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롤랜드 에머리히의 대놓고 펼치는 재난 영화


어떤 영화든 영화마다 기대치가 틀린 것이 사실이듯이, 영화마다 미덕을 달리 찾아야 함도 사실 일 듯 합니다. 타란티노의 작품을 볼 때는 또 어떤 재기발랄한 영화적 장난들을 풀어내는지를 보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작품을 볼 때면 이 이야기가 우리내 인생과 또 어떤 우연적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하듯이, 재난 영화의 대표주자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작품을 볼 땐, 과연 이번에는 얼마나 더 상상한 것 이상의 스케일을 보여줄까, 얼마나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을 선사할까 하는 기대와 미덕을 찾게 되곤 합니다. 모르겠네요. 영화라는 예술은 다른 예술이 그렇듯 옳고 그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고 덜좋고의 예술이기 때문에 감독마다 자신 만의 스타일과 기대하는 바가 다를 수 밖에는 없는데, 롤랜드 에머리히에게 누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같은 먹먹함을 주는 메시지와 이냐리투 같은 무력감, 더 나아가 히치콕, 타르코프스키 같은 작품성을 기대하고 바라는지 말이에요. 개인적으로 롤랜드 에머리히에게 바라는 점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습니다. 그의 장기인 '스케일'을 또 얼마나 업그레이드 했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번 에머리히의 신작 <2012>는 만족할 만한 오락영화였습니다. 그는 기대한 만큼의 스케일을 스크린에 선사했고, 보는 중간 몇 번이나 입을 떡 벌리고서 '와'하고 탄성을 지를 만한 압도하는 스케일의 장면이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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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는 재난 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지키다 못해, 갖은 공식을 모두 풀어놓고 '작정하고 다 지켜보겠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재난 영화라고 하면 등장하는 필수 요소들을 <2012>에서는 모두 만나볼 수 있습니다. 단절된 가족이 위기를 통해 다시 봉합되는 설정은 모든 재난 영화의 베이스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이혼 가정만큼 진부하며 어울리는 설정은 없겠죠. 그리고 재난을 미리 예측한 주인공과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부 관리, 그리고 지구종말의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지고 벌이는 논쟁, 꼭 등장하는 애완견, 그리고 말 안듣는 아이들, 마지막엔 목숨 바쳐 희생하는 조연들. 롤랜드 에머리히는 작정한 듯 모든 재난 영화의 요소들을 <2012>에 집중시킵니다(그런데 따지고보면 이렇게 작정하지 않은 재난 영화를 찾기는 별로 어려운 편이죠. 오락적 재난 영화에서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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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재앙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마치 '자, 이제부터 대놓고 농담 같은 재앙 스토리를 펼칠테니까, 단단히 준비해'라고 말하는 듯, 쉽게 말해 대놓고 뻥을 치기 시작합니다. 온통 무너져내리는 캘리포니아를 주인공이 탄 리무진 차량과 경비행기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는 장면은, 사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 안되는 장면이긴 합니다. 뭐랄까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그 재난 속에 모든 파편과 지진을 피해서 온전히 빠져나오는 순간을 보고 있노라면 '좀 너무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 영화는 대놓고 '말도 안되지만 주인공이 벌써 죽지 않는다는 건 다들 잘 알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걸 서로 잘 아는 마당에 거리낌 없이 스케일을 키우고 과장 됨을 더해서 표현해 보겠다는 '작정'이 엿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차라리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차피 이런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는, 어떤 과학적 디테일이나 현실적 가능성 등을 고려한 것은 아니거든요. 그랬다면 주인공은 주인공이라 불리기 이전에 죽을 확률이 높고, 영화는 주인공 없이 수 많은 엑스트라 만으로 진행되는 리얼 다큐 재난 영화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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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냥 오락적인 요소에만 집중할 것 같았던 이 영화에서 롤랜드 에머리히는, 마치 자신을 그저그런 감독으로 생각하는 관객들에게 '나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대사 가운데 보면 존 쿠삭이 연기한 '잭슨'이 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비평가들은 너무 순진한 긍정이라고 얘기한다'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마치 로랜드 에머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이런 재난 영화만큼 순진한 긍정의 메시지는 없죠. 재난 이라는 벽 앞에서 모든 갈등이 봉합되고 주인공은 어떤 시련과 어려움에도 죽지 않으며,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희망을 엿보게된다는 전개 말이죠. 롤랜드 에머리히가 굳이 이런 대사까지 삽입한 것을 보면, 자신은 이런 비판들을 잘 알고 있으며, 본인이 말하려는 것이 비록 순진한 긍정일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허황된 것 만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듯해 오히려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재난 영화에 온갖 어렵고 복잡한 메시지를 풀어내려고 시도했다기 보다는 순진할지언정 누구나 공감 가능한 뻔한 이야기를 스케일로 업그레이드 해보겠다는 그의 야심이 솔직하게 드러나 보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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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에 대한 아주 미세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2>의 이야기 자체는 너무 전형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건 누가봐도 '노아의 방주'의 21세기 버전이죠. 영화 초반 에드리언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과학자의 아들이 배를 가지고 놀던 장면은 복선으로 보기에도 너무 뻔한 요소였고, 잭슨의 아들 이름이 '노아'인 것도 결코 우연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이 스토리 가운데 조금 비전형적인 요소들을 꼽아본다면, 대부분 나쁜 이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끝까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가 목숨을 잃게 되는 것과는 달리, 이런 캐릭터들 마저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과, 대부분 이런 재난 영화에서 국제적으로 마지막을 담당했던 국가가(특히 재정적인 면에서 독보적인 역할로 자주 등장했던) 일본이었던 것에 반해, 이번 작품에서는 중국이 마지막 가장 중요한 순간을 담당하는 국가로 설정되었다는 점이었지요. 물론 여기에 큰 정치적 메시지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어쨋든 무언가 생각해 볼만한 거리이기는 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마지막 인류가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되는 대륙이 아프리카라는 점 역시 생각해 볼만한 점이었구요. 아, 그리고 덧붙여 새 아빠 고든 캐릭터를 그냥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챙겨준 영화의 포용력도 인상 깊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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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쿠삭이야 그렇다치고 거의 주인공에 버금가는 역할을 맡은 애드리언 역할의 치웨텔 에지오포의 경우, 이전 많은 영화들에서 주조연급의 캐릭터를 많이 연기하기는 했지만 그 중 가장 큰 비중이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로, 주인공이라 부를 만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음이 흥미로웠습니다. 탠디 뉴튼은 출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출연 자체가 반가웠으며, 대니 글로버의 경우 대통령 역할을 맡은 것에 일단 '와, 대니 글로버가 이제는 미합중국 대통령 역할까지 맡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더 먼저 들더군요 ㅎ 그 외에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인상깊은 역할을 연기한 우디 헤럴슨과 너무 귀여운 딸 역할을 맡은 아역 연기자 모갠 릴리의 모습도 기억에 남을 듯 하다(모겐 릴리는 마치 레이첼 와이즈가 얼핏 떠오르기도 했다).


1. 아마도 정말 지구가 종말을 맞게 되더라도, 우리 같은 민간인들은 아무 것도 모른채 그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지 않을까요;;
2. 아놀드 주지사에 대한 묘사도 재밌더군요. '연기자잖아, 연기하는거야!'라는 식의 대사요 ㅎ
3. 엘리자베스 여왕 역할을 맡은 배우의 실제 이름도 '엘리자베스'더군요 ㅎ
4. 몇 가지 말도 안되는 설정들 가운데서도 최고는, 그 재난 중에도 어디서든 잘 터지는 핸드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ㅎ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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