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판타지아 (A Midsummer's Fantasia, 2014)

이 우주 어디가 존재 할 너에게



그 제목과 (제목이 너무 좋다) 아련한 수채화 풍의 포스터 이미지들 만으로도 몹시 보고 싶었던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그저 좋기만 한 작품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가득 채워진 세상 (그리고 영화)에서 최소한의 것들 만을 남기고 비우는 것 만으로도 최근은 치유 받는 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최소한의 것들 만으로 여백의 여유와 긴 여운으로 좋은 느낌의 가득 참을 선사하는 동시에, 형식이나 디테일 측면에서도 영화적 흥미를 이끌어 내는 흔치 않은 작품이었다. 어쩌면 그저 쉬고자 했던 입장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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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판타지아'는 크게 두 개의 섹션으로 나눠져 있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는 한국에서 온 영화 감독 태훈이 일본의 소도시인 고조시를 방문해 이 곳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이틀 남짓의 여정이 담겨 있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는 역시 동일한 고조시를 배경으로 한국에서 여행 온 혜정이 우연히 만나게 된 청년 유스케와의 짧은 여정을 담고 있다. 일단 이 두 개의 에피소드가 서로 작용하는 방식이 흥미로운데, 여러 가지 측면으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 같은 작품이 연상 되기도 하는데, 단순하게 보면 두 에피소드의 관계를 1편에서 조사를 마친 영화 감독 태훈이 만들어 낸 결과물로서 두 번째 에피소드를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한 편으론 고조시라는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르는 평행우주 저 편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첫 번째 감상 방식을 단순하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단순하지 만은 않은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기도 한데,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태훈이 보고 듣게 된 사람과 사실, 풍경 들이 어떤 식으로 받아 들여 졌는 지를 두 번째 에피소드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여러가지의 접촉들 가운데 무엇이 더 인상적이었고, 어떤 대화가 더 중요하다고 느껴 졌는지가 작품을 통해 표현 된다는 점에서, 이 방식의 접근 방법도 생각보다는 단순하지 않고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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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이 같은 접근 방식보다는 오히려 두 번째 평행 우주의 접근 방식으로 이 영화가 더 받아 들여 졌는데, 얼핏 들으면 그냥 두 가지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불과(?)한 것에 과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마치 '족구왕'을 진짜 SF영화로 느꼈던 것처럼), 이 영화에는 이러한 접근 법을 수긍하게 할 만한 묘한 분위기 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 태훈이 오래 된 학교 건물에서, 동네 어른에게 전해 들었던 인물의 환영을 본다 거나 (보는 꿈을 꾼다 거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혜정과 유스케가 걷다가 만나게 된 벚꽃 우물의 전설을 한 참이나 들려 주는 것도 그렇고, 이 영화에는 마치 '판타지아'라는 제목처럼 지극히 현실적이고 소박한 단편적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환상적이고 우주 적인 감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것 때문 만은 아니지만, 두 명의 배우가 각 에피소드에서 서로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형식도 이러한 묘한 분위기에 한 몫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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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가, 어쩌면 전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었던 혜정과 유스케의 관계와 감정 들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졌다. '더 같이 있고 싶어요'라는 말이 그 어떤 전쟁 같은 사랑을 하는 연인들 보다 도 더 절실 하게 느껴졌던 건 비단 유스케 역할을 맡은 배우 이와세 료의 그 눈빛 때문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차원적인 시간의 계산으로는 비록 이틀이 조금 안되는 시간을 함께 했을 뿐이지만, 영화는 마치 이 둘을 오랜 시간, 다른 차원으로 부터 이어진 애틋한 관계라고 느껴질 정도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영화 속에 등장한 혜정과 유스케의 관계와 그들이 서로 느끼게 되는 감정이 보통 같았으면, 마치 우리가 헐리웃 액션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남녀 주인공이 모든 것을 재쳐 두고 키스할 때 그 어떤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저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생각되었을 텐데, 어쩌면 비유로 든 헐리웃 영화 속 남녀 주인공 들 보다도 표면적 유대 관계가 없었음에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것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이 바로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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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두에 이야기 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제목이 참 좋다. 내용을 포장하고자 한 제목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더도 덜도 없이 표현해낸 제목. 그것이 '판타지아'라는 점이 놀라울 뿐. 



1. 영화를 봤던 지난 일요일 낮 시간은 정말 몹시 더웠었는데, 이 영화를 보기엔 더 없이 적절한 날씨가 아니었나 싶네요.

2. 영화 속 실제 장소가 존재하는 경우, 그 장소에 꼭 한 번 가보려고 하는 편인데 고조시도 가야 하나요. 다른 경우와 달리, 이 작품은 영화 홍보 자체가 지도까지 나눠주면서 가보기를 부추기고 있어서 더 고민 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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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Dooman River, 2009)
경계와 경유 그리고 약속


장률 감독의 신작 '두만강'을 보았다. 그는 전작들을 통해 메마르고 황폐하고 남겨진 인물과 장소를 통해 자신 만의 인장을 깊게 새겨왔었다. 항상 장소에 국한되는, 혹은 그곳이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장률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두만강'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영화를 완성했으며, 이 곳은 감독 자신이 자란 곳이기도 헀다. 어쩔 수 없이, 아니면 필연적으로 자신이 겪고 느꼈던 과거가 담길 수 밖에 없었던 '두만강'은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극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그저 상황에 인물들을 던져두고 멀리서 지켜보거나, 상황에 처한 인물들 역시 처연하게 일들을 겪어가는 인상을 깊게 남겼던 전작들과는 달리, 조금은 더 감정적인 동요가 일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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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변의 한 작은 마을. 이 곳은 북한 함경도에서 탈북해오는 북한 주민들이 경유하는 곳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리적 배경에 놓인 곳이다. 장률 감독은 바로 이 민감한 두만강 변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많은 비유를 들어 관객들이 더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한 편, 정 반대로 특별할 수 밖에는 없는 이 곳에 살고 있는 인물들 (아이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정서가 특수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어른들로 대변되는 외부의 요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어떻게 잠식해 가는 지에 대한 과정을 섬뜩할 정도로 강렬하게 그려낸다. 

결국 '두만강'의 일들은 '경계'와 '경유'의 의미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경계 넘어의 곳인 동시에 돌아가기 위한 경유지였으나 예전에는 존재했던 경계 간의 다리가 사라지면서 결국 그대로 남겨지게 된 두만강 변의 마을. 삶과 죽음의 거리 역시 그 어느 곳보다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이 곳은 마치 카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연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난 때문이기는 하지만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항상 같은 옷을 입는 모양새, 배고픔에 경계를 넘어온 아이들 중 하나가 죽어도 '숨이 없어'라고 덤덤히 말하고는 그냥 갈 길을 가는 아이들의 뒷 모습, 그리고 영화 내내 드리워진 겨울의 차가운 공기까지. 마치 이 마을은 어떤 외부의 힘도 깨기 어려운 철옹성이라기 보다는, 조금만 물들여도 쉽게 물들고 마는 순백의 편견없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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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탈북자들의 문제가 점점 커지면서 이 마을의 어른들은 '어쩔 수 없이' 어느 한 편에 서서 탈북자들을 공안에 신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마을의 변화는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감정적으로 전달되고, 아이들의 세상 역시 어른들의 그것으로 물들어 간다. 그런데 여기에는 글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음'으로 이해되는 부분, 그러니까 누구하나 쉽게 단정지을 정도의 절대적 악한은 등장하지 않는다. 순희가 차려준 밥상을 받고는 무릎 꿇고 감사를 표시하던 탈북자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었으며, 그가 순희에게 범한 일은 물론 옳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그 역시 가해자라기 보다는 피해자로서 볼 수 있는 면이 분명 존재하며, 탈북자들을 도왔던 같은 마을 사람을 신고한 다른 마을 사람들의 행동도 보상금을 타려고 한 일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이야기는 정치적인 메시지에 대해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장률 감독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 부분을 애써 피해가지 않고 오히려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서 결과적으로 정치적으로 논란이 발생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보편적인 가치를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역시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입장에서 바라볼 수 밖에는 없는 조건에 있다. 두만강 건너 편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또 다른 건너 편에서 바라보게 되는 시선 말이다. 상영 후 가졌던 대담에서 장률 감독이 했던 얘기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 중 하나는, 그가 살고 있는 중국이나 연변에서 두만강 건너 편을 바라보면 전혀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데, 남한에 와서 두만강 쪽을 바라보면 경계가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역시 남한이라는 정치적, 지리적 공간에 살고 있는 이들로서 또 다른 경계와 맞닿아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떨쳐내려해도 결국 단순하게 넘길 수는 없는 이야기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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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약속의 의미. 이 영화를 아이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그린 이유는 아주 미약한 희망 때문이거나 혹은 그 미약한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더 큰 슬픔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영화에서 어린 창호와 정진은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약속을 하게 되는데, 결국 이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이 아이들은 어른들과 현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룰에 따라 상처를 받게 된다. 정진은 위험을 무릎쓰고 창호와의 약속을 지켰고, 창호 역시 자신 만의 방식, 아니 아무것도 방법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방식으로 정진과의 약속을 지키게 된다. 이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아이들이 지켜낸 약속의 의미는 결코 희망적이지 만은 않다. 상상 속의 다리가 희망을 꿈꾸게 하기 보다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씁쓸함을 안기는 것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지켜낸 이 약속의 방식은 더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맨 처음 '두만강'을 장률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하면서 몹시 감정적으로 '극적'이라는 얘기를 했었는데, 정말로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자극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치장된 영화들에 못지 않은 감정적인 떨림이 있었다. 실제로 너무 심장이 뛰는 나머지 가슴을 부여잡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  정도의 동요가 있었는데, 장률 감독의 작품에서 이런 극적인 떨림을 겪게 될 줄은 사실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큰 인상을 주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포스터에 새겨진 '삶의 슬픔이 침묵으로 흐른다'라는 문구를 그저 머리로만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었는데, 보고 나니 이 문구에 담긴 정서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두만강'에는 삶의 슬픔이 침묵으로 흐른다.





1. 영화가 끝나고 장률 감독과 정성일 평론가가 함께한 대담은 정말 의미있고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일단 장률 감독에 작품 세계와 '두만강'에 대한 깊은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는데,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로 공감되고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가득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성일 평론가와의 친분에서 오는 '까페 느와르' 농담들과 더불어 정말로 '재미'있는 얘기들도 많았구요.

2. 이번 '두만강' 시사회는 장률 감독특별전을 통해 상영되는 방식이었는데, 그래서 인지 시네마테크를 찾은 관객들의 대부분이 장률 감독의 팬분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질문들의 깊이가 결코 가볍지 않아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3. 장률 감독의 전작들을 인상깊게 본 분들은 물론, 그렇지 않았던 분들에게도 조심스레 추천하고픈 작품입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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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영화 (Enlightenment Film, 2009)
과연, 계몽이 필요한 한국사와 현실


제목부터 확실한 이 영화,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는 (한편으론 '계몽영화'라는 제목이 영화를 보기에 앞서 미리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면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확실한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3대에 걸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일제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상처와 청산해야할 과거,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되물림 되고 있는 폭력 (넓은 의미의 폭력)에 대한 '계몽'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처음 예상했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 아니 스케일의 작품이었다. 독립 영화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3대를 그리더라도 시대극일 거라는 예상은 거의 하지 못했었는데, '계몽영화'는 한 가족을 이어주고 있는 3대의 이야기를 각각 1931년, 1965년, 1983년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으나 좋고 나쁘고의 의미를 떠나서 독립영화 같지 않은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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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의 내용적인 면을 논하기 전에 이 영화가 '계몽영화'의 영화적 완성도 (촬영 및 스케일)에 조금 놀랐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시대극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무리가 없으며, 로케이션이나 공간의 활용 측면에서 보아도 일반적인 상업영화와 비교했을 때 크게 부족함이 없는 결과물이었다. 이런 영화적 완성도는 영화가 의도하고 있는 이른바 '계몽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관객들로 하여금 좀 더 쉽게 극중 인물들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실제로 아직 독립영화에 익숙치 않은 많은 관객들은 독립영화 혹은 저예산 영화, 그 '날 것'의 느낌 때문에 그 속에 담고 있는 메시지를 발견하기도 전에 실증내고 마는 경우를 자주 보았던 점을 떠올려 봤을 때, '계몽영화'의 이런 자연스러움은 시네필을 넘어서 더 많은 일반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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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의 이야기를 통해 감독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 일단 이 가족의 이야기를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질적인 병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과거, 그리고 반대로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친일파 후손의 현실 (물론 대부분 친일파의 후손들은 이런 후회보다는 아직까지도 일제 강점기 마냥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이 대한민국 현실의 가장 이상한 부분일 것이다), 가부장적인 가족 구조와 살아남아야만 했던 변화의 시대 속에서 '나'를 돌볼 수 없었던 존재들에 대한 연민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들이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혹은 그렇게 변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깍듯하고 아내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섬기던 정학송이 왜 그렇게 폭력적이고 술에 쩔어사는 남자가 되었는지, 딸 태선 역시 그런 아버지의 말도 잘 따르며 순종적이었던 아이가 종교부분에 있어서는 왜 그렇게 극도로 기독교를 민감하게 거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이 영화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물론 몇 가지 단서들을 통해 유추해볼 부분은 분명히 있지만, 그 과정을 누락하다시피 한 것은 분명 시간 상의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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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런 '과정'을 갖지 못했던 이들의 현실, 이런 '과정'을 갖을 여유를 갖지 못했던 불쌍한 역사의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별 것 아닌 학교 단체 사진에서도 '왜 중앙에 서지 않았냐!'라며 딸에게 화를 내는 아버지나, 매번 상사 욕을 입에 붙이고 살면서도 때마다 음식에 돈뭉치를 함께 전달할 수 밖에는 없었던 씁쓸한 현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임에도 하느님을 욕하는 이야기에 오랜 세월 한 번도 대항할 수 없었던 힘 없는 노모의 모습, 그리고 사회에서 엘리트로 취급받지 못하고 아내가 바람 피는 것을 알면서도 화조차 내지 못하는 불쌍한 가장의 현실 등, 중간에 잘못된 것을 바로 잡거나 반론을 제기할 만한 시간은 있었음에도 그 속에서 '여유'나 '용기'는 가져보지 못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무엇이던가. 바로 '계몽영화'다. 즉, 한국사의 암울한 과거 그리고 현재까지도 세습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단순히 연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몽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이 인물들을 바라보는 방식은 연민보다는 오히려 냉소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나?'라고 물으며, 현실의 관객들에게는 '저렇게 그냥 두면 안되는 거였다'라고 계몽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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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영화'를 보고 나오며 좋았던 건, 이 영화가 영화 속에서 모든 것을 이루려 한 작품이 아니라 관객들이 느끼는 순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어서였다. 아마도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극중 '태선' 같이 관객들이 좀 더 감정이입을 하기 쉬운 인물을 완전히 계몽시켜, 영화 안에서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하는 것까지 마무리 지었을지 모르지만, '계몽영화'에서는 태선 역시 3대의 한 인물로서 이 굴레 안에 머물러 있다. 마지막에 가서 가족의 역사가 서려있는 서교동 집을 둘러보며 3대의 이야기를 훑으며 결국에는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이 시퀀스를 통해, 무언가 변화의 조짐을 느낄 수 있지만 이것이 영화에 마지막인 것처럼 영화는 바로 여기서 멈춘다. 그리고는 관객에게 그 다음을 이어가길 바라고 있다. 


1. 개인적으로는 참 오랜만 아니 거의 처음으로 느껴보는 '계몽'이라는 단어의 긍정적인 느낌인 것 같네요.
2. 코믹한 부분들도 많았습니다. 큭큭 하고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이요.
3. 카라얀의 실황을 녹음하는 장면이나 실크로드 녹화하는 장면들을 보니, 영화 속과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 좋아하는 TV프로나 라디오 프로를 연달아 가며 녹음하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더블데크가 있어서 테잎으로 녹음할 때 테입을 갈아끼우는 시간의 여백을 만들지 않기 위해, 양 쪽에 테입을 넣어놓고 한쪽이 다되면 다른 쪽을 눌러 바로 연결해 녹음하곤 했었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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