴의 연기와 오랜만에 악역으로 돌아온 게리 올드만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볼 만한 작품일 듯 싶다.


1. 역시 세상이 아무리 황폐해도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음악인듯. 거의 첫 장면에서 Al Green의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가 극장 가득 울려퍼졌을 땐 소름이 돋더군요. 워낙에 좋아하는 곡이었는데 이런 황폐한 지구에서 또 만날 줄이야. 마치 <12 몽키스>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듣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2. 극중 노인들만 사는 집이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해요. 집주인이 무려 '덤블도어'니까요.

3. 마지막에 친절하게 '어디 버전'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더 좋을 뻔 했어요. 그냥 그 유명한 다리와 멀리서 본 모습만으로도 어디인지 다 알 수 있었으니까요.

4. 영화가 갖고 있는 메시지 자체는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뻔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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