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my friend (Khane-ye doust kodjast?), 1987)
제목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영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1987년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예전 비디오테입으로 얼핏 본 기억만 있었는데 이번 아트하우스 모모에서의 재개봉을 통해 제대로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스치듯 본 기억으로는 그저 어린 소년들의 해맑은 모습들과 친구의 노트를 전해주기 위해 열심히도 달리던 주인공 아마드의 모습만이 기억에 남았었는데, 이번에 나이들어(?) 다시 보게 된 영화는 그저 '유년의 책갈피에 꽂힌 한 장의 꽃잎 같은 영화'라고만 하기에는 상당히 깊은 사회적 문제와 메시지가 담긴 이중적 영화였다. 물론 그저 이란 아이들의 놀랍도록 순수한 눈망울을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던 영화였지만.


(이후 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간단한 줄거리는 엄한 규율을 강조하는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는 아마드가 실수로 짝꿍의 숙제노트를 집에 가져오게 되는데, 한번 만 더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던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 겁이 난 아마드는 노트를 돌려주기 위해 집에서 한참이나 먼, 그리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친구 네마자데의 집을 찾아 한참을 해매이게 된다.

어쩌면 내일 주면 되지 않느냐는 아마드 엄마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숙제를 해오지 못했더라도 아마 선생님은 네마자데를 퇴학시키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아마드에게 이 사건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더군다나 나 때문에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퇴학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아마드를 온갖 방해들에도 굴하지 않고 친구의 집을 찾아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흥미로운건 바로 아마드가 네마자드의 집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이 과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어른들은 하나 같이 일방적이다. 아마드가 몇 번씩 물어봐도 들을 생각이 없는 것인지 들리지 않는 것인지 대답은 커녕 시늉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얘기만 반복적으로 전할 뿐이다. 그저 단순한 질문에 대답만 해주었다면 간단했을 일이 집요하게 대답하지 않는 듯처럼까지 보이는 어른들 때문에 어린 아마드를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의외로 굉장히 분노가 치미는 영화이자 인내를 시험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정말 집요할 정도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자신들의 입장만 가치관만 전달하려 한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아마드가 네마자데의 아버지인줄 알고 따라가게 된 문을 고치는 남자도 그렇고, 아마드의 할아버지도 그렇고 아마드의 선생님도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과연 진짜 저럴까 싶을 정도로 아마드가 마치 투명인간인냥 상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절로 분노를 일게 한다. 이들에게 아마드의 외침은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올 뿐이며 정말 말그대로 투명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뿐이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굳이 리얼타임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런 피곤함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관객들은 이 길을 처음 오를 때는 별 생각을 하지 않지만, 이 장면이 반복될 때에는 다들 탄식을 터뜨리게 된다. 다시 말해 관객은 전지적 입장에서 굳이 이럴 필요까지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속에서 고생하는 아마드를 보며 안타까울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아마드가 고생이 많다;).

마치 추리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양한 단서들을 조합하여 네마자데의 집을 찾던 아마드는 (이 영화를 추리극의 면에서 바라보면 굉장히 흥미로워진다. 같은 바지를 알아보고 추적하는 장면이나 네마자데라는 이름을 물어가며 집요하게 추적하는 장면은 마치 <추격자>에서 4885를 찾던 김윤석의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밤이 되어서야 구세주같은 할아버지 한 명을 만나게 된다. 네마자데의 집을 알고 있다는 할아버지의 등장은 관객들로 하여금 '아, 다행이다'라는 안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데, 이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돌아 찾아간 곳이 결국 낮에 들렸던 그 '네마자데'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관객은 더 큰 한숨을 절로 짓게 된다. 결국 이 곳에서 아마드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으며, 아마드는 체험을 통해서야 이런 현실을 깨닫고는 집으로 돌아와 밤을 새서 친구의 숙제를 대신해주게 된다.

사실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면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일은 처음부터 숙제를 대신 해주었으면 간단했을 일라는 것을 들 수 있을텐데, 이렇게 굳이 이런 일들을 피곤하게 보여준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밖에는 없는 단절되고 피곤한 이란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면에서 따져보면 이 영화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제목에 대부분의 메시지와 감성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인가'라고 묻는 아마다의 말에는 삭막한 사회 속에서 외치는 순수한 존재의 울림과도 같으며, 반대로 가장 친한 친구의 집도 알지 못하는 이란 사회의 폐쇠성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몇몇 장면들로 유추해보자면 이 아이들은 제일 친한 친구임에도 학교에서 어울리는 시간을 제외하면 따로 아이처럼 놀거나 할 여유가 없어보인다. 다들 가사나 일을 돕는데 남은 시간을 써야하기 때문에 단순히 노는데 투자할 시간은 없으며, 더군다나 동네가 떨어져 있는 경우는 더 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제목은 가장 친한 친구의 집마저 모를 수 밖에는 없는 이란 사회의 현실에 대한 푸념일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1. 재개봉이지만 대부분 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이 많아서인지 영화가 끝나고나자 '화끈한' 반응을 보여주시더군요. 요근래 엔딩에서 이렇게 화끈한 반응이 있었던 영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어요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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