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로드 (The Road, 2009)
마음 속 불꽃이 있는가?


코맥 맥카시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존 힐코트의 영화 <더 로드>는, 워낙에 많은 원작의 독자들 때문이라도 온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수 밖에는 없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코맥 맥카시의 원작 소설을 읽을 뻔했었는데, 다행히도(?) 막 읽으려는 찰나에 영화화 소식을 접한 터라 더 깨끗한 상태로 영화를 만나기 위해 독서의 즐거움을 포기하기도 했었다(그렇기 때문에 이 리뷰는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쓰여졌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사실 엄청난 베스트셀러라는 사실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긴 했지만, 베스트셀러의 영화화는 기대와 동시에 우려가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려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면, 비고 모르텐슨이라는 배우는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만한 믿음을 주어 결정적으로 이 작품을 주저없이 선택하게 되었다.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 이어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를 함께 하며 어쩌면 벗기 힘들었을 '아라곤'이라는 이미지를 너무 쉽게 벗어버린 비고 모르텐슨의 이름이 코맥 맥카시 보다 더 매력적이었던 건 아마 나 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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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알려주지 않지만 인류가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만큼의 재앙을 겪게 되어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쇼핑카트에 필요한 것들을 담아 인간들을 먹는 무리들을 피해 하루하루를 연명해 간다. 비고 모르텐슨이 연기한 남자는 아들과 함께 이 지구에 남겨졌으며, 아내의 마지막 말처럼 남쪽으로 남쪽으로 계속 힘든 여정을 이어간다.

혹자들은 왜 지구가 이런 재앙을 맞게 되었는지, 아니 그 이전에 정확히 어떤 재앙이 일어난 것인지조차 묘사나 설명이 없는 스토리에 대해 불만을 갖을 지도 모르겠다. 종종 이렇듯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해주지 않는 작품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물론 그 배경적인 이야기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쉽게 얘기해서 영화 속 부자에게는 그들에게 닥친 지구의 재앙이 지진이던, 온난화로 인한 재난이던, 멈추지 않는 화제던, 외계인의 침공이던 그 어떤 것이 되든 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더 로드>에서 닥친 재난은 '재난' 이상의 의미는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이런 재난을 맞닥들인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그 안에서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지가 핵심적인 이야기라는 말이다. 물론 지구가 어떤 재앙을 맞았고 아이가 다 크도록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불만으로 까지 전이될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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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재앙 앞에서 연약하기만 한 인간의 외로운 싸움을 그린 영화는 많은데, <더 로드> 역시 그 묘사 방법이 훨씬 더 정적이고 차분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많은 부분을 같이 하고 있다. 재난 앞에 무력함, 그리고 그 재난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는 전개, 항상 옳을 것만 같았던 우리의 주인공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욕구의 유혹에 넘어갈 때,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항상 강할 것만 같았던 역시 '우리의' 주인공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시퀀스 등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이야기 구성을 <더 로드>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물론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 영화의 접근 방식은 훨씬 정적이고 인상깊은 편이다).

개인적으로 <더 로드>에서 발견한 이 영화 만의 특별한 지점은 '따라온다'라는 개념이었다. 일단 이 영화에서는 굉장히 의도적으로 '따라온다'라는 대사를 사용하고 있다. 남자는 가끔씩 만나게 되는 불청객들에게 꼭 '언제부터 따라왔냐!'라고 묻곤 한다. 하지만 그 때마다 불청객들은 '따라오지 않았다'라고 얘기한다. 실제로 불청객들이 따라온 적은 없지만 남자는 항상 본인은 착한 사람으로서 나쁜 사람들에게 쫓기는 듯한 불안감에 살고 있다. 이것은 재앙이 닥친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라고 하더라도 이런 남자의 심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와 내 가족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회. 남자는 분명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홀로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아무도 믿지 못하고 스스로를 가두는 것으로 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믿고, 실제로 그렇게 생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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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들은 이런 재앙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이지만 본 적도 없는 착한 사람들(가족 외에)을 믿고 있다(정확히 얘기하자면 착한사람으로 믿고 있다). 길에서 만난 노인에게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남자는 누군가가 우리를 쫓고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아들에게는 이런 부정적인 걱정이 없다. 오히려 개가 있으니 한 무리의 가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다.
이런 아들과 남자의 미묘한 갈등은 이 영화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이런 재앙 속에서도 천사 같이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아들과 착한 사람이지만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재앙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를 일깨워 준다.

'따라온다'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자면 남자는 계속 불청객이 나타났을 때, 언제부터 우리를 따라왔냐며 의심했었지만 정작 그들을 계속 따라온 것은 영화 속에서 말하는 '착한 사람'들이었음이 밝혀지는 부분은 의미 심장했다(물론 영화에서 묘사하기로는, 왜 이 착한 사람들이 마치 부자를 시험이라도 하듯 계속 따라왔으면서 남자가 죽은 이후에야 나타났는지는 조금 의문이지만;;). 남자의 의심과는 다르게 계속 그들을 따라오던 이들은 착한 사람들이었고(개가 짖던 것도 순간도 그들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를 은연 중에 믿어오던 아들의 믿음은 결국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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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분명 컬러영화이지만 흑백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의 색이 드러나지 않는다. 색이 빠진 죽어있는 지구의 모습과 생존에 갈림길에 서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이로 인해 더 인상 깊게 다가왔으며, 별다른 스펙타클한 장면 없이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구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주연을 맡은 비고 모르텐슨은 다시 한번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흡입력 높은 연기를 펼친다. 비고는 실제로 아버지라는 캐릭터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항상 생각해왔었는데, <더 로드>에서 그런 진가가 제대로 드러나고 있다. 로버트 듀발과 가이 피어스는 워낙에 피폐한 캐릭터 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몰라볼 정도인데, 특히 가이 피어스의 경우는 까메오 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가이 피어스는 존 힐코트 감독의 전작 <프로퍼지션, 2005>에 출연했었다). 샤를리스 테론 역시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편인데, 개인적으로는 다른 의미에서 그녀의 출연이 굉장히 의미있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아들 역할을 맡은 코디 스미스 맥피 때문이었는데, 물론 이 아역 배우의 연기 역시 흠잡을데 없이 만족스럽긴 했지만, 별개로 이 아이의 얼굴에서 샤를리스 테론의 얼굴이 계속 비춰졌다는 것이 몹시도 흥미로웠다. 흡사 실제 모자 관계가 아닌가 (테론에겐 죄송;) 의심을 해볼 정도로 코디 스미스 맥피의 눈빛, 표정, 볼 에서는 샤를리스 테론의 이미지가 매우 자주 흘러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아들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서 단순히 아들 뿐만 아니라 아내를 그리는 그의 모습이 느껴져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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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닉 케이브 (Nick Cave)가 음악을 맡고 있습니다.
2. 존 힐코트 감독의 그의 아들인 Louie Hillcoat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 있습니다.
3. 이제야 마음 놓고 맥카시의 원작 소설을 읽어볼 수 있겠네요 ^^;
4. 엔딩 크래딧과 함께 시작되는 소리들을 귀 기울여 들어보세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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