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안개와 굴레에 관한 담론


<질투는 나의 힘>을 연출했던 박찬옥 감독의 7년 만의 신작입니다. 신작을 만나기 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전작보다 <파주>가 더 취향에 맞았던 것 같습니다(어떤 인터뷰를 보니 전작보다 더 대중적인 요소에 신경을 썼다고 했는데, 사실 그건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하지만 애매한 부분도 있구요 ;;;). <파주>는 이선균과 서우라는 배우들 때문에도 기대를 갖게 되었던 영화였습니다. 특히 서우의 경우 <미쓰 홍당무>를 통해 주목할 만한 연기를 선보였던터라 더욱 기대가 되었는데, 전작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라 과연 이런 어두운 캐릭터는 어떻게 소화해 낼지가 궁금하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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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는 안개 자욱한 파주를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이 영화는 제목을 '파주'가 아니라 '안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파주와 안개는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파주'는 '밀양'처럼 미지의 공간은 아니에요. 어찌되었든 아주 멀지는 않은 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터라 그 지명이 낯설지 않은 것도 있고 대략의 동네 분위기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영화에서 이 파주란 공간은 하나의 굴레처럼 작용합니다. 극중 주인공들은 이 파주에 자의든 타의든 오게 된 뒤, 역시 자의로 혹은 타의로 떠나게 되지만 그 이별이 영원하지는 못합니다. 눈에는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떠나려고 하지만 결국엔 떠날 수 없는 커다란 굴레 같은 것이지요. 은모(서우)가 파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쉽게 생각하면 단순히 그 곳에 부모님이 남겨준 집이 있어서, 혹은 친구가 거기 있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떠나지 '못'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건 바로 어쩔 수 없음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서 무작정 인도로 여행을 떠났을 만큼 남아있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돌아와서 왜 갑자기 떠났는지를 설명해야 된다는 부담감을 무릎쓰고라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분명, 형부 중식(이선균)에 대한 미묘한 감정 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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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를 얘기하면서 이 영화의 홍보 방식에 대해 문제를 삼은 적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를 형부와 처제의 불륜으로 인한 격정멜로로 포장하여 홍보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 홍보방식은 분명 받아들이는 이들을 생각해보았을 땐 문제가 있는 방법이었지만, 말자체를 따지고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여러가지 굴레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어쨋든 '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형부와 처제에게 묘한 감정이 생긴다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륜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고(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는 다른 의미로요), 이 미묘한 감정 사이에는 각 인물들마다 개별적으로 생각해볼 만한 큰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확실히 단순 멜로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멜로적인 스토리 외에 영화에는 철거민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그려지는데, 이 부분의 비중에 대해 감독과 스텝들도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네요. 확실히 이 부분의 비중이 커지면서 큰 멜로의 줄기에서 보았을 때 이야기가 분산되는 경향이 생긴 한편(이에 따라 호불호가 생길 수도 있겠구요), 최근 벌어졌던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면서 정치 사회적인 생각들도 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분명히 얘기하지만 하나의 배경과 캐릭터를 설정하기 위한 소스로 철거민 이야기가 존재할 따름이지 이것이 주가 되는 스토리는 아닙니다. 이런 뉘앙스는 철대위 대책위원장을 맞고 있는 극중 중식의 태도에서 드러나는데, 중식은 젊었을 때 대모를 시작하게 된 것도 정치적 의도가 강해서라기 보다는 여자 선배의 모습에 반해 시작하게 된 점이 분명 있었고, 철거민이 아니면서 철대위를 맞게 된 것도 생존을 위한 사투의 측면보다는 자기 위안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영화 후반 은모가 '왜 이런 일들을 하세요?'라고 했을 때 중식의 대답은 흥미로웠습니다. 결국 중식에게 철대위는 또 하나의 파주처럼 위안이자 상처인 굴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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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옥 감독의 전작 <질투는 나의 힘>이 대사와 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갈등으로 풀어갔던 작품이라면, <파주>는 의외로 많은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풀어가는 작품이었습니다(그래서 몇몇 장면에선 많은 분들이 이름 때문에 해깔리시곤 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연상되기도 했네요). 안개 자욱한 첫 장면도 그렇고 방안에 누운 중식을 바라보는 카메라 앵글도 움찔할 정도였으며(이런 장르에서는 잘 쓰지 않는 조금 다른 앵글이었거든요), 안개처럼 표현된 거친 화면의 입자들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미지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였고, 대사가 있을 때 보다는 오히려 없을 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영화 후반부 철거현장으로 돌아온 은모가 마치 유령처럼 대치 건물로 들어가는 컷트였는데, 약간의 슬로우 모션과 진짜 유령처럼 주변의 상황과는 아랑곳 하지 않고 유유히 건물로 향하는 은모의 모습은 흡사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의 그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을 떠올릴 정도로(허름한 건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하나의 테이크로 이루어져서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 같네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이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을 정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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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서 중식 역할을 맡은 이선균을 보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의 한석규가 떠올랐습니다. 무언가 본심을 말하지 못하고 그냥 혼자서 웅크리고 터트리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다른 한 편으론 이제 이선균이라는 배우에게서 특별함이 느껴지기 시작해서 인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히 중식이라는 인물은 이선균이 연기하면서 좀 더 멋진 캐릭터라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파주>에서 여전히 돋보이는 배우는 역시 서우입니다. <미쓰 홍당무>를 보며 '야, 저렇게 잘 우는 연기를 하는 여배우가 또 있을까?'싶었었는데, <파주>에서도 그녀의 우는 연기는 역시나 독보적입니다. 무언가 서러움이 붇받치면서도 연기가 아니라 진짜 우는 것 같은 착각에 막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을 정도랄까요. 국내에서 중고생부터 성인까지 모두 어색하지 않게 소화할 수 있는 여배우를 꼽으라면 다시 한번 서우를 주저없이 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이선균, 서우의 경우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갔던 경우라면 은모의 언니이자 중식의 아내인 은수 역할을 맡은 심이영의 연기는 기대하지 않았던터라 더 인상적인 경우였는데, 굉장히 낯설지 않은 얼굴이면서도 막상 따져보니 제대로 작품을 본 적은 없었던 그녀의 연기는, <파주>의 작은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의 후속 작품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1. 철거민 동료들 가운데 <똥파리>에 출연했었던 정만식씨의 모습도 반가웠습니다.
2. 이경영씨 역시 특별출연하고 있는데 거의 대사 없는 캐릭터였음에도 그 날카로운 눈빛 만큼은 기억에 남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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