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한 것들의 카니발

<말죽거리 잔혹사>를 마친 유하 감독은 이 작품이 학교라는 정형화된 틀 안에서 주입식으로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강압적인 폭력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군사정권 아래 암울한 시기에 무방비 상태에 청소년들에게 가해진 폭력, 직접적으로 가해진 폭력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된 간접적 폭력 등 인성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시기에 폭력성을 주입하는 사회와 시스템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한 남자아이가 어떻게 폭력성이 생겨나고 키워가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 <말죽거리 잔혹사>를 만들며 유하 감독이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유하 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를 얘기하면서 폭력에 관한 3부작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 작품 <비열한 거리>는 바로 그 두 번째 격인 작품이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폭력성에 시작에 관한 이야기라면 <비열한 거리>는 전작에서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폭력성을 키워온 한 고등학생이, 성인이 되어 이 폭력성을 소비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배경도 고등학교에서 사회로, 즉 조직폭력배로 스케일이 커졌다. 흔히 말하는 조폭영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조폭 코미디물과 조폭 영웅물이 있다. 조폭 코미디란 이미 한국 영화계에서 수없이 복제되었기 때문에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조폭 영웅물이란 쉽게 말해 한 때 전설이었던 주인공이 시간이 흘러 손을 때고 지내려는데, 예전에 원수들이 여자 친구 혹은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다시 폭력을 쓰게 되는,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장렬히 전사하게 되는,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미화하고 멋지다고 생각되게 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열한 거리>는 얼핏 보았을 때 후자 쪽에 가깝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프로듀서가 ‘이 영화를 보고 정말 조폭이 되지 말아야 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만들었다’라는 말처럼 이 영화는 절대 조폭을 미화시킨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조인성이 멋있어서 그랬다면 할 말 없겠다만).


 
폭력성과 더불어 유하 감독이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집단성’ 혹은 ‘조폭성’이다. 감독은 왜 폭력성과 집단성이 항상 함께 하는지(조직폭력배 라는 말자체가 집단성과 폭력성에 합성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에 관한 이유를 ‘성공’이라는 보편적인 것에서 찾고 있다. 특히 <비열한 거리>에서는 주인공 병두 외에도 이 같은 사례를 보여주는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폭력을 일삼고 있는 조직폭력배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영화 성공을 위해 친구의 비밀을 영화화하는 감독 민호(남궁민 분)나 역시 자신의 사업을 위해 폭력배들을 이용하는 황 회장(천호진 분)이나, 직접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이 그려지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천태만상들은 여전히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그 힘을 갖기 위해 갖은 자는 더 많은 나쁜 일들을 정당화하며, 이 힘의 논리에 피해 받아 죽어간 자들 역시 복수를 하기 위해, 역시 그들과 같은 방법을 쓰게 되며 결국 잘못된 연결고리가 계속되는 쓸쓸한 시스템을 그대로 보여준다. 감독은 직접적으로 폭력사용이 나쁘다 라는 표면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계속 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잘못된 연결고리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그래도 어느 정도 희망을 엿볼 수 있었던 ‘슬픈’ 영화였다면, <비열한 거리>는 그 희망마저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 ‘씁쓸’한 영화이다. 'One Summer Night'은 애절했지만, 'Old & Wise'는 씁쓸하기 그지없으니 말이다.



<비열한 거리>는 폭력이 중심이 된 영화인만큼 액션에도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진흙탕에서 벌어졌던 ‘인천터널’액션 장면은, 모든 배우들과 스텝들이 힘들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찍었다는 말들을 할 만큼, 심혈을 기울인 장면이다(봉고차에서 내리기까지만 3일을 촬영, 총 7일간 이 장면만을 촬영했다고 한다). 스텝들도 한국영화에 길이 남을 액션 씬을 한 번 만들어보자는 일념 하에 좀 더 리얼하고, 차 유리도 효과를 위해 실제 유리를 깨트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완성도 높은 장면을 완성해 냈다. 그리고 스스로 국내최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서점액션’씬 에서도 장소에 특성에 맞는 동선과 액션으로 리얼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이 외에도 실제 오락실을 빌려 촬영했던 ‘오락실 액션’과 봉고차 안에서 벌어지는 액션 장면 등 모든 액션 씬들이 영화적인 장면을 만들기보다는 더 현실적인 액션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 고심했던 장면들로 결과적으로는 스텝들과 관객들 모두 만족할만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인 병두 역할은 본래 조인성 같은 꽃미남 스타일이 아닌 좀 더 거칠고 말 없는 스타일이 될 예정이었으나, 조인성이 맡게 되면서 본래 시나리오와는 조금 다른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진구가 맡은 역할도 본래는 좀 더 익살스러운 캐릭터였으나, 진구가 캐스팅되면서 충복의 이미지로 변화되었고, 남궁민이 맡은 민호 역시 본래 시나리오와는 조금 다르게 변화되었다고 한다(처음에는 병두가 아닌 민호가 주인공이었으나, 영화적으로 강도가 약하다는 의견이 많아 병두를 주인공으로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인성에 연기에 관한 얘기들은 아직도 분분한 것이 사실이지만, <비열한 거리>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액션이면 액션, 감정이면 감정, 모두 다 한층 성숙해진 연기였다고 생각된다. 처음 조인성이 조폭역할을 맡았다고 했을 때는 앞서 언급했던 조폭이 미화되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보여준 연기는 이 전에 드라마에서 보았던 귀여운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안정적이었다. 이 외에 여러 배우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배우들은 윤제문과 천호진인데, 이 두 배우는 이 영화에서 꼭 필요한 무게와 중심을 잡아주는 탄탄한 연기를 펼치고 있다. 특히 라스트 씬에서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나야지’하는 천호진의 대사와 곧 이어지는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 Wise'는 정말 그가 아니면 만들어내지 못했을 아우라를 보여주고 있다.

 
2.35: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의 화질은 최근작답게 우수한 수준이다. CJ에서 출시했던 한국영화 타이틀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비열한 거리>역시 외곽선이나 명암비가 뚜렷한 선명한 화질을 수록하고 있다. 돌비디지털 5.1채널의 사운드는 액션씬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데, 쇠파이프, 야구 방망이등 수많은 연장(?)들을 사용한 액션 소음들과 사시미 특유의 섬뜩한 소리도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채널 분리도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며, 노래방 씬에서의 공간감도 수준급이다.
첫 번째 디스크에는 유하 감독과 김선중 PD의 음성해설, 그리고 조인성, 이보영, 진구가 참여한 음성해설 등 총 2가지 트랙의 음성해설이 수록되었는데, 영화와 주제에 관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원한 다면 첫 번째 트랙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촬영장의 에피소드나 장면 당시의 일들을 전해듣고 싶다면 두 번째 트랙을 추천한다.

두 번째 디스크에는 본격적인 서플먼트 영상이 수록되었는데, 메이킹 다큐멘터리 격인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에서는 전체적으로 영화를 기획했던 단계에서부터 촬영장 에피소드 등을 감독과 스텝, 배우들의 인터뷰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비열한 거리의 군상들’에서는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폭력성과 조폭성에 대한 좀 더 심도 깊은 이야기가 인터뷰로 수록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비열한 거리>는 상당히 액션 장면에 심혈을 기울인 장면인데, 서플먼트에서 이 노력을 고스란히 만나볼 수 있다. ‘인천터널 액션’ ‘오락실 액션’ ‘고수부지 액션’등 각각 액션을 파트별로 나누어 촬영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아마도 이 서플을 감상한 뒤 각 액션 장면의 본편을 다시 감상한다면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장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6.11.22
글 / 아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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