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올해의 영화 베스트 10


2013년은 저에게 정말 정신 없이 바쁜 한 해 였습니다. 이 블로그에는 영화 관련된 이야기만 주로 올리다보니 얘기할 기회가 없었지만, 지난 해 말부터 올해 지금까지는 제 직장 경력을 통틀어 가장 정신 없이 바쁜 한 해였으며, 그 만큼 중요한 일들과 역할을 맡다보니 본래 좋아하던 영화보고, 음악듣고, 글 쓰는 일을 병행하는 것이 정말 더 더 어려워만 지더군요.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전보다 더 많은 영화를 보진 못하고, 영화제에 가는 건 꿈도 못 꿀 정도가 되었지만, 그래도 잠을 덜 자가며 어렵게 본 영화들과 써내려간 글들이라 더 뿌듯하기도 한 한 해 였기도 했네요.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는 자주 하는 말인데, 이렇게 잠을 못 잘 정도로 바쁘고 피곤해도 영화보고 쓰는 일을 잠시 쉬거나 멈추지 않는 건, 한 번 멈추면 절대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아서에요. 올해는 정말 중간에 쉬고 싶은 유혹이 많았었는데, 그 때 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버텨냈던 것 같습니다. 올해 본 '잉투기'를 보면 그런 대사가 나와요.


'계속하는 것은 힘이 된다'


제게 올해는 이 말을 새삼 깊이 새겨보았던 한 해였습니다.

자, 그럼 제가 올 해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10편의 영화를 소개합니다.

순위는 없으며 순서는 제가 극장에서 본 순서입니다.







1. 라이프 오프 파이 / 이안


올해 초 본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3D의 놀라운 영상도 대단했지만,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의 놀라움이 더 큰 작품이었어요. 믿음에 관한 영화 가운데 아마도 오랫동안 회자될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믿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믿고 싶어 하는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 작품.


라이프 오브 파이 _ 믿음을 말하는 거대한 이야기

http://realfolkblues.co.kr/1781







2. 가족의 나라 / 양영희


올 해 초 보았던 양영희 감독의 '가족의 나라'는 당시 너무 일찍 올해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고 바로 말할 수 있었을 만큼,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우리와 관련이 있는 제3자 혹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나라, 내 가족의 대한 이야기로 전달한 수작.


가족의 나라 _ 내 가족이 살고 있는 나라

http://realfolkblues.co.kr/1760






3. 월플라워 / 스티븐 크보스키


올 해의 청춘영화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엠마 왓슨 주연의 '월플라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이 영화는 청춘 영화가 흔히 담고 있는 무모함과 아름다움을 가장 높은 수준의 진심을 담아 전달하고 있는 영화였어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월플라워 _ 청춘, 그 뜨거운 무한함에 대해

http://realfolkblues.co.kr/1784






4. 테이크 쉘터 / 제프 니콜스


올 해의 청춘영화가 '월플라워'라면 올 해의 가족영화는 '테이크 쉘터'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처음엔 약간 미스테리한 SF적 요소에 관심이 있어 보게 된 영화였는데,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가장 진한 가족에 대한 내용이었네요.


테이크 쉘터 _ 불안을 이기는 가족의 힘

http://realfolkblues.co.kr/1794






5. 비포 미드나잇 / 리차드 링클레이터


전 물론 제가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좋아하는 지는 바로 이 작품을 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어요. '비포 미드나잇'은 뭐랄까, 극도로 현실적이면서도 판타지가 존재하는 그런 영화였는데, 삶의 아름다움과 현실로 인해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드는 참 이상한 영화였어요. 저도 그들처럼 어른이 되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비포 미드나잇 _ 세월의 무상함 보다는 성숙함

http://realfolkblues.co.kr/1803






6. 일대종사 / 왕가위


한 동안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던 왕가위가 엽문을 주제로 한 무협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화려하고 기술이 주가 된 액션 영화보다는 정수를 담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부푼 기대가 있었어요. 그 기대를 넘어설 만큼 왕가위 감독은 정수에서도 최고 지점을 간파하는 무협 영화를 만들었으며, 양조위는 기대 만큼 해주었고 장쯔이는 왜 그녀가 중화권 최고의 배우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정말 멋진 연기였어요. 굳이 여우주연상을 꼽자면 그녀.


일대종사 _ 왕가위의 21세기 동사서독

http://www.realfolkblues.co.kr/1829






7. 그래비티 / 알폰소 쿠아론


알폰소 쿠아론이 언젠가 일을 낼 줄 알았어요. 제가 해리포터 시리즈에 애착을 갖게 된 것도 그가 연출을 맡았던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때문이었거든요. '그래비티'가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것에는 전혀 이견이 없습니다.


그래비티 _ 당연하다고 여겼던 존재의 발견

http://www.realfolkblues.co.kr/1847







8. 사이비 / 연상호


'사이비'는 가장 흥미롭고 재미 없기 힘든 주제와 (하지만 반대로 그 가운데서 돋보이긴 힘든) 악인이 더 나쁜 악인과 싸우는 익숙한 구조 속에서도, 진정성과 다른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수작이었어요. 맹신이라는 것을 일 방향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의 다른 방향을 열어둠으로서, 같은 주제지만 새롭게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 준 영화이기도 했구요. 전작 '돼지의 왕'보다 모든 면의 진 일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국내 감독 중에서 가장 먼저 아카데미를 수상하게 될 감독은 아마도 연상호 감독이 아닐까 싶습니다.






9.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 / 코엔 형제


아직 국내 정식 개봉하지 않았지만 특별 시사회를 통해 먼저 보게 된 코엔 형제의 첫 번째 음악 영화는, 음악을 소재로 하되 코엔 형제스러운 영화가 될 것이라는 뻔한 예상과는 달리, 코엔 형제 영화이면서도 가장 완벽한 음악 영화의 경지에 오른 작품이었네요. 포크뮤직과 우연, 로드무비와 코엔 형제. 극장을 나오면 더 생각나는 영화였어요.







10.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최근 몇 년 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을 보면 그는 가족이라는 것 안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듯 보여요. 본인 스스로도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부모를 잃게 되는 등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늘어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닌가 싶네요. 이번 신작도 여지없이 좋았어요. 아마도 최근 일본 영화 감독들 가운데 이렇게 편차 없이 계속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감독은 그 밖에 없는 것 같네요.




제가 올해의 영화를 꼽으면서 홍상수 영화를 꼽지 않은 적은 최근 드문 것 같은데, '우리 선희'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은 둘 다 참 좋았지만 10편에 넣기에는 아주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고, 그 밖에 여기에 언급하지 못했지만 좋았던 영화들로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 강진아 감독의 '환상 속의 그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더 헌트' 등이 있었네요.


올해도 여전히 몇 편의 블루레이에 제 글을 실을 수 있었고, 몇 편의 음반에 해설지를 쓸 수 있었고, 몇 몇 기대하지 않았고 복에 겨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 부분은 따로 한 번 글로 정리하려구요. 매번 드리는 말씀이지만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올해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누군 가가 내 글을 정성껏 읽어주고 있다는 느낌은 생각 외로 삶에 큰 힘이 되거든요 ^^;


감사합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블루레이] 라이프 오브 파이

믿음을 말하는 거대한 이야기



이안에게 제 85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감독상을 안겨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는 복합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의 두 가지 스타일은 각각 정반대의 경우인데, 하나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 분명해서 이를 영화가 이끄는 대로 끝까지 따라간 뒤 영화가 맺은 마지막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를 선택하면 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영화는 적게는 두 가지의 길을 많게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도록 설계 되어 있어서 영화 스스로는 답을 하지 않은 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경우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가 흥미로운 것은 보는 이에 따라 이 두 가지가 모든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꼭 보는 이에 따라서가 아니라 같은 사람에게서도, 곱씹어 보기에 따라서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정반대의 경우로도 생각해볼 수 있고, 반대로 열려있다고 여긴 지점이 너무도 분명한 주장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넓게 보았을 때 '믿음'에 관한 영화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이야기는 영화 후반부에 파이가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두 가지 이야기 중 무엇이 진실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진실인가 라는 것보다는 둘 중 하나 혹은 모두가 다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우리가 영화 내내 공감하고 따라왔던 파이가 들려준 리차드 파커와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일본 선박회사 사람들에게 들려준 참혹한 이야기 역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내 생각은 불분명 했었다. 파이가 영화 내내 들려준 이야기에 흠뻑 빠져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고, 마지막 파이가 일본 선박 회사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다시 이야기를 들려 줄 땐 '아!'하며 진실이 무엇인지 반대로 의심하지 않게 되었었다. 하지만 극장을 나오며 다시 곱씹어 본 영화는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가를 넘어서서, 내가 더 믿고 싶은 것은 어느 쪽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영화가 궁극적으로 묻고 싶었던 바로 그 부분 말이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실제 참혹했던 일을 이렇듯 비유로 만들어낸 파이의 이야기에 목적성이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이야기(편의상)에서 내가 파이였다면 이런 오인 혹은 회피의 과정 없이 남은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여기에 대입해 인간이란 무엇이든 믿는 바 대로 자신을 컨트롤 혹은 속일 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에 다다랐는데, 좀 더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이런 방식으로의 회피나 왜곡을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이르렀다.


만약 이 이야기를 근거로 파이에게 일어났던 실제의 일들을 유추해 본다면 (식인 섬을 비롯) 파이가 처했던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 가에 대해 쉽게 답하기가 어려웠다. 즉, 리차드 파커는 사실상 파이의 또 다른 자아가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를 유체이탈 화법을 통해 3인칭 시점으로 본다면 리차드 파커를 탓하기는커녕 안쓰러움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리차드 파커를 타자로 인정했을 때의 얘기지, 이것이 파이 본인의 이야기라면 답변은 달라질 수 밖에는 없다.





사실 여기서 리차드 파커의 이야기가 사실 파이 본인의 이야기였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파이가 스스로 리차드 파커로 타자화 하여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또 다른 진실의 가능성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파이 스스로가 작가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신의 존재를 믿게 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의도한 것 자체가 비판적인 측면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 보니 새삼 '라이프 오브 파이'가 '영화'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게 되었다. 모든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얘기처럼 이 작품 역시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영화라는 것은 2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감독이 철저히 주도권을 쥐고 관객을 믿게 만들거나 오해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즉, 어떤 영화라도 '만들어 졌다'라는 태생적 요소를 부정할 수 없다는 얘기인데, 그런 측면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의 거의 대부분은 특히 더 가짜의 것들로 채워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믿음에 관한 영화임에도, 아니 그래서 인지 몰라도 이 영화의 대부분은 가짜로 '만들어 진' 것들이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물론 대부분 CG로 만들어졌고, 바다도, 하늘도, 대부분의 배경들도 CG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만들어진 것들이 겹겹으로 쌓여 복합적인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영화다. 이 허구로 쌓인 겹겹의 구성이 본래의 진실을 더 강하게 만들고자 함인지, 반대로 본래의 진실 혹은 거짓마저 강하게 부정하려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 라기 보다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처음부터 '믿는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몇 가지 테마를 던진다. 첫 번째는 수영장의 이름에서 따온 파이의 이름이 다른 의미로 읽혀 겪게 되는 과정을 통해, '이름'이라는 것 즉, 불리는 기호로서의 이름에 대해 다룬다. 조련사와 동물의 이름이 바뀌어 그대로 불리게 된 '목마름'과 '리차드 파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 '이름'이라는 것의 에피소드를 통해 부르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 혹은 부르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씩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직접적으로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든다. 파이가 종교를 만나고 믿게 되는 과정은 이 영화의 주제와 상당히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 힌두 신이 예수님을 소개해주고, 예수님이 알라 신을 소개 해주었다는 식의 전개는 어쩌면 지금의 종교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믿음'에 관한 측면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전개였다.


여러 가지 종교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다루면서도 모든 종교에게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지는 영화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라이프 오브 파이'가 종교를 다루고 있는 방식은, 종교를 믿는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인 '믿음'이 아닌 종교 그 자체를 믿고 있는 현실을 자연스레 환기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이 러닝 타임 상으로는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종교를 다루고 있는 방식은 그 어떤 영화보다 탁월하고 솔직했다.






이름과 종교를 아우르면서 믿음에 관한 것을 풀어내고 있는 것은 결국 '이야기'다. 이 영화는 결국 파이가 작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관객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듣는 입장으로 파이가 겪은 일들을 듣게 된다. 파이는 작가에게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를 어떻게 믿느냐는 당신에게 달렸고, 이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아닌 당신의 이야기라고. 이것은 앞서 이 영화를 '영화'에 대한 영화로 보았을 때 더 직접적인 메시지가 된다.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간혹 감독의 의도나 결론이 무엇인지에 더 초점을 맞추기도 하는데, '라이프 오브 파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라는 것은 감독의 예술이기는 하지만 결국 관객이 완성하는, 관객 한 명 한 명 각자의 것이 될 때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매우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믿겠습니까?'라고.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겠다 라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결론을 내려보자면 지금은 답할 수 없다 정도일 것 같다. 다시 말해 이 대답은 대답을 하는 시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그런데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내 마음 한 켠에서는 간절히 믿고 싶어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필요 없이 장황해질 것만 같은데, 어찌되었든 무언가를 아무 조건 없이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사실'인 것 같다. 그것이 맹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말이다.





Blu-ray : Menu






Blu-ray : Video


MPEG-4 AVC 포맷의 풀HD 화질은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다. 블루레이 리뷰를 작성하면서도 모든 스크린 샷을 다 화질 소개 용으로 써도 무방할 만큼, 화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극장에서 볼 때도 화질이 좋게 느껴졌었는데, 블루레이의 화질이 보여주는 체감도는 그 이상이다.


▼ 스크린샷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본문에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라이프 오브 파이'는 CG의 활용도가 상당히 높은 작품인데, 극도의 디테일 한 표현으로 인해 '이게 진짜 블루레이 화질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DVD의 화질이 아무리 좋다 한들 '라이프 오브 파이'를 DVD로 보면 감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블루레이의 화질은 압도적이다. 표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변해가는 파이의 피부 상태는 작은 상처 하나도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는 화질을 통해 더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오랑우탄 '오렌지주스'의 털과 피부의 표현은 물론 그녀(?)의 표정 연기마저 돋보이게 만들 정도로 얼굴의 주름 하나까지 잡아낸다.






파이와 리차드 파커가 섬에 도착하게 되면서부터는 그야말로 화질의 깨알 같은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는데, 특이하고 잔 줄기가 많은 녹색 나무들의 갈라짐과 셀 수 없이 많은 미어캣들을 화면 가득 잡아내는 장면은 나도 모르게 '와!' 소리가 나올 정도로 놀라운 화질을 보여준다. 장면 자체가 자연 다큐멘터리 같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명 그 놀라움 가운데는 선명하고 날카로운 화질로 표현되는 미어캣 한 마리 한 마리의 표현력 때문이기도 하다.






어두운 장면에서도 화질의 우수성은 잘 드러난다. 특히 '라이프 오브 파이'의 어두운 장면들은 완전히 어두운 장면이라기 보다는 반사광이 화려하게 표현된 장면이라던가, 미미한 광량으로 인해 아직은 밝기가 남아있는 장면들이 많은데, 어쩌면 애매하게 표현될 수 있는 그 어슴푸레한 순간을 딱 그 수준의 광량이 느껴질 정도로 표현해 내고 있다. 또 어두운 밤 바다를 배경으로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무너진 순간에 네온처럼 빛을 발하는 물고기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장관인 동시에 블루레이 화질에 또 한 번 만족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Blu-ray : Sound


DTS-HD MA 7.1 채널의 사운드 역시 레퍼런스로 평하기에 손색이 없다. 임팩트와 밸런스가 모두 수준급인 사운드를 수록하고 있는데, 파이가 난파되기 이전까지는 영화 음악과 함께 편안한 사운드를 주로 들려주다가, 침몰 되는 장면에서부터는 '퍼펙트 스톰' 부럽지 않은 강렬한 폭풍우를 안방으로 가져온다. 실제로 이 전까지 편안하게 영화를 즐기다가 이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볼륨을 줄이게 되었을 정도로, 침몰 순간의 혼란스러움이 휘몰아치는 사운드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리차드 파커의 으르렁 거리는 사운드 역시 굉장히 공간감 있게 울리는데, 특히 처음 리차드 파커가 배 아래에서 등장할 때의 그 사운드 적인 임팩트는, 깜짝 놀라 마치 영화 속 파이처럼 몸을 뒤로 젖혀 지게 만들 정도다.






또 하나 사운드 적인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장면이라면 역시 물고기 떼가 등장하는 장면일 텐데, 복잡한 가운데 오히려 작은 소리들을 하나 하나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사운드의 디테일이 돋보인다. 물고기 떼가 날아오는 소리와 다시 물 속으로 입수와 날기를 반복할 때 나는 마찰음 그리고 여기에 파이의 몸에 부딪혀 나는 마찰음까지, 적지 않은 소리들이 섞여 있음에도 개별의 소리가 잘 살아있는 장면이었다.


Blu-ray : Special Features


3D버전과 2D버전의 합본으로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2장의 디스크에 나뉘어 수록되었다. 첫 번째 디스크에는 3D본편과 부가영상이, 두 번째 디스크에는 2D본편과 부가영상이 수록되었는데, 첫 번째 디스크에는 삭제 장면과 시각효과 과정에 대한 부가 영상 등이 수록되었으며 본격적인 부가영상은 두 번째 디스크에 수록 되어있다.






삭제 장면은 총 5가지가 수록되었는데 '아난디의 두 번째 춤'에서는 본편에서는 짧게 등장했던 아난디의 춤을 훨씬 더 긴 버전으로 만나볼 수 있는데, 이 버전을 본다면 극 중 파이처럼 아난디의 다양한 표정과 춤사위에 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해피 버스데이'는 물고기 떼가 지나간 이후, 바다 위에서 엄마의 생일을 기념하는 장면으로 파이가 낚시 등에 더 익숙해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 파이가 리차드 파커의 몸짓과 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는 장면도 만나볼 수 있다.





'시각효과 과정'에서는 포스트 비즈, 프리비즈, 플레이트, 최종 버전 등으로 나뉘어 각각 시각효과가 최종적으로 적용되기 전 과정들을 보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으며, 애니메이션을 통한 사전 시각화 과정 역시 비교하기 쉽게 소개해 준다.






두 번째 디스크에서 가장 대표적인 부가영상이라면 '감독의 여정'을 꼽을 수 있을 텐데, 1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동안 이안 감독을 중심으로 이 영화가 어떻게 기획되었고, 촬영 기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들려준다. 무려 4년이라는 제작 기간은 신념과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여정이었는데, 이안 감독과 제작진들은 마치 파이가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이 작품을 영화화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고, 신뢰로 이어져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가족처럼 버텨낼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스개 소리로 영화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3대 요소인 아이들, 동물, 물이 모두 나오는 영화라서 처음에는 모두들 꺼려한 아이템이기도 했다는데, 원작자 얀 마텔도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하듯 처음 폭스가 영화화를 위해 판권을 구매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미쳤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영화로 만들기에는 너무 복잡한 구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이안 감독과 제작진이 만들어 내는 과정 들을 보며 조금씩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영화사에 프리젠테이션 용으로 사용했던 다양한 컨셉 아트 장면들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영화 장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아니 오히려 더 예술적인 면모가 부각된 작품들로 감독이 연출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CG호랑이 때문에 철저한 사전 시각화 작업을 거칠 수 밖에는 없었는데,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 사전 시각화 작업에만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관객이 보게 된 결과물이 얼마나 오랜 시간 공들여 나온 '자연스러움'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파이 역할을 맡은 수라지의 카메라 오디션 동영상도 만나볼 수 있는데, 수라지가 이 영화에 캐스팅 되기 된 계기가 우리가 흔히 듣는 바로 그 케이스, 동생 오디션에 따라 갔다가 우연히 캐스팅 된 경우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연기 경험이 전혀 없던 그에게 '라이프 오브 파이'가 주는 의미가 어느 정도 인지도 엿볼 수 있었다. 수라지는 영화 촬영 전에는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것은 물론, 평생 바다를 직접 본 적도 없었다고 하는데, 수영을 배우고 보트 위에서 생존을 배우는 트레이닝 과정 자체가 수라지에겐 영화 속 파이처럼 큰 도전이자 모험이었다는 얘기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대부분이 대만에서 촬영되었는데, 대만에서 촬영한다는 건 이안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영화 촬영을 해본 적이 없는 대만이었지만 이안에게는 다양한 시설의 제작은 물론, 시장과 총리까지 직접 촬영장을 찾아 격려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영화 제작 사상 가장 큰 파동 수조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뒷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 초대형 파동 수조는 그 제작과정만 봐도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를 실감할 수 있는데, 부가영상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준다.






부가영상을 통해 알게 된 사실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는 리차드 파커, 즉 호랑이에 관한 내용들이었는데, 자연스러운 CG호랑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기술적으로 엄청난 조사와 시간을 투입한 것은 물론이요, 그와는 별개로 실제 호랑이 조련사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더 진짜 같은 리차드 파커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이안 감독은 조련사인 티에리에게도 각본가의 공을 주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이안이나 각본가 혹은 애니메이터가 알지 못했던 호랑이의 습성과 심리를 티에리가 조언해 주었으며, 그의 말을 듣고 각본이 수정된 경우도 많았을 정도로 단순히 호랑이를 조련하는 것이 아닌 영적인 교류를 한다는 그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를 설명하며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상당 부분이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이 기술과 표현들이 얼마나 디테일하게 현실에 철저히 기반을 두고 임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의 주된 촬영 장소였던 대규모 파동 수조 세트에서의 촬영 이야기와 함께 3D 촬영에 대한 이야기도 수록되었다. 이안 감독은 처음부터 공간적인 규모와 범위를 느끼게 하려면 3D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이 이야기를 3D로 촬영해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3D는 극장에서 볼 때도 그랬지만 3D 입체 효과를 일부러 과장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깊이를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3D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3D영화들과의 차별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라이프 오브 파이'는 지금까지 나온 3D 영화들 가운데서도 단연 손꼽히는 3D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경이로운 영상'에서는 말 그대로 영화 속 경이로운 장면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특수효과 차원이 아니라 예술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가능했던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영상 작업이 특별히 어려웠던 점은 영화의 이야기 상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해야만 하는 숙명을 갖은 작품인 동시에, 대부분이 물 위에서 진행된다는 점 때문에 실제 촬영한 물과 CG로 만든 물이 자연스럽게 섞여야 했으며, 그 안에 CG캐릭터인 리차드 파커와 실사 캐릭터인 파이가 섞여 있고 이 모든 것들을 3D로 촬영된다는 점을 또 한 번 염두 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작품들에 비해 곱절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여기에 더 나아가 기술적 완성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작품이었기에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작업이었음을 그 과정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생생한 벵갈 호랑이의 탄생'에서는 영화 속 리차드 파커의 제작 과정을 소개하고 있는데, 단순히 100% CG캐릭터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호랑이와 CG호랑이가 지속적으로 교차하는 방식이라 자연스러운 연결이 필요해 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했던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영화 속에서 파이가 보트 위에서 리차드 파커를 훈련시키는 과정은 그 자체로 독립된 또 하나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장면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파이와 리차드 파커와의 영적 교감을 관객들도 느낄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앞서 소개했던 조련사 티에리의 조언이 각본에도 적극 적용되었다는 걸 한 번 더 소개하고 있다. 또한 천 만개가 넘는 털로 이뤄진 리차드 파커를 표현해 내기 위해 수없이 복잡한 작업을 반복했다는 것도 (이런 작업을 거친 리차드 파커가 물로 뛰어드는 장면도 있으니 말 다했다 -_-;) 소개하고 있다.





그 밖에 마지막으로 갤러리와 총 7가지 장면의 스토리 보드가 수록되었다.




[총평]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결말이 열려있는 것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표현하는 영상과 표현 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깊이 있는 올해의 명작이다. 영화적으로는 물론 압도하는 화질과 사운드 그리고 성숙한 3D영화의 교본으로서도 완벽한 블루레이 타이틀이기도 하다. '라이프 오브 파이' 블루레이는 압도적인 화질과 사운드를 즐기기 위해서도 가끔 꺼내보는 타이틀이 되겠지만, 다시 한 번 파이의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느껴보고 싶을 때도 꺼내보게 될 그런 작품이 될 듯 하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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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IMAX 3D, 2012)

믿음을 말하는 거대한 이야기



연초부터 정말 흥미로운 작품을 보았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는 복합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의 두 가지 스타일은 각각 정반대의 경우인데, 하나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 분명해서 이를 영화가 이끄는대로 끝까지 따라간 뒤 영화가 맺은 마지막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선택하면 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영화는 적게는 두 가지의 길을 많게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도록 설계 되어 있어서 영화 스스로는 답을 하지 않은 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경우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가 흥미로운 것은 보는 이에 따라 이 두 가지가 모든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꼭 보는 이에 따라서가 아니라 같은 사람에게서도, 곱씹어 보기에 따라서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정반대의 경우로도 생각해볼 수 있고, 반대로 열려있다고 여긴 지점이 너무도 분명한 주장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넓게 보았을 때 '믿음'에 관한 영화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 Fox 2000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이야기는 영화 후반부에 파이가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두 가지 이야기 중 무엇이 진실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진실인가 라는 것보다는 둘 중 하나 혹은 모두가 다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우리가 영화 내내 공감하고 따라왔던 파이가 들려준 리차드 파커와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일본 선박회사 사람들에게 들려준 참혹한 이야기 역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내 생각은 불분명 했었다. 파이가 영화 내내 들려준 이야기에 흠뻑 빠져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고, 마지막 파이가 일본 선박 회사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다시 이야기를 들려 줄 땐 '아!'하며 진실이 무엇인지 반대로 의심하지 않게 되었었다. 하지만 극장을 나오며 다시 곱씹어 본 영화는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가를 넘어서서, 내가 더 믿고 싶은 것은 어느 쪽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영화가 궁극적으로 묻고 싶었던 바로 그 부분말이다.



ⓒ Fox 2000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처음에는 단순하게 실제 참혹했던 일을 이런 판타지로 승화(?)시킨 파이의 이야기에 목적성이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이야기(편의상)에서 내가 파이였다면 이런 오인 혹은 회피의 과정 없이 남은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여기에 대입해 인간이란 무엇이든 믿는 바 대로 자신을 컨트롤 혹은 속일 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에 다다랐는데, 좀 더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이런 방식으로의 회피나 왜곡을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이르렀다. 만약 이 이야기를 근거로 파이에게 일어났던 실제의 일들을 유추해 본다면 (식인섬을 비롯) 파이가 처해던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 가에 대해 쉽게 답하기가 어려웠다. 즉, 리차드 파커는 사실상 파이의 또 다른 자아가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를 유체이탈 화법을 통해 3인칭 시점으로 본다면 리차드 파커를 탓하기는 커녕 안쓰러움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리차드 파커를 타자로 인정했을 때의 얘기지, 이것이 파이 본인의 이야기라면 답변은 달라질 수 밖에는 없다.


사실 여기서 리차드 파커의 이야기가 사실 파이 본인의 이야기였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파이가 스스로 리차드 파커로 타자화 하여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또 다른 진실의 가능성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파이 스스로가 작가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신의 존재를 믿게 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의도한 것 자체가 비판적인 측면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 Fox 2000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그렇다보니 '라이프 오브 파이'가 영화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게 되었다. 모든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얘기처럼 이 작품 역시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영화라는 것은 2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감독이 철저히 주도권을 쥐고 관객을 믿게 만들거나 오해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즉, 어떤 영화라도 '만들어 졌다'라는 태생적 요소를 부정할 수 없다는 얘기인데, 그런 측면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의 거의 대부분은 특히 더 가짜의 것들로 채워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믿음에 관한 영화임에도, 아니 그래서 인지 몰라도 이 영화의 대부분은 가짜로 '만들어 진' 것들이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물론 대부분 CG로 만들어졌고, 바다도, 하늘도, 대부분의 배경들도 CG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만들어진 것들이 겹겹으로 쌓여 복합적인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영화다. 이 허구로 쌓인 겹겹의 구성이 본래의 진실을 더 강하게 만들고자 함인지, 반대로 본래의 진실 혹은 거짓마저 강하게 부정하려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라기 보다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 Fox 2000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하지만 영화는 매우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믿겠습니까?'라고.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겠다 라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결론을 내려보자면 지금은 답할 수 없다 정도일 것 같다. 다시 말해 이 대답은 대답을 하는 시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그런데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내 마음 한 켠에서는 간절히 믿고 싶어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필요 없이 장황해질 것만 같은데, 어찌되었든 무언가를 아무 조건 없이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사실'인 것 같다. 그것이 맹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말이다.



1. 아이맥스 3D로 보았는데, 이 영화는 '이야기' 만큼이나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아이맥스 3D관람을 추천하고 싶어요. 이 영화가 믿음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방법 중에는 관객을 압도하려는 시각적 의도가 분명히 있거든요.


2. 이안 감독의 스펙트럼은 진짜 놀라운 것 같아요. 작품의 호불호를 떠나서 '헐크' '색,계' '라이프 오브 파이' '센스 앤 센서빌리티' '와호장룡'이 같은 감독의 필모그래피라고 믿기는 힘들죠. 이것도 믿음의 문제인가요 ㅎ


3. '라이프 오브 파이'는 좋아하는 영화인 동시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네요. 다시 보고 싶어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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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앞으로 남은 기대작들은?



2011년 좋았던 영화를 꼽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고, 상반기 베스트 영화라며 몇 편을 꼽았던 것도 정말 별로 안된 것 같은데 벌써 10월하고도 10일. 이제 2012년도 3달 정도 밖에는 남질 않았군요. 그러다보니 그렇다면 과연 올해 남은 개봉예정작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들은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자연스레 궁금해질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볍게나마 현재 개봉이 확정된 영화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기대되는 작품들을 꼽아보았습니다. 물론 이 밖에도 여러 작품들이 개봉할 예정이고 아직 확정되지 않은 작품들도 있는 터라 더 많은 영화들이 추가되겠지만, 일단 아래 일곱 작품들은 극장에서 꼭 볼 작정입니다.


순서는 개봉역순이며 중간에 개인 성향에 따라 혐짤도 포함되었으니 미리 마음에 준비를 해주세요.

(참고로 이 것 때문에 일부러 이 작품만 순서를 바꿨습니다 --;;)

(아, 그리고 이 글은 기존 영화 글과는 달리 100% 소개 형식의 글이라 평소와 다르게 경어체로 작성되었습니다)



1.



007 스카이폴 (Skyfall, 2012)

10월 26일 개봉예정

감독 - 샘 맨데스

주연 - 다니엘 크레이그, 하비에르 바르뎀, 랄프 파인즈, 주디 덴치, 알버트 피니, 벤 위쇼 등


첫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세 번째 007영화 '스카이폴' 입니다. 기존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를 리뷰하면서도 했던 얘기지만 저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기존 본드들 보다도 더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래서인지 그가 만드는 007 영화에는 편차는 조금 있었지만 대부분 만족스러웠으며, 이번 작품 역시 큰 고민없이 아이맥스로 감상할 예정입니다. 다니엘 크레이그 말고도 기대하게 하는 배우들이 여럿 출연하고 있네요.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차세대 제임스 본드의 후보 중 한 명이었던 하비에르 바르뎀과 '볼드모트' 랄프 파인즈, 알버트 피니와 벤 위쇼까지. 벤 위쇼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인데 스크린에서 자주 만날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 '스카이폴'에서는 어떤 캐릭터를 선보일지 기대가 되네요.






MB의 추억 (Remembrance of MB, 2012)

10월 18일 개봉예정

감독 - 김재환


두 번째 작품은 앞서 소개한 '스카이폴' 보다도 한 주 먼저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MB의 추억' 입니다. '트루맛쇼'를 통해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던 김재환 감독의 작품으로서, 이명박 정권 말기에 그의 재임기간을 되짚어보며 정산하는 코미디 물이라고 하네요.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라면 그냥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을 정산한 것 뿐인데 장르가 코미디가 되었다는 것 정도? 요근래는 TV에서도 얼굴 보기가 힘든 대통령인데, 이렇게나마 극장에서 스크린을 통해 그와 함께한 5년 간을 추억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좋은 추억은 아니겠죠.






몬스터 호텔 (Hotel Transylvania, 2012)

11월 22일 개봉예정

감독 - 겐디 타르타코브스키

주연 - (목소리 연기) 아담 샌들러, 셀레나 고메즈, 앤디 샘버그, 스티브 부세미 등


음, 일단 이런 류의 애니메이션도 좋아하는 입장에서 기대작에 꼽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뚜껑을 열어봐야 좀 더 정확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작품일 것 같습니다. 국내 개봉 제목을 보면 픽사의 '몬스터 주식회사'를 연상시키니는 하지만, 픽사와는 전혀 무관한 소니픽쳐스의 작품이며 작화나 분위기로 봐서는 오히려 팀 버튼의 애니메이션에 더 가까운 작품일지도 모르겠네요. 기대반 우려반의 작품이랄까요?






남영동 1985 (National Security, 2012)

11월 개봉예정

감독 - 정지영

주연 - 박원상, 이경영, 명계남, 김의성 외


다음 기대작은 '부러진 화살'을 연출했던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남영동 1985'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군부독재 시절 남영동 치안본부를 배경으로한 어두운 과거를 담고 있는 작품인데, 얼마 전 세상을 떠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김근태 님의 실화를 바탕으로한 작품이네요. 혹자들은 이 영화를 내용만 가지고 단순히 선거철에 맞춘 기획 영화라고도 폄하하는데, 영화에 완성도야 보고 나서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에 근거한 이런 영화에 영향을 받는 후보라면 과연 대통령 자격이 있을까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부러진 화살'보다 10배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

11월 개봉예정

감독 - 이안

주연 - 수라즈 샤르마, 이르판 칸, 아딜 후세인 외


다음 기대작은 이안 감독의 신작 '라이프 오브 파이' 입니다. 이 작품은 얀 마텔의 유명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 기획 초기부터 많은 기대를 갖게 했는데, 개인적으로도 원작 소설(파이 이야기)을 읽었던 터라 (다 읽지는 못했다는 것이 함정;;) 소설 속에서 상상으로만 그렸던 세계를 이안 감독이 어떻게 영상화 했을지 궁금증이 앞서더군요.






바람의 검심 (るろうに剣心, Rurouni Kenshin, 2012)

11월 개봉예정

감독 - 오오토모 케이시

주연 - 사토 타케루, 아오이 유우, 타케이 에미, 아오키 무네타카 외


다음 작품은 개봉 안할까봐 겸사겸사 일본에 한 번 가볼까? 까지 생각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기대하고 있는 문제작(!) '바람의 검심' 입니다. 애니메이션과 코믹스 '바람의 검심'의 왕팬으로서 사실 영화화는 극구 말리고 싶었고, 관련 소식을 전할 때 마다 '제발 그만해!' '하지마!'를 외쳤던 작품인데, 어쨋든 나와버렸으니 두 눈으로 확인하긴 해야할 것 같아서요. 무슨 짓을 해도 원작의 켄신 근처까지 가기도 어려울 것 같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혹시??'하는 일말의 기대를 갖게 하는 묘한 작품이랄까요. 어쨋든 개봉 한다니 천만 다행입니다. 실망을 하더라도 직접 보고 해야죠.





호빗 : 뜻밖의 여정 (The Hobbit: An Unexpected Journey, 2012)

12월 개봉예정

감독 - 피터 잭슨

주연 - 마틴 프리먼, 이안 맥켈런, 리처드 아미티지, 케이트 블란쳇 외


올해의 마지막을 장식할 영화는 누가 뭐래도 피터 잭슨의 '호빗 : 뜻밖의 여정'이 될 예정입니다. '반지의 제왕'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그러니까 프로도 배긴스의 삼촌이었던 빌보 배긴스가 주인공인 이야기로, 빌보가 절대 반지를 얻게 되는 과정 그러니까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에게 들려줬던 그 무용담을 담은 이야기로 보면 되겠네요. '반지의 제왕'을 보고나서 원작 소설을 완독하고는 자연스럽게 '호빗'도 소설로 먼저 읽어보았었는데, '반지의 제왕'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볼거리가 덜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중간계를 스크린에서 만난다는 것 만으로도 벅찬 작품이네요. '반지의 제왕'의 여러 캐릭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재미 중 하나일텐데, 그 가운데서도 역시 '골룸'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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